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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제 Ⅰ. 학문 배경 및 가계에 대하여 Ⅱ. 삶과 학문에 대하여 Ⅲ. ≪克菴文集≫에 대하여 Ⅰ. 학문 배경 및 가계에 대하여 이 ≪克菴文集≫은 조선말기 尙州의 유학자인 克菴 柳欽睦(1843∼1910) 선생의 시문집이다. 선생은 溪堂 柳疇睦의 문인으로, 자는 致(穉)潔1)이고 본관은 豐山이다. 선생은 이제까지 학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선생은 1928년 鄕議에 따라 修補된 ≪商山誌≫의 <科第人物>에서, “升春의 손자로 학문에 독실하여 가학을 이었는데, 늘그막에도 더욱 부지런하였다.”2)라고 간단히 소개되고 있다.
선생은 尙州市 中東面 愚川(現 于勿里)에서 태어났다. 이 우천은 풍산류씨 愚川派의 世居地로, 西厓 柳成龍의 셋째아들인 修巖 柳袗이 愚伏 鄭經世와 蒼石 李埈을 從遊한 것을 계기로 河回에서부터 이주해온 곳이다. 이곳은 二水 즉 낙동강과 渭江이 남쪽에서 합류하고, 三山 즉 螺角山·兎峯·飛峯山이 둘러싼 형국인데, 풍수적으로는 ‘梅花落地’형의 명당이다.3) 地靈이면 人傑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이곳 우천에 세거한 풍산류씨 우천파에는 걸출한 인물들이 篤生하였다. 선생과 근사한 세대를 살다간 인물을 우선 꼽아본다면, 단연 우천파 종가의 柳尋春(江臯)·柳厚祚(洛坡)·柳疇睦(溪堂) 3대를 먼저 들 수 있다. 이들은 조선후기 政界·學界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세웠다. 이런 업적은 우천파는 물론 풍산류씨 문중 전체의 地閥을 격상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류심춘은 19권 10책의 ≪江臯集≫을 남긴 經學·禮學者였다. 어렸을 때 외종형인 舊堂 趙沐洙와 可隱 趙學洙에게 학문을 배웠고, 그 후 立齋 鄭宗魯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다. 官人이기도 했던 그는 주로 지방관과 元(世)子僚屬의 이력을 가졌다. 관인으로서 그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는 正祖였다. 정조는 그를 “그 이름을 익히 들었는데 그 사람을 대하여 함께 얘기해 보니 과연 端正한 선비더라.”4)라거나, “걸음걸이가 차분하고 용모가 단정하니 자못 학문을 하는 사람다워 반드시 과거 공부하는 유생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5)고 평한 바 있다. 柳台佐·鄭象晉·李蓍秀 등 많은 학자들이 그 문하에서 길러졌다.
류심춘의 아들 류후조는 甲戌換局 이후 老論一黨專制와 世道政治가 굳어지는 속에서 침체 일로에 있던 영남 인사 가운데 단연 독보적 위치를 점한다. 그는 류성룡 이후 300여 년만의 영남 출신 재상이었다. 물론 그의 이력에 官運이 작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부분적으로 그는 世家의 후광과, 北人·南人을 이용해 세도가를 견제하려는 大院君의 정치적 의도에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온화하고 참된 자품과 정성스럽고 근검한 지조가 흘러넘쳐서 손으로 움켜쥘 수 있을 듯하다.”6)는 高宗의 평가에서 보듯, 류성룡 이후 가풍에 훈도되어 포용력 있는 성품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류후조의 아들 류주목 또한 一道의 丈席으로 세상의 추앙을 받은 巨儒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연마한 바탕 위에서, 居然齋를 지어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柳道洙·金輝鑰·鄭昌翼 등 많은 門人들은 그렇게 해서 길러진 학자들이다. 그의 학문은 祖師(祖이자 동시에 스승)의 가르침을 承襲하고, 옛날 성현의 책과 조선 諸先儒의 학설을 널리 읽은 데서 기초하였다. 逸薦이 거듭되고, 벼슬을 하라는 권유가 있자, “우리 집안은 世臣이라 山野를 고수하는 것은 事體에 온당치가 않다. 그러나 30년 동안 세상을 사양한 종적을 돌아보건대 재주가 본래 떨어진다. 또한 차면 넘치는 것이니 아버지가 재상이요 아들과 형제들이 모두 蔭官이 되었는데 어찌 사람마다 供仕하겠는가?”라며 끝내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7)
극암 선생은 이들과 혈연에서 오는 유대 그 이상의 관계를 가졌다. 어려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가난한 생활환경에서 두 명의 누이와 함께 필설로는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던 선생은 바로 류후조의 보살핌을 받으며 장성할 수 있었다. 류주목 사후에는 류후조와 함께 先世 行錄의 편찬 작업을 하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선생은 종질 류도석을 대신하여 그의 할아버지 류후조의 묘지명을 대필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선생은 堂伯兄 류주목을 바로 壎師(형님이자 스승)로 모시어 풍산류씨 문중의 가학을 학습하는 한편, 류주목 사후 그의 저술을 정리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풍산류씨 문중은 영남의 명문이 거의 대부분 그러하듯 학문의 전수에 있어 家學的 性向이 두드러진다. 이 가문의 家學的 系譜는 크게 安東 河回와 尙州의 愚川으로 양분되는 양상이다. 류진의 큰조카인 拙齋 柳元之로부터 갈라진 하회의 가학 계보는 柳宜河·柳世哲·柳世鳴·柳後章·柳聖和·柳聖曾·柳澐·柳氵奎 ·.柳宗春·柳相祚·柳台佐 등 쟁쟁한 학자가 포진해 있다. 이들은 안동의 서부 유림의 핵심을 점하면서 이른바 屛論을 주도하여, 金誠一·李象靖을 退溪의 嫡傳으로 옹립하려 끊임없이 시도하던 안동 동부의 虎論을 견제하였다.8)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송논쟁 과정에서 영남 전체 유림의 公論을 결집하여 중앙으로 전달하는 역량을 보여주기도 하였다.9) 그들의 屛山書院은 고종대의 書院 毁撤의 십자포화에도 살아남은 명실상부 영남의 대표 서원이다.
반면, 류진과 그의 아들 柳千之로부터 갈라진 우천의 계보는 류성룡⇒류진(修巖)⇒柳千之(漁隱)⇒류심춘(江臯)⇒류주목(溪堂)으로 정리된다. 이 계열은 다음 장에 후술된 바와 같이 정경세의 年譜를 둘러싸고 不睦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류성룡의 제자이자 류진의 스승으로 이른바 ‘陶山再傳의 嫡統’10)으로 파악되기도 했던 상주의 晉州鄭氏 우복 집안과 보조를 같이 하며 道南書院을 거점으로 儒論을 주도했다.
