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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 리쓰코의 중국을 움직인 거인들(2015.04.05.)
공자에서 루쉰가지, 최고의 인재 56인이 수놓는 열전 중국사
서문
이 책은 춘추 시대의 공자에서 현대의 루쉰에 이르기까지, 2500여년 중국사의 도도한 물결 가운데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을 펼친 이색적인 인재 56인의 궤적을 시대순으로 살펴본다.최고의 인재들이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중국사의 세계를 향해 항해의 돛을 올려보자-이나미 리쓰코
제1장 어지러이 피고 지는 고대 제국의 성쇠
2세, 3세, 만세이 이르기까지 영원히 이어 가도록 하라!-진시황제의 말에서
모든 것의 시작-춘추 전국 진 한
●01 공자-수천 년 동양을 지배한 사상의 아버지(사상가, 춘추시대, 기원전 551~479)
기워전 499년 노나라 군주 정공이 학자로 명성 높던 공자를 발탁하여 대사구(지금의 법무부장관)에 임명했다. 기원전 497년 실각하고 14년에 걸쳐 인(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예(도덕관습)를 기초로 한 자신의 정치 이념을 이해해 줄 군주를 찾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유세(遊說)를 계속했다. 기원전 484년 68세가 되던 해, 공자는 별 소득이 없던 유세 여행을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73세로 죽을 때까지 제자들의 교육에 힘을 쏟는 한편, 오경으로 총칭되는 유가 사상의 다섯가지 경전 곧 시경,서경,역경,예경,춘추를 정리해 편찬하는 데 전념하며 나날을 보냈다. 논어는 제자들이 기록한 공자의 언행록이다. 논어는 스승과 제자의 자유로운 대화 가운데서 원시 유가 사상이 형성되어 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아주 희귀한 기록이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을 하기로 결심했고, 서른 살에 학문의 기초를 완성했다. 마흔 살이 되자 내 학문과 삶의 방식에 자신을 갖게 되었으며, 쉰 살에는 하늘이 내게 부여한 사명을 깨달았다. 예순 살이 되자 나와 다른 의견을 들어도 반발하지 않게 되었고, 일흔 살에는 마음 가느대로 행동해도 인간의 도리에 벗어남이 없게 되었다.- 공자, 논어 위정편
●02 상앙-중앙 집권의 근간을 세운 냉혹한 법치주의자(정치가, 전국시대, 기원전 390?~338)
상앙(공손앙 또는 위앙)은 전국 시대에 진나라 효공(재위 기원전 361~338)을 섬기며 매서운 수완을 발휘했던 유능한 정치가이다. 효공은 기원전 359년 상앙을 변법(變法) 곧 국가 개조 계획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상앙은 탁월한 계략으로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기에 이른다. 상앙을 국외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던 재상 공숙좌의 우려가 적중했던 것이다.
효공을 섬긴지 20여년, 순풍에 돛 단 듯 순탄하던 그의 인생은 기원전 338년 효공이 죽고 그 아들 혜문왕이 즉위하면서 곧바로 암울하게 뒤바뀐다. 예전에 법을 어긴 자기 대신 스승들이 상앙에게 처벌받은 쓰라린 경험이 있던 혜문왕이 즉위하자마다 상앙을 반란죄로 체포하려 했던 것이다. 도망가다 붙잡힌 상앙은 진나라 군사에게 살해당하고 혜문왕은 그의 시체마저도 사지를 찢는 거열형에 처했다고 하니, 그 원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상앙은 자신이 만든 냉혹한 정치 수법에 스스로 걸려들어 비운의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가 실시한 법률 중심 정책과 중앙 집권 체제는 진나라의 기본 방침으로 채택되었고, 약 100년 후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있어 최대 무기가 되었다.
●03 장자-궁핍한 뒷골목에서 천지자연을 품다(사상가, 전국시대, 생몰년 미상)
노자와 함께 도가 사상의 시조로 평가되는 장자는 전국 시대의 송나라 몽현 출신이다. 명예도 출세도 바라지 않고 오직 정신적 자유만을 추구했던 장자, 그는 아마도 가난한 뒷골목의 은자 사상가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은 세속이나 사회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위대한 천지자연과 하나가 되어 내면에 있는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예컨대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이야기하고자, 장자는 일곱구멍이 뚫리지 죽고 만 혼돈(용제왕편) 우화를 제시한다. 곧 우주의 중앙을 다스리는 신인 혼돈은 원래 머리에 아무것도 없는 밋밋한 존재였는데, 다른 신들이 호의를 베푼답시고, 눈, 코, 입,귀의 일곱 구멍을 하루에 하났기 뚫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혼돈은 마지막 7일째 모든 구멍이 뚫리는 순간 그만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본래의 성질을 인위적으로 가공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며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장자는 이 우화를 통해 백만 마디 장광설보다 더 분명하게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흥취 넘치는 우화가 가득한 장자는 중국 고대 환상 소설집이라 불렀을 정도로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04 진시황제-천하를 가지고도 채우지 못한 불사의 욕망(황제,진,기원전 259~210)
상앙의 사상과 정치 수법을 계승한 이사는 강압적인 사상 통제 정책을 단행했다. 기원전 213년에 일어난 분서사건의 각본을 쓴 사람도 사실 시황제가 아닌 이사였다. 시황제는 자신의 수중에 집중된 부를 호화찬란한 건축물을 축조하는 데 낭비했다. 기원전 212년 노생이라는 한 사이비 방사에게 속아 격노한 시황제가 그와 관련된 방사와 학자들을 추적하여 체포하고 가혹하게 심문한 뒤, 그 가운데 460여 명을 산 채로 파묻는 형벌에 처한 일이 바로 갱유사건이다.
