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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언[예고]
마태복음 16장 21절(막 8:31, 눅 9:22)
마태복음 16장 21절 / 21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 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인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시기 위하여 마침내 죽음을 당하실 것과 또한 제 삼일에 부활하실 것을 모두 네 번에 걸쳐 예언[예고]하십니다. 이 예언은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사역기 3년 6개월의 5차년도 중에서 제 4차년도의 전반기 사역기(예수님의 공생애 제3년 9월경)인 초막절이 다가온 때에 있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직후부터 하십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절기를 지키시고 거기서 6개월 정도 머무시면서 사역을 행하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이러한 시점에 이르러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을 비로소 시작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예언이 본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예언은 마가복음 9장 30-32절(마 17:22-23, 눅 9:43-45)이며, 세 번째 예언은 마가복음 10장 32-34절(마 20:17-19, 눅 18:31-34)이고, 마지막 네 번째 예언은 마태복음 26장 1-2절입니다. 이 네 번에 걸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예언은 각각 하시게 된 배경이 있으며, 그 내용은 좀 더 구체적이면서 강화됩니다.
첫 번째 예언(막 8:31-38, 마 16:21-28, 눅 9:22-27))
이곳에서는 네 번에 걸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예언 중에서 그 첫 번째 예언을 다룹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한 첫 번째 언급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신앙고백으로 이끌어 내시고 그들로부터 세워져 나갈 교회에 관하여 말씀하신 직후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곧 닥치게 될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선포하시고, 그들도 이 세상에서 예수께서 겪으신 것과 같은 운명에 처하실 것이기에 그들이 어떠한 정신과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제자의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심
예수께서는 베드로로부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앙을 고백으로 들으시고, 교회에 주실 권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시키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때부터 비로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거기서 무슨 일을 겪으실 것인지를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본문은 그 첫 번째 예언인데,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인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과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 예언할 때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셨습니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이 일은 무엇을 통해서 행해지는가 하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에 의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희생을 치르시는 방법으로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아 그 죄의 결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한편 예수님이 이렇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 것은 부활의 생명을 자기 백성에게 주실 것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실을 베드로에게 신앙고백하게 하는 것을 통하여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과 관련하여서 비로소 제자들에게 알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언에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동안 자신의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시는데 사역이 집중됐었다면, 이제 예수께서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이제 곧 무슨 일을 겪으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믿음은 바로 그 진리를 깨닫는데 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구주이신 것은 그들이 깨달은 바의 진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께서 베푸시는 사죄와 새생명의 은혜를 입고서 그분의 다스림 속에서 사는 교회의 실제적인 모습을 띠게 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신앙고백 직후에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된 생명을 잉태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신앙을 지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스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 둘은 장차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본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할 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자로서 사역하였습니다. 처음으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예루살렘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무리가 가룟 유다를 대신하는 열 두 사도의 수에 보충할 한 사람을 선출할 때‘예수의 부활의 증인’으로 세운다는 것이었습니다(행 1:22). 예수님께서 대속물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드려 죽음을 당하셨으나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생명의 주가 되셨다는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할 사람으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에게 죽음과 부활을 예언해 주셨으나 그 의미를 쉽게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약속의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는 기도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그들 가운데 내주하셔서 그들을 예수님이 예언해 주신 메시야 사역의 진리로 인도하시고 그 진리를 밝히 알 수 있도록 믿음의 지식과 지혜를 주심으로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하고 깨달았습니다. 성령의 강림은 제자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를 확연하게 깨닫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성령 강림 사건으로 크게 두려워하나 의혹을 품고 웅성웅성하는 무리들 앞에 나서서‘하나님의 큰 일’에 관하여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에 의해 당시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된 생명체인 예루살렘 교회로 태어났습니다(행 2장).