물론, 학문적 성향이나 인적 교류에 있어 河回系와 愚川系가 고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류성룡⇒류진⇒류원지⇒류의하⇒류세철·류세명으로 도드라지는 하회의 계보에 대해, 우천은 ‘厓·修·漁·江’의 계보를 도드라지게 하는 한편, 은연중에 竹丌와 같은 것을 상징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다음은 죽기에 관한 息山 李萬敷의 識이다. 서애 선생의 죽기가 수암 선생에게 전해졌고, 또 聘君 선생[류천지]에게 전해졌으니 이것은 풍산의 대대로의 舊物인 것이다. 내가 그 집안에 장가를 갔는데 柳 友 汝常 씨[류천지의 아들 柳經河]가 내가 옛 책을 읽으며 옛것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주었다. 무릇 물건이 오래되면 보물이 되는데 하물며 文忠公의 天地를 經綸한 사업과 古今을 관통한 학문이 모두 이 죽기를 따라 얻어진 것임에랴. 더욱 感發할 만하다.11)
죽기
위 글에서 竹丌의 의미가 잘 나타난다. 이 죽기는 西厓의 천지를 경륜한 사업과 고금을 관통한 학문이 배태된 고귀한 유물로서, ‘厓·修·漁’가 서로 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죽기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柴里[우천의 별칭]에 도착하여 외손녀를 보았다. 주인인 上舍 류심춘이 家傳하는 죽기를 꺼내 보여주었는데, 서애 선생의 書牀이다. 선생이 수암 선생에게 전하였고, 수암이 掌令公에게 전하였으며, 李息山이 장령공 집안에 장가가서 그것을 취하고 수리하고는 대의 아래에 지를 써서 本家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내가 삼가 구경하다가 감탄하던 나머지 절구시 한 수를 빨리 써서 주인에게 주고는 돌아왔다.12)
죽기의 내용글
이는 蘆厓 柳道源이 그의 외손녀이자 류심춘의 부인인 鐵城李氏를 시리로 보러 왔다가, 류심춘이 꺼내 보여준 죽기를 보고 써준 절구시의 序文이다. 죽기란 서애의 책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 책상은 厓·修·漁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江臯에게까지 전해졌다. 죽기는 풍산류씨 문중 가학의 또 다른 줄기 속에서 호흡을 같이한 한 상징물로서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선생은 바로 이러한 우천의 풍토 속에서 뿌리내렸다. 다음에서는 우천의 가학의 계보를 유의하면서 선생의 직계를 중심으로 그의 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풍산류씨 문중의 시조는 柳節이다. 戶長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는데, 풍산 지역의 鄕權을 장악한 유력 호족 집단의 구성원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들 柳敦升과 손자 柳挺莊은 모두 호장직을 세습하였다. 정장의 아들 柳伯은 恩賜로 급제하였고, 백의 아들 柳蘭玉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昌平縣令을 지냈으며, 난옥의 아들 柳葆는 檢校禮賓卿을 지냈는데 문장으로 당시에 이름이 났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와 보의 아들 柳從惠는 工曹典書를 지냈으며 풍산의 上里에서 하회로 처음으로 이주해왔다.13)
그 후 6세가 흘러 류성룡이 배출된다. 그가 김성일·趙穆과 더불어 退溪學團의 領袖였음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가학적 성향이 짙던 嶺南學派 특성을 고려했을 때 풍산류씨 문중 안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이었다. 그의 학풍은 剛毅의 면모가 두드러졌던 김성일·조목에 비해 현실적이고 융통성이 있었다. 그는 ‘心’의 문제에만 치우쳐 ≪心經≫·≪近思錄≫만을 절대시하던 경향을 비판하고, 體用의 측면에서 處事의 문제까지 포괄하여 현실적 효용성에 주목하였다.14) 또한 이런 면은 덕목의 실천 문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이때 忠孝가 부각됐다. 충효의 실천은 質朴함을 나타내는 ‘謹拙’과 함께 풍산류씨 문중 가학의 주요 테마로 계승됐거니와15), 後述하겠지만 학문의 效用性과 함께 이 ≪극암문집≫의 저자이자 풍산류씨 문중 22세손인 극암 선생에게까지 일관된다.
류성룡의 셋째아들 류진은 實踐을 중시하는 학풍을 견지하면서 “종일토록 조용히 앉아 있는 건 쉬워도 일각이라도 마음 다잡아 보존키는 어렵지[靜坐終日易 操存一刻難].”란 시 구절을 지어 座右銘으로 간직하였다. 그는 정경세가 張顯光과 함께 南人 가운데 중용할 만한 인물로 낙점하기도 하였다.16) 특히 여러 고을에 수령으로 부임해 탁월한 치적을 세운 데다 ≪서애집≫을 수습했다는 측면에서 부친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했다는 세평을 받았다.17) 그의 실용적 성향은 우천에 이거한 후 “老農에게 나아가 耕耘의 법을 구하고 농사에 관한 견문을 기록했다.”는 <渭濵明農記>의 題文18)에도 잘 나타나 있다.
류진의 맏아들이자 창석 이준의 사위이며 식산 이만부의 장인이었던 류천지는 특히 奉先의 정성을 중시하여 일찍이 “제사에 삼가지 않으면 조상님께서 흠향치 않으시니 자손된 자들은 마땅히 그 정성을 다해야 한다. 人家의 興衰가 이에서 말미암으니 유념치 않겠느냐?”고 하였다. 학문은 어려서부터 經史子家를 섭렵했으며 圖書·象數의 변화를 구명하였고 禮義를 정밀히 분석했다. 전반적으로 그는 집안의 영향이 耳目에 익숙히 젖어들었기 때문에 충효가 篤實하였다고 한다.19) 또한 성향면에서도 剛柔를 겸비했으면서도 溫柔한 풍모가 짙었다던 류성룡과 닮은 면이 많았다.20)
류천지의 셋째아들 柳緯河는 앞에서 소개된 그의 선대와는 달리 벼슬하지 않고 處士의 생을 살았다. 그에 대해선 爲先의 정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특히 류진의 문집인 ≪수암집≫의 간행에 있어서의 그의 역할을 주목했으면 한다. 그는 ≪수암집≫의 간행 논의를 내고 류진의 遺書들을 수습하여 李槾 등으로 하여금 그를 編摩토록 하는 등 편찬 작업을 지휘했다.21) 그의 이러한 노력은 류진의 사후 27년 만에 간행된 ≪수암집≫으로 결과를 보는데, 그는 趙德鄰으로 하여금 발문을 짓도록 청하기도 하였다.22) 이 발문을 지으면서 조덕린은 그를 “植志飭躳 甚有家法”이라 평한 바 있다. 덧붙여, 그는 두 형님이 먼저 죽고 없는 상황에서 先人의 言行大致가 없어질 것을 우려하여 아버지 류천지의 行狀을 이만부에게서 받아내기도 하였다.23)
류위하의 아들 柳後儉은 요졸하여 柳德霖을 후사로 삼았고 류덕림이 또 요졸하여 柳光洙를 후사로 삼았는데, 류광수는 곧 선생의 증조부이다. 류광수는 어질고 예의가 있어 동류들 가운데 추중을 받았다. 尙州의 문인 趙錫喆이 지은 輓詩에 따르면 류광수는 古家의 가풍을 잘 따라 孝悌를 기반으로 삼았으며, 博覽强記한 재능을 지녔고 문장은 贍彰한 면이 있었다고 하였다.24)
선생의 조부는, 류광수가 친아들인 류심춘을 우천파 종손 柳潑에게 양자로 보내고 후사로 삼은 柳升春(愚溪)이다. 그 역시 가학을 承襲하고 널리 經史를 섭렵하였다고 한다.25) 류심춘은 그런 동생의 공부에 대한 관심이 없을 수 없어, 1799년 류승춘과 從弟 柳抃春·柳晉春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라건대 제군들은 조용히 앉아 책을 읽되, 익숙하게 반복해 그 맛을 음미하여 究竟의 바탕을 삼고 몸소 실천하는 밑천으로 삼아, 이 형이 뜻은 두었으되 이루지는 못했던 꼴과 같아서는 아니 된다.”라 당부하기도 하였다.26) 류승춘은 이런 가학적 분위기에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Ⅱ. 삶과 학문에 대하여 극암 선생은 1843년(헌종 9)에 柳京祚와 星山呂氏 사이에서 獨子로 태어났다. 서애 선생은 그의 9대조가 된다. 류경조는 隱德이 있었고, 성산여씨는 士人 鍾奎의 딸로서, 임진왜란 때 金山 지역에서 義兵 召募官으로 활약했던 呂大老의 후손이다. 류경조와 성산여씨는 모두 1남 2녀를 두었는데, 선생은 각각 眞城 李晩時와 達城 徐錫元에게 시집간 누님과 누이를 두었다. 선생은 타고난 바탕이 영오하고 기개와 도량이 장중하였다. 그러면서도 재치 있는 사고가 기발하였다. 그는 群兒와 어울려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홀로 字句를 깨쳐 갔다. 그의 스승이면서 서른 살 연상의 再從兄인 류주목은 그런 그를 “文質이 겸비되었으니, 반드시 門戶를 光大하게 할 것이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선생의 아동기는 매우 불운하였다. 그의 아버지 류경조가 1853년에 하세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겨우 11세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기에, 어머니 성산여씨와 그녀의 세 자식은 남모르는 천신만고를 겪어야 했다. 선생은 이 시기에 그가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從叔父인 류후조의 덕분이라고 하였는데, 류후조의 愛恤이 깊었을 것이다. 선생의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성인과 같이 슬픔을 다하였고, 葷菜와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홀로된 어머니를 섬기매 정성을 다하였는데, 집안의 쌀독이 번번이 비었어도, 滫瀡之節은 반드시 힘을 다해 스스로 마련했다. 어머니의 병세가 위독해졌을 때에는 밤낮으로 애태우며 대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기까지 했다.