●05 한고조-시정 무뢰배에서 통일 제국의 황제로(황제, 전한, 기원전 256 또는 247?~195)
진나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천하를 재통일한 한나라 고조(재위 기원전 202~195) 유방은 강소성 패현의 농민 출신이다. 유방은 핵심 참모 소하, 조참, 주발, 번쾌 등을 중심으로 패현 출신 군단을 결성하여 진나라 말기의 난세에 적극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항우와 사투를 거듭한 지 4년 만인 기원전 202년, 유방은 해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마침내 숙적 항우를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최고의 권력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06 사마상여-희대의 사랑 속에 여문 문학 재능(문장가, 전한, 기원전 179~117)
부(賦,서사적 성격이 강한 운문의 일종)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제7대 황제인 무제(기원전 141~87)에게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무제가 가장 총애하는 궁정 문인으로서 천자유럽부를 비롯해 많은 명작을 지어 냈다. 한대 문학의 대표적 존재로서 특별한 재주를 가진 문인 사마상여는 탁문군과 나눈 희대의 사랑 속에서 탄생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07 사마천-거세의 치욕을 이겨 내고 대역사를 쓰다(역사가, 전한, 기원전 145~86)
신화와 전설 시대부터 그가 살았던 전한 무제 시대가지의 역사를 기록한 사기를 지은 사람이다.
전한의 장군 이릉이 북방 이민족인 흉노 군대와 격전을 벌이다 칼도 부러지고 화살도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적에게 항복한 사건이 벌어졌다. 조정의 중신들은 일제히 이릉을 비난했지만 사마천은 무제 앞에 나가 논리 정연하게 그를 변호했다. 이것이 무제의 역린을 건드려, 다음 해인 천한 3년 사마천은 성기를 잘리는 굴욕적인 형벌인 궁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8세였다. 죽음보다 참담한 나날을 극복하고 마침내 사마천은 무제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담아 사기 집필을 재개했다. 전 130권에 이르는 장대한 통사인 사기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각 시대별 권력자의 전기를 서술한 본기(12권)와 특징적인 삶을 살아간 개인의 전기를 모은 열전(70권)이다. 이런 역사 기술 체계는 사마천이 발명한 것으로 기전체라고 불린다.
사마천인 발분저서(發憤著書, 들끓는 분노를 글로 남겨 후대 사람을 일깨우려는 문인 정신)로 사기를 완성한 것은 정화 3년(기원전 90),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내가 참고 견디며 구차하게 살아남아 더러운 곳에 유폐되는 일조차 사앙햐지 않은 것은, 마음속 하고 싶은 일을 다 이루지 못 한 채 비루하게 죽어 내 문장이 후세에 드러나지 않을 것을 한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사마천, 보임소경서,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08 반초-호랑이 굴에 뛰어 들어 천하를 호령한 용장(군사 전략가, 후한, 33~103)
후한의 반초는 서역 원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없다(不入虎穴, 不得虎子)
난세의 영웅과 시대 비판 정신-삼국 서진
●09 조조-교활한 모략가인가 불세출의 영웅인가(정치가, 삼국시대, 155~220)
간웅의 면모를 부각시킨 여러 전설로 둘러싸여 있는 이 인물은 실제로는 탁월한 군사 전략가이자 수완 좋은 정치가였고, 또한 손자에 주석을 달 정도로 병법학에 뛰어난 학자이자 전쟁에 나가서도 틈틈이 고양된 감정을 시와 노래로 지어 부른 걸출한 시인이기도 했다.
초평2년(191년) 환관파에 반대하는 양심적 지식인 모임인 청류파가 우러러보던 순욱을 군사로 영입했다. 이 일을 계기로 청류파 지식인들이 조조의 밑에 속속 모여들었고, 조조는 그들을 활용함으로써 단순한 군사 정권을 넘어 행정 기구를 갖춘 본격적인 정권의 기반을 일찌감치 굳힐 수 있었다.
그러나 조조도 만년에 접어들면서 권력욕에 눈이 멀어 그토록 훌륭했던 군사 순욱과 결별했으며, 순욱은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만다. 이렇게 순욱을 잘라 내면서까지 최고 권력을 추구했지만, 결국 조조는 위왕에서 황제에 이르는 마지막 한 단계를 뛰어오르지 못한 채 죽음을 맞고 말았다.
●10 제갈량-한번 주군은 죽어서도 주군, 신의의 책사(정치가 군사전략가 삼국시대, 181~234)
자신의 초가를 세 번이나 방문한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감동한 제갈량은 그의 군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지론인 천하를 삼분하는 계획에 따른 전략을 전개하여 마침내 유비를 삼국 중 하나인 촉나라의 황제 자리까지 올려놓은 데 성공했다.
선제(유비)께서는 제 신분의 비천함 따위를 개의치 않으시고, 황공하게도 스스로 몸을 낮춰 세 번이나 제 초막을 방문하여 당시 정세에 대해 자문하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감격하여 선제를 위해 부지런히 일할 것을 약속했던 것입니다.-제갈량, 출사표
●11 화타-외과 수술의 달인, 신이 내린 명의(의사, 삼국시대, 생몰년 미상)
그는 삼국지의 영웅 조조와 같은 마을의 초 출신으로, 그 의술을 인정받아 두통으로 고생하던 조조의 시의가 되었다. 하지만 처우에 불만을 품고 마음대로 귀향해 버리는 바람에 조조의 역린을 건드려 살해당하고 만 것이다.
