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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에스겔 2: 5-7
말씀: 듣든지 아니듣든지
일시 : 2014. 5. 4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하나님은 에스겔을 불렀다.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을 들은 에스겔은 백성들보다 한발 앞서 있는 사람이었다. 백성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러한 사람을 선지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이기에 선견자라고도 한다. 성경에 보면 이사야나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 요나 나훔 요엘 하박국... 등등 많은 선지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눈이 되어 알려주며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감각하도록 일깨워주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중요한 역할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4절을 보라.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고 한다. 선지자들은 가만히 있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II. 지금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한다.
그런데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쉬운 일인가? 아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듣는 자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패역한 족속”(a rebellious house/ ein Haus des Widerspruchs)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들이다. 4절을 보면,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이다. 듣고도 못 들은 척 할 사람들이고 보아도 못 본 척 할 사람들이다. 또한 진리가 뭔지 알고도 모른 척 할 사람들이다. 알게 되면 피곤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을 것이기에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죄성으로 인해서 고집이 얼마나 센가? 아이들을 패역했다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이겠지만, 어릴 때부터 하는 것을 보면 늘 아담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안다. 배반의 피요 죄성을 가진 피다. 아이들을 키워보니 그들은 나인(Nein)이나 알레스 마이너(Alles meiner)를 가장 먼저 배운다. 그 조그마한 마음에 뭐가 들었는지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을 하고 그렇게 끌어들이려고 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말 안듣는 백성을 찔레와 가시 그리고 전갈로 표현하고 있다. 에스겔은 그러한 백성들을 생각할 때 두려워했고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백성들은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선지자를 환영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결정한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그물을 가지고 검열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의 생각에 맞는 것, 자기가 듣고 싶은 것,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고르고 선택한다. 진리에 의해 교정을 받고 자기를 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구만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아이들이 종종 “엄마가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 “아빠가 해 줄 수 있다고 했잖아” 라는 식의 말을 한다. 그러면 “그렇게 순종을 잘했어요?” “그렇게 약속을 철저히 잘 지키는 사람이야”라고 놀린다. 진정 엄마나 아빠가 하라고 해서일까? 그렇게 순종을 잘했는가? 아니다. 핑계를 대는 것이다. 엄마가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결과가 이게 뭐야라고 하면서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라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아빠가 해 줄수 있다고 했으니 졸라대면서 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약속을 지키자는 아름다운 마음이 아니라, 자기 맘에 맞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저는 종종 나선다. “그래? 그러면 다시 말하지!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라고 한다. 그러면 곧바로 도전이 들어온다. 안 된다는 것이다. “이래라”고 할 때는 꽤나 순종하는 것 같지만, 그러면 “저래라”고 할 때도 순종해야 되지 않는가? 자신이 편한대로 고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비의 모습으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비록 그들이 패역하고 말을 안듣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설주의 페북을 보았다. 장목사님과 대화이다. “방구했냐?” “네 목사님 드디어 방 구했어요!” “추카한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미국에 계세요?” “그래” “선물 사다 주세요. 아 장난이에요” “남자친구사다줄까?” “그러시려면 아빠라는 Zoll에 통과한번 시키셔야 할 것 같은데요^^” 설주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빠는 함부로 허락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지금 관심을 갖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에스겔이지 말씀을 듣는 백성이 아니다. 7절을 보라. “...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너는 백성의 반응에 신경쓰지 말고 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전하는 자는 미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들을 거야 안들을 거야. 통할거야 안통할거야. 시나리오를 너무 많이 만든다. 그러나 아무런 유익이 없는 시나리오가 된다. 시나리오가 확 바뀌는 것을 아는가? 어려울 줄 알았던 상대가 의외로 쉽고 쉬울 줄 알았던 상대가 얼마나 어려운지 삶에서 경험하지 않는가!
전하는 자는 전하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듣는 자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자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에스겔은 전해야 하는 말이 있기에 듣는 자의 호불호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해야 하는 것은 해야 하고 전해야 하는 것은 전해야하는 것이다. 말하는 자는 듣는 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자를 따라서 가야 하는 것이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가야 한다. 듣는 것은 백성들의 소관이지만 전하는 것은 에스겔의 소관이다. 내 속에 진리가 있는가? 전해져야만 하는 메시지가 있는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것은 전달 되어야 한다.
III. 그 언젠가를 위해서 선지자를 두라
말해도 안듣고 흔들어 깨워도 깨닫지 못한다는데 회의가 있다. 그러나 말이 안 통한다고 말을 안할 것인가? 깨닫게 될 바로 그 “언젠가”를 위해서 진리는 이미 선포되어 있어야 한다. 5절 후반부의 말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는 그들이 지금 당장 진리에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감지하라는 것이다. 특히 문법적인 표현으로는 완료형이 쓰이고 있다. “A Prophet has been among them." 그 말은 없던 선지자가 지금 막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와 그가 전한 진리의 말씀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는 사실이다.
