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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4월12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청주] 먼저 감사하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신부
† 독서 : 사도 5, 34 - 42
† 복음 : 요한 6, 1 - 15
★ 사울(바오로)의 스승이기도 한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 최고
의회에서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대해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사도들의 활동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제1독서).
★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 계신 예수님께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군중을 먹이시려고 하자,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아이’가 가진 음식이 안드레아의 눈에 뜨였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를 가진 사람이 어디 아이
하나뿐이었을까요? 더구나 아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호수
건너편까지 오면서 먹을 것을 그만큼 챙겼다면, 어른들은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어른들은 예수님께 자기의 것을 봉헌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는 도저히 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도 제대로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것만이 예수님께 봉헌되었습니다. 계산도 빠르고 앞가림도
잘하는 어른들이 자기의 것을 숨겨 두고 있을 때, 아이의 것은
예수님께 봉헌되어 가치 있게 쓰였습니다. 아이는 계산도 하지
않은 채 예수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것을 바쳤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보잘것없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그분의 힘을 믿고
기쁘게 봉헌한다면 참으로 가치 있게 쓰일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먼저 감사하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4월12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 6,1-15
먼저 감사하라.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
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한 걱정을 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으니 주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 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적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똥은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됩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려지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 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의 작은 긍정이 기적의 씨앗이 된다
2013년 다해 4월12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복음 : 요한 6,1-15
< 나의 작은 긍정이 기적의 씨앗이 된다 >
우리가 잘 아는 인도 켈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그
곳에 큰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보육원 건축기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데레사 수녀님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준비된 기금은 3실링뿐입니다.”
그러면서 테레사 수녀님은 책상 위에 실제로 동전 세 닢을
꺼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웃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표정과 말은 진지했습니다.
“이 3실링과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실링이 하느님의 것이 될 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녀는 3실링으로 고아원과 병원 등을 전 세계에
수백 개를 지었습니다.
켈커타의 사랑의 선교회 모원에 사는 300여명의 수련 수녀들이
음식이 없어 모두 굶게 생긴 일이 있었습니다. 주방 담당 수녀는
마더 데레사에게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더
데레사가 몇몇의 후원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
중이었으며 그 어린 수녀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매가 이번 주 주방 담당인가요? 그렇다면 경당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먹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세요. 그 문제는 해결됐군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그리고 십 분 후 현관 초인종이 울렸고, 처음 보는 어떤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마더 데레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을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공립학교 교사들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수업이 취소되어서 7,000개의 점심
도시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도시락을 처리하게
도와주시겠습니까?”
긍정적인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은 그 곳에 기적으로 보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정적인 것을 더 잘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선생님이 흰 종이 가운데 매직으로 점을 찍으시더니
무엇이 보이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점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검은 점은 이렇게 조그맣고 흰 바탕은 이렇게 넓은데 왜 검은
점만 볼까? 항상 살아가면서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다른 복음에서처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시지도
않고 그저 어디서 살 수 있는지만 물어보십니다. 그럼에도
필립보는 돈 걱정부터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안드레아도 물론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말하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을 봅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제 됐다!’라고 느끼셨는지, 기적을 행하실 결심을
하시고 사람들을 자리 잡고 앉게 합니다. 왜냐하면 기적을
위한 재료가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재료란 바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지만, 실제로는 안드레아의 아주
작은 긍정이었던 것입니다. 안드레아가 완전히 부정적이었다면
빵과 물고기가 조금 있다는 것을 굳이 이야기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의 아주 작은 긍정을 보시고
큰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에 동양의 어떤 임금이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그 꿈은
자기의 치아가 하나하나 다 빠져버리는 꿈이었습니다. 왕은
나라에서 유명한 해몽자를 불러다 꿈을 해석하게 하였습니다.
해몽자는 꿈을 풀어 해석하기를 임금님의 친척들이 한 사람씩
죽어서 맨 나중에는 임금님만 남게 된다고 해몽을 했습니다.
기분이 언짢은 임금은 그 해몽자를 죽여 버렸습니다.
임금은 계속해서 다른 해몽자를 구해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해몽자가 임금에게 불려왔는데 그는 임금님의 꿈
얘기를 들은 후에 다음과 같이 해석을 내렸습니다.
“임금께서는 집안의 모든 친척들보다도 가장 장수를 해서
오래 오래 사신다는 꿈입니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그 해몽자에게 많은 상금을 내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지으면 부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어두운 면이 많아지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어두운 면이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둠이나 부정적인 면이 많을수록
부정적인 면이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일수록 밝은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는 그런
긍정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 복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빵 산’
2013년 다해 4월12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빵 산’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분께서 건네시는
말씀은 얼마나 명쾌하고 또 감미롭던지 암울했던 백성들의
삶을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앓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 일행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려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으로부터 치유를 받으려고, 그분께
조언을 구하려고...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갈릴래아 호숫가를 따라 걷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 뒤로 셀 수도 없이 많은 군중들이 따라 걷습니다.
