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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견미
임견미는 평택(平澤) 사람이며 그의 부친 임언수(林彦修)는 임견미 까닭에 갑자기 귀하게 되어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이 되었다.
임견미는 공민왕 때에 우달치(于達赤 국왕의 주위에서 근시(近侍)·숙위(宿衛)하는 업무를 담당)에 속하여 공로가 있었으므로 중랑장이 되었으며 왕이 홍두적(紅頭賊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남으로 갔을 때 임견미도 시종하였는다.
경안역(慶安驛)에 이르렀을 때 (견미가) 재추들에게 말하기를
“홍두적이 이미 서울에 들어왔으니 임진강 이북은 우리 나라의 것이 아니다. 청컨대 각 도의 병력을 징발하여 적을 토벌하자!”고 했으나 재추들이 응낙하지 않았다.
임견미가 울면서 왕에게 말하였더니 왕은
“창졸간에 어찌할 도리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홍두적을 평정한 후에 그의 호종공(扈從功)이 1등으로 평정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승진되었다.
신우 때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되었다가 평리(評理 : 문하부(門下府)의 종2품 벼슬. 고려 전기의 참지정사)로 전임되었다.
신우가 처음으로 내재추(內宰樞)를 설치하여 그로 하여금 명령과 보고의 전달 사업을 장악하게 하였는데 이때 임견미, 홍영통(洪永通), 조민수(曹敏修)가 선임되어 항상 궁중에 있었으며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먼저 여기를 통과한 후에야 시행되었다.
평리로 퇴직(致仕)한 임견미의 장인 공영장(公永張)이 죽었을 때 그 장례에 사용한 기구 일체는 모두 관부(官府)에서 구비한 것이었다.
신우가 어느 날 사람을 보내서 임견미를 불렀으나 임견미는 병을 핑계하고 가지 않았으며 재차 불러서야 비로소 궐 내에 들어갔다. 그의 교만 방자함이 이러하였다.
임견미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승진되어 도길부(都吉敷), 우현보(禹賢寶), 이존성(李存性)과 더불어 정방(政房) 제조(提調)를 했는데 예로부터 내려온 관례는 시중이 전선(銓選)을 주관하는 법이었으나 임견미가 그 권한을 독차지하고 제 마음대로 처결하였으므로 홍영통과 조민수는 시중으로 있으면서도 전선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임견미의 인척(姻族) 성수항(成守恒)은 평주(平州) 원으로 되었는데 그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백성의 고혈을 착취하여 사복을 채우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집으로 돌아오니 임견미는 그를 또 주선하여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보냈다. 또 이상원(李祥原)이란 자는 임견미의 아들 임치를 양자(養子)로 삼고 추밀(樞密) 벼슬을 얻었다.
신우가 임견미의 과도한 탐오를 좋지 않게 여기고 누차 그의 아들 임치에게 암시를 주었다. 그리하여 임견미가 병을 이유로 퇴직을 청원하였으므로 신우가 그것을 허가하고 평원 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봉하였으며 지신사 염정수(廉庭秀)를 보내서 궁중에서 빚은 술을 주며 위로하였다. 멀지 않아 다시 시중으로 되었으며 또 이성림(李成林) 등과 함께 실록(實錄) 편수(編脩)를 제조(提調)했다.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백호(百戶) 정여(程與)를 보내 북청주(北靑州) 만호 김득경(金得卿)이 관군(官軍)을 공격 살해한 연고를 질문했을 때 신우는 정여를 지극히 후대했으며 임견미와 이성림이 모두 자기 집에서 연회를 차려서 후하게 위로하고 세포(細布)를 선물 주었다. 드디어 김득경을 잡아 명나라 서울로 보내기로 하고 그 출발 때 도당(都堂)에서 김득경을 타일러 말하기를
“북청 사건은 네가 그 책임을 지고 나라에 누를 끼치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득경은 말하기를
“나는 다만 도당의 공문(公牒)을 봉했을 뿐이다. 상국(上國)에서 따져 물으면 어찌 감히 끝까지 숨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임견미가 우려하였으나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때 밀직제학 하륜(河崙)이 가만히 말하기를
“일에서는 권도를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왜적이 들끓고 있으니 어찌 왜적을 만나서 죽을 수가 없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임견미는 크게 기뻐했다.
그래서 김득경이 철주(鐵州)에 당도했을 때 야밤에 도적이 그를 죽였으며 명나라 황제에게는 왜적을 만났다고 보고했다.
임언수가 죽어서 장삿날 상여가 지나가는 도중 20여 개 소에서 전(奠)을 울렸다. 그리고 이성림, 우현보, 염흥방, 이인민(李仁敏) 등이 청하여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주었다.
