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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수필 / '호랑이 장모님' 꽃상여 타시던 날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 필자 주 : 본 기록은 97세를 일기(一期)로 경자년(庚子年) 동짓날(12.21) 별세하신 장모님(千命順 ․ 1924.8.19.~2020.12.21.)을 주인공으로 쓴 수필작품입니다. 칠갑산 아래 깊고 깊은 길지(吉地)에 장모님을 모시고 오던 날, 생시에 사위를 지극히 사랑해 주셨던 은혜로운 말씀이 큰 가르침으로 떠올라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존경과 추모하는 마음으로 장모님 관련 추억의 글과 자료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자손들에게 남기고 싶은 소중한 이야기도 담고 있어 ‘가족 소통 방’에서 공유하고,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 등에도 올려 한 시대의 단편적인 가족사 자료로 삼고자 합니다. [2020.12.23. 필자 윤승원] |
장모님을 주인공으로 한 「윤승원 수필」과 가족사 기록
■ 자료 목록과 글 순서(1990~2020) □ 경찰 교양잡지 수필 / 부적符籍 : 월간《경찰고시》1990년 7월호 □ 조선일보 수필 / 구순九旬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 :《조선일보 에세이》2011년 □ 순수 문예지 수필 /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월간문학》2020년 7월호,《칠갑문화》2020년 □ 역사기록 /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장수마을 <낙지리(樂只里)>사연 :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 카페 / 청양문화원 연간지 《七甲文化》 2020년 □ 역사기록 / 역사학자가 보내준 장수기원 축시와 필자의 답글 (2020년) □ 기록 / 호랑이 장모님 꽃상여 타시던 날 : 현장 사진 (2020년 12월 23일) □ 기록 / 장례를 마치고 : 감사의 인사 (2020년 12월 23일) |
■ 추억의 수필[1] <부적符籍> :
[작가의 말] : 필자가 경찰관 생활을 하던 당시 전국 경찰관들이 애독하는 교양잡지가 있었다. 월간≪警察考試≫. 책 구독료를 매달 봉급에서 자동으로 뗄 만큼 경찰관서 전 직원들의 필독 교양지였다. 현직 경찰관뿐만 아니라 경찰가족들도 시와 수필 등 문학작품으로 참여할 수 있어 인기가 높았다. 이 잡지에서는 글이 뽑히면 매달 선자평(選者評)과 함께 큰 상금도 주어졌다. 필자가 처음 투고한 이 글은 과분하게도 1990년 7월호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장모님을 주인공으로 쓴 생활수필이다. (필자나이 37세)
【選者評】뽑고 나서
/ 편집국장 李三憲(시인)
이달에 투고된 작품은 모두 27편이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뽑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투고된 작품들이 한 자, 한 자 정성을 쏟은 글들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투고된 작품 모두를 게재할 수는 없는 형편이니, 부득이 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달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달에도 옆으로 미루기 매우 어려운 작품들도 많이 있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최우수작> 符籍(윤승원)
<부적>을 최우수작으로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글을 엮는 솜씨가 매끄럽고 표현이 뛰어나다. 장모님이 주신 ‘부적’에 얽힌 이야기지만 그 주변 인물들의 인간미도 은은하게 드러나고 있어 더욱 글의 격을 높이고 있다. [이삼헌 편집국장]
부적符籍
윤승원 충남경찰국 정보과
시골에 계신 장모님께서 고추장 담글 거라고 하시며 찹쌀 한 말을 머리에 이고 오셨던 날이다. 어찌 생각하면 찹쌀 한 말쯤 가까운 쌀가게에 전화만 하면 손쉽게 배달해 주기도 하고, 더 편케는 만들어 놓은 고추장을 사다가 먹을 수도 있는 걸 노인이 멀리서 직접 이고 오신 것이다.
그 날은 마침 집안에 행사가 있어 형제들이 모두 모였는데, 모처럼 오신 장모님께서 사돈댁 식구들이 많이 모여 자리가 불편하셨는지 한나절도 안 되어 바로 가시겠다고 일어 나셨다. 적이 서운했지만 막무가내로 가시겠다고 서두르시는데 더 이상 머무르게 해 드리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큰길까지 따라 나가면서 여비를 드렸더니 그것마저 극구 사양하시고, 오히려 잊고 갈 뻔했다며 허리춤에서 봉투 한 개를 꺼내시더니 내 주머니에 찔러 주시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뭐예요, 장모님?”