1869년에는 선생의 첫째 부인인 開城高氏가 사망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그녀는 高述謙의 딸인데, 고술겸은 孝行으로 童蒙敎官에 추증되고 諸家에 의해 立傳될 정도로 행실이 탁월했다. 이를 통해 婦德이 있었다던 그녀의 세세한 행실까지 미루어 알 수 있겠다. 고술겸의 아들인 高彦亨은 선생과는 친형제와 같은 교분을 맺었으며, 개성고씨가 죽은 후에도 선생을 동생처럼 보살펴주었다. 이후 선생은 敬菴 文東道의 5세손인 남평문씨를 後配로 맞아 딸 셋을 두게 된다.
선생이 청년기에 과거를 준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전통시대에 임금을 섬길 수 있는 門路로서 과거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선생은 程文에 능통하다는 평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하였는데, 그 후 관직에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溪亭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1883년 입춘에는 이렇게 읊었다. 천지에 늦겨울 기운 가셨으니 天地窮陰盡 책상에서 보낸 세월 많구나. 書牀歲月多 동풍 부는 맑은 낙동강 가에서 東風淸洛上 외로이 앉아 매화를 바라보네. 孤坐看梅花 <癸未立春題軒上> 이 무렵 선생은 상주의 유림으로서 道南書院의 일을 맡아 보았다. 도남서원은 상주를 대표하는 南人系 서원인데, 이때는 서원훼철(1868년)로 인해 壇所의 형태로 존속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通文을 내어 여론을 환기·결집시키는 일 등에 참여하였다. 1886년 11월 4일에는 어머니 성산여씨가 하세했다. 선생은 이때 衣衾·棺槨의 도구를 ≪家禮≫에 의거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였고, 장지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시묘살이의 예에 따라 집 뒷산 위에 거적자리를 깔고 조석으로 묘소 쪽을 바라보고 곡을 하되, 비바람이 몰아친다고 그만두는 일이 없었다. 忌日에는 제수를 정성껏 마련하여 정결하게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선생의 장년기는 조선이 바야흐로 쇠망기에 접어들던 시기였다. 외세의 東漸도 문제이려니와, 내부적으로는 東學까지 일어나 전통적 가치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조정과 유림은 衛正斥邪의 기치를 내세우며 儒學 중흥을 도모했다. 鄒魯之鄕의 대도회지인 상주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의 배려 하에 講學會와, 鄕飮酒禮와 같은 一鄕 단위의 의식이 개최되었다. 선생은 시대에 대한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叔世 意識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인 염세주의로 뒷걸음치지는 않았다. 말세를 살아가면서, 그는 “몸을 닦아 때를 기다린다[修身以俟時].”와 같은 식의 처세관을 견지하면서도, 山野를 고수하는 隱遁處士와는 다른 적극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東·西學 등 異端의 풍미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이 시기 강학회 등의 興學 사업과 유교 전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먼저, 선생은 상주의 梧山書塾 重營에 나섰다. 그는 동몽들이 남전향약·백록동규약을 실천하면서 선현들을 계승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通告文을 작성하여 義捐 협조도 구하였다. 1891년에는 溪亭에서 열린 강학회에 참석해 少長의 단합을 강조하였다. 1892년에는 도남단소에서 강학회가 열렸는데, 그는 여기서 主席으로서 ≪大學≫을 강론하였다.
1893년에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목사 尹泰元이 상주향교에서 향음주례를 베풀었다. 선생은 이 자리에서 賓으로 초청되어 주선하였다. 아울러 후에 목사의 부탁으로 題名錄의 서문을 짓기도 하였다. 그 해 4월에는 龍山 李晩寅과 田園 柳道獻이 주축이 되어 浯川書堂에서 강학회가 열렸다. 여기서 그는 相禮로 참여하여 강의도 하였고, 正學으로서의 性理學이 海東에 영속했으면 하는 바람을 詩로 깃들이기도 하였다.
한편, 상주는 동학의 布敎史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1860년대 초반부터 동학의 2대 교주인 崔時亨의 포교활동이 山谷間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무장 봉기 이전부터 그 세력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 상주는 최시형의 관할인 北接의 영향력 하에 있었지만, 이미 1차 농민봉기 때부터 무장 투쟁에 참여하였다. 1894년 9월경에는 농민군이 상주 읍내를 점령하여 목사 尹泰元이 도주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를 진압할 능력이 없던 정부는 지역 사족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召募營을 구성하고 民堡軍을 활용하려 하였다. 이에 愚山의 晉州鄭氏 가운데 鄭宜黙이 召募使로 임명되고, 愚川의 풍산류씨 문중 가운데 柳道奭(류주목의 아들)이 義兵將에 추대되었다.
류도석은 출전에 앞서 한 통의 檄文(<檄一鄕文 甲午○代宗姪道奭作>)을 발하는데, 1894년 겨울 선생은 그의 종질을 위하여 바로 이 격문을 지어 주었다. 선생은 代作한 이 격문에서 “陰祀와 祈禳을 하면서 걸핏하면 天主를 칭하니 張角의 요술을 모방했고, 말없이 염주를 굴리다가 낭자하게 주문을 외니 如來의 支流라도 되는 양 행세하고는 있으나, 흩어지면 백성 노릇을 하고 모이면 도적놈이 되니 장각의 요술보다 지나치고, 사람을 상하게 하고 물건에 해를 주니 자비일랑 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군중을 현혹하는 左道일 뿐만이 아니라 곧 하나의 강도요, 난적”이라고 동학을 규정하였다. 또한 愚民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당당한 士族으로서 이 亂에 가담한 자가 있음을 개탄하면서, 무력 진압에 대한 일향의 호응을 구한다. 그는 이러는 한편, 지역 사족들이 주축이 된 의병의 鄕會에 참석하고 있었다.
1896년과 1897년 두 해 사이에는 우산의 진양정씨가 정경세의 연보를 중간하려고 하여 풍산류씨 문중과 갈등이 야기됐다. 이른바 黔潭本/辛巳本과 靑龍本(庚寅本)의 판본 싸움이다. 검담(송준길을 배향한 서원 이름)본이란 숙종대 왕명에 의해 鑄字로 간행된 ≪同春堂集≫에 실린 정경세의 연보이다. 정경세가 죽었을 때 그의 손자인 無忝堂 鄭道應이 겨우 16세여서, 그의 次女壻인 宋浚吉이 연보를 완성시켰다. 이에 반해, 청룡(상주에 있는 사찰 이름)본은 류성룡의 본손, 관계된 가문의 인사들, 그리고 합의에 나선 정경세의 본손이 검담본을 수정한 것이다.