말씀을 선포하기 좋은 적당한 장소에 도달하면 군중들을
편안하게 자리에 앉힙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잘 볼 수 있는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서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살아있고 재미있던지 사람들은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제자 필립보를 향해 조금은 생뚱맞은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저 사람들’이란, 열 명 스무 명, 백 명 이백 명이 아닙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많은 수의 군중입니다. 요즘 연패의 늪에
빠져있는 한화 이글스 대전 야구장을 꽉 채웠을 때의 관중
수정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설마 진담으로 그러는 것을 아니겠지, 생각했던
필립보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강하게 고개를 젓습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이라고 했는데, 데나리온은 예수님
시대 당시 통용되던 은화였습니다. 이것을 당시 가치로
따지자면 로마제국 군대 군인들의 하루 복무비 정도, 아니면
팔레스타인 지역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5만 원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200 데나리온 어치 빵은 천만 원 어치 빵인 것입니다.
옆에 있던 다른 제자 안드레아는 더욱 비관적인 어조로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안에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흔듭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전개됩니까? 예수님께서는 한 아이의
손때 묻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초로 엄청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기적을 통해 제자들이 얻게 된 빵의 양,
생각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천만 원 어치 빵입니다. 트럭으로
몇 트럭이 될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빵 산’ 앞에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이 나서
나누어주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으로 깜짝 이벤트가 꾸며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굶주렸던 백성들은 원 없이 빵과 물고기로 배를
채웠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은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하십니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그래서 제자들이 남은 조각들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열둘이란 숫자는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이지요. 그
완전함이 또 다른 완전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미지는 풍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곳,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상처도 죄도 없는 곳, 그저 하느님
사랑과 인간의 행복만으로 충만히 채워지는 곳...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곧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곳,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배를 채우는 곳,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되는 곳...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조용히 산으로 피하신 예수님
자기 나라가 세상에서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욕심, 참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 욕심을 독재자가 갖게 되면서 생긴 과거의
전쟁사들이 아닌가요? 눈앞에 있는 북한이 지금 그런 행동을
하는 걸 보면 알고도 남지요.
백성도 그래요. 배불리 먹고 살게 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
합니다. 권력자의 욕심과 백성의 욕심이 부딪치면 폭동이
일어나는 거 맞고요. 백성 욕심 앞에서 조용히 산으로 피하신
예수님, 깊은 느낌을 주네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요한 6,15)”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부활 제2주간 금요일
2013년 다해 4월12일
지난 부활절에 의정부 교구의 사제 한분이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신부님은 8년 동안 연천 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면서 ‘국화축제’를 매년 준비하셨습니다. 아름다운
국화축제는 연천지역의 문화행사로 자리를 잡았고, 많은
분들이 신부님께서 정성스럽게 가꾼 국화를 보려고 연천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의 또 다른 이름은 ‘국화꽃
사제’였습니다. 저는 작년에 있었던 국화꽃 축제를 보았습니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꽃을 가꾸는 일, 행사를 준비하는 일,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김수환 추기경님, 정진석 추기경님을 가까이에서
모셨습니다. 한국교회의 어르신들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닙니다. 매일 긴장해야 하고, 잘못하면 건방지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부님께서는 언제나 든든한
소나무처럼 두 분 어르신들이 편안 하실 수 있도록 늘 곁에서
모셨습니다. 어르신들이 편하실 수 있었던 것은 신부님께서
그만큼 순수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너무나 젊은 나이에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이 함께 하시어,
신부님의 영혼이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지난번 성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청년이 아버지를 위해서
‘병자성사’를 청하였습니다. 병자성사를 청하면 보통은 총구역장,
해당 구역장, 반장과 함께 갑니다. 총구역장에게 연락을 하고,
시간을 정했습니다. 병자성사를 청한 청년이 전화를 했습니다.
시간을 바꾸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연락을 했습니다.