영문을 알 수 없는 봉투를 받고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장모님은 웃으시며, “그냥 지니고 다니게!” 한 마디 하시고는 총총걸음으로 버스에 오르셨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장모님이 주신 봉투가 궁금했다. 돈은 아닌 것 같고, 가정에 충실 하라는 당부의 말씀이라도 적어 넣으셨을까?
접혀진 봉투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뜯어보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의 그림 한 장이 나왔다. 붉은 색깔로 야릇한 모양을 그린 노란 종이였다.
누구네 집에선가 벽에 붙어 있는 이것을 본 적이 있지만, 내가 직접 받아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내심 놀랍기도 하고 어쩐지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이 비밀스런 것을 행여 누가 볼까 싶어 얼른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원래 불교나 도교(道敎)를 믿는 집에서 재앙을 방지하고 잡귀(雜鬼)를 쫓기 위하여 부(符)자를 적은 종이를 몸에 지니기도 하고, 소중히 여기는 곳에 붙이기도 하는 것이 부적(符籍)이라 들었는데, 이를 장모님께서 내게 주신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아낄 수 없는 경찰관이란 직업을 가진 사위의 건강을 염려한 때문이리라.
시골 처가 대문 옆에 귀신을 쫓는다는 속설을 가진 ‘엄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는 걸 보더라도, 일찍이 홀로 되신 장모님이 심어 놓으신 ‘수호신’임을 나는 평소 느껴왔다.
그뿐 아니라, 옛 조상님들이 그랬듯이 음양오행(陰陽五行)설과 불로장생, 승천(昇天)의 도교적 사상을 지극히 신봉하시는 모습을 생활 속에서 쉽게 엿볼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정성은 자신의 부귀영화보다는 자식들을 위한 모정(母情)이 더 큰 것이었다. 희생에 가까운.
장모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니 큰 형님께서, “그 무거운 걸 머리에 이고 모처럼 오셨는데, 바로 가셔서 여간 서운치 않구나.” 하시며 “올해 어른 춘추가 몇이시냐?”고 물으셨다. “연세요? 글쎄요….”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평소에 그저 나이 드신 어른으로만 생각했지, 장모님의 정확한 연세를 기억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침묵하고 있는데, 옆에 계시던 누님께서 얼른, “난 집에 아이들 나이도 갑자기 물으면 모르겠더라.”고 궁색해진 동생의 입장을 두둔해 주셨다.
“하기야 요새 처가 식구들 나이까지 알고 지내는 젊은이가 흔치 않을 거야” 형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여태껏 장모님께서 사위에게 베풀어주신 정성에 비해 사위는 장모님 연세도 잊고 지내니, 이 같은 소홀함이 또 있는가. 부모님을 여의고 장모님 한 분 계신데, 부모님께 생전에 못한 도리를 장모님께마저도 다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부끄러운 마음 그지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가 있는 주방으로 갔다. 그러나 아내에게 장모님 연세를 새삼스레 묻지는 못하였다. 아무리 가까운 게 아내라지만 스스럼없이 선뜻 던질 수 있는 물음이 아님을 순간 느꼈다. 아무 것도 아닌 그 한 마디 물음이, 왜 그렇게 어렵게 느껴졌는지…. 그건 어쩌면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부적’ 때문인지도 몰랐다. ■ 月刊 ≪警察考試≫ 1990년 7월호
■ 추억의 수필[2] / '호랑이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
▲ 대전문학관 기획전시 『한국문학시대 』 문학대상 수상작가 작품(2018.3.16 - 6.30.)
- 윤승원 作 『호랑이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 』
조선일보 2011.11.30일자
[ESSAY] 九旬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
윤승원 대전수필문학회장
청양 칠갑산 아래 사는 장모님은 자식들이 가져온 선물보다 큰절 받는 걸 더 좋아하셔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라는 그분의 꼿꼿한 가르침을 좀더 오래 누릴 수 있었으면 |
충남 청양의 칠갑산 아래 산골 마을에 아흔이 다 되신 장모님이 사신다. 어르신에게 유일한 벗은 TV이다. 온종일 틀어놓는 TV의 높은 볼륨 탓에 대화가 불편할 정도다. 하지만 나는 TV 볼륨을 줄이지 않는다.
TV 소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은 도회지에서 사는 나의 예민한 귀 탓이지, 시골 노인의 귀에는 상관이 없다. 혼자 적적하게 사시는 노인 귀에는 이렇게 큰 음량이 익숙해 생활에 아무런 불편이 없으니, 문안드리는 사람이 굳이 TV 볼륨을 줄여 드릴 필요가 없다.