류성룡의 후손과, 그의 제자를 선조로 둔 가문의 입장에서는 검담본이 정경세의 스승인 류성룡에 대한 언급과 표현을 매우 온당치 못하고 소략히 처리했다27)는 게 문제였다. 다름 아닌 서인의 영수인 송준길이 연보를 작성하였다는 점도 걸렸다. 그들 입장에서 검담본이 師門을 폄하한 감이 없지 않았다. 우산의 정씨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던지, 정경세 사후에 당초의 검담본을 간행치 않다가 1821년에 가서야 정리하되, 制庵 鄭象履가 “執禮請益于西厓柳文忠公門”이라는 12자를 연보의 綱으로 뽑아서 보완하였다(신사본). 그러나 하회의 풍산류씨 집안은 이 신사본이 송준길의 연보를 全用하였으니 검담본의 “點改”에 불과하고, 더구나 그저 別號와 諡號를 썼을 뿐 “先生”이란 말은 여전히 찾아볼 수 없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결국 이 신사본은 간행되지 못하였다.28)
그 후 류성룡의 후손과, 그의 제자를 선조로 둔 가문의 입장에서도, 陶山再傳의 嫡統인 정경세의 別集에 연보가 오래도록 빠진 채로 있던 게 미안했던지, 은밀히 간행하려는 우산 측의 시도를 아예 차단해버리려 했던 것인지, 어쨌든 정경세의 본손인 鄭象晉·鄭象履와 합의하여 1830년에 상주의 청룡사에서 수정본을 이뤄 몇 질을 印頒하는데, 이를 청룡본 혹은 경인본이라 한다.29) 이렇게 사태는 일단락된 듯했다.
그러나 우산의 정씨 집안은 60여 년 동안 잠잠하던 이 판본 싸움을 재연한다. 그들은 1896년부터 鄭夏黙이 중심이 되어 初刊에서 빠졌던 諡狀·墓表·言行錄을 보완하는 등 별집의 重刊 작업을 본격적으로 개시하면서,30) 바로 청룡본이 아닌 신사본을 대본으로 하고 약간의 補遺 부분을 첨가하였다.
우산의 정씨 집안은 검담본이 “先世로부터 전해 받은 바이니 그 중요함이 자별하고, 先祖께서 간행하신 바이니 가벼이 논의해서는 아니 된다.”라는 先父老의 생각, “뒤에 만일 刊布할 날이 있으면 반드시 검담본으로 시행하라.”는 遺戒를 내세우고, 덧붙여 영남 이북 선배가 선현의 稱謂에 있어 시호를 사용한 경우가 많으니 그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류상조에게 보낸 류심춘의 편지 내용을 근거로 내세웠다.31)
이 문제에 대해, 우천의 풍산류씨 집안은 하회가 主가 되는 공조 태세를 취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천종가의 류주목·류후조가 1872년과 1875년에 하세하고 류도석이 1881년의 李載先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鹿島에 安置되어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로 선생이 우천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다.
선생은 이 문제에 대해 1897년에 용산 이만인과 우산의 정씨 문중으로, 1898년에 하회 문중에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용산 이만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우산의 일이 斯文의 한 변괴라 규정하고 師門을 폄하하는 짓을 시정하는 데 있어, 그의 이해를 구하고 있다. 우산 문중에 보내는 편지(<與愚山鄭氏門中丁酉>)에서는, 먼저 서면이나 방문을 통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우산이 ‘同春本’을 가지고 연보를 중간하는 작업을 몰래 끝낸 사실에 대해 유감을 표하였다. 또 연보의 범례에 師門을 諡·別號로 칭한 것이 다른 문집의 예와 다르다고 자인하고서도, 송준길의 연보를 그대로 木刻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붕당의 대립이 첨예화된 이래 서인의 남인 선배에 대한 흠집잡기는 일상다반사인 데다, 실제 송준길의 연보에는 先先生을 모함한 부분이 있다고도 하였다. 그는 편지의 말미에서 두 가문의 契誼를 환기시키며 합의점의 도출을 희망하였다.
1898년 세밑에 河上에 보낸 편지(<答河上宗中戊戌>)에서는, 하상으로부터 수령했던 龍山本의 校正帙을 인근의 동지들과 검토할까 했는데, 새해가 된 이후에야 여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양해를 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풍산류씨 집안이 우산의 중간본에 맞서 나름대로 定本을 내놓을 목적으로 용산본을 교정하고 있었고, 여기에 선생이 대표격으로 우천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극암문집≫의 <遺事>는 선생의 이런 노력들에 대해 “공이 의리에 근거하여 간절히 책망하니 정씨도 그 잘못을 알아 판본을 거두어 고치겠다고 서약하였다.”라고 하면서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노력이 그렇게 주효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우산은 하회와 우천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중간 작업을 결국 성사시켰던 것이다.32)
선생은 한 문인으로서 문필 활동도 전개했다. 친분이 있던 집안의 선조의 유고, 契·筆帖 등의 序·跋文, 史蹟에 세우는 비석의 글, 건물의 記文 등을 작성해주었다. 대표적으로, 그는 상주향교에서 베풀어진 향음주례의 제명록에 들어갈 서문(1893)을 작성하였고, 상주의 사족으로서 류성룡의 제자였던 金憲의 ≪松灣先生逸稿≫의 발문(1908)과, 선조대 己丑獄事 때 寃死한 崔永慶의 ≪守愚堂先生實紀≫의 중간 발문(1910)을 작성하였다. 이는 그가 사족들 간의 네트워크 내에서 활발히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이 문집의 詩·輓歌·祭文·簡札·記文 등을 통해서 선생의 교유 관계를 살필 수 있다. 눈에 띄는 대로 열거하자면, 通菴 裵晉曦, 蒼厓 高允相, 東旅 安昌烈, 柳渼 韓耆東, 旺山 許蔿, 江村 許烒, 魚命周, 孫永鷹, 金肅源, 용산 이만인, 廣巖 呂錫輔, 石塘 李衡敎, 孫蘭秀, 月湖 金志遠, 상주목사로 부임하기도 했던 李晩胤, 畏堂 李炳葉, 韓斗源, 鄭建鎬, 徐錫元, 痴軒 李中稙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이형교, 이중직, 허식, 고윤상, 이만윤, 손영응, 김지원, 이병엽, 한두원, 정건호, 김숙원, 서석원 등은 선생과 함께 류주목의 <門人錄>에 이름을 올려놓은 이들이며, 특히 김숙원은 선생과는 사돈지간이 되고, 서석원은 선생의 妹弟가 된다. 이밖에 겨레붙이로는 石湖 柳道性, 田園 柳道獻, 此山 柳寅睦, 止菴 柳畯睦, 柳舜睦 등과 교유가 있었는데, 이들도 대개 류주목의 문인들이었다.
선생의 성품은 너그러운 편이었다. 친족을 대하매 休戚을 같이 하였고, 어려운 이들을 扶護하매 인색하지 않았으며, 哀·慶事에도 진심을 베풀었다. 이 때문에 그를 愛慕·悅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아랫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
한 에피소드가 있다. 하루는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런데 촌민들은 자신들의 집으로 가지 않았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바로 선생의 집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마당과 섬돌에 있던 여러 물건들을 정리하여 비에 젖지 않게 갈무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한 이후에야 귀가하였다고 한다. 당시 상주는 동학교세가 치성하여 그들만의 ‘별천지’가 운용되던 곳이 많았는데, 이러한 일화를 통해서 우천의 풍산류씨 집안이 이 시기에도 上下 親和를 바탕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선생은 이런 가운데서도 儒者다운 처세로서 義理에 접근하는 단호한 자세를 유지하였다. 또한 옛사람들의 意趣를 사모하여 그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데 열성적이었다. 그러니, 그가 혼탁한 시류에서 靈光殿과 같은 존재였다는 鄭東轍의 말은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 하겠다.