병자성사 시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바뀌었기
때문에 내일 해야 할 일들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또
전화를 하였습니다. 복잡한 일이 생겨서 병자성사는 다음에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도 화가 났습니다. 또다시
총구역장님께 전화를 드려야하고, 일정을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겨우 두 번 전화를 했는데, 저는 참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저를 참아 주셨습니다.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화를 내시지
않으셨고, 저를 기다려주셨습니다. 고작 두 번 바뀐 것을
가지고, 저는 화를 내고야 말았습니다.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을 이해하고, 다음에 할 수 있도록 하자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혔어도, 매를 맞았어도, 멸시와 조롱을
받았어도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런 멸시와 조롱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커다란 능력이 있었음에도 미련
없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뿌리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권위는 있었지만 권위적이지 않았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힘은 있었지만 그 힘을 언제나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주님, 아드님의 십자가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주님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 주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
광에 이르게 하소서.”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기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2013년 다해 4월12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요한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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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오늘 복음으로 선정된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마태오, 마르코, 루카도 같은 내용을 대동소이하게
전하고 있다. 즉, 4복음 모두가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이 복음 내용이 전하는 메시지는 엄청나다.
그에 대한 생각은 지난 1월8일(화)에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르코 복음(6,30-44)때 나누었다.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표징들을 보았기에 모였다 한다.
성서에서 나오는 표징(Sign)이라는 말은 보통 이적(異蹟)
혹은 기적(奇績)이라는 말로 이해된다. 즉, 사람들은 상식을
벗어난 기이하고 놀라운 일들을 보고 예수님께 모였고 그분을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다.
오늘은 무엇이 상식을 벗어나고 기이하고 놀라운 일들인가에
대해 묵상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말하는 기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시각을 바꾸었으면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 만나는 모든 것들 중 기적이 아닌 것이
있을까? 우리는 생명이 수태되는 순간부터 삶을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 자신부터 기적임을 의식해야 한다. 우리는 기적 안에서
살고 있고, 모든 것이 기적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다만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신비로움이 상식과 평범으로 여겨지며
놀라워하지 않을 뿐이다.
들숨과 날숨, 뜨거운 눈물, 뛰는 심장과 멈추어진 심장,
생각한다는 것, 관계라는 이름 안에 있는 모든 만남과 헤어짐,
오선지 안에 그려지는 무한 수의 음악,
혈관을 돌고 있는 피, 그 피를 구성하고 있는 백혈구와 적혈구,
들에 핀 수많은 종류의 꽃, 가지가지의 나무, 그리고 우주.
이름 지어진 모든 것들에서 알지 못하는 그 어떤 것들조차
기적이 아닌 것은 없다.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심지어는 미워하는 것조차도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시각이 ‘태양인 형님과 누님인
달’을 노래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좀 더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신앙적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존재가치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새로운 마음으로 모든 이들, 모든 사물들, 모든 시간, 모든
공간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는 우리이기를 희망한다.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표징을
보여주실 것을 확신한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나눔만이 미래를 위한 우리의 마지막 대안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이들이 먹고도 남았다. 우리는 이를 기적이라고
한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요술방망이를 두들겨서 양을 불리는 것을 기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참된 기적은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제자들 눈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 많은 군중이 그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을
삼삼오오 짝지어 자리 잡게 한다. 그리고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보따리에 싸온 것, 주머니에 있는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내놓으라
한다. 조금 모자라는 무리가 있으면 여유 있는 무리에게 나누어
주라 말씀하신다. 슬슬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그 말씀대로 따라
한다. 그랬더니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았다.
사람들이 마음을 연 것이 기적이다. ‘설마!’라는 의심을 버린 것이
기적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별것 아니라 부끄럽지만 하며
내놓은 마음이 기적이다. 없어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눈을
돌리고 손을 내민 것이 기적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최고의 기적은 물 위를 걷거나, 죽은
이를 살리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 김대열 신부(일본 사이타마교구 오따천주교회) -
◈ [기타] <내맡긴영혼은>'거룩함'만이 모든 것의 잣대
- 이해욱신부
"거룩함"만이 모든 것의 잣대입니다!
우리는 가끔,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옥신각신합니다.
특히, 하느님을 믿는 이들 안에서 그러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에 그 판단의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세상의 지식이나
상식"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거룩함"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일어난 모든 일에 있어서
"거룩함"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세상의 상식"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그저 상식적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그러면 "거룩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거룩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테살 4,3) 거룩함이란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사는 것"일 뿐 다른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뜻에는 "명시(밝을明,보일示) 의지"와
"임의(맡길任,뜻意) 의지"가 있습니다.
"명시(분명하게 가르침, 밝힘)의지"란 성경이나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의 오랜 역사를 통해 이미 밝게 드러난 하느님의 가르침을
말하며, 여기에는 십계명, 교회법 등이 있습니다.
"임의(자기 뜻대로 하는 일)의지"란 말 그대로, 하느님께
맡겨진 하느님의 의지를 말하며, 임의의지를 더 쉽게 표현하면
"엿장사 맘대로, 하느님 맘대로"입니다.