신우가 임견미를 다시 등용하여 문하시중으로 임명하고 지문하사(知門下事) 안소(安沼)를 파견하여 옷 1습을 주었으므로 임견미가 대궐에 가서 사례하였다. 그때 신우가 말하기를
“이제 국사(國事)를 그대에게 위임하니 힘써 보아라!”라고 하고 또 말과 안장과 의복을 주었다.
신우가 화원에서 승마하다가 좌우 시종들을 돌아보며
“수정목 공문(水精木公文)을 가져 오라! 내가 이 말을 길들여 놓겠다”라고 하고 또 임치를 보고 희롱하여 말하기를
“네 부친이 수정목(水精木) 공문(公文)을 잘 쓴다지?”라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임견미, 이인임, 염흥방이 그 흉악한 종들을 내놓아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덮어놓고 수정목으로 곤장질하여 강탈하였는데 그 임자가 공가문권(公家文券)을 가지고 있어도 감히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이것을 “수정목 공문”이라 하였는데 신우가 듣고 그것을 증오하였으므로 매양 언급했던 것이다. 머지 않아 영 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염흥방의 집종(家奴) 이광(李光)이 전(前) 밀직부사 조반의 백주(白州) 땅을 강탈하였으므로 조반이 염흥방에게 애걸하였더니 염흥방은 그 땅을 반환해 주었으나 이광이 또 그 땅을 강탈하고 조반을 능욕했다. 그래도 조반은 이광을 방문하고 반환을 간청했으나 이광은 거만을 부리고 더욱 포학하게 굴었으므로 조반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수십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포위한 후 이광을 죽이고 그 집을 불질렀다. 그리고 염흥방에게 그 사유를 말하려고 말을 달려 서울로 들어왔다.
한편 염흥방은 이광을 죽인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조반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무고하고 순군(巡軍)에 명령해서 조반의 모친과 처를 잡아 두고 또 4백여 명의 기병을 백주로 파견하여 조반을 체포케 했다. 그런데 기병이 벽란도(碧瀾渡) 나루터까지 갔을 때 그 고을 사람이 말하기를 “조반은 5명의 기병을 데리고 서울로 달려갔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염흥방 등의 권고에 의하여 신우가 명령을 내려 현상을 걸고 그 체포를 대단히 급하게 서둘렀다. 교주도 원수 정자교(鄭子交)가 그의 사위 중랑장 안승경(安承慶)을 시켜서 조반을 효사관(孝思觀) 솔밭 언덕에서 체포하여 순군에 가두었다.
당시 염흥방은 상만호(上萬戶), 도길부는 부만호(副萬戶)였는데 임견미의 사위 도만호(都萬戶) 왕복해(王福海)와 부만호 이광보(李光甫), 위관(委官) 윤진(尹珍), 강회백(姜淮伯)과 함께 대간과 전법의 공동 심문을 하였다. 이때 조반이 말하기를
“6∼7명의 탐오하는 재상들이 종을 사방으로 내놓아 타인의 땅을 강탈하고 백성을 잔인하게 짓밟고 있으니 이것은 대적(大賊)이다. 내가 이번에 이광을 죽인 것은 오직 나라에 도움을 주고 백성의 도적을 제거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라고 하였다.
종일 고문하여도 자백하지 않으니 염흥방은 조반을 허위자백시킬 생각으로 지극히 참혹한 형을 가하였으나 조반은 욕만 하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국적(國賊)인 너를 죽이려고 하니 너와 나는 소송 상대자인데 어찌 나를 문초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염흥방은 더욱 노해서 사람을 시켜 입을 마구 치게 했으나 왕복해는 듣지 못하고 조는 척하고 있었으며 기타의 사람들은 감히 어찌하지 못했는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김약채(金若采)만이 홀로 옳지 않다고 제지했다.
며칠 후에 신우가 최영의 집으로 가서 장시간에 걸쳐 이야기하고 조반의 옥사(獄事)에 대하여 의논한 바 있었는데 이날 염흥방이 또다시 조반을 문초하려고 순군으로 가서 옥관(獄官)과 대간(臺諫)들을 청했으나 모두 오지 않았다. 그러자 신우가 의원을 보내 조반에게 약을 주고 잠시 후에 조반과 그의 모친 및 처를 석방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그에게 또 의약과 털옷을 보내 주었다.
또 그때 마침 녹(祿)을 나누어 주고 있었는데 신우가 명령을 내리기를
“재상들은 그만하면 부유하니 발급하지 않아도 좋으며 우선 군졸들로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지급하라!”고 하였다. 드디어 염흥방을 순군에 가두니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명철하시네!”라고 하였다.