선생은 1910년 12월 5일, 愚川里第의 正寢에서 68세의 생을 마감했다. 그는 고향의 觀瀾臺에 잠들어 있다. 그는 아동기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아들을 두지 못해 인생의 대부분을 ‘耳耳之歎’으로 몸 둘 곳을 몰라 하였고, 생의 마지막 5년여를 風痰 등 호흡기 질환으로 골골했고, 무엇보다 잠시나마 國恥의 뼈아픈 충격을 경험해야 했다. 더구나 그는 현달하여 화려한 생을 살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이 선생에게 여한이 될 수 있었겠는가? 류후조·류주목의 은덕과 학덕을 입었으니 남들보다 오히려 더 좋은 조건에 있었다 할 수 있고, 柳道徵과 같은 훌륭한 후사를 두어 지금에 이르러 후손들이 번창하며, 지병 없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역사상 희귀할 뿐더러 오히려 더 불행했던 경우가 많으며, 元氣 배양을 위해 지역의 교육 활동 등에 열성적이었으니 그의 책임이 아님에랴. 또 현달하지 못했던 것은 어떤가? 여기엔 다음과 같은 詩도 있다. 補遺를 겸하여 소개한다.
화답하여 류치결 흠목에게 주다. 和贈柳致潔欽睦 말세에 가슴이 탁 트이게 되었지만 末路襟懷覺爽凉 언제나진 시 빚은 조금도 갚질 못했네. 尋常詩債寸無償 배운것 도탑고 논한것 넉넉하매 옥같은 사람이니 學優論贍人如玉 그대 입신양명 못했다 무얼 근심하랴. 之子何憂未立揚 (呂錫輔, ≪廣巖遺集≫ 卷1, 詩)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선생은 상주의 巨儒이자 그의 당백형인 계당 류주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류주목에게서 ≪中庸≫과 ≪大學≫ 등의 경서를 배웠는데, 굳이 독려치 않아도 학업이 나날이 성취되었다. 새벽으로는 가묘를 찾아뵙고 물러 나와서는 책상을 마주하여 공부를 하였으며, 臥病 중이 아니라면 ≪중용≫·≪대학≫·≪詩經≫·≪書經≫을 날마다 송독하는 것을 日課로 삼았다. 한 嶺南儒林으로서 그가 유의한 것은 ≪心經≫·≪近思錄≫, 주자·퇴계의 저술이었다. 특히 그는 일찍이 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 사람이면 예나 지금이나 누군들 마음 없으랴만 人生今古孰無心 성현을 안 배우면 어찌 마음이란 걸 알겠노. 不學聖賢豈識心 만세의 근본은 오직 允執厥中이고 萬世淵源惟厥執 내 한 몸의 주재자는 내 마음이야. 一身主宰是吾心 선유는 마음이 “신명의 집”이라고 했고 先儒曾謂神明舍 후각자들은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 늘 보존했지. 後覺常存孝悌心 이를 통해 참되고 실다운 공부 힘쓰면 由此用工眞實地 이단이 어찌 사악한 마음 부리겠노. 異端焉得逞邪心 <再從姪善初 以心字見寄 因次其韻> 또한 居敬의 家學的 표현인 류진의 “靜坐終日易 操存一刻難”란 시구를 좌우명으로 삼아 이론적인 면과 아울러 마음 修養에도 힘썼다. 한편, 스승인 류주목의 학문적 영향이 가장 잘 묻어나는 것이 禮學에 대한 선생의 소양이다. 류주목은 한 뛰어난 예학자로서, 그가 편찬한 ≪全禮類輯≫은 四禮·五禮로부터 學校·鄕射·鄕飮酒 등의 분야에 걸쳐 제가의 예설을 모아 유대로 엮은 것인데, 變禮의 복잡한 문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33)
선생의 호인 “克菴”은 ≪心經附註≫ 卷1, <顔淵問仁>의 “顔子克己 如紅爐上一點雪”에서 따온 것으로, 그의 사업상 지향이 어디에 두어졌는지를 가장 명료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선생은 류주목의 학문적 그늘 아래서 예학에 대한 소양을 넓혀갔으며, 상당한 수준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는 첫째, 그가 상주향교의 향음주례 이후에 참석자들을 대표하여 제명록의 서문을 지었던 사실, 둘째, 도산서원 尙德祠의 퇴계 위패 도난 및 月川 위패 훼손 사건이 해결된 이후 갖게 될 위안제에서 一獻禮를 쓸 것인지 三獻禮를 쓸 것인지를 서신으로 묻는 李中華·李晩輿에게 답변(<答李孟淵中華希徵晩輿>)을 제공해줬던 사실, 셋째, 1900년 겨울 龍興寺에서 외당 이병엽 등과 함께 류주목의 禮說을 편집했던 사실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풍산류씨 문중의 일원으로서 류성룡 이후의 가학의 계승·발전에 여러모로 기여하였다. 사실상 그의 학문적 경향은 류성룡 계열의 학문적 풍토34)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예학에 밝았던 선생의 학문적 성향을 먼저 거례할 수 있다. 또한 그는 博學風의 면모를 승습하였는데, 經史子集을 눈으로 훑기만 해도 외워낼 정도로 才分이 특출했던 선생은 제가의 학설도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璣衡·地理·曆筭·蓍筮의 법까지 이해의 폭을 넓혔으나, 다만 이를 자처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性理書에만 매몰되지 않고 좀 더 생활에 접근할 정도로 폭이 넓었던 류성룡의 학풍이 그에게서 엄연히 재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 선생은 집안의 실천적 테제인 忠孝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였다. 적이 생각건대, 族叔父이신 鶴栖公께서 일찍이 경현사의 기문을 지으시면서 이렇게 쓰셨다. “문충공의 遺戒詩에 ‘너희 자손들 힘써 삼갈지니, 사업은 충성하고 효도하는 것 밖에 없느니라[勉爾子孫須愼旃 忠孝之外無事業].’고 하셨고, (서애 선생께서) 또 이르시길, ‘선한 일을 힘써 유념하고 선한 일을 힘써 실천하라.’고 하셨다. 생각건대, 제군들은 반드시 선대의 유훈을 욕되게 하지 말아서, 임금께 충성하고 부모께 효도하며, 그 선한 일을 유념하고 선한 일을 실천한 이후에야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말을 세 번 반복해 음미하며 간절히 잊지 못하여 오로지 우리 여러 族君들을 위하여 읊어보았으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柳川亭記>) 류성룡의 유계시에 피력된 충효의 유훈을 體念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면모를 엿보기에 충분하다. 또한 세가 후예로서 잃지 않았던 謹拙에 대해서도, 또 한마디 해 줄게 있으니, 제군들은 이렇게 어리고 건장한 시절에 등골을 꼿꼿이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착실히 노력하여 집안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경하며 책을 읽어 의리를 강론하되, 몸가짐을 잡고 말을 내는 사이에 비루, 패려하고 태만한 버르장머리를 없게 하고 謹拙하고 도타운 기풍을 가져, 사람들로 하여금 그걸 보고는 묻지도 아니하고 丹山의 學契에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하고, 이 계가 헛된 문구로만 귀결되지 않고 성심으로 스승을 높이는 의를 갖게 되었으면 한다.(<會仁契序>) 라고 하며, 제군의 분발을 역설하였다. 근졸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소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덕목이 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기 근졸에의 강조는, 언어가 낭자했던 말세에 그러한 태도를 지님으로써 풍속을 순후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의 훌륭한 鎭定策임을 역설한 것이다. 선생은 일정한 학문적 성과를 쌓은 후, 자연스럽게 남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나아갔다. 이 책 부록의 輓詞·祭文에 보면, ‘侍生’ 혹은 ‘侍敎生’이라 자처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趙尙衍·金有源·金在源·琴德淵·琴九淵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금덕연은 “아! 소자는 변변한 구석도 없었으나, 책상자를 안고 문하에 올랐고, 저의 동생도 함께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선생에게서 師恩을 입었음을 명백히 볼 수 있는 것이다. Ⅲ. ≪克菴文集≫에 대하여 이 ≪克菴文集≫은 선생이 하세한 후 한 세대가 될 무렵인 1938년에 石印本으로 간행되었다. 本集으로만 모두 4권 2책(乾·坤)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크기가 28×20.5cm(半郭: 20.5×17cm)이고 半葉이 10行 20字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異本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같은 판본의 책이 國立中央圖書館과 韓國學中央硏究院 藏書閣 등에 소장되어 있다. 國學電算化로 국립중앙도서관의 電子圖書館과 장서각, 韓國國學振興院 등의 홈페이지에서 이 책의 원문 이미지를 손쉽게 열람할 수 있다.
