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누구인가
나의 고향은 모로 가도 간다고 원주에서 자그마치 이 십리 시골길을 되작되작 걸어야 도달합니다. 원주에서 충주방향으로 걸어 가다보면 과수원지대인 무실이라는 동네가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행가리” 라는 마을로 접어들어 꾸불꾸불 논두렁길을 걸어가면 논 가운데 작고 구릉진 동산이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었습니다. 이 산모롱이를 지나 작은 돼니 재로 곧장 치달아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돌고 돌아서 내려가면 작은 연못이 등장하는데 물 위에 떠다니는 물벌레를 보고 학창시절에 의심을 품었었습니다.
‘엿장수벌레는 왜 물위에서 떠다닐 수 있을까!’
이곳에서 벼랑 좌측 모퉁이를 끼고 걸어가면 아담한 동네 마을이 펼쳐지는데 앞에는 곱상시리 작은 동산이 놀부처럼 넌지시 다가옵니다. 이 산이 우리 동네의 미주알고주알 안산 격입니다.
이 동산을 돌아 나오면 개울이 등장하는데 여름날 조약돌로 물탕놀이 하면 재미가 나죠. 마른 소똥을 불씨로 삼아 물고기를 잡아 구워먹기도 하고요. 징검다리를 건너면 거대한 미루나무 한 그루와 넓은 들판 그리고 친구 아버님께서 운영하셨던 칡 공장이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한 사리 두 사리 칡 사리에 용돈 좀 썼습니다. 물론 밭에 가서 마늘을 캐서 아이스깨끼하고 바꾸어 먹었습니다. 밤이 오면 복숭아 수박 서리도 하고요.
고향마을 지명은 그 옛날 어느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가다가 고향마을 길목에 멈춰 서서 눈을 지그시 감고 조촐한 동네를 눈요기하는데, 어찌나 요상했던 마을인지라 세 번 살펴보면서 뭔가 이룰 동네라 합니다. 그리하여 훗날 석 삼(三)자에 살필 성(省) 삼성이라 합니다. 뜰에는 풀들이 얼만치로 무성하였는지 몰라도 마을 사람들은 “삼새뜰”이라 하고요, “삼새”란 마을로도 전해옵니다.
산세의 기운은 오대산 적멸보궁이 있는 태백산맥 우백호 줄기가 횡성을 거쳐 치약산으로 또르르 굴러옵니다. 이 산맥의 정기는 토지 소설가 박경리님께서 살아가시던 삶의 지역인 충주방향 매지리로 흐르다가 시계방향으로 감돌아 태봉을 걸쳐 봉황이 울었다는 명봉산에 이룹니다. 여기서 산세의 기운은 머물러 있지 않고 지혜를 상징하는 북향으로 줄기를 뻗어 가는데 만종과 동화까지 갑니다. 동화는 그 옛날 황진이를 사모했던 벽계수 아시죠!?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 바로 이곳에 벽계수의 무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줄기 가운데 자락 아래 고향마을이 있는데 동북동남향으로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좌측에 서낭당과 앞에 놓인 안산들은 마을을 감고 감아서 겹겹이 쌓여 동해가 춤추듯 너울너울 아롱다롱 거립니다.
뒷산에 오르면 서울을 오가는 열차와 동화, 문막이 보이고 앞에는 치악산아래 원주시가 한눈에 보입니다.
‘기차표, 왕자표, 검정고무신이 뭐야! 남들은 색동고무신을 신고 서울 이사를 간다는데 나는 이제나 저제나 은제 서울 가보나!’ 어린 시절 소원이었습니다.
여기서 남쪽 줄기인 산 능선을 따라가면 벼랑 끝 너럭바위가 깔려있지요. 바위를 돌로 두들기면 소리가 난다하여 통통 바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남서향으로 눈을 돌리면 봉황이 울었다는 명봉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입니다. 이 산 넘어 남쪽 산기슭에는 떡 주물러 놓은 듯 아름답게 조각을 한 국보로 유명한 법천사지 석탑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석탑이 서울로 시집을 갔지요.
목수이셨던 아버지와 6. 25를 모질게 겪으셨던 어머님 품속에서 고요한 장막을 깨고 소인배가 탄생하게 되는데 어린 시절 행복한 인생이었습니다. 냉이 국, 메 뿌리 떡, 쑥떡, 송편, 흰 무리떡, 호박떡, 무떡까지 지금도 입안에서 보리알 굴러가 듯 군침이 입안에서 지그재그 뱅글뱅글 돕니다.