이곳은 TV 소리마저 없으면 절간이나 다름없다. 사람이 사는 집인지, 빈집인지 모를 정도이다. 일찍이 홀로되신 장모님은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호랑이처럼 무섭게 살지 않았으면 살아가면서 별의별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 혼자 살아가니 나약한 면을 보여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그 많은 전답을 혼자 관리하려면 장정(壯丁) 못지않은 완력과 기세도 필요했다.
거친 농사일에 자식 키우는 일까지 억척스럽게 일인다역(一人多役)을 해내신 분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외로운 분이었다. 일찍이 남편과 사별해 경험했듯이 뜻하지 않은 불행을 이겨내려면 보이지 않는 신령(神靈)도 믿어야 했다.
이때부터 일진(日辰)이며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엄격히 따지면서 '가리고 삼가는 일'이 많아졌다. 먹는 것, 물건 사는 것, 심지어 장거리 출타할 때도 '좋은 날'을 따져야 했다.
30여 년 전 내가 이곳 깊은 산골 마을로 장가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대문 앞에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는 가시 달린 나무였다. 악귀(惡鬼)를 쫓는다는 '엄나무'였는데, 장모님의 수호신(神)이었다. 그 나무는 세월이 흐르면서 태풍에 쓰러졌지만 뿌리는 아직도 죽지 않고 새순을 피워 올려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아내는 그 산골 마을에서 '콩밭 매는 아낙'이었다. 대중가요 '칠갑산'의 노랫말에 등장하는 것처럼 아내도 '홀어머니 두고' 내게 시집왔다.
찬바람이 불면 아내는 김장을 한다. 우리 식구 먹을 양만 하는 게 아니라 시골에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가 드실 김치도 담근다. 요즘은 손쉽게 택배로 부쳐도 된다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지난 휴일 김장 단지를 승용차에 싣고 청양으로 달려갔다. 허리가 활처럼 휜 장모님이 이것을 보시더니, 사위한테 '큰절' 받으시는 것도 잊으시고 김장 단지가 놓일 장소부터 지시하신다.
그래도 나는 큰절이 먼저다. '호랑이 장모님'한테 큰절부터 올리지 않으면 나중에 혼쭐이 난다. 장모님은 사위나 손주들에게 선물을 원하지 않는다. 큰절이면 그만이다. 왜 그러실까?
아내한테 들은 이야기다. "친정어머니는 일찍이 혼자되시어 아버지 몫까지 대신해 오신 분이고, 자식들 교육도 그렇게 엄격히 하셨어. 객지의 자식과 손주들이 찾아뵙고 올리는 큰절도 어머니에겐 그래서 각별한 의미가 있지."
그러면서 "자식이나 손주들이 오랜만에 찾아뵙고 큰절을 하지 않으면 어쩐지 인사받은 것 같지 않아 서운하다고 하신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 뒤로 나는 처가에 가면 무조건 '큰절'부터 올린다.
또 하나 신경 써야 할 일이 있다. 작별 인사하면서 장모님께 용돈을 드릴 때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언젠가 대문 밖까지 나오셔서 배웅해 주시는 장모님께 용돈을 드리는데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셨다.
그래서 치마 주머니에 찔러 드리는데 그냥 드리기가 뭣해서 "고기나 사 드세요"라고 말씀드렸다. 예부터 어르신들께 용돈을 드리면서 자식들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내 딴엔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말씀드린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내를 통해서 책망하시는 말씀이 들렸다. "왜 용돈을 주면서 꼭 '고기를 사 드시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그냥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주었으면 초파일에 절에 가서 '사위 무사 기원 등(燈)'을 달려고 했는데, 사위가 '고기 사 드시라'고 한 말 때문에 임의로 기원을 드리지 못했다"는 말씀이었다.
결코 융통성이 없어서 그러신 게 아니다. 노여움으로 하신 말씀도 아니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장모님이 사위에게 서운한 마음으로 하신 말씀 같지만 실은 그 말씀이 '바른 가르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깊은 사랑'이다.