고을 하급 관리인 예심과 이연이 함께 의원에 왔는데, 둘 다 두통과 발열을 호소해 아픈 데가 똑같았다. 화타가 말하기를 “예심에게는 설사약을 쓰고 이연에게는 땀 빼는 약을 쓰도록 해라” 했다. 어떤 사람이 그 처방이 다른 것을 이상하게 여기자, 화타가 말했다. “체질상 예심은 겉이 충실하고 이연은 안이 충실하다. 그러니 처방이 다를 수밖에 없지” 즉시 각자에게 약을 지어 준 결과, 다음날 아침 두 사람 모두 자리에거 일어났다.-삼국지 방기전 중 화타
●12 죽림칠현-시대의 압박 속에서도 경쾌했던 자유인들(은둔자, 삼국시대, 서진)
죽림칠현이라 불리는 완적, 혜강, 산도, 유령, 완함, 상수, 왕융의 7명이었다. 그들은 노장사상의 무위자연을 기치로 삼아 속세의 굴레를 벗어나 은둔하며, 대숲에 모여 술을 마시면서 청담과 음악에 열중했다. 진류의 완적, 초국의 혜강, 하내의 산도, 이 세사람은 모두 연배가 비슷한데 혜강의 나이가 조금 적었다. 패국의 유령, 진류의 완함, 하내의 상수, 낭야의 왕융 도한 이 모임에 참여했다. 이 일곱 사람은 항상 대숲에 모여 실컷 술을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들을 죽림칠현이라 불렀다.-유의경 세설신어 임탄편
●13 두예-대세에 아랑곳 않고 한 우물만 판 아웃사이더(역사가, 군사전략가, 서진, 222~284)
그가 28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유배를 당했지만, 일말의 흐트러짐 없이 방대한 서적을 꾸준히 읽어 나감으로써 훗날 대역사가로 성장하게 될 기초를 튼튼하게 닦았다.
두예는 전황을 꿰뚫어 보고 합리적인 전략을 세울 줄 아는 군사 전략가였다. 동시에 공자가 편찬한 춘추를 신비화하던 종래 사상의 조류를 배척하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해설서 좌전에 입각하여 철저하게 검증하는 등, 역사 연구 방법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가진 탁월한 사학자였다.
화려하게 꽃핀 귀족 문화-동진 남북조
●14 왕도- 좋아, 좋아 가 입버릇이었던 유연한 정치가(정치가, 동진, 267~339)
왕도의 방침은 대립과 긴장을 완화시키고 이질적인 요소를 포용하여 평온하게 공존시키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왕도의 포용력 넘치는 정치 아래서 아무런 구애 없이 자유로운 삶을 구가한 동진 귀족 사회에서는 이윽고 세련된 문화가 활짝 꽃을 피웠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서성으로 유명한 왕희지는 바로 왕도의 조카이다.
●15 왕희지-권력 대신 자유로운 삶을 택한 서예의 성인(서예가, 동진, 307~365)
강남의 망명 왕조 아래서 화려한 예술이 꽃을 피우다니, 역사는 참으로 모순적인 것이다.
동진의 왕희지는 서성으로 불리는 서예의 대가이다. 그는 삼국 위나라 이래 명문 귀족이던 낭야 왕씨 출신으로, 동진 왕조의 최고 공신인 왕도와 왕돈의 조카이기도 하다. 왕희지는 입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골경(骨骾,생선의 가시)이라 불렸을 만큼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낭야 왕씨의 희망으로 손꼽혔다. 그의 아내는 왕도 및 도간과 함께 동진 초기의 세 거물 중 하나인 치감의 딸이었다. 정략적인 결혼이기는 해도 왕희지 부부의 금슬은 매우 좋아, 슬하에 7남1녀를 두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꾸려 나갔다. 왕희지와 더불어 이왕(二王)이라 불리는 서예의 대가 왕헌지는 그중 일곱째 아들이다.
●16 고개지- 털 세 가닥에 혼을 불어넣은 회화의 성인(화가, 동진, 346?~407?)
동진의 고개지(자는 장강)는 중국 회화 역사상 최초로 이름을 날린 대화가로 손꼽히며 화성(畵聖)이라 불린다. 그의 그림은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동시대의 재상인 사안은 고개지의 그림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제껏 없었던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특히 고개지는 모델의 특징을 응축해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 인물화에서 최고의 기량을 펼쳤다.
●17 사도온-귀족사회에 핀 재기 발랄한 함박꽃 한 송이(동진, 생몰년 미상)
중국에서 재주 있는 여성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도온(謝道蘊)은 동진의 대귀족 양하사씨 가문 출신이다. 그녀의 숙부인 사안은 동진 중기에 정권의 수뇌부를 차지했던 뛰어난 정치가였다. 상승 가도의 세도가에서 태어난 사도온은 재기 발랄하여 커다란 함박꽃 같은 소녀로 성장했다. 위.진 시기 명사들의 일화 모음집인 세설신어의 언어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사안이 일족의 제자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안이 펑펑 내리는 저 눈은 무엇과 비슷할꼬? 라고 묻자, 한 아이가 대답했다. 소금을 공중에 뿌린 것과 얼추 비슷합니다. 유치하고도 즉물적인 대답이었다. 그러자 사도온이 쑥 나서며 말했다. 버들개지가 바람에 흩날리는 것에 비유함만 못하지요. 무척 아름다운 시적인 비유였다. 그뒤 사도온은 서성 왕희지의 둘째 아들 왕웅지와 결혼한다.
●18 도연명-국화꽃 꺾어 들고 남산을 바라보네(시인, 동진, 남조 송, 365~427)
은둔 시인 및 전원 시인의 대표 격인 도연명(자는 원량)은 동진에서 남조 송대에 걸쳐 살았다. 고향에서 도연명은 죽을 때까지 20여 년 동안 문자 그대로 맑은 날에는 밭 갈고 비 오는 날에는 책 읽으며(晴耕雨讀), 가난과 싸우면서도 여유로은 마음으로 은둔 생활을 이어 나갔다.
현재 남아 있는 도연명의 시는 약 130수다. 유유자적한 경지에 노닐었던 도연명.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일찍이 동료였던 유유가 왕위를 찬탈한 시대 상황에 대한 굴절된 분노와 완강한 저항 의지가 숨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알 될 것이다.