주님의 교회된 성도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신 것과 부활하신 것을 믿는 신앙은 그가 가진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신앙고백을 일으킵니다. 그런 그에게는 죄 사함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인 새생명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한 사람들이 함께 연합하여 주님을 생명의 주로 섬기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유기적인 생명체를 띠게 됩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또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면서 그 일이 과연 그리스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되어졌음을 믿는다면, 그 신앙은 단지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믿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가 믿는 주님과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신앙고백이 일어나며, 증거하며, 같은 생명체로 연합하여서 주님과의 유기적인 삶을 갖게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그 용어만 들어도 성경 전체를 샅샅이 흩어 알고 있듯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이해, 앎이 없이는 신앙이란 형성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교회된 생명체를 형성하는 요인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어도‘무교회주의자’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나 우리나라의 함석헌이 잘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있는 것인지요.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끝나고 말지, 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인격이 함께 연합한 그 인격체에 주님의 교회로 자신들을 세워나가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인격체를 교회의 초석으로 삼아 그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 자신이 예수님과의 믿음의 관계성 속에서 형성된 신앙인격체 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자로서 사역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과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인격자를 얻어 함께 주님의 교회가 세워져 나가는 보다 확장된 반석을 형성합니다. 여기서 온 세상에 확장되어가는‘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신앙은 그가 주님의 교회로 세워지는 일과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 있는 성도라면 그의 믿음은 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대속주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이를 신앙고백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심이 주는 가르침
무엇 때문에 주님의 교회된 성도들의 신앙에게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신앙이 강조되고 중요시 되고 있는 것인지요. 예수님은 전혀 자신과 상관없는 이방인들에게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 그것도 장로, 대제사장, 서기관으로 있는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서 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의미가 큽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약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서 많은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 어느 백성들보다도 가장 잘 예수님을 이해하고, 또 주로 섬겨야 할 것인데,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여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아 죽이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안 것은 요셉의 아들, 목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극도의 배척과 대적 행위를 보였습니다. 그런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갑니다.
그런데 같은 유대인 동족인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며,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믿음의 고백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요. 사도행전 1장 6절에서는 승천을 앞둔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질문하는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이 말은“주께서 통치하시는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실 때가 이제 온 것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질문은 이스라엘 왕국을 주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서 보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제 임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시기를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으나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40일동안 땅에 계시면서 여러 사도들에게 나타나 몸소 자신을 보이며 살아계시다는 것을 확실한 증거로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므로, 제자들은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에서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기대에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제 임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구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말하는 주님의 재림으로 있을 내세천국의 개념에서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개념으로 보는 것에서입니다. 제자들은 말이죠. 하루라도 빨리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임하여 유다[이스라엘]가 로마로부터 독립하여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될 때 자기 의를 인정해 주어서 거기에 걸맞는 좋은 자리를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은‘섬김’이 아니라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며 함께 하고 활동한 업적이요 공로에 따른 논공행상에 있는 것으며, 높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시기와 미움이며 다툼입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모친은 예수께 자신의 두 아들을 큰 아들은 예수님의 보좌 좌편에, 작은 아들은 예수님의 보좌 우편에 각각 앉게 해 달라고 구하였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실 때 자기의 두 아들을 좌의정과 우의정 자리에 각각 앉게 하여서 정승 반열에 있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다른 열 제자들은 말이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었습니다.(마 20:20-28). 제자들이 갖는 이런 생각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40일 동안 땅에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행 1:1-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서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으로 깨닫지 못하고서는 땅에 속한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그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죄인의 부패 성향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교회된 반석으로 그 초석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무슨 일을 겪으실 것인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때로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예언되기 시작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었습니다.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그대로, 곧 성경 그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후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 섬김에 있는 우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없었으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며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새생명으로 받는 부활도 없을 것이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도 헛될 것이요, 그러한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자로 있을 것입니다(고전 15:12-19).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진리이기에 우리의 믿음을 헛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자가 되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대속주로서의 죽음에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한, 그리고 우리를 대신한 대속주가 되시는 것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생명을 주는 주님이 되시는 것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자가 되셨고 생명을 다스리시는 주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설화(전설)에 의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주후 30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는 역사적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기록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예수님의 사도들을 위시하여 오백여 형제들에게 나타나셨고 사도 바울 당시에 그들 가운데는 태반이 아직도 살아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였었습니다. 그리고 말이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내 자신을 보이신 자들 중에는 심지어는 바울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며 그들의 죽음을 마땅한 것으로 여겨 앞장 서서 활동한 바울에게까지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로 세우셨습니다(고전 15:3-9).
우리가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 사함을 주시고 참생명인 영생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입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주께서 심판주로 오셔서 악인은 영벌에 처하시고, 의인은 영생에 있게 하시기 위하여 불원간에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기억에 항상 있는 것으로 결코 잊음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오늘도 주님을 경외함에 있어 그 이름을 높여 부르는 찬양이 예배하는 교회에 울려 퍼집니다. 온 성도의 입술에 맺힌“…어찌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까!”를 듣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