이제 내게는 다른 어르신이 안 계신다. 장모님 한 분이 유일한 어르신이다. 남달리 정직하고 올곧게 살아오신 분,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라고 늘 강조하는 그분의 엄격한 가르침이 나의 느슨한 의식에 바늘처럼 꽂힌다. 그 꼿꼿한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누리고 싶다. (2011.11.30. 조선일보)
■ 한국문협 문예지 《월간문학》 신작수필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윤승원 수필가
100세를 바라보는 장모님을 모시러 시골에 갔다. 거동 불편한 노인을 시골집에 혼자 계시게 할 수 없었다. 아내와 아들도 동행했다. 연로하신 장모님을 업어 바깥마당에 주차한 승용차로 모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동식 들것을 별도로 준비하지 않았다. 등에 업어 차에 태워 드리면 되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달려온 것이다.
재래식 시골집 구조는 연만하신 노인에게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안방에서 마루로 나오면 뜰팡[土房]이 있다. 뜰팡에서 안마당으로 내려오면 대문 문턱을 넘어야 바깥마당으로 나올 수 있다.
장모님이 마루까지는 가까스로 나오셨는데 마루에서 뜰팡에 내려오기 힘들었다. 내가 업으려고 하자 장모님은 손사래를 치면서 한사코 거부하셨다. 아내가 업으려고 했다. 하지만 힘이 부쳤다. 안간힘을 쓰면서 업으려 했으나 허리조차 펴지 못하고 마룻바닥에 주저 않고 말았다. 바깥마당 승용차 운전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들을 불렀다. 외할머니를 등에 업어보라고 했다.
아들이 장모님을 업으려고 등을 구부렸다. 그러자 장모님은 역시 외손자의 등을 단호히 거부하셨다. 이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절대 안 된다.’고 고개를 저으셨다. 난감한 일이었다. 마루에서 더 이상 운신(運身)하지 못하고 오도카니 앉아계신 노인이 안쓰러웠다.
안마당 한 구석에 바퀴 달린 농업용 손수레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얼른 손수레를 갖다 대었다. 사위와 외손자의 등을 완강히 거부하시던 장모님이 손수레에는 순순히 올라 타셨다. 2인이 뒤에서 밀고, 1인이 앞에서 끌어당겨 가까스로 대문 앞에 이르렀으나 이번엔 문턱이 장애물이었다. 손수레에 타고 계신 장모님을 3인이 마치 가마 들어 올리듯 번쩍 들어 올려 바깥마당 승용차 안으로 모셨다.
장모님께 여쭈었다. “사위와 외손자가 업어서 차에 태워 드리려고 했는데, 왜 한사코 마다하셨어요?” 장모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 못하셨는가 싶어 큰 소리로 재차 여쭈었으나 역시 침묵하셨다.
대전에 도착하여 처제네 집 앞에 차를 댔다. 처제가 자기 집으로 모시겠다고 일찌감치 예고하고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제가 승용차 뒷좌석에 누워계신 장모님을 업으려고 하자 장모님이 벌떡 일어나 순순히 업히셨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위의 등 다르고 딸자식 등이 다른 이유가 뭔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처제도 60대 중반의 나이지만 아내보다는 힘이 셌다. 3층까지 좁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하는 주택 구조인데도 처제는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혼자서 장모님을 등에 업고 거뜬히 계단을 올라갔다. 처제가 장모님을 편안히 모시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안도했다.
집에 돌아오면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아내에게 말했다. “딸자식(처제)의 등에는 순순히 잘도 업히시면서 왜 사위와 외손자 등에는 업히시기를 한사코 거부하셨을까?”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본래 까다로운 분이잖아요. 남자 등에 여자가 업힌다는 게 어머니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것이지요. 더구나 사위 등에 업힌다는 것은 남세스러운 일이고, 아직 장가도 안 간 총각인 외손자 등에 여자가 업힌다는 것은 더구나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이 어른의 상식이고, 평생 몸에 밴 법도인 셈이지요.”
법도? 모처럼 듣는 말이라 신선했다. 어디서 잠자고 있던 말이 여기서 툭 튀어 나오는지 생경하면서도 언어의 무게가 느껴졌다. 아내의 뜻하지 않은 해석을 들으면서 문득 과거 총각시절에 고향 이장님이 내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자네가 이웃동네 원(元)씨 가문으로 장가간다면서? 어려울 걸! 윤(尹)씨도 둘째가라면 서운한 ‘꼿꼿 가문’이지만 원 씨네 가문도 대단히 어려운 집안이지. 참한 아가씨 고른다고 애쓰더니, 결국 그 어려운 댁으로 장가를 가는구먼! 쯧쯔~”
축하의 말씀 대신 ‘쯧쯔~’라니, 혀를 차는 동네 이장님이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40여 년을 살아보니, 옛 시골 이장님 말씀이 틀린 말씀이 아니었다. 당시 이장님이 내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까다롭게 느껴지는 ‘어려운 상황’을 수없이 경험했다.