●19 안지추-시대의 격랑 속에서 아로새긴 고금의 교훈(문장가, 남조 양 수 ,531~591)
안씨가훈의 저자 안지추는 격동하는 시대의 파도에 휩쓸리며 온갖 고초를 겪은 인물이다. 안지추는 남조의 양, 북제, 북주, 수로 이어지는 네 왕조를 편력하고 세 왕조의 멸망을 몸소 겪으면서, 자손들에게 남기는 훈계 형식을 빌려 전 20권에 달하는 안씨가훈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안씨가훈은 남북조 시대상의 분석에서 학문론과 언어론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이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명석한 문장과 어울려 가히 고금의 걸작이라 이를 말한다.
학식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안심할 수 있다. 난리(후경의 난)가 일어난 이래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다. 비록 백 년 동안 조상 대대로 신분이 비천했다 하더라도, 논어와 효경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하다 못해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도 되었다. 반면 천 년 넘게 조상 대대로 귀족이었다 하더라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전부 밭 갈고 말 먹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런 예들을 볼 때, 어찌 학문을 열심히 갈고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항상 책 수백 권을 보유할 수 있다면, 천 년이 지나도 결코 낮은 신분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안지추, 안씨가훈 면학편-
제2장 융성한 통일 왕조의 흥망
백발이라 삼천 장은, 시름 때문에 이리 걸었네-이백의 시에서
개성 강한 정치인과 대시인의 세계-당(唐) 오대(五代)
●20 측천무후-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카리스마 여제(황제, 당, 624~705)
400년간 이어진 위.진 남북조의 난세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전역을 통일한 것은 북조 계열인 수나라(581~618)였다. 하지만 수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지 채 40년도 못 되어 멸망하고, 그 뒤를 이어 성립한 같은 북조 계열의 당나라(618~907)는 약 300년간 지속된 대왕조가 되었다.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원래 태종 후궁의 궁녀였다. 태종의 재위기간 동안 조용히 때를 기다리던 측천무후는 태종이 죽은 후 즉위한 아들 고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단숨에 권력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대단한 야심가였던 측천무후는 주도면밀하게 술책을 짜 황후 왕씨를 폐위시키고, 영휘 6년(655) 공식적으로 황후 자리에 올랐다. 이때 그녀의 나이 32세였다.
혹독한 관리들을 비밀 경찰로 동원해 반대 세력을 차례차례 숙청하며 황제가 될 준비를 해 나갔다. 재초 원년(690), 67세의 측천무후는 마침내 즉위하여 주 왕조를 세웠다. 이 무주혁명으로 이씨의 당 왕조는 잠시 명맥이 끊기게 된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묘한 힘을 가졌던 황제 측천무후의 최후는 비참했다. 신룡 원년(705), 퇴위당한 아들 중종을 추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병상에 누워 있던 그녀는 그대로 양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당 왕조는 부활했고 측천무후의 주 왕조는 겨우 15년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10개월 뒤 측천무후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향년 82세였다.
●21 이백-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 불린 방랑 시인(시인, 당, 701~762)
성당(710~765) 문학사에서는 당나라를 초당, 성당, 중당, 만당의 네 시기로 나눈다. 일생동안 방랑 및 은둔 지향적인 면과 출세지향적인 면의 양극단을 오갔던 것이다. 강남 이곳저곳을 떠돈 지 3년여. 이윽고 이백은 안륙에 머무르며 왕년에 재상을 지낸 허어사의 손녀딸과 결혼한다. 이백이 현종 조정에서 벼슬한 기간은 1년 수 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백발이라 삼천 장은
시름 때문에 이리 길었네.
알 수 없구나, 거울 속 내 모습
허연 가을 서리는 어디서 맞았는지.-이백 추포가중 제15수
●22 안진경-부러질지언정 뜻을 굽히지는 않으리(서예가, 당, 709~785)
당나라의 안진경은 왕희지의 뒤를 잇는 대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남북조 말기에 온갖 풍상을 겪으며 안씨가훈을 남긴 안지추의 6대 손이다.
안사의 난이 발발한 때로부터 만 1년 동안 안진경은 압도적 열세를 무릎쓴 채 항전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 불굴의 분전 덕분에, 안진경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대단히 호의적이다. 글씨가 곧 그 사람인 것이다. 세상에 보기 드문 불굴의 생에 대한 감탄이 상호 작용하여 안진경의 글씨는 후세 서예가들에게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큰 영향을 끼쳤다.
●23 백거이-귀족, 평민 모두에게 사랑받은 위대한 상식인(시인, 당, 772~846)
중당(766~8350시기의 대시인 백거이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화려한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로 유명하다. 그는 비록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었으나 어릴 적부터 빼어나게 총명했다. 29세로 진사과에 합격하고 3년 뒤에는 다시 상급 관리 임용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무거운 세금과 강제 노역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생활에 아픔을 느껴, 악덕 정치를 비판하는 풍유시를 많이 지었다. 스스로 팔을 부러뜨려 가혹한 징병을 피하는 노인의 모습을 노래한 장편 시 신풍절비옹이 대표적이다. 가정을 사랑하고 원진 등 많은 벗들과 우정을 나눈, 성실 그 자체의 위대한 상식인이었다. 그가 쓴 시의 풍격 또한 평이하기 그지없어,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24 어현기-한스럽다, 재능을 가리는 비단 치마(시인, 당, 843?~868?)
중국 고전 시가의 황금기인 당나라 때는 이백과 두보를 필두로 걸출한 시인들이 배출되었으며, 뛰어난 여류시인들도 출현했다. 설도와 어현기는 그 대표적인 존재다. 설도는 성도의 유명한 기녀였고, 어현기는 장안 기방의 양녀였다고 하니 둘 다, 화류계 출신이다.
