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있으신 분들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진명선생이 처음부터 차크라 명상으로 수행한 것이 아닙니다.
35여년 이상 참선과 교학을 수행.공부하면서
일반 불자들에게는 참선. 교학은 너무 어렵고 접근하기도 어렵고 무겁기 때문에 염불.기도로 신행이 아닌 신앙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신앙이 아닌 실천수행인 신행(信行)이다.
2013년 8월에 헤미싱크로 명상을 하면서
차크라 명상의 실천수행이 몸도 마음도 직접적인 변화를 빠르게 얻을 수 있다는 판단으로ㅡ직접 체험해 본 결과로ㅡ 사람들에게 차크라 명상수행을 적극 귄장하고 내면의 업식을 정화시키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기에 차크라 명상으로 가르침을 주고자 관련된 글들을 올리고 체험일지도 올렸던 것입니다.
아랫글은 참선.교학 공부할 때 오직 참선만이 붓다의 최고 가르침이라 생각할 시절에 올린 글이다.
어렵고 무거운 글입니다.
근기되시는 분에게는 아주 귀한 가르침이될 것입니다.
어렵더라도 끝까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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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禪을 말할 때 不立文字. 言語道斷이라는 용어를 써서 붓다의 가르침인 敎를 아주 쓸모없고 수행에 알음말이만 키운다고 생각하여 敎를 공부하면 수행에 장애된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을 위하여 이글 올립니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敎를 근본으로 삼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수행한다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격이 될 것이다"
수행으로 空性을 체득하고 나면 禪과 敎가 둘이 아님을 바로 깨닫게 된다.
역대 조사나 선사들도 모두 敎에 능통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선종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경전들을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 보자.
대승불교의 공통된 사상은 공(空)사상이다.
그 이유는일체를 공으로서 관찰 수행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승불교는 공의 불교이다.
선정을 통해 제법의 모습을 공으로서 관찰 수행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실천이다.
대승불교는 공사상을 창도하고 나아가 전승한 수많은 경전과 논서가 있다.
그 중에
중국의 선정에 직접적으로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주요 경전으로, 공사상의 금강경과 불성론의 대승열반경과 여래장사상의 《기신론》을 살피면서
중국의 선종사상의 배아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응무소주이생기심.
얽매인 마음을 푸는 1.《금강경》은 공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공을 설명한 것은 공이란 말에 얽매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체의 개념, 관념을 떠나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조차도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반야바라밀을 이해하고
그 지표에 의지해서 실천할 때 깨달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공이나 청정함에 집착하거나,
혹은 마음을 일으켜서 궁극의 깨달음을 구하려 하는 것은 어느 것이나
다 허망한 마음의 행동이다.
다만 마음을 작용시키지만 않는다면 마음에는
그 자체로서의 형체는 없다.
즉 형체가 없는 마음이다.
그 마음의 본성은
空寂하며,
그 空寂한 본체 위에 저절로
本智가 존재한다.
이 本智는 知를 그 작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금강경》에는 무엇가에 집착하고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는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生해야만 한다 )라고 설하는 것이다.
'應無所住'란 본래
적정(寂靜)한 본체를 말하며. '而生其心' 이란 본래 갖추고 있는 智의 작용이다. 오로지 마음을 작용시키지만 않는다면 "자연적으로 반드시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중국 선종에서
禪者에게 마음을 지니는 방법을 가르칠 때에 쓰던 문구로
《금강경 》에서는 이 문구로써 모든 생각을 불식시키고 부처의 깨달음 그 자체가 일체의 얽매임을 벗어난 곳에 있다.는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일체중생 모두 불성을 가진다.
《대승열반경 》
《열반경》이라고 하면,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을 설하는 경전이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 즉 불성론을 설하는 것이다.
불성론은 선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불성이라고 함은 불타가 될 소질을 말하는데 불타의 소성(素性), 본성(本性), 종자라는 의미이다.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했을 때 어디라고 지정할 수는 없다.
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범부는 그 존재를 지각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량의 번뇌가 가려 있기 때문에, 또한 선지식에게서 바르게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믿음을 일으키고 보리심을 일으키면 불성의 묘과(妙果)를 볼 수 있다.
불성에는 생멸거래(生滅去來)가 없고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의 구별이 없으며, 또 시간을 포섭한다. 인과관계를 떠난 것이다.
불성은 작용도 아니고, 작용의 주체도 아니다. 일체의 개념, 관념에 의해 포착되는 것은 아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모든 현상적 존재가 있는 곳이고 그런 의미에서 상주(常住)이다. 허공과 같은 것이다.
곧 공성( 空性)을 말한다.
중생 속에 하나의 실체로서의 불성이 있는 것처럼 일체중생실유불성의 교설을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경전에서는 중생이 그대로 불성이라고 한다.
"만일 중생 가운데 특별히 불성이 내재한다고 하면, 그 의미는 정당하지 않다. 왜 그런가 하면 중생이 곧 불성이고 불성이 곧 중생이기 때문이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일체의 산 것(生類)은 모두 그대로가 불성 그대로라고 말한다.
이 사고방식은 도원의 불성관에 그대로 직결되고 있다.
불성을 아는 것은 그대로 불과(佛果)를 얻는 것이고, 열반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열반은 결과적으로 번뇌를 제거하는 데에서 얻어지는 것일까?
경전에서는
" 번뇌를 끊어 없앤 상태를 열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번뇌가 생기지 않는 것이 열반이다.
제불여래(諸佛如來)에게는 본래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열반이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교설은 선종 제6조 혜능의 사상과 직결되고 있다.
3.《기신론》도 선종(禪宗)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여래장이라 함은 중생의 번뇌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에 더럽혀 지는 일이 없는 여래장이 실재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래장은 일체중생여래지장상주
(一切衆生如來之藏常住)이라는 요지는 《열반경》의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 佛性)을 계승한 것이다.
먼저 "심생멸이란 여래장에 의거하기 때문에 생멸의 마음이 있다고 한다"
이 의미는 우리들의 망심속에 있는 진여를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진여를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심진여문에서는 여래장이라는 말이 필요없으며, 심생멸문이기 때문에 이 여래장이라고 하는 말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중생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 중생의 흔들리는 미혹한 마음 속에도 진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망심속에 여래장이 있고 이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흔들리는 생멸의 마음도 분명히 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멸의 마음 뿐이라면 그것이 망심이라는 시실조차 알 수 없게 된다. 흔들리는 어리석은 마음으로는 그것이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 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 속에 진주 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진여, 즉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어리석은 마음의 존재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여래장은 우리들의 어리석고. 흔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광명인 것이다.
여래장은 물이고, 흔들리는 어리석은 마음은 파도와 같다.
이와같이 대승불교의 근본인 空道理는 깊은 실천수행을 했을 때 空性체득하면 진정 空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緣起가 곧空이고 中道이고 열반이고 여래임을 알게 될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진명 차크라명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