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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장기실 전도사 이야기(5) 황영준 도움 받던 교회가 여러 교회 섬겨드려 신앙생활로 누리는 은혜와 복도 크지만 때로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감사하는 이들이 있다.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 내 몫의 십자가를 감당했다는 기쁨과 행복감 때문일 것이다. 바울이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하였던 것처럼.
내가 오래전에 故 장기실 전도사의 이야기를 찾아 나선 것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신실하게 목회했던 한 여전도사의 이야기를 발굴해서 널리 소개하고 싶어서였다. 대둔도를 찾아가서 교인들을 만나고 또 여러 증인들을 수소문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 가운데는 증경 총회장 박요한 목사, 대둔도 수리교회 정삼섭 목사도 있었는데 두 분은 이미 고인이 되셨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승천교회가 교회설립 50주년(1959. 1. 7-2009) 기념으로 펴낸 『박사론. 장기실의 기도 전도-그 50년의 열매』에 실린 장 전도사 일기를 부분적으로 소개한다. 먹고살기도 어려웠던 섬 대둔도와 영산도에 4개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까지 건축했으니 과연 어떤 힘으로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육지에 있었던 여러 교회와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연보를 받았다. 그래서 사역은 반은 현지 사역이고 반은 교회 방문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연보자들 이름 하나하나가 그녀의 일기 수첩에 올려놓았다. 귀한 이름들을. 어찌 교인들이라고 이런 일을 몰랐으랴.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교인들 자력으로는 예배당을 세울 수 없었지만 장전도사가 기도와 눈물로 교회를 섬기니 교인들은 몸 바쳐 일했을 것 아닌가. 목회자의 수고와 교회들의 도움을 마음 깊이 새겼던 승천교회 성도들이 가두리 양식업으로 소득을 얻으면서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여 봉헌했고, 신안군만 아니라 여러 미자립 교회와 해외 선교사들을 지원한다. 지난날 사랑에 빚진 자로 마땅히 행할 일이라며 기쁨으로 섬기는 교회가 된 것이다.
그녀가 소천하기 1년 전, 복통을 앓으면서 수술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촌동생인 부산 복음병원 장기려 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장 박사는 “누님, 주님 나라 가는 것이 진짜 안식인데 무얼 더 살자고 이제 와서 그 고생을 하시렵니까? 주님을 굳게 붙드십시오.” 하였다. 장 전도사도 “아멘”하고 대답했단다. 아무래도 위암을 앓았던 것 같다고 한다. 장 전도사의 일기를 부분적으로 옮겨본다. 그의 고생 그리고 그 때 섬생활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부산에 7시 도착. 복음병원에 들어가 조반 먹고 동생 장기려 박사로부터 10만 원 헌금 얻음. 감사하다.(1975. 6. 10). 아침, 도목리 떠나 예리(흑산도)에 왔다. 스웨터 1,200. 러닝셔츠 300, 점심 300, 치약 300, 비누 80, 양파와 감자 합 1,500, 감자 7관 1,400. 백미 19,200. 보리 10,000. 오늘 밤 영산리 집회에 60명가량 나왔다. (1975. 7. 17). 부산 산정현교회에서 10만7천 원 헌금해 주심. 대단히 고맙고 감사했다. 오직 주님의 도우심이다.(1975. 9. 14) 각처 흩어졌던 교우들이 추석을 맞으려고 다 온고로 교회가 가득 차서 기뻤다.(1975. 9. 21) 주일예배를 가득히 보았다. 서울 부산에서 온 아이들 가기 전 슬레이트를 올려야 했다. 할 수 없이 일을 오후에 했다. 슬레이트를 다 올렸다.(1975. 9. 28) 오늘은 폭풍경보로 배가 못 나가서 목사님들 못 갔고 저녁에 집회했다. 오늘 바람 세게 불었으나 배가 나감으로 목사님들께서 가셨다.(1975. 12. 4, 5) 새벽에 잠언 4:7. 지혜를 얻으라. 지혜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 나를 사랑하신 사랑을 기억하고 울었다. 은혜를 주심. 저녁에 혼자 예배 보았다. 오늘 영산리 땅 140평을 4만 원에 샀다. 구원의 방주 터가 생겼습니다. (1975. 12. 30)”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장기실의 눈물 꽃은 아름다운 교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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