당나라가 몰락의 길을 걷던 만당(836~907)시기에 태어난 어현기는 어려서 장안의 한 기방에 수양딸로 들어갔다. 총명한 어현기가 책을 즐겨 읽고 시를 잘 짓자, 그녀가 요금수(돈이 열리는 나무)임을 알아본 양부모는 가정교사를 붙여 시(詩)작법을 가르치는 등 그녀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벼슬은 없어도 재산은 많은 명문가 아들 이억의 청혼을 받아 들여 화류계를 떠났다. 사실 이억에게는 본래 정처가 있어 측실에 지나지 않는 자리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적어도 안정된 생활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2년도 채 안돼 이억이 변심하는 바람에 어현기는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만다. 이 굴욕적인 경험으로 그년느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후 어현기는 장안의 유서 깊은 도관(도교사원)인 함의관으로 들어가 여도사가 되었다. 도교식 출가를 한 것이다. 이억의 배신으로 받은 마음의 상처가 거의 치유될 즈은 어현기에서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하지만 배신에 대한 공포에 짓눌려 있던 그녀는 결국 사소한 오해 때문에 처참한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녀가 집을 비운 사이에 마침 연인이 방문하자 집을 지키던 시녀가 대신 응대를 했는데, 연인이 집을 나선 뒤 돌아온 어현기는 그 둘의 관계를 의심해 시녀을 문책하다 그만 살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총명한 여류시인이 한순간 실수로 일으킨 어리석은 범죄였다. 어현기가 살인죄로 처형된 것은 그 직후로 꽃다운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뭉게구름 가득하고 봄 햇살 내리비치는데
또렷하고 힘찬 필치로 진사 명단 써 내려가네.
한스럽구나 비단 치마, 내 시 재능을 가림이여!
고개 들어 부질없이 방(榜)에 적힌 이름을 부러워한다.
-어현기, 유숭진관남루, 도신급제제명처,과거 급제자 명단을 쓰는 것을 바라보며
●25 풍도-다섯 왕조 11명의 황제를 섬긴 처세의 달인(정치가, 후당, 후주 882~954)
300년 가까이 지속된 당나라가 멸망한 뒤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한다. 북방에서는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다섯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고, 남방에서는 열 나라가 난립했다. 이른바 오대십국(907~960)의 난세이다.
풍도는 후당, 후진, 요, 후한, 후주의 다섯 왕조에서 11명의 황제를 모시며 20년 넘게 재상 자리를 지켰던 이색적인 대정치가이다. 927년 46세 때 후당의 제2대 황제 명종으로부터 박학다식과 원만한 성품을 높이 평가받아, 재상으로 발탁되어 일약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어지럽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군주를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구성하는 기초인 백성을 위해 충성을 다해 왔노라고 공언한 것이다. 그가 난세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곤궁한 삶을 살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다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대개 나라의 은혜이며, 모두가 집안의 법도를 좇은 것입니다. 훈계하신 뜻을 받들어 교화의 근원에 관련시켜,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며, 입에는 무도한 말을 담지 않고 집안에는 부정한 재화를 들이지 않았습니다. 제 소원은 아래로는 땅을 속이지 않고 중간으로는 사람을 속이지 않으며 위로는 하늘을 속이지 않는 것이었으니, 이 삼불기(三不欺)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습니다.- 풍도(882~954), 장락로자서
●26 이욱-국가의 불행은 시인의 행복(황제, 남당, 937~978)
당나라가 멸망한 후 강남에는 오, 남당, 전촉, 후촉, 남한, 초, 오월, 민, 남평, 형남이 난립했다. 이들을 북방의 북한과 함께 십국이라 부른다. 이욱은 십국 중 하나인 남당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군주이며, 이후주로도 불린다. 이욱에 의해 한층 성숙한 사는 이후 송대를 통해 중국 문학의 주요 장르로 자리를 잡아 간다.
발 너머 주룩주룩 내리는 비
봄기운이 이울어 가네.
얇은 비단 이불로는 새벽 한기 이기지 못하는데
꿈속에서는 이내 몸이 나그네임을 잊은 채
잠시 즐거움에 빠져 든다.
홀로 난간에 기대지 말지니
고향가지 무한히 펼쳐진 강산이여.
이별의 때는 쉽게도 오더니 만날 날은 아득하기만 하구나.
흐르는 물에 꽃이 지며 봄날은 간다.
하늘과 인간의 격절만 남긴 채
-이욱, 낭도사령
새로운 지식인들-송(宋)
●27 임포-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은 은둔 시인(시인, 북송, 967~1028)
오월이 송나라에 멸망할 당시 임포는 열두 살이었다. 소년 시절 망국의 아픔으로 생긴 깊은 상처는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병약하여 평생 독신으로 지낸 임포는 학 명고를 자식으로 사슴 유유를 시종으로, 그리고 매화꽃을 아내로 여겼다.
●28 왕안석-800년 세월을 외면당한 불운의 개혁가(정치가, 북송, 1021~1086)
희녕 3년, 재상이 된 왕안석은 대상인과 대지주가 이익을 독점해 영세 상인과 소작농이 손해를 보는 왜곡된 경제.농업구조를 뜯어고쳐 적자 재정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에 따라 균수법, 청묘법 등의 신법을 입안하여 가차 없는 개혁을 단행했다. 균수법이란 각 지방의 물가 안정을 위해 중앙에서 물자를 사들여 값이 싼 다른 지방에 판매하도록 한 제도이고, 청묘법이란 대지주의 고리채로 인한 농민의 몰락을 막기 위해 관아에서 돈과 곡식을 싼 이자로 빌려 주던 제도였다. 근대 국가 시스템을 너무 일찍 도입했던 대정치가 왕안석은 이후 전통 중국 사회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혀 지탄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참뜻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나기까지 80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29 심괄-재능만큼 야망도 컸던 만능 과학자(과학자, 문장가, 북송, 1031~1095)
북송의 심괄은 천문 지리 의학 약학 수학 등의 분야에 정통하여 전통 중국이 낳은 굴지의 과학자로 불린다. 몽계필담의 저자
●30 휘종-방탕한 천자와 초일류 예술가의 두 얼굴(황제, 북송, 1082~1135)
북송 제8대 황제인 휘종은 뛰어난 서예가이자 화가였다. 휘종은 황제로서는 실격이었지만, 가늘고 예리하며 독특한 서체 수금체를 고안해 냈고 세밀한 화조도에 뛰어났다.