거짓이 만연해 보여도 그 속에 이미 진리가 있다. 삶속에 수많은 변칙과 왜곡이 많아도 알고 보니 있을 원칙이 다 있다는 것이다. 법이 없는 것 같아도 다 있다. 자녀가 편식하고 야채를 안먹어도 야채는 더 많이 준비해 두어야 한다. 균형있는 영양을 위해서 어떻게든지 먹여야 하기 때문이다. 싹이 나지를 않는다고 해도 코스모스씨는 지난 가을부터 땅에 있어야 한다. 때가 되면 싹이 나는 것이다. 세월호의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구명정과 구명조끼는 잘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불법이 난무한다고 해도 법은 여전히 그곳에 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비록 듣지 않는다고 해도 선지자가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독일어 표현처럼 Ich bin immer da 해야 한다. 즉 늘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거짓말이 많아도 진리는 그곳에 있어야 한다. 듣지 않는다고 해도 말씀은 여전히 선포되어야 한다.
세월호의 이야기는 여전히 화두가 된다. 사고가 나지 않았으면 몰랐겠지만 사고가 나 보니 있을 것은 다 있었고 그것만 잘 지켰더라도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부는 국가안전처를 만들고 관련 법령을 정비키로 하는 등의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기존의 법령만 제대로 집행됐더라도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 법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관리청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침몰 순간만 해도 이준석 선장이 선원법 가운데 위험 해역에선 직접 지휘해야 한다는 제9조, 여객 승선부터 하선까지 선박을 떠나선 안된다는 제10조,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인명 구조에 필요한 조치를 다해야 한다는 제11조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지켰다면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법이 없었으면 아무도 처벌도 못할 것이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선지자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짓에 머무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진리를 이야기할 때이다. 어둠에 머무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빛일 것이다. 어둠에는 모든 것이 숨기워졌는데 빛이 비추게 되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것이기에 진리의 빛을 거부할 것이다. 거짓선지자는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에 장단을 맞추어줄 것이다. 파멸을 해도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진 선지자는 그들의 입맛에 맞출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비의 심정으로 하는 것이다.
끝까지 배꼽인사 시킨다. 어릴 때도 부모님 친구들이 오시면 우리에게 인사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했다고 해도 다시 인사를 시킨다. 얼마나 싫던지... 그러나 지금 보면 인사 잘 하는 친구들을 보면 참 좋다. 이래서 인사를 시키는구나. 끝까지 공부를 시킨다. 끝까지 살을 빼게 한다. 너가 그렇게 듣기 싫으면 말 안하지라고 각오하고 또 각오해도 다시 허물어지고 잔소리를 한다. 그러나 소망을 갖는 것은 오늘 말씀이다.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선포를 해 두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안들어도 말을 해 놓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환영을 못 받고 거절할지라도 진실을 말해 놓는 것이다.
때가 있다. 언젠가 알아듣고 아하라고 감탄이나 탄식할 때가 있다. 바로 이 때를 위해서 준비되고 선포되고 언급되어야 한다.
“어디서 본 것은 있어가지고... 보고 들은게 무서워”라는 말을 종종한다. 보여주고 들려주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력을 발휘할 때가 있다. 지금 당장은 에스겔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 선지자의 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냥 지났는데 지금 필요하니 들은 게 있고 본 게 있어서 기억을 더듬어 나가는 것이다.
이곳에서 김치를 만들어 보았는가? 한번도 안하다가 어떻게 했더라하면서 기억을 더듬는다. 불고기는 어떻게 재더라? 비빔밥에는 뭐를 넣더라? 족발은 어떻게 해야 하지? 잡채는 어떻게 만들고 된장국은 어떻게 끓이지? 무엇이든지... 어찌 그렇게 시도해 볼 수 있는가? 들은 게 있고 본 게 있어서이다. 물어도 본게 있고 들은 게 있어야 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국적에도 없는 이상한 비빔밥이 나오기도 하고 현지화된 김치도 나오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 맛이 아닌데”라고 하면서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묻지 않는가? 어디서 먹어본 맛이 있기에 그 원래의 맛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먹어보지 않는 사람은 으레 그런지 안다. 광주에서 시관계자들이 와서 시청에의 초대를 받아 갔을 때 독일 사람이 김치를 준비해 왔다. 역시 이상한 김치이다. 하지만 우리 한국사람들은 먹어본 게 있고 만드는 것을 본 게 있어서 기본실력이 있는 것이다.
IV. 오늘날 사회는 진리가 없고 거짓만 있는 시대와 같다. 사실은 없어지고 수많은 해석과 자신들의 이해관계속에서 말이 무성한 사회와 같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 믿음의 사람 그리스도인들은 선지자 역할을 해야 한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에 그냥 맞출 수는 없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져야 할 말은 전해져야 한다. 교회 안에서도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 권목사가 갖는 부담이 늘 그러하다. 맘 아픈 소리 듣기 거북한 소리, 마음에 부담이 있는 소리... 이런 감정적인 데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꼭 전해져야 하는 말씀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다. 아이들은 이제 자라나고 잘 양육되어야 한다. 그들보다 앞선 어른들과 가정의 부모들이 선지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6).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함께 나누어야 한다. 성장하면서 언젠가 들었던 그 선지자의 음성이 내 가슴속에 박힐 때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