구체적인 사례 설명 없이 ‘어려울 걸!’이라고 막연하게 암시했던 당시 이장님의 애매한 표현을 달리 해석해 보면, ‘법도를 지키면서 올곧게 살아가기가 결코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였다.
법도란 무엇인가. 원칙과 상식이다. 전통을 말한다. 예의범절을 뜻한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도 함축돼 있다. 공맹(孔孟)도 들어 있다.
‘그런 것을 지키면서 왜 불편하게 사느냐’, ‘좋은 세상에 왜 옛 사고방식을 고집하느냐’라고 물으면 집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본디 그렇게 보고 배웠기 때문이지요.’, ‘몸에 밴 생활 습성인 걸 당장 어떤 식으로 바꾸라고 요구하지 마세요.’
그렇다. 불편하게 산다는 것은 그렇게 보는 사람의 눈이지, 정작 본인은 까다롭다거나 외곬인생이라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정도(正道)라고 생각한다.
장모님이 융통성이 없어서 그런 옛날 방식의 생활철학을 고집하는 분은 아니었다. 따뜻한 정을 가진 분이다. 초파일이 되면 절에 가서 사위 무사기원 등(燈)을 다셨다. 몸을 아낄 수 없는 경찰관 직업을 가진 사위를 위해 부적(符籍)을 만들어 오신 적도 여러 번 있다. 지갑 속에 소중히 넣고 다녔다. 그 덕분인지 모르겠으나 거칠고 험한 경찰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고추장 담글 거라면서 시골에서 무거운 찹쌀을 머리에 이고 오신 적도 있다. 찹쌀 한 말쯤 가까운 쌀가게에 전화만 하면 손쉽게 배달해 주기도 하고, 더 편케는 만들어 놓은 고추장을 사다 먹을 수도 있는 것을 노인이 멀리서 시외버스를 두세 번씩 갈아타면서 힘겹게 머리에 이고 오셨던 것이다.
사위가 용돈을 드리면 한 번도 덥석 받으신 적이 없다. 언제나 손사래를 치면서 도망가다시피 했다. 그러면 쫒아가서 치마 주머니에 찔러 드리곤 했다. ‘염치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분, ‘분수를 지키라’고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 주신 분,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視聽言動 四勿(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논어)]’라고 가르치신 분.
이제는 거동이 어려워 방안에만 계신 노인이지만 사위가 찾아뵈면 여전히 어려워하신다. ‘남자’인 사위나 손자들 앞에서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정숙한 장모님.
사위가 문간에 들어서면 화들짝 놀라면서 옷매무새부터 고치시는 100세 노인.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시는 어른의 반듯한 가르침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꼿꼿한 충청도 선비 가문의 극기복례(克己復禮) 정신을 나는 존경한다. 《월간문학》2020년 7월호
▲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권갑하 시인이 보내준 서예 작품 - 필자의 수필 마지막 대목을 정썽껏 써서 보내주었다.
[後記]
■ 장수마을 낙지리(樂只里)와 장모님, 그리고 역사가 정구복 박사
▲ 청양 <건강 장수 마을> 낙지리 - 즐거울 낙(樂)자가 들어간 '낙지리(樂只里)'라는 지명이 뜻이 좋아서 일까. 칠갑산 정기(精氣)가 흐르는 '농촌 건강 장수 마을'을 다녀올 때마다 이곳의 청량한 공기와 맑은 물이 장수(長壽)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고향 선배님이자 저명 역사학자인 낙암(樂庵) 정구복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아호에도 '낙(樂)'자가 들어가 있다. 정 박사는 낙지리 지명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 낙지(樂只)라는 말은《시경》의 <소아편>에 세 번 나오고 있다. 하나는 "낙천적인 군자여! 나라와 가정의 바탕이로다.(樂只君子 邦家之基)"요, 다른 하나는 "낙천적인 군자는 천자 나라의 후원세력이 된다.(樂只君子 殿天下之邦)"요, 마지막은 "낙천적인 군자여 만복이 함께 하리라!(樂只君子 萬福攸同)"이다. 참으로 멋진 마을 이름이다. 이를 볼 때 아마도 '낙지리'는 어느 한학자가 붙인 이름으로 생각된다. (정구복 著《우리 어머님》137쪽)
장모님께서도 청양 낙지리 출신 역사학자 정구복 박사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칭송하셨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자수성가(自手成家)한 분으로, 학문과 인품이 훌륭하여 성공한 학자로 평판이 나 있다." 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고 했던가. 내 고향 청양 출신 중엔 그 말에 합당한 훌륭한 인물들이 많다. 이곳 산수(山水)와 지령(地靈)은 전래 미풍양속과 인간의 기본 도리를 강조하는 법도와도 맞닿아 있다. 예(禮)를 중시하는 연로하신 어른의 평소 생활 철학과도 무관하지 않다.