●31 이청조-죽은 남편의 보물을 지킨 천재 여류 시인(시인, 북송, 남송, 1084~1151?)
북송에서 남송에 걸친 격동기를 살아간 이청조는 전통 중국 최고의 여류 시인이다. 지칠대로 지친 이청조 앞에 장여주라는 남송 관료가 나타나 결혼을 간청했다. 그녀는 소흥 2년(1132)장여주와 재혼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49세때의 일이다.
●32 신기질-강인한 무인, 호방한 반골 시인(시인, 남송, 1140~1207)
신기질은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냉정하게, 강인한 무인의 삶과 반골 문인의 삶을 다했던 것이다.
세계는 넓어지고 사상은 깊어지다-원(元) 명(明)
●33 조맹부-황제들의 탄복을 산 귀공자적 기품(서예가. 화가. 원, 1254~1322)
남송이 멸망한 후 조맹부는 10년간 고향 호주를 본거지 삼아 은둔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지원 23년(1286) 33세때, 세조의 초빙에 응하여 수도 대도(지금의 베이징)로 들어가게 된다.
●34 도종의-재야의 삶을 관철한 기록 문학의 명인(수필가, 원말 명초, 생몰년 미상)
도종의는 원말 명초의 전환기를 살았던 이색적인 문인이자 학자이다. 도종의의 대표작인 철경록은 원나라 시대의 제도와 문물에서 소설, 희곡, 서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이고도 상세하게 기록한 기록 문학의 수작이다.
●35 정화-인도에서 아프리카까지, 세계가 내 무대다(모험가, 명, 1371~1435?)
정화는 명나라 초, 일곱 차례에 걸쳐 대선단을 이끌고 30여 국에 원정한 사람이다. 홍무제의 넷째 아들 연왕 주체의 소년 시종이 되어 강제로 거세를 당하고 만다. 정화는 무려 7척9약 218센티미터)에 달하는 키에 수려한 용모로, 무인다운 위엄이 넘치는 풍채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정화는 35세부터 약 30년간 원정에 나서 대항해를 계속했다.
●36 심주-자립형 문인의 길을 개척한 도시의 은자(화가,명, 1427~1509)
심주는 명나라 중기 강소성의 거대 상업 도시인 소주에서 활동했던 문인 화가이다.
●37 왕양명-내 마음이 곧 이치다(군사 전략가, 사상가, 명, 1472~1528)
양명학의 시조인 왕양명. 왕양명은 빛나는 무공으로 정덕 16년 남경의 병부상서(지금의 국방부장관)가 되었고 이후에도 광서 지방의 반란 진압에 참여하는 등 57세로 죽을 때까지 계속 군사적 수완을 발휘했다. 이(理)와 지(知)를 바깥 사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널찍하나 원천이 없는 연못보다는, 작지만 원천이 있어 끊임없이 솟아나는 우물이 더 낫다.-왕양명, 전습록
●38 이탁오-시대를 앞서 나간 위험한 사상가(사상가, 명 말기, 1527~1602)
자신의 저서 장서(藏書)에서 한 시대에는 그 나름의 기준이 있으므로 역사상의 인물을 고정된 유교적 기준에 의해 일률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위험한 사상가로 낙인찍혀 투옥되었다가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냔 76세였다. 이탁오는 비운의 최후를 맞이했지만, 경직된 유교 윤리에 과감히 칼을 빼 든 그의 주장은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9 서광계-선진 문물을 과감히 도입한 실용주의 학자(농업학자, 수학자, 명 말기 1562~1633)
명나라 말기의 서광계는 농업기술에 관한 백과전서 농정전서를 편찬하고 서양역법을 도입해 새로운 달력을 제작했으며, 유클리드 기하학을 번역한 기하원본을 간행하는 등 과학 제반 영역에 두로 밝았던 우수한 학자이다.
대체로 사람이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는 정반 정도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열에 아홉이나 열에 하나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다. 하지만 유독 기하학만은 알면 전부 알고 모르면 하나도 모르는 분야여서, 이해의 등급이나 정도를 논할 수가 없다.-서광계, 기하원본잡의
제3장 위기 혹은 기회, 현대로의 도약
가을 바람 가을비, 사람을 시름겹게 하는구나-추진의 말에서
시대 전환기를 뜨겁게 살다 간 명인들-명말 청초(明末淸初)
●40 풍몽룡-통속 문학을 유행시킨 최초의 전문 편집자(문장가 편집자 명 말기 1574~1646)
풍몽룡은 삼언(三言)이란 불리는 백화(구어체)단편 소설집의 편집자로 알려져 있다. 유세명언, 경세통언, 성세항언 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 삼언에는 각 40편씩 총 120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걸친 명나라 말기에는 출판업이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삼언은 그가 이렇게 편집자로서 갈고닦은 수완을 발휘하여 고금의 화본 가운데 걸작들을 선별해 묶어 낸 통속 문학의 정수이다.
●41 장대-반세기를 유민으로 살다 간 초일류 재야 문인(문장가 명 말기 1597~1689?)엄청난 독서가이자 서적 수집에 열정을 쏟은 장서가이기도 했다. 요컨대 장대는 다재다능하면서도 박학다식한 재야의 초일류 문인이었던 것이다. 지향하는 바가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아무런 구속 없이 살던 장대가 48세 되던 해에 명나라는 이자성이 이끈 농민 반란군인 유적에 의해 멸망한다. 그 뒤를 이어 유적을 내쫓고 북경을 제압한 만주족의 청 왕조가 강남 각지에 성립한 명나라 망명 정권을 차례로 멸망키시며 중국 전역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대는 전 재산을 잃고 궁핍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42 유경정-청중의 마음을 움직인 희대의 이야기꾼(전문 이야기꾼 명말청초 1587~1606)
감형을 받고 고향을 떠난 유경정은 강석사가 되어 강남 각지를 돌아다니며 기예를 갈고 닦았다. 늙은 몸을 이끌고 강석사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그는 죽는 순간까지 뜻을 같이해 온 복사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깊은 신뢰 관계를 유지했다.