跋文은 果齋 柳道昇이 지었다. 그는 西厓 柳成龍의 10대손으로 直齋 柳烋睦의 친아들이자 柳源睦의 양자이다. 선생에게는 再從姪이 된다. 이 발문은 이 책이 발간되던 해인 1938년에 지어졌다. 이 발문의 말미에 “이제 공께서 돌아가신 지 지금까지 29년이 되었는데, 맏아들 道徵 씨가 효심이 무궁하거니와, 遺文 약간 편을 수습하여 영원히 전하기를 도모하면서 나에게 교정 작업을 맡기고 인하여 발문을 청하였다. 나는 평일 공의 권애하심을 입은 처지를 돌아보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감히 글이 못났다 사양할 수 없어 그 보고 들은 바를 위와 같이 기록한다.”고 되어 있다.
즉 이 ≪극암문집≫은 선생의 아들 류도징이 선생의 유문 약간 편을 수습하고 선생의 재종질인 류도승이 교정 작업과 발문 제작을 맡아 1938년에 완성된 것이다. 다만, ≪溪堂先生文集附錄≫ 권3, <及門錄>에 “克菴集 二卷”이라 되어 있는데, 이것이 단순한 착오가 아니라면, 4권 2책의 문집이 나오기 이전에 2권 분량의 문집이 草稿 형태로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문집의 구성은 먼저 序文이 없이 바로 문집의 目錄이 나오고, 1책인 乾에 문집의 卷1(詩)과 卷2(書·祭文·告由文)가 있으며, 2책인 坤에 卷3(序·記·跋·遺事·墓誌·墓碣銘·雜著)과 卷4(附錄)가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발문이 이어진다.
권1은 선생이 지은 詩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詩體로 구별되지는 않고, 輓詩가 뒤로 돌려져 있다. 일반 시는 모두 73題 80수이다(回文體 1수). 이 가운데 <贈崔叔度>는 目錄에는 있으나, 문집에는 없어, 여기에 산입치 않았다. 만시는 모두 26제 48수이다. 권2의 서는 31편이고 제문은 9편, 고유문은 6편이다. 권3의 서는 4편, 기는 4편, 발은 4편, 유사는 1편, 묘지는 2편, 묘갈명은 4편, 잡저는 3편이다. 권4의 부록에는 遺事·行狀·묘갈명·輓詞·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誤字는 편지 <與金古菴世洛○辛丑>의 “古巖”을 “古菴”으로, <本鄕校宮鄕飮酒禮題名錄序>의 “大比”를 “大化”로, <遊淸凉山錄>의 “丏邨”을 “丐邨”으로, 만사 <又 金直源>의 “袞鈇”를 “袞鐵”로, 제문 <又 三從孫參奉萬植>의 “買櫝”을 “賣櫝”으로, 같은 곳의 “狷狹”을 “狷挾”으로, 같은 곳의 “玄晏”을 “玄曇”으로, 같은 곳의 “門祚荐椓”을 “門祚荐㧻”으로 한 경우를 지적할 수 있다. 다만, 㧻은 상하다, 해치다의 의미를 띤 椓과 혼용되는 경향도 있다.
이밖에, 목록의 <次姜戚少沙行幌>이 본집에는 <贈姜戚少沙行幌>으로, 목록의 <次景巖齋修契韻>이 본집에는 <景巖齋>로, 목록의 <次生物講會韻>이 본집에는 <生物講會韻>으로, 목록의 <答李畏堂>이 본집에는 <答李畏堂炳葉>으로, 목록의 <與金古菴文顯世洛○辛丑>이 본집에는 <與金古菴世洛○辛丑>으로, 목록의 <祭從叔父文憲公洛坡府君文>이 본집에는 <祭從叔父洛坡府君文>으로, 목록의 <祭石湖翁文 代人作>이 본집에는 <祭族姪石湖翁文 代李中華作>으로, 목록의 <祭李公漢之文 代人作>이 <祭李公漢之文 代作>으로, 목록의 <同福徐公墓所山訟時外裔諸家名帖後>가 본집에는 <同福徐公墓所山訟時外裔諸家名帖跋>로, 목록의 <檄一鄕文>이 본집에는 <檄一鄕文 甲午○代宗姪道奭作>으로 되어 있으며, 목록의 <黃溪瀑㳍>는 본집에는 “합천에 있다[在陜川].”란 주가 부기되어 있다. 또한 목록의 <與金上舍命海肅源>은 실은 그 題下에 모두 3통의 편지가 들어 있다. 이들은 편집상 작은 실수라 할 수 있는데, 이 번역서의 목차는 본집의 제목을 기준으로 하였다. 만시를 제외한 시는 내용상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 家學 등 공부와 관련된 소회를 읊은 시: <癸未立春題軒上>, <讀書有感>, <敬次先祖西厓先生集中韻>, <又次先祖韻贈明玉光植族君>, <蓮菴贈崔上舍極三炳燮>, <再從姪善初 以心字見寄 因次其韻>, <柴桑新歲>, <生物講會韻>, <回文體> · 누정·사찰 또는 그와 관련된 행사 때 지은 시 ㉠ 풍산류씨 문중과 관련된 곳: <屛院獨宿>, <黃猿霜降節 與田園族姪道獻 共賦玉淵亭>, <玉淵亭小集>, <敬次先祖西厓先生麟角韻>, <乙酉仲春 謁屛山書院>, <宿花川書堂>, <敬次蒼石先生題修巖先祖所居佳士里韻>, <玉淵亭重修韻>, <辛卯暮春省義谷先齋>, <辛卯秋 因道伯李 ㉡ 그 외: <吾山堂與諸益共賦>, <敬次愛日堂板上韻>, <次花山書堂修契韻>, <登不知巖精舍>, <道南壇所築牆後 宋聖鍾 以一律 識其事 因次其韻>, <宿道壇>, <大芚菴早發>, <道壇感舊 幷小序>, <次兩巖亭韻>, <次近水亭韻>, <景巖齋>, <留泗陽書堂>, <登觀魚臺>, <壬寅仲夏 留白洞 與諸益共賦>, <謹次順天金氏四君遺墟碑韻>, <次浯川書堂講會韻>, <次杏亭韻>, <重營梧塾韻>, <敬次敬睦齋重修韻 竹巖金氏先齋>, <擎天臺有感>, <登靑龍寺>, <暮春與客登溪亭 二首>, <次陽山刻石韻>, <次道川亭韻>, <吳孝子寅植春雨室韻> · 경치 혹은 뱃놀이, 유람, 旅情을 읊은 시: <道南八景 幷序>, <庚辰七月旣望 與龜洛二寓從及二三客泛舟 自合江亭至觀水樓 攬取江左右十二景 拈韻共賦>, <石田津船遊>, <觀喜方寺瀑㳍>, <溪榭新秋>, <黃溪瀑㳍 在陜川>, <端陽夕湖亭卽事>, <自凁上因往上谷 二首> · 일상적 소회를 읊은 시: <喜晴>, <罷睡>, <偶吟>, <雨中獨坐>, <早春有感>, <辛丑小春 病起 次兒少輩落葉韻>, <閒中偶吟>, <餞春 二首> · 贈遺詩: <次洪應三幽居韻>, <次而悳從松亭韻 幷序>, <柳川亭 敬次先祖西厓先生集中韻 贈箕先寅榮族君>, <謹次族兄都正公榮秩韻 幷序>, <贈姜戚少沙行幌>, <和族從相伯>, <次製荷亭韻 幷序>, <贈再從弟直齋 烋睦> · 행사나 모임과 관련되어 지은 시: <太平宴韻>, <甲寅正月三日 往此山再從兄寅睦家 蘭西兄舜睦適至 因與止菴弟畯睦及金石醒共賦>, <大王大妃趙氏壽宴韻 戊辰十二月六日>, <道南鄕飮酒禮韻> <答李倅晩胤 ○ 甲午>는 1894년 11월에 상주목사로 부임한 이만윤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상주는 동학군의 무장 봉기가 겨우 진정된 상태였다. 선생은 이만윤에게 상주가 갖는 행정상 어려움을 환기시키고, 상주를 안정시킬 방책을 묻고 있다. <答金拓菴道和 ○代宗姪道奭作>은 선생이 그의 종질인 류도석을 대신해 척암 김도화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후로 피차가 서로 권면하여 예전의 좋았던 관계를 회복시켜, 진실로 보내셨던 편지 말씀대로 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라는 사연을 보아, 屛虎是非와 관련된 답장으로 보인다.