▲ 면사무소 민원실에서 글씨 쓰시는 모습 - 인감증명서를 떼기 위해 청양군 장평면사무소에 가셨을 때의 일이다. 고령의 장모님이 글씨 쓰시는 모습을 이 때 처음 보고 놀랐다. 또박또박 쓰시는 글씨체가 반듯했다. 서체(書體)에 '반듯체'라는 용어는 없지만, 당시 구순 넘으신 노인이 장부에 기재하는 성함 삼자도 함부로 흘려 쓰지 않고 반듯하게 정성을 기울이시는 것을 보면서 '반듯체'라는 서체 이름을 '장모님 글씨'에 붙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성이 깃든 장모님 서체에서 평소 정숙한 몸가짐과 건실한 생활방식까지 엿볼 수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자동차 타시는 걸 좋아하셔서 시골에 갈 때마다 사위인 내가 승용차로 모셨다.
▲ 외손자와 무 구덩이 파는 모습 - ROTC 육군 장교로 복무하던 외손자가 휴가 나왔을 때다. 외할머니와 함께 남새밭에 무 구덩이를 파고 있다. 고령임에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시는 것도 장수 비결인 듯하다. 휴가 나온 외손자가 열심히 삽질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견해 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외손자를 끔찍히도 사랑해 주셨다. 두 아들이 외가를 방문하면 '외할머니 즉석 강의'를 최소한 한 시간 정도는 들어야 자리를 뜰 수가 있었다. '강의 내용'은 생활 법도와 건강비결을 주로 말씀하시면서, 특히 '저출산 시대'에 '다산(多産)'을 강조하셨다. 집안이 번창하고 대(代)를 온전히 이어 가려면 '자식(아들)을 많이 두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어른의 지론이자 소원이셨다.
▲ 시골집 풍경 - 서양화가인 외손자가 고드름 매달린 시골 처마 밑에서 겨울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예술가에겐 이채로운 '화재(畵材)'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외할머니가 한 평생 생활하셨던 안방과 마루, 뜰팡이 보인다. 184cm 장신(長身)의 외손자가 등을 바짝 구부려 거동 불편하신 외할머니를 바로 이곳 마루에서 업어 승용차에 태워 드리려고 했으나, 완고하신 외할머니는 '남자 등'에 업히는 것을 끝내 허(許)하지 않으셨다.
■ 역사학자 정구복 교수가 보내준 장수기원 축시와 필자의 답글
※ 낙지리 출신 역사학자 낙암 정구복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독후기(讀後記)
윤승원 선생! 선생의 수필을 읽고 나니 50여년 전 기억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윤 선생 장모님 생각이 새삼 떠오릅니다. 장모님은 제가 시골에서 살 때 논에 오셨다가 가시는 길에 저의 집 앞을 지나가시면서 몇 차례 만나 뵙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때 장모님은 ‘법 없이 사실 분’이라는 평이 나있던 분이십니다. 장모님이 지금 건강이 불편하시다니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백세에 가까우셨다는 말씀에 저의 숙모님과 거의 동년배이신 것 같습니다. 바르게 키우신 두 따님 덕분에 장수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훌륭하신 사위님과 외손자가 올바르게 활동하심을 보시고 고생하시면서 살아오신 자랑스러움을 느끼실 것입니다. 윤승원 선생과의 깊은 인연으로, 그리고 장모님과의 인연으로 저에 대한 과분한 칭찬을 해주신 점이 송구스럽습니다.
앞으로 장모님께 맑은 마음과 바른 마음으로 축복이 있기를 삼보님께 기원합니다. 귀가 듣기에 불편하시다니 전화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습니다.
