한 방 먹이고 싶다
하희경
‘내 고향은 신림동.’이라고 대답한다. 누군가 묻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태어난 곳은 신길동이다. 신길동 어딘가 대로변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있다. 일자로 된 앞머리와 바짝 밀어 올린 뒷머리, 머슴애도 계집애도 아닌 아이가 꾀죄죄한 웃음을 물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을 처음 발견한 순간 부모님 생각을 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사진을 찍었을까. 누가 찍어 주었을까. 어린 시절을 통틀어 단 하나 뿐인 사진을 앞에 두고, 아이를 보는 부모님의 시선을 떠올려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신림동을 고향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곳이 그만큼 내게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난 신림동에서 밑바닥 인생이라는 걸 제대로 경험했다. 하루 한 번 동사무소에서 배급받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 먹거나, 급식 차에서 나눠주는 우동 한 그릇을 동생과 나눠먹으면서 하루를 살아내곤 했다. 잔뜩 불어 곱빼기가 된 우동이나 수제비를 먹으면서 어린 마음에도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아니 정확하게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어떤 일을 할 건지 궁리하곤 했다. 자연스럽게 장래 희망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꿈이다. 하지만 몸은 돈을 벌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늘 책을 끼고 살았으니, 내가 부자가 안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지도 모른다. 책에서 말하는 인간답게 사는 길과 현실에서의 인간답게 사는 길은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물론 먹고사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예외다. 문제는 나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하는 사람에게 인간답게 사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그래도 철이 없을 때라 절망이라는 건 하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이루어질 거라고 다독이며 열심히 달렸다. 배움이 짧아 제대로 된 직업은 가지지 못 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다.
한날한시도 잊지않고 돈에 매달려 살았다. 한 푼이라도 아끼고, 돈이 생기면 통장 하나 더 늘리며 몸을 재게 놀렸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지만, 늘어나는 통장은 내게 분홍빛 세상을 꾸게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지만 혼자만의 노력은 바닷가에 지은 모래성이나 다름없었다. 끊임없이 손 벌리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어, 다시 벌면 되지 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다. 몸은 마음만 작정하면 무조건 따라오는 건 줄 알았다. 그날도 그랬다. 하던 가게를 접고 노후대책으로 수선집이라도 하려고 양재를 배우던 중이었다. 늙어가면서 자식들에게 손은 안 벌려야겠다는 계산으로 옷 만드는 과정을 배우는데, 갑자기 오른쪽 눈이 안 보였다. 바늘에 실을 꿰지 못해 돋보기를 사러갔다가 안과에 가보라는 말을 들었다. 안과에서는 대학병원으로, 대학병원에서 시신경이 많이 죽었다며 결국엔 실명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덧붙여, 죽은 시신경은 저 혼자 죽는 게 아니라고 한다. 살아있는 신경을 점차 죽이면서 한쪽 눈에서 시작해 다른 쪽 눈으로 영역을 넓혀간단다. 결국 최대한 실명 시기를 늦추기 위해 안구에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뭘 위해 그렇게 안간힘을 썼을까. 분명, 언제일지 모르는 실명과 매달 맞아야하는 주사가 나의 희망은 아니었다. 하늘도 참 무심하지.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겨우 이런 결과를 보여주다니. 눈이 멀기 전에 세상이 먼저 캄캄해졌다. 무엇이든 거침없던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게 암담했다. 살려고 버둥거렸던 그 모든 순간들이 헛짓이었다니. 신림동을 떠나 대전에 오기까지의 일들이 영화필름처럼 돌아간다. 내편이라고 믿었던 남편마저 남의 편이란 걸 알게 되고, 인생은 결국 혼자 걷는 길이란 걸 알기까지의 휘청거림이 어지럽게 들이닥친다.
이제 그만하자 싶었다. 하지만 모든 걸 내려놓으려고 하는 순간, 어미라는 게 발목을 잡는다. 자식이 있다는 건, 내 삶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행동이 자식에게 어떤 의미로 남는 건지 생각해본다. 이건 어쩌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나라는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욕망인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진정한 나의 마지막 욕망은 운명이라는 녀석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는 것이다. 꽈배기처럼 비비 꼬기만 하는 저 비열한 운명에게 기어이 나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