신우가 조반의 7세 난 어린 아들을 불러다가 그 부친의 한 일을 물으니 그 아들이 대답하기를
“나의 아버지가 그저 칼을 뽑아 시험하면서 말하기를 ‘탐오하는 재상 6∼7명을 죽여서 내 뜻을 풀겠다. 그렇지 못하면 처자들이 반드시 굶주리고 헐벗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신우는 그 아이에게 모자를 주었다.
신우는 최영과 태조 이성계에게 명령하여 병력을 포치하여 궁중을 숙위케 하고 임견미와 도길부를 옥에 가두게 했는데 사자(使者)가 임견미의 집에 가니 임견미가 왕명을 거부하면서 목소리를 높여 사자에게 말하기를
“7일에 봉록을 지급하는 것은 오랜 제도인데 지금 임금은 까닭 없이 녹을 주지 않으니 이게 무슨 임금의 도리인가? 자고로 임금이 잘못하면 신하들 중에서 그것을 바로 잡아 주는 자가 있는 법이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반란을 일으키려고 사람을 파송하여 그의 도당(徒黨)에게 급보하려 하니 무장한 기병이 이미 교통을 차단하고 있으므로 그 사람이 나가지 못하고 되돌아 서 임견미에게 보고하였다.
임견미의 집은 남산(男山) 북녘에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임견미가 남산을 바라보니 무장 기병이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으므로 낙담하고 체포당하면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광평군(廣平君 이인임)이 나를 그르쳤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서 임견미와 염흥방은 최영이 청백하고 정직한 것과 병권을 잡고 있는 것을 꺼리어 일상 최영을 해치려고 하였으나 이인임이 굳이 말렸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순군에서 임견미와 염흥방을 문초하면서 그 죄를 철처히 구명하지 않고 보고했더니 신우가 대노하여 전 평리 왕안덕(王安德)을 도만호로, 지 문하 이거인(李居仁)을 상만호로, 이조의 공저왕(恭靖王)을 부만호로 각각 임명하여 다시 문초케 하였다.
당시 지밀직(知密直) 임치는 총각 때부터 신우를 친근히 시종하여 신우가 놀이하러 드나들 때면 반드시 수행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밀직부사로 승진한 후부터는 늘 궁중에 입직(入直)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강제로 그의 집에 돌려 보냈다.
그 후 곧 임치, 왕복해, 이성림, 염흥방, 염흥방의 아우 대사헌 염정수(廷秀), 임견미의 사위 지밀직 김영진(金永珍) 등을 순군옥에 가두고 각 도(道)로 찰방(察訪)을 파송하여 임견미와 염흥방이 강탈한 전민(田民)을 조사하여 그 주인에게 반환해 주었으며 드디어 임견미, 이성림, 왕복해, 염흥방, 도길부, 염정수, 김영진, 염치를 사형에 처하고 또 왕복해의 양부인 문하찬성사 김용휘(金用輝), 이성림의 사위 이존성(存性), 이성림의 우서(友壻) 전원주 목사(前原州牧使) 서신(徐信), 임견미의 아우 판 개성(判開城) 임제미(齊味), 염흥방의 매부 밀직 홍징(洪徵), 임헌(任獻), 전법 판서 이송, 임헌의 아들 임공위(公緯), 임공약(公約), 임공진(公縝), 반복해의 형 반덕해(潘德海), 매부 개성윤(開城尹) 정각(鄭慤), 박인귀(朴仁貴), 이희번(李希蕃) 등도 죽였다.
왕복해가 피검되자 김용휘가 반역을 음모하고 칼을 품고 대궐로 들어왔으므로 먼저 죽였다. 박인귀, 이희번은 임견미에게 의탁한 자였다.
옥관이 가산을 몰수하였을 때 임헌의 집에는 곡식 한 섬의 저장도 없었으므로 그를 면죄해 주려 하였으나 최영이 그가 염흥방의 세를 등지고 대사헌이 되어서 한 마디의 직언(直言)도 없었다는 이유로 드디어 죽였다. 그때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또 왕복해의 부친 우시중 반익순(潘益淳), 임견미의 조카 사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신권(辛權), 도길부의 사위 대호군 신봉생(辛鳳生), 임견미의 족자(族子) 집의(執義) 이미생(李美生), 판관 민중달(閔中達), 홍징(洪徵)의 아들 홍상연(尙淵), 홍상빈(尙濱), 홍상부(尙溥), 판 내부시사(判內府寺事) 김만흥(金萬興) 등도 죽였다. 김만흥은 임견미의 가신(家臣)인바 전민(田民)의 문부(文簿)를 담당한 자로서 탐욕, 포학, 간사, 교활한 놈인데 임견미의 심복이 되었었다.