<與金月湖>은 北川壇所의 계를 만드는 일과 관련하여 월호 김지원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與族從都正宇睦 ○ 代門中作>은 선생이 문중을 대신하여 柳宇睦에게 준 편지이다. 내용은 류성룡의 둘째아들 柳褍의 후손인 生物派 종손이 요절하여 그 후사를 얻는 데 대하여 협조를 구한 것이다. 문중 대사에 있어 선생의 역할을 엿보게 한다.
<答族姪田園道獻>은 병호시비와 관련하여 족질인 류도헌에게 답한 편지이다. 여기서 선생은 保合 논의에 부정적 입장을 드러냈다. 실제 70년 동안 아주 작은 부분도 보합하지 못했던 것은 호론이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位次의 遷動 문제, 湖上의 위조된 판본의 문제, 西厓와 鶴峯을 순서를 바꿔 칭한 문제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결국 “閉門保合”에 그칠 것이라 하였다. 선생은,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그들의 “예부터 전수한 心法”이라고 다소 격앙된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與高元仲彦亨>은 선생이 그의 처남인 고언형에게 보낸 편지이다. 禮說을 편집하는 일로 고언형을 溪亭으로 청하였고, 겸하여 狀德文에 참고가 될 만한 책을 부탁하였다. <與韓進士南一斗源>에는 다시 병호시비와 관련된 사연이 들어 있다. 여기서 선생은 서애와 학봉의 序次를 정함에 있어, 벼슬로 차례를 정하는 것은 賢人의 차례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는 검제[金溪]의 흉악한 언설이 黨이 갈린 후 80년 이래로 처음 있는 極變이라 규정하였다. 종래 서애가 학봉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1차적으로 그가 학봉에 비해 더 높은 벼슬을 했다는 데에 있었다.
<答洪迺休奎欽 ○ 丁酉>에서는, 陽山書院 터의 陟西亭을 중건하는 일에 대해 치하하였다. <與金古菴世洛 ○ 辛丑>에서는, 류주목의 ≪전례유집≫을 간행하는 일에 대해서, 조속히 교정 작업이 끝나 판각에 부쳐질 수 있도록 尙州 南長寺의 營刊所에 왕림해주기를 청하였다. 여기서 ≪전례유집≫의 간행 노력에 대한 정보의 일단을 얻을 수 있다. <寄徵兒>는 선생이 아들 류도징에게 보낸 편지이다. 선생이 만년에 ≪柳川集≫을 校勘하였음을 알 수 있다.
<祭從叔父洛坡府君文>은 류후조에 대한 제문이다. 류후조와 선생의 관계를 엿보게 한다. <祭高元仲文>은 선생의 처남인 고언형에 대한 제문이다. <祭從叔母贈貞敬夫人延安李氏文>은 류후조의 부인인 연안이씨에 대한 제문이다. <祭堂伯兄溪堂先生文>은 선생의 스승인 류주목에 대한 제문이다. 특히 모친 상중에 의병장으로 출전한 류주목의 出處에 대해서, “집상을 고례대로 하셨으니 남들 질시가 무슨 상관이었겠습니까[持制古例 何恤媢讚].”라 하였는데, 이는 충효가 두 가지의 다른 이치가 아니라는 관점에서 집상 중의 擧兵은 喪禮의 파괴가 아니라 權道였음을 알리는 것이다. <祭李姊氏文>은 眞城 李晩時에게 시집간 선생의 누나에 대한 제문이다. 세 남매의 절절한 삶이 잘 드러나 있다.
<立齋鄭先生墓所豎碣文>은 입재 정종로의 묘소에 비갈을 세우는 것에 대한 고유문이다. 정종로는 류심춘의 스승이었다. 우산의 진주정씨 문중과 우천의 풍산류씨 문중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다음에 실린 일련의 기우문은 류후조의 둘째동생으로서 靑松都護府使에 재직 중이던 柳敎祚를 대신하여 지은 것들이다.
<本鄕校宮鄕飮酒禮題名錄序>는 1893년에 상주목사 윤태원이 상주향교에서 연 향음주례의 제명록 서문이다. 향음주례 실시의 동기와 진행 과정 및 내용, 한말 유림의 현실인식과 대응책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 상주에 대한 자부심도 읽을 수 있다. <菊坡漫言序>는 국파 金奎錫의 시문집에 쓴 서문이다. 김규석은 류주목과 정민병의 문인으로, 선생의 사돈인 金肅源의 아버지이다. <金松灣先生逸稿跋>은 송만 金憲의 시문집에 쓴 발문이다. 김헌은 상주의 유학자로서 류성룡의 제자였으며, 역시 김숙원의 先代이다. <敬書花樹三榦帖後>은 柳宣睦이 河上·生物·柴里 3宗의 10世에 이르는 선인의 遺墨을 모아 이룬 帖子에 써준 발문이다. “花樹三榦”이란 이름도 선생이 지은 것인데, “花樹”는 친족의 모임인 화수회에서 따왔고, “三榦”은 河上·生物·柴里(愚川) 3宗派를 의미한다.
<宗姪縣監公墓誌>는 우천의 종손으로 류주목의 아들인 류도석의 묘지이다. <樂眞軒鄭公杏亭遺墟碑銘 幷書>는 龜巖 李楨의 문인이었던 낙진헌 鄭仁平의 유허비명이다. <族兄大司諫公墓碣銘 幷序>는 대사간을 역임했던 柳致睦의 묘갈명이다. 류치목은 豐安君 柳相祚와 학서 류이좌와 함께 풍산류씨 문중 3大夫로 칭해진 인물이었다. <義隱朴公墓碣銘 幷序>는 戊申亂 때 黃道熙·尹重邦과 함께 선산의 金烏山에서 의병으로 활약했던 朴啓佑의 묘갈명이다. <書堂營建時通告文>은 梧山書堂을 영건할 때 통고한 글로서, 재정적 지원을 호소한 글이다. <檄一鄕文 甲午○代宗姪道奭作>은 동학 무장 봉기 때 의병장으로 추대된 류도석을 위해 써준 격문이다. <遊淸凉山錄>은 1894년 4월 3일부터 동월 20일까지 柳謹睦·柳舜睦·柳畯睦·李中稙·金世洛 등과 함께 한 청량산 유람을 적은 일록이다. 선생은 이 유람에 대해 “장부로서 이 세상에 그저 헛되이 태어난 것만은 아니었다.”라 할 정도로 보람을 느꼈다.
