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타 변이바이러스의 확산이라는 예기치 않는 변수로 지난 1일부터 시행된 유럽연합(EU)의 '백신 여권' 기능이 퇴색된 감도 적지 않지만, 비슷한 시스템이 러시아 주도의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권역에서도 시행될 것으로 전해졌다.
EAEU 회원국인 카자흐스탄의 텡그리 뉴스는 "EAEU 회원국 국민들이 10일부터 러시아 방문시 신종 코로나(COVID 19) 음성 사실을 확인하는 'QR코드'를 제시해야 한다"고 지난 9일 보도했다. EAEU는 지난 5월 러시아·벨라루스·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아르메니아 등 5개 회원국의 '정보 시스템'을 통합해 '통합검색 시스템'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텡그리 뉴스에 따르면 EAEU는 이 '통합 시스템'에 연계하는 방식으로 백신 접종자(혹은 음성 확인자)들에게는 신종 코로나로 봉쇄된 국가간 출입 장벽을 허물겠다는 것이다. EAEU판 '백신 여권' 시스템인 셈이다. 당초에는 EU와 마찬가지로 7월 1일부터 시행할 계획이었으나, 준비가 늦어진 관계로 10일 러시아를 시작으로 본격 시행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주도의 구소련 5개국 경제통합체 EAEU/사진출처:트위터
이 '통합 시스템'은 원래 역내 일자리 정보를 취합해 노동시장을 단일화하겠다는 취지로 추진됐다. 노동시장 단일화는 노동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전제로 한다. 육로로 국가간 이동이 가능한 EAEU 회원국들에게 노동시장 통합은 서로 '윈윈'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노동 인력은 모스크바 등 러시아 주요 도시의 인력 수급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게 현실이다.
EAEU는 지난 2015년 러시아 등 5개 회원국간에 상품·자본·서비스·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미래 단일 통화 도입 등 경제 정책의 통합을 목표로 출범했다. 전체 1억 7천만명의 인구에 GDP 규모도 4조원 이상이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 사태로 EAEU의 인적 교류는 일단 멈춰섰다. 국가간 이동 자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백신 접종과 함께 '통합 시스템'에 연계된 'COVID-19없는 여행'이라는 모바일 앱은 백신 접종자들에게 국가간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COVID-19없는 여행'이 EAEU내에서 '백신 여권' 시스템을 구현한 셈이다.
6월 중순 신종 코로나 백신접종 증명서(여권 백신) EU에 도입될 것이라는 러시아 매체 기사 묶음/얀덱스 캡처
여행자는 이 앱을 통해 다운받은 'QR코드'를 러시아 국경 통과시 제시하면 의무 격리 등이 면제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QR코드에는 백신접종 정보는 물론, PCR 검사 내용도 들어 있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에서는 지난 6월 초부터 앱 무료 다운로드가 시작됐다고 한다.
반면, EU의 '백신 여권'은 처음부터 여행 자유화를 겨냥해 출시됐다. 그리스 등 주요 관광국가들이 백신 접종 여행자들을 수월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백신 여권' 도입에 앞장섰다. 하지만, 인정하는 백신의 종류를 놓고 EU국가간에 이견이 노출되기도 했다. EU집행위는 논란끝에 국가별 자율에 맡기기로 했다.
프랑스 외무부, EU회원국에 러시아와 중국 백신 접종자 불인정 촉구/얀덱스 캡처
문제는 델타 변이종의 창궐과 함께 불거졌다. 비상이 걸린 프랑스 등 일부 국가들이 러시아 관광객을 겨냥한 그리스의 입국 완화 조치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는 '백신 여권' 아이디어가 나올 때부터 예상된 것. 소위 '역차별' 논란이다. 유럽의약품청(EMA)의 승인을 받은 백신(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얀센) 접종자에게만 '백신 여권'을 인정하고, 남유럽 지역 여행자가 적지 않는 러시아 백신 접종자들을 제외하면서 잠재된 국가간 불만이 터진 셈이다.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프랑스 클레망 봉 외무부 장관은 8일 그리스 등을 겨냥해 "러시아와 중국에서 개발된 백신을 인정하면 안된다"며 "(백신 여권을) EMA 승인 백신으로 제한할 것"을 촉구했다. 봉 장관은 "EMA 승인 백신은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존슨앤존슨(얀센) 등 4개"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러시아와 중국 백신의 승인을 요구하는 스페인과, EU 미승인 백신 접종 관광객들에게 국경을 개방한 그리스 등을 비판했다.
이에 러시아 크렘린과 외무부는 신종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위기를 극복하려는 국가들의 노력을 폄훼하고 국가간 차별을 고착화하려는 시도라고 비난했다.
다행히 EU측이 지난 8일 러시아 보건부에 '백신 여권'의 상호인정을 논의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르쿠스 에데러 주러시아 EU대사는 이날 브리핑에서 "EU의 COVID 증명서에 관한 법안은 제3국의 증명서를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우리는 러시아 보건부에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기를 원하는지 여부에 대한 협상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 백신 접종 확인서(백신 여권)상 백신 차별을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혀/얀덱스 캡처
EU, 러시아측에 백신 접종 증명서의 상호 인정 논의 제안/얀덱스 캡처
앞서 EU집행위원회는 "27개 회원국 국민들이 7월 1일부터 '백신 여권'을 갖고 다른 회원국으로 넘어갈 경우, 코로나 검사와 격리 의무를 면제할 것"이라며 '백신 여권'의 시행을 알렸다. '역차별' 논란에 대해서는 각 회원국의 자유로운 결정에 맡기기로 했다.
EU '백신 여권'에는 백신의 접종 유무, 코로나 감염및 완치 여부, 72시간 내 코로나 PCR 검사 결과 등이 담긴다. 여행객이 QR코드를 제시하면 출입국 당국은 EU권역의 '통합 데이터 베이스' 조회를 통해 백신 접종이나 음성 여부를 확인한 뒤 방역 의무 조항을 면제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러시아, 백신 접종 확인 체제 구축/얀덱스 캡처
모스크바 음식점 등에서 시행중인 백신 접종 QR코드 확인 시스템/현지 매체 rbc 동영상 캡처
모스크바 QR코드 확인 시스템 시행 모습/현지 TV채널 '즈베즈다' 캡처
러시아도 지난 3월 "공공 서비스 웹사이트를 통해 백신 접종을 받은 사람에게 증명서(QR코드)을 발급할 계획"이라며 '백신 여권' 도입 계획을 밝혔다. 이미 모스크바 등 일부 지역에서는 다운받은 QR코드(백신 여권)를 제시하지 못하면 레스토랑과 카페 등 음식점 출입이 금지된다. 동물원과 극장 등 일부 다중밀집 장소에도 'QR 코드' 출입 허가제가 도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백신 여권'(백신 접종 증명서)에 대한 국제적 승인 문제를 조속한 시일내에 해결하도록 정부에 일찌감치 지시했으나, EU 주요 국가들과의 협상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여름 휴가철 러시아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그리스와 스페인 등이 러시아 QR코드(백신 여권)를 인정하거나 인정을 촉구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유럽의약품청(EMA)이 '스푸트니크V'에 대한 심사를 끝내고 승인하는 길인데, 당초 예상과 달리 그 소식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