엿장사가 엿을 어디서 끊어줄지 손님은 엿장사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우리는 하느님 마음(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란,
하느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임의의지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善)"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절대로 "악(惡)"하지 않고 "선(善)"합니다.
그 선함이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하느님의 가르침, 하느님의 법, 하느님의 규범,
교회의 법을 잘 지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가르침은 사람을
속박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참자유"를 줍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에 속박감을 느끼는 것은 다른 것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것이란 바로 "죄"인데 죄의 주인은
사탄 마귀입니다. 사탄 마귀에 속박된 사람은 자유를 잃게
됩니다.
사탄 마귀는 사람을 기기묘묘하게 잘도 속입니다.
자기의 뜻을 따르면(유혹)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고 말입니다. 40일 단식 후에 예수님 앞에 나타난 사탄
마귀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것"이 "참자유"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어도 주인이 따먹지 말라고 하셨기에
따먹지 않는 것이 참자유입니다. 담배를 필 수 있어도 건강에
좋지 않으니 피지 않는 것이 참자유입니다. 마약을, 도박을,
도색을 다 할 수 있어도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것을하지 않는
것이 진정 참자유입니다.
참자유를 얻은 사람은 감옥 속에서도 자유를 느낍니다.
죽음도 고통도 그 사람을 속박할 수 없습니다.
자기 생명만을 살리려고 다른 생명을 몰라라 하는 비굴한 짓을
하지 않습니다. 참자유인은 참으로 죽음 앞에 의연한 모습을
취합니다.
참자유인을 속박할 수 있는 분은 오직 단 한 분!
그를 있게끔 하시고 그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그의 주인 되시는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은 자유자재(自有自在)하신 분이시라 그분의 속박은
오히려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속박(내맡김)시킬 때,
오히려 사람은 "참자유인"이 됩니다.
참자유인이 된 사람은 사람을 진짜로 속박하는 "죄"로부터
멀어집니다. 아직 많이많이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십니다. "하느님께 내맡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부족한 그 사람들의 지혜를
열어 주시어 뛰어난 "사리분별력"을 주십니다.
거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보다
"분별력의 탁월함"입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죄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사는 사람은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인 사탄
마귀의 지혜를 넘어섭니다. 하느님께 속박(내맡김)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사람의 거룩함의 정도에 따라 분별력이
크게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분별력을 받은 이는 결코 사람을 분별하여
"차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식의 높고 낮음이나 직업의
귀천이나 재물의 있고 없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다 같은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 한 가지 분별하여 따지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의 "거룩함"
입니다.
거룩하게 사는 사람을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차별하게 됩니다.
죄와 거룩함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사탄 마귀의 조종을 받는 사람은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사탄 마귀의 지혜가 그를 그의 보잘 것 없는 지식을 잡아먹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의 우두머리, 사탄 마귀의 지혜에
그의 알량한 지식이 잡혀 먹혀 사탄 마귀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의 일어난 모든 일의 판단의
기준은 "거룩함"뿐입니다. 하느님이 보실 때, 어느 것이 더
하느님의 마음(뜻)에 드시겠는가를 따져야 합니다. 세상의
상식과 지식을 앞세우거나, 어떤 사람을 내세우거나, 과거를
들먹이지 맙시다.
하느님의 지혜가 담긴 성경 말씀을 앞세우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간 성인을 앞세우고, 지금 현재를 말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나간
과거를 들먹이지 않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엄청나게 거룩히 잘 살았어도 지금 현재
그렇지 못하면 꽝입니다. 과거에 자신이 하느님 앞에 엄청난
죄인이었어도 지금 현재 거룩히 잘 살면 끝입니다. 자신의
모든 과거를 자신의 주인이신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이미 다 용서해 주셨는데 누가 감히 하느님께서 용서한
이를 또 판단합니까?
하느님은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잠시 지나가는
현세에서 인간끼리 서로 잘 잘못을 너무 따지지 맙시다.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오직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느님처럼 과거, 현재, 미래 등의 시간이 없는
"영원"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영원을 기다리는 이들답게
과거를 묻지 말고 오직 영원을 허락받을 수 있는 조건인
"거룩함"만을 생각하며 이 세상을 지나가는 "나그네"로
살아갑시다!
나그네는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주께 내맡깁니다.
그날그날 필요한 것만을 소유합니다.
그날그날 필요한 것은 그날의 주인께서 채워주십니다.
"존재의 가벼움"을 하루하루 느끼며 이 세상에서부터 "존재의
근원"과 함께 "참존재"되어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게 삽시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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