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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인 전 백골부대장(육군 전 보병3사단장) "군인답지 못한 장군 많다" 일갈 1973년 북한의 기습사격에 대응해 포사격 명령을 내려 북한군 약30명을 사망하게 한 박정인(88.육사 6기)전 3사단장이 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박 장군은 백골부대장이던 1973년 3월 7일 북한군이 비무장 지대 표지판 보수 작업 중이던 부대원들에게 기습 사격을 하자 즉각 전 진지를 향한 포격을 지시했다. 훗날 귀순한 북한군은 당시 포탄이 명중해 약 30명이 사망했다 고 말했다. "3.7완전 작전"으로 알려진 이 보복 공격은 국군이 북한군의 DMZ도발로 피로 응징한 마지막 사례로 알려져 있다. 박 장군은 회고록 "풍운의 별"에서 당시 북한군이 한 발도 대응 포격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며 "북한 공산당은 약한 자에게는 강하지만 강한 자에겐 더 없이 약하다"고 밝혔다. 박 사단장은 그러나 그해 4월 상부의 허락 없이 임의로 대응 사격을 했다느 이유로 보직(사단장)에서 해임 됐으며 5개월 뒤 전역했다. 그는 3사단장 이임사에서 "북진(北進)통일의 성업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단장을 떠나게 돼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박 장군은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직후 인터뷰에서"군 지휘부는 상부 눈치만 볼 게 아니라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교전 상황 때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 며 요즘엔 군인답지 못한 장군이 너무 많다"고 일갈했다. 박 장군은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으로 1946년 함흥 반공학생 사건에 연류돼 김일성 전권에 수배당하자 월남했다. 전역 후 군사편찬위원장을 역임했다. 외아들 홍건(63 육사 31기) 예비역 대령, 큰 손자 선욱(31 육사 64기)대위 등 3대(代)가 육사 가족이다. 박 대위의 쌍동이 남동생도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아들과 손자는 박 장군에게 인사할 때 거수경례를 하고 "백골!"이라고 외혔다고 한다. 흥건씨는 "만주까지 통일하자는 아버님 말씀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고 했다. 2016.2.5 모 일간지에 기사
◆박정인 장군‥1973년 북한 총격도발에 야포로 대응‥북한군 진지 '불바다' 1973년 3월 갑작스러운 총성이 강원도 철원지역 비무장지대(DMZ)의 적막을 깨뜨렸다. 북한군 559GP(경계초소)에서 DMZ 표지판 보수작업을 하던 남측 3사단 백골부대 소속 병사를 향해 기습사격을 가하며 도발해 온 것이다. 이 총격으로 백골부대 병사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북한의 기습 도발 사실은 즉각 백골부대 사단장이던 박정인 장군에게 보고됐다. 박 장군은 북측에 사격 중지를 요청하는 한편, 군에 대응사격 준비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북한은 남측의 사격 중지 경고에도 총격을 멈추지 않았다. 박정인 장군은 즉각 휘하 사단 포병대대에 대응사격을 지시했고 105mm와 155mm 견인포가 적 진지를 향해 일제히 포탄을 쏟아 부었다. 북측의 기습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병사 구출을 위해 인근에 연막탄을 발사하자, 사방에 화염이 치솟았고 곳곳에 매설된 지뢰가 불을 뿜으며 폭발했다. DMZ 인근에 있던 적군은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북한 김일성은 우리 군의 대응포격을 대대적인 반격작전이라 판단하고 전군에 준전시상태를 지시했다. 일주일 뒤 귀순한 북한군 장교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 30여명이 우리 군의 대응 사격으로 죽었다. 북한의 기습도발에 맞서 적 타격 원점을 초토화한 박정인 장군의 응징은, 이후 영웅담이 됐다. 2012년 10월7일, 육군 12사단 37연대 1대대를 '박정인 대대'로 명명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 대북 응징 포격으로 우리 군은 북한군에 대한 자신감을 얻고 그야말로 사기충천했다. 정전 상태를 감시하던 유엔군사령관은 "이번 사건은 북한 측의 휴전협정 위반으로 발생한 일이고, 부상병 구출을 위해 자위적인 작전을 전개했을 뿐 전투할 의사는 없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 박정인 장군의 대응이 정당했음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6.25전쟁 이후 우리 군이 북한을 향해 야포 사격을 가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박 장군은 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만에 군복을 벗었다. 상부의 허락 없이 임의로 대응사격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1973년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박정인 사단장을 "다른 곳으로 전출보낸다"며 사실상 해임했다. 기자는 백골사단의 전설이 된 박정인 장군에게 당시 상황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직접 듣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었다. 현재 박 장군은 강동보훈병원에서 투병 중이다.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긴 시간 대화를 하는 것은 어려웠다. 대신 박정인 장군이 2년 전 TV에 출연해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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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에야 기사화 됐지만, 저 공격이 있던 당시에는 기사화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73년 당시에는 우리의 군사력이 북한 보다도 열세의 상태였지만,
그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최전방 사단장에 기지로 북한군을 혼낸 자랑스런 행위였다.
몇 년 전에 연평도 피격은 대통령이 오히려 공격을 하라고 군 수뇌부에 지시했지만,
오히려 군 지휘부가 유엔과의 협약이니 전쟁이 난다느니 하며,
뒤로 빼는 어리석은 행위를 국민들은 알고 있습니다.
편안한 명절 휴가 보내시기 바랍니다. 맹호
참 안타까운 소식이군요하면 무슨둑음이라그리던디...
ㅇ
잠시 글읽고 있으니...
군에서
저두,,,시골집 살때
국군아저씨 한겨울에 산등선에서 훈련받다가
참변당하는일이 발생해서
저희집에서 하루인가.. 모셔두고
국군병원 이송하기도 했어요
@사과향기. 어이 고, 그런 사고가 있었군요
60만 대군 이다보니
안전사고를 비롯해
알려지지 않는, 알릴 수 없는 사고가 많지요
현장에 있으면 안타가운 부분입니다.
저가 복무 할 때도 다섯 명이나....으ㅡ
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