부모님의 재주를 타고 나 어린 시절부터 만들기와 벼름 벽에 그림그리기를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혼도 났지요. 소인배의 창작예술은 모든 것이 독학입니다. 현재까지 글, 그림, 판화, 조각, 설치, 모형 등등 부모님이 물려준 두뇌와 손재주를 믿고 창작해왔습니다.
우직한 뚝소의 강원도 소인으로서 옷 한 벌 입게 해준 부모님의 덕분에 오늘도 도전에 도전이며 현재까지도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속 인간의 마음을 모르듯 나는 누구인가 품안에 품고 살아갑니다.
우측 매리리 방향 안산 삼봉이 너울너울 춤추고
주산인 뒷산에서 바라 본 무실동과 원주가 보인다.
좌측에는 봉황새의 꼬리 봉미 그리고 봉현 배부릉산 이다.
이 아래 어머니 홀로 삼십년이 넘은 그 옛날 초가형태의 집을 지키며 살아가신다. 어머니 말씀 반만 따라가도 샌님소리 들을 정도로 구구절절한 이야기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잠자면서 어느 여름을 회상해 본다.
회사생활 강릉에서 7년의 삶 세월이 남긴 것은 시나리오다. 시나리오는 오만가지의 마음에 문이 열려야 작성이 가능하다. 시나리오 작가도 시나리오 책을 펴내지 않는다. 영월 동강 여량 아우리지에 얽힌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현장 답사를 하여 노인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실존인물로 구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덕분에 다른 영화시사회 초대로 참가하게 되었다. 소양강 처녀와 함께 두편의 시나리오가 수록이 되어 있다.
누구나 한번 쯤은 고향집을 생각 할 것이다. 어린시절에 살았던 소인배 초가삼칸 십 분지 일로 축소하여 직접 제작한 것으로 전시장이 확보되면 공개가 된다.
소인배는 종교가 없다. 그러나 작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 넘나든다. 1987년 모 방송국에 출현한 모형작으로 아버지의 재주를 물려받아 1년에 걸쳐 제작하게 되었다.
돌이돌이 삼돌이 염소똥 열 개의 신으로 구성된 만동이 판화, 은행나무 목판에 제작
훗날 선보일 예정이다.
모래 언덕 모래 사 언덕 제 사제리 도선국사가 신라 말 세 번 살핀 동네 삼성동
이번에 고향마을 모래인형의 삶 시나리오집을 출간했습니다.
짧고 굵게 살아간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펼쳐봅니다.
만달이와 수만이 어린 시절 수만이 모습입니다
어린 시절 옷 보따리 장사
어린 시절 구경하기도 하고 사먹어 본 과자봉지 보관 중입니다,.
첫댓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감사감사.
고맙습니다
오자마자 모래인형을 읽었다. 고맙다.
벌써 다 읽으셨나요?
왜 사필연과 사인형이라고 지엇는지? 특별한 이유라도?
모래 사 언덕 제 사제리 어린 시절 모래를 가지고 많이 놀았습니다. 지명과 아울러 모래에 관련 된 이미지와 물결에 의해 유실되면서 사라지는 모래 인생, 모래인형 캐릭터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필연은 주인공 사인형이 만년필과의 인연이 된 동기에서 캐릭터를 잡았습니다.
정동진에는 모래 시계가 있다면 사제리는 모래인형이 ---- 모래로 만든 인형 훗날 설치작으로도 캐릭터화 예정입니다. 늘 불안정된 인생을 살아가는 느낌을 주지요. 물결에 의해 흩어졌다가 다시 뭉치기도 하고 발자취도 남김 없이 먼 곳으로 휩쓸려가는 모래, 상상력의 이미지 인생.
모래성도 만들어 신발에 물을 떠서 그 안에 넣고 물고기와 방개를 잡아 모래성 안에 놓아두고 관찰도 해보고.. 두꺼비집도 지어보고 물길 돌리기 놀이도 하고 모래탑 쌓기 대회도 하고 에펠탑 만들기 대회도 해보고 모래로 잠자리도 잡아보고 개구리 무덤도 만들어보고 모래로 장난놀이 많이 해 본 시절이 생생합니다. 지금은 현장관찰 체험이겠지요.
아 그런 의미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