●43 모진-8만 4000책의 장서를 모은 집념의 서적 마니아(장서가 출판인 명말청초 1599~1659)
강소성 상숙현에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모진은 동향 사람인 대문학자 전겸익을 사사하며 학문에 힘썼지만,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심기일전하여, 고향에서 송본(송나라 때 간행된 서적)을 중심으로 서적의 선본을 수집하는 일에 전념했다.
장서 중에 출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선본을 골라낸 뒤, 다른 판본과 대조하여 교정 작업을 진행했다. 이때 자신의 장서에 없는 판본이 필요한 경우, 소장자에게 빌려 와 초본(사본)을 만들었다. 명말에서 청초에 걸쳐 모진과 모의 부자가 간행한 서적은 모두 587종에 달한다. 급고각본 또는 모본이라 불리는 이 서적들은 대부분 현재까지도 양질의 판본으로 널리 유통되고 있다.
삼백육십 가지 세상의 그 어떤 장사보다도 모 씨에게 책을 파는 것이 낫다.-소주부지
●44 여회-저물어 가는 시대를 노래한 풍류 시인(시인, 명말청초 1616~1695?)
영회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남경에서 나고 자랐다. 수필집 판교잡기의 저자. 판교잡기는 명나라 말기 남경의 화류계인 진회에서 일세를 풍미하던 기생과 강석사 악사 방간(술자리의 흥을 돋우는 것을 업으로 삼는 남자)등 예능인들의 모습을 전기 형식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즉 화류계 수필이라는 형식을 빌려 명나라에 바치는 애가 혹은 만가였던 것이다.
●45 유여시-당대의 지성과 어깨를 나란히 한 여장부(문장가 명망 청초 1618~1664)
기녀 출신 문인이다. 전겸익의 자랑인 서고 강운루에 수장된 중요 도서를 정리하고 교정하는 일에서 살림살이에 이르기까지 전씨 집안의 일체를 도맡아 관리했던 것이다. 명말 청초의 격동기, 유여시는 훌륭한 남성들과의 만남으로 강인한 지성과 날카로운 현실 감각을 연마했고,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완전히 연소시켰던 것이다.
역사와 예술을 응시한 날카로운 시선-청(淸)
●46 만사동-중국의 루소(역사가 청 1638~1702)
역사가 만사동의 최대 업적은 60권에 달하는 역대사표(歷代史表)를 만든 것이다. 역대사표는 한나라에서 송나라까지, 각 시대마다 중직을 맡았던 사람의 명단인 장상대신연표와 각 주 장관의 명단인 방진연표를 연대순으로 작성한 것으로, 극도로 정확하고 치밀한 작업이었다.
●47 팔대산인-세상에 침묵하며 내면에 귀기울인 천재 화가(화가 청 1626~1705)
청나라 화가 팔대산인은 본명이 주통란 혹은 주탑이라고 하며, 명 왕조의 일족이다. 명청 교체기에 맞닥뜨려 운명의 격변을 신물 나도록 맛본 그가 팔대산인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59세부터이다. 이후 정복 왕조 청에 대한 원망을 담은 팔대산인의 화풍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는 번뜩이는 눈으로 쏘아보는 물고기, 예리한 눈초리로 흘겨보는 새 등 독특한 제재를 기백 넘치는 화풍으로 묘사했다.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사생보다는 화가의 내면을 응축해 표현하는 것을 중시한 그의 화풍은 양주팔괴를 비롯한 후세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8 공상임-살아 있는 역사를 그려 낸 희곡의 대가(희곡가 청 1648~1718)
중국에서 희곡 장르가 확립된 것은 원나라 때의 일이다. 희곡4대가-관한경 정덕휘 백인보 마치원
원곡(元曲)이라 불리는 독특한 희곡 양식이 발전하게 되었다. 원곡은 4막 구성을 원칙으로 하며, 노래를 부르는 자는 주인공 한 사람으로 한정한다.
도화선의 작자 공상임은 공자의 64대손으로 30대 후반까지 산동성 곡부에서 살았다. 청나라 관료체제에 속해 있으면서도 명나라 유민에 공감하여 명나라 말기의 저항파 문인과 기녀의 사랑을 그렸던 희곡가 공상임, 공자의 자손인 그의 반골 기질은 결코 미흡한 것이 아니었다.
●49 납란성덕-죽음의 그림자를 예감한 대문장가(문장가 청 1655~1685)
청나라 초기의 문장가 납란성덕은 북송 시대 이래 문학 장르의 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 사(詞)의 명인으로 많은 걸작을 남겼다. 납란이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여진족(만주족) 출신으로 청나라 황제의 일족과도 친척 관계에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총명하여 많은 책을 섭렵하고 시를 짓는 데도 뛰어났던 납란성덕은 18세 때 향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는 중앙 시험인 회시에도 합격했다. 명문가의 귀공자이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온몸으로 느끼며 명리에 무관심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에도 물들지 않은 채, 오로지 불우한 벗들에게 공감하고 애정에 충실한 일생을 보낸 요절 사인(詞人) 납란성덕. 이 유례를 찾기 힘든 인물이 바로 18세기 중엽 조설근이 쓴 중국 고전 소설의 최고봉 홍루몽의 주인공인 가보옥의 모델이었다는 설도 있다.
●50 양주팔괴-괴물들의 자유분방한 붓놀림(화가 청)
18세기 청나라, 소금 상인들의 근거지로서 발전한 강남의 거대 상업 도시 양주를 무대로 양주팔괴라 통칭되는 8명의 화가가 활약했다. 이 8명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김농, 정판교, 이선, 황신, 나빙, 이방응, 왕사신, 고상을 꼽는다. 파격적인 화풍으로 유명한 그들은 살아간 방식도 자유분방하기 그지없어서 기이할 괴라는 호칭과 썩 잘 어울린다.