또 염흥방의 형 서성군(瑞城君) 염국보(國寶)와 염국보의 아들 동지밀직 염치중(致中), 그의 사위 지부(知部) 안조동(安祖同), 염흥방의 사위 성균 제주(成均祭酒) 윤전(尹琠), 호군 최지(崔遲), 반복해의 매부 대호군 김함(金涵) 그 일족(族)인 전법 판서 김을정(金乙鼎), 장령(掌令) 김조(金肇), 임제미의 아들 임맹양(孟陽), 도길부의 일족(族)인 전 강릉 부사(前江陵府使) 도희경(道希慶), 도간, 도운달(都云達) 및 사형자의 족당인 전 지밀직 전빈(全彬), 밀직부사 안사조(安思祖), 밀직제학 박중용(朴仲容), 신정(辛靖), 사복정(司僕正), 감성단(甘成旦), 환자 조원길(趙元吉) 등 50여 명을 죽이고 임견미 등의 자산을 몰수했다. 도길부의 아들 진사(進士) 도유(兪)는 변방에 귀양 보냈는데 도유는 우인렬의 사위이며 최영이 우인렬과 친우였으므로 죽음을 면하였던 것이다.
전민 변정 도감(田民辨正都監)을 두고 임견미 등이 강탈 횡점한 전민(田民)을 심사하였으며 각 도에 안무사(安撫使)를 파견하여 임견미 등의 가신, 악질 노복을 수사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였는데 그 수효가 1천여 명에 달했으며 그들의 재산도 몰수했다. 그리고 박중용(朴仲容)의 부친인 전 찬성 박형(朴形)에게 1백 도의 곤장을 치고 각산(角山)으로 귀양 보내 수자리(戍)를 살게 했다.
순군에서 임견미, 박익순, 염흥방, 도길부의 재산을 검수했으며 그 자들의 처는 고문으로 인하여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사형당한 자들의 자손은 모조리 잡아들여 죽였으며 비록 강보 안에 싸인 아이라도 모두 강물에 던져 죽였고 숨어서 화를 면한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처단된 자의 처와 딸로서 관비(官婢)로 편입된 자가 30여 명에 달했다.
이성림, 반복해, 이존성, 김영진, 임치, 신권, 손중흥과 임치의 6세 나는 아들을 임진강(臨津江)에 던져 죽이고 또 이성림의 일당인 전 판서 성중용(成仲庸)을 죽였다.
서규(徐規)도 이성림의 도당인데 이천(利川)에서 안집(安集) 이안생(李安生)을 시켜 체포하게 했던바 서규는 도망쳤다. 서규의 처는 고인이 된 재상 성사달(成士達)의 딸인데 이안생이 보고 마음에 들어서 드디어 사통했는바 그 처가 서규를 유인하여 와서 잡아죽이게 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어 이안생을 사형에 처하고 서규의 처는 전객시(典客寺) 여종(婢)으로 만들었다.
임견미는 성정이 시기심이 강하고 음흉했으며 말재간이 있었는바 세간에서 그를 이임보(李林甫)에게 견주었다. 이인임이 장기간에 걸쳐 국권을 절취해서 파당의 뿌리를 깊이 박고 임견미를 심복으로 삼았었다. 그런데 임견미는 문관(文官)을 증오해서 추방한 자가 심히 많았다. 염흥방도 또한 추방당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후에 임견미는 염흥방이 세가(世家) 대족(大族)이므로 그 집에 혼인할 것을 청했으며 또 염흥방도 전일의 귀양을 체험하였으므로 그 몸을 보전할 생각으로 이인임과 임견미의 말이면 다 복종하였고 이때 와서는 염흥방의 이 부형(異父兄) 이성림(李成林)을 시중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권세 잡은 간신들과 그 친당(親黨)들이 조정의 양부(兩府)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으며 중앙과 지방의 요직은 모두 사적 관계가 있는 자들이 점령하였다.
이렇게 정권을 독차지하고 전횡하면서 벼슬을 팔아먹었으며 타인의 토지를 강탈하여 온 산과 들을 모두 차지하였고 타인의 노비를 강탈하여 그 수는 천백이 넘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왕릉, 왕실의 창고, 주, 현(州縣), 나루(津), 역(驛) 등에 소속된 땅에 이르기까지 강탈하지 않은 바가 없었고 또 주인을 배반한 종들과 부역을 도피한 포민(逋民)들이 마치 고기가 못에, 새가 덤불에 모이듯이 그 집으로 모여들었으나 안렴사와 수령들이 감히 그들을 징발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분산되고 도적은 성해졌으며 공사(公私)의 재물이 고갈되었으므로 온 나라가 이를 갈고 분하게 여겼다.
이때 최영과 태조 이성계가 그의 소행을 통분히 여기고 동심 협력하여 신우를 인도해서 그들을 제거하니 국내의 모든 사람들이 크게 만족하여 길에 나와서 춤추고 노래하였다.
*조반 사건 사료이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