윤승원 선생의 주옥같은 수필에서 <뜰팡>라는 표현을 보니, 낙지리 옛 시골집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한 폭의 그림보다도 더 정겹고, 인간의 애정이 넘치는 멋진 수필이었습니다. 윤 선생 장모님을 위해 시 한 수 지어 올리겠습니다.
90평생 힘든 여행하셨습니다.
바르고 올곧게 살아오신 공덕
자식과 외손자에 큰 힘을 주셨도다.
이런 공덕 크게, 크게 자라나
내생의 새 인연 심으셨네요.
건강하게 100세를 넘겨 사시옵소서!
윤 선생 장모님 기억을 더듬으면서
삼보님께 지극 정성 기도 드립니다.
- 낙지리 출신 정구복 합장 3배 올림
■ 필자 답글 / 윤승원
거동은 어려우시지만 총기(聰氣)는 좋으셔서 말씀도 잘하십니다. 청력이 좀 떨어지시다 보니 언어 소통이 예전만 못하십니다. 장모님이 평소 칭송하셨던 정 박사님과 제가 이렇게 따뜻한 인연의 정을 이어가는 모습을 장모님이 아신다면 참으로 기뻐하실 일입니다. 정 박사님이 저희 장모님 50년 전 옛 모습을 기억해 주시고, ‘법 없이도 사실 분’이라고 존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온갖 세상 풍파 다 겪으시고 100년 세월을 살아오신 어른이시니, 자식 손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얼마나 많으시겠습니까. 앞으로는 자식, 손자들이 평소 어른이 강조하셨던 유익한 말씀을 육성으로 듣기 어려울 것입니다. 컴퓨터 기억장치에 잘 저장해 놓고 필요할 때마다 재생해 보면서 <생활의 나침반>으로 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정 박사님의 정중하면서도 따뜻한 정이 배어나는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특히 저의 장모님을 위한 정 박사님의 <만수무강 기원 시>는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장모님도 불심이 깊으셨습니다. 가까운 절[정혜사]에 가셔서 기원 드리시고 자손들의 건강과 행운을 비는 연등도 다셨습니다. 정 박사님이 만수무강을 위한 기도를 해 주시고, 3배 올려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 호랑이 장모님 꽃상여 타시던 날
【장례를 마치고】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장모님을 떠나 보내드려야 했습니다. 칠갑산 아래 깊고 깊은 길지吉地에 장모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코로나 역병 공포는 기본적인 문상과 상례喪禮의 예도 허락하지 않았으나, 따뜻한 인정과 각별히 정성을 담아 보내주신 조의弔意 덕분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모든 장례 절차는 전통 유교 방식으로 정중하게 모셨습니다. 꽃상여로 마지막 가시는 길 편안하게 모시는데도 효를 다하지 못한 자손들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습니다. 97세 천수天壽를 다하셨으니 장례가 축제가 돼야 한다는 위로의 말씀을 주시는 분들도 많았으나 자손들은 생시에 더 잘 모시지 못한 안타까움과 죄송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고마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가내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2020년 12월 23일 윤승원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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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훈[문학평론가, 소설가, 대전문총 명예회장] 2020.12.25. 01:52
윤 수필가님,
아! 대단한 수필로서의 대장정입니다.
주제가 분명히 담겨 있고 게다가 스토리가 확실한 수필문학의 진수입니다.
시차를 두고 따로 쓴 수필작품인데 그 작품들을 한 꿰미에 끼워 서사성이 느껴집니다.
윤 수필가님,
참으로 오랜만에 수필작품을 통해서 아니,
인간 삶에서 진실이 느껴지는 감동을 가슴에 안아봅니다.
장모님을 소재로 한 수필작품이 이렇게 문학성 높은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요?
범접하기 어려운 작업을 하셨고, 그 작업이 독자에게 의미를 느끼게 하는군요.
수필의 진미를 보여 주시는군요.
윤 수필가님.
평소에도 윤승원을 수필가로서 좋아하고 존경해왔는데
이번 올려주신 글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머리를 끄덕여 봅니다.
윤승원 수필의 진미를 느껴봅니다.
같은 동향인으로서 평소에도 가까이 하고 싶었는데
자랑스러움을 넘어 가슴 벅참을 느낍니다.
[계속]
윤 수필가님,
앞으로 더욱 정진하시고, 활약하시어 이번처럼 효를 실행하는
후손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의 그 경계를 다시 넘으면서
마지막에는 수필문학의 꽃을 활짝 피우시는 수필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니 꼭 그렇게 되시기를 빌어봅니다.