큰 폭은 6냥, 중간 폭은 4냥, 작은 폭은 2냥, 족자나 대련은 1냥, 부채에 그린 것이나 두방(상자가 궤짝에 붙이는 사방 한 자짜리 그림)은 5전입니다. 예물이나 음식으로 주시는 것은 백은(현금)이 효과를 발휘함만 못합니다. 당신이 주는 것이 반드시 제가 좋아하는 것은 아닐 수 있으니까요. 현금으로 보내 주시면 마음속이 즐거워져 글씨도 그림도 모두 멋지게 됩니다.-정찬교, 판교윤격, 정판교가 그린 그림의 값.
●51 조익-고증학의 새 장을 연 대기만성 역사가(문학자, 역사가 청 1727~1812)
조익은 청나라 중기 유수의 문학자이자 역사학자로 강소성 양호현 출신이다.
70세때 그의 대표작 이십이사고이(36권)를 완성했다. 조익의 저작은 사소한 사물이나 언어에대한 고증보다는 각 시대별로 중요한 문제와 모순점을 꼽은 뒤 역사적 사실을 열거하며 비교 연구한 데에 특색이 있다.
외세와 정치적 격변에 대처하는 자세-청 말기·중화민국 초기
●52 임칙서-서양의 오만에 맞선 결사 항전파의 선봉(정치가, 청 말기, 1785~1850)
임칙서는 중국이 서양의 충격에 노출된 청나라 말기에 활약했던 걸출한 정치가이다. 2만200상자가 넘는 아편을 몰수해 소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영국정부는 이런 조치에 반발하여 중국으로 파병을 강행, 아편전쟁(1840~1842)이 발발하게 된다. 서양의 부조리한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던 임칙서, 그는 동시에 서양 문화의 장점에 눈을 돌린 최초의 근대 중국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53 옌푸-최초로 서양 사상서를 소개한 번역계의 거목(사상가 청 말기 중화민국 초기, 1853~1921)
린수와 함께 청나라 말기, 중화민국 초기에 활동했던 중국 번역계의 거목중 한사람이다.
천연론은 바로 중국인 스스로 서양 사상서를 번역한 최초의 예이다.
번역하는 데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신(信, 원문에 충실할 것), 달(達, 번역문이 명쾌할 것),아(雅, 표현이 우아할 것)가 그것이다. -옌푸, 천연론 번역 범례
●54 랑치차오-잠든 용 중국을 개운 천재적 신문 발행인(문장가 언론인 청 말기 중화민국 초기, 1873~1929)
랑치차오는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에 걸쳐 활약한 대언론인이다. 일본으로 망명한 후 랑치차오는 청의보를 발행하여 개혁 운동 선전에 힘쓰는 한편, 빠르게 일본어를 익혀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소설 몇 편을 다시 중국어로 옮기기도 했다.
비록 이룬 것 적더라도 감히 스스로 비하하지 말지니, 적은 것이 없다면 많은 것이 어디서 나오리!-량치차오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해도의 일부
●55 추진-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열혈 혁명가(혁명가 청 말기, 1875~1907)
천부적 선동가인 추진이 일본도를 손에 잡고 단상에 올라 이민족 왕조 청나라를 통렬하게 비난하는 모습은 소름이 돋을 만큼 매서웠다고 한다.
동향 사람인 루쉰의 단편소설 약(藥)은 바로 추진의 처형과 관련된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추진은 외세에 의해 반식민지가 되어 버린 청나라 말기의 상황에 분노하여, 스스로 부정의 화신이 되어 격렬하게 저항하며 짧은 생애를 완전히 불살랐다. 결코 타협을 몰랐던 그 생애의 궤적은 앞서 소개한 네 여성 곧 사도온, 어현기 이청조 유여시와 깊은 근저에서 상통한다고 할 것이다.
●56 루쉰-펜 끝으로 투쟁한 세기의 논객(문장가, 중화민국 초기, 1881~1936)
루쉰(본명은 저우수런)은 절강상 소흥시 출신이다. 일본 동경에서 유학한 후 1909년 귀국하여 교사생활을 하던 중인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1918년 문학 혁명 운동과 때를 맞춰 백화 소설 광인 일기를 발표했다. 원래 루쉰에게는 어머니가 정해 준 형식적인 아내가 있었지만, 쉬광핑과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을 얻을 수 있었다. 루쉰과 쉬광핑 사이에 오간 서간집 양지서는 연애문학의 걸작이라 불러도 좋은 작품이다. 1927년부터 1936년 56세로 병사하기까지, 루쉰은 쉬광핑과 함게 상해에서 살았다.
이나미 리쓰코
1944년 일본 도야마 현에서 태어났다. 1966년 교토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1972년 같은 대학원에서 중국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가나자와 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국제 일본 ㅁ누화 연구 센터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인물 삼국지』,『중국 문장가 열전』,『배신자의 중국사』,『중국 문학의 유쾌한 세계』,『고사성어로 읽는 중국사』등이 있다.
옮긴이 이동철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연수했다. 현재 용인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삼국통일과 한국통일(공저)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유교사(공역), 장안의 봄(공역), 고사성어로 읽는 중국사 이야기(공역)등이 있다. 세계 지식인 지도, 위대한 아시아, 21세기의 동양철학 등의 기획에도 참여했다.
옮긴이 박은희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대동고전연구소와 민족문화 추진회에서 한학을 연수했다. 원전 및 국역 조선왕조실록 전산화 작업에 참여했으며 옮긴 책으로 장안의 봄(공역), 고사성어로 읽는 중국사 이야기(공역)등이 있다.
중국을 움직인 거인들
1판1쇄 찍음 2008년3월27일
1판1쇄 펴냄 2008년4월1일
지은이 이나미 리쓰코
옮긴이 이동철 박은희
펴낸곳 민음 in
출판등록 1996.5.3.(제16-13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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