끝으로 늦게나마 윤 수필가 장모님의 명복을 빕니다. [김영훈]
▲{답} 윤승원 12.25. 04:16
김영훈 회장님의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평소 작품으로 감동받고, 인품으로 존경해 왔던 김 회장님께서 저의 졸고 수필을
따뜻하게 평가해 주시니, 이 또한 저의 능력이 아닙니다. 장모님 덕분입니다.
장모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만분지일이나마 글로 옮긴 보람을 느낍니다.
문학박사이자 문학평론가이시며 중앙 문단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오르신 작가로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계신 분이 김 회장님입니다. 오늘 제게 주신 댓글 옥고는
문단에서 그간 보았던 수많은 작품평 중에 극찬 명문입니다.
허전하고 슬픈 마음 가누기 어려웠는데 김 회장님의 깊은 정이 담긴 위로와
과찬의 작품 평가를 듣고 큰 위안을 삼습니다.
가족 소통방에도 올려 온 가족과 함께 김 회장님 귀한 댓글 옥고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2.25. 새벽에 윤승원 큰절 올림]
윤선생 장모님 마지막 길 모시느냐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간 읽어온 내용입니다만 가신 후에 엮어 놓으시니 한편의 인생 역정에 대한 드라마 같아서
앞으로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좋은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부고를 전화 카톡으로 받던 날 밤 11시 50분경이었습니다. 지난 밤에 꿈이 이상해서 장모님과
동갑이신 저의 숙모님의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해서 하루를 조마조마 기다렸습니다. 저의 숙모님이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가 퇴원하셨거든요.
어떻든 가신 장모님의 영혼이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셨을 것으로 생각하며 거듭 명목을 빕니다. 피곤하실 터인데 이처럼 정리를 해주심에 경의와 찬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력은 물론, 聰氣도 좋으셔서 100세를 넘기실 줄 알았는데 낙상을 하신 이후로 큰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선영으로 모시던 날, 그곳 동네 분들은 단결이 잘 되어서 꽃상여 메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코로나 공포 시대라고 해도
모두 내 일처럼 팔 겉어 붙이고 정성스럽게 山일을 도와주시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언론사 기자인 둘째 아들이
동영상을 찍어 놨는데, 한 편의 영화 장면 같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꽃상여를 타고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 시대 마지막 전통 장례 풍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정 박사님의 따뜻한 위로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큰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상여로 모셨다니 참으로 훈훈한 마을 인심을 확인했습니다. 시골 사람들의 연세도 젊은이들이 아닐 터인데요. 날씨가 따뜻한 것이 천행이었습니다. 앞으로 영화로 만드어질 것을 기대하고 이루어질 것으로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낙지리 동네 인심과 단결력도 좋고, 모든 장례를 주관한 미당장례식장 사장도 장평초등학교 후배인데, 참으로 훌륭한 전문 장례기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산 아래 천막에서 葬事전문가인 그와 소주 한 잔 마시며 많은 얘기 주고받았습니다. 스토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언젠가 그의 얘기를 글로 쓰고 싶습니다. 거의가 초등학교 선후배로서 제가 아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등잔, 짚신, 냇가, 빨래터, 우물터, 전통놀이, 소 등타기, 화로, 곰방대, 유교문화, 인의예지신, 인간의 도리, 혼례 및 장례문화, 꽃상여 등 청양(장평)의 스토리는 희노애락과 감동이 넘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분은 부모님 상여 메어 주시는 분, 내 일처럼 슬퍼해 주시고 따뜻한 조의 표해 주시는 분입니다. 평생 은혜 잊지 못하는 고마운 분들입니다.
윤선생님의 장모님께서 서거하셨다니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예로부터 처부모나 친부모나 다 같은 부모라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고인께서는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없이 홀로 계시는 시간이 많았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러니 따님이나 사위나 인척들의 관심이 더욱 많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정은 모르오나 코로나19의 위협 아래에서도 애도의 뜻을 살려서
장례를 무사히 마치신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도의 뜻을 올리는 바입니다. 2021.01.10 지교헌
지 교수님의 따뜻한 위로의 말씀 들으니 사위인 저보다도 저 깊은 칠갑산 아래 잠드신 장모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만 같습니다. 생시에도 사위가 훌륭한 학자님과 친분을 갖고 좋은 글 나누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시고 흐뭇하게 여기셨습니다. 지 교수님 정중하신 조문에 큰절로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