부록의 <遺事>는 선생의 族孫인 柳昌植이 지은 것이다. 선생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를 알 수 있다. 至親인 류후조가 정승의 반열에 올라 그 子姪이 벼슬길에 나설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음에도, 殘編을 음미하고 林下에서 도를 즐겼던 선생의 면모가 나타난다. <行狀>은 族曾孫인 柳永佑가 지은 것이다. 여기서 선생의 가계, 인품, 학문, 행적, 일화를 살필 수 있다. <墓碣銘>은 鄭東轍이 <행장>을 토대로 하여 지은 것이다. 그는 선생이 “높이 솟은 관과 거친 베옷을 하시고 宴席 사이에서 요량하셨고, 훌륭한 말씀과 곧바른 언론은 문자상에 정통하였으니, 창연히 옛사람의 儀範이 있었고 엄연히 덕망 있는 어른의 풍모가 있어서, 위대하게 우리 유림의 靈光殿이었다.”고 칭술하였다.
분명, 선생은 정계나 학계의 괄목할 만한 지위를 점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 밑에서 학문에 열중하며 지역에서 활동한 한 處士였다. 과감하게 규정하자면, 선생은 구한말 상주의 유림이었고, 우천의 풍산류씨 문중의 일원이었고, 계당 류주목의 문인이었다. 따라서 이 ≪극암문집≫은 극암 선생의 개인적 정서와 삶은 물론, 구한말 상주의 유림 사회와 우천의 풍산류씨 문중, 계당 류주목학단의 동향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자료적 가치도 가지고 있다.
1) 선생의 자는, 그의 <행장>·<묘갈명> 등을 따르면 致潔이 되고, ≪豐山柳氏文忠公西厓派愚川世譜≫나 ≪溪堂先生文集附錄≫ 권3, <及門錄>을 따르면 穉潔이 된다. 2) “升春之孫 篤學承家 到老冞勤”(≪商山誌≫, <科第人物>, 柳欽睦) 3) 柳時中 編著, ≪愚川과 先賢≫, 豐山柳氏愚川花樹會, 1999. 4) “飽聞其名 對其人 與之語 果然端士”(≪日省錄≫ 正祖 20年 12月 辛卯) 5) “步趨安徐 容貌端正 頗似學問中人 必非科儒而止矣”(≪日省錄≫ 正祖 21年 12月 戊申) 6) ≪承政院日記≫ 高宗 3年 1月 庚午. 7) 朴時黙, ≪雲牕日錄≫, 壬申(1872년) 八月 十一日癸亥. 8) 권오영, <19세기 안동유림의 학맥과 사상>, ≪조선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돌베개, 2003. 9) “嶺儒會屛山書院 以儀禮事 通文道內 柳世哲 上疏論禮”(徐文重, ≪記聞≫, <典禮故事>, 今上庚子) 10) “文莊公之學 得之於吾先祖文忠公之門 允爲陶山再傳之嫡 淵源之正 有自來矣”(≪江皐集≫ 卷16, 墓誌銘, <立齋鄭先生墓誌銘 幷序>) 11) “西厓先生竹丌 傳于修巖先生 又傳于聘君先生 此葢豐山世之舊物也 余旣贅其門 柳友汝常父 以余讀古書好古 贈之 凡物舊則寶 况文忠公經綸天地之業 貫通古今之學 皆從丌上得之 尤可感發焉”(≪息山先生文集≫ 卷20, 識, <竹丌識>) 12) “到柴里 視外孫女 主人上舍柳尋春 出示家傳竹丌 蓋西厓先生書牀也 先生傳于修巖先生 修巖傳于掌令公 李息山贅掌令公之門 取而新之 識于丌底 還送本家云 道源奉玩 感歎之餘 走草一絶 贈主人而歸”(≪蘆厓集≫ 卷1, 詩, <柴里竹丌>) 13) 修巖宗宅, ≪豐山柳氏文忠公西厓派愚川世譜≫, 2002. 14) 설석규, <월천선생문집月川先生文集 해제>, ≪국학연구≫ 제5집, 韓國國學振興院, 2004. 15) 權五榮, <柳道發․柳臣榮 父子의 삶과 殉國>(「抗日愛國志士 柳道發․柳臣榮 父子의 삶과 殉國」 발표문), 2002. 16) ≪宋子大全≫ 卷205, 諡狀, <愚伏鄭公諡狀>. 17) ≪旅軒先生文集≫ 卷10, 跋, <西厓先生文集跋>. 18) ≪修巖先生文集≫ 卷1, 雜著, <題渭濵明農記>. 19) ≪息山先生文集≫ 卷22, 行狀, <通訓大夫司憲府掌令豐山柳公行狀>. 20) “行不矯激而純實無玷 言不訐直而醞藉中理”(≪息山先生文集≫ 卷22, 行狀, <通訓大夫司憲府掌令豐山柳公行狀>) 21) ≪顧齋先生文集≫ 卷2, 書, <答柳汝三 緯河>. 22) ≪玉川先生文集≫ 卷7, 序, <修巖柳先生文集序>. 23) ≪息山先生文集≫ 卷22, 行狀, <通訓大夫司憲府掌令豐山柳公行狀>. 24) ≪靜窩先生文集≫ 卷2, 挽詞, <挽柳仲和 光洙>. 25) “尋春之弟 承襲家學 博洽經史 號愚溪”(≪商山誌≫, <科第人物>, 柳升春) 26) ≪江皐集≫ 卷7, 書, <答季弟升春從弟抃春晉春>. 27) “愚伏先生年譜草本 蓋出於宋同春所撰 而凡係厓門傳受稱謂等處 率多未安疎漏之端”(韓國國學振興院 陶山書院古文書 <通文53>) 28) “徃在辛巳年間 自鄙家付剞劂氏 而惟我制庵公 以有目無綱 有異於他年譜例 乃於黔潭本中 提起執禮請益于西厓柳文忠公門十二字 引目升綱 不害爲權而合經 而與河愚柳氏相持七八年之久矣 自河上 謄來此本於內浦西人家 傳示鄙鄕曰 全用同春本 則已旣爲㸃改 而不書先生二字 大爲未安 辛巳本 則使之寢而不行”(豊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文書 <通文51>) 29) “年譜之不載於別集 實有欠於尊慕先生之道 故粤在庚寅 鄕道內諸長德 屢次往復於愚山本孫 石坡制庵二公 撰次新編 彙成一書 印頒幾帙”(韓國國學振興院 陶山書院古文書 <通文53>) 30) ≪愚伏集≫ 解題(民族文化推進會, 韓國文集叢刊68) 31) “鄙等先父老以爲 黔潭本 是先世之所傳受 則其重自別 先祖之所刊行 則輕議莫敢 所以青龍別撰之板 緘扄封閉 不曾印布 申戒子孫曰 後若有刊布之日 必以黔潭本施行之意 丁寧教訓 尙在鄙等之耳 (중략) 是故江臯先生 與豐安君書曰 嶺北先輩於先賢稱謂 多用謚號者 少無如何未安之端 則恐不必屑屑於稱謂二字”(豊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文書 <通文51>) 32) 현전하는 정경세의 연보는 송준길이 찬술한 것이고, 우복 종택에 소재하는 正祖 御覽用 淨書本도 그 대본이 송준길이 찬한 것이다(金鶴洙,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藏書閣≫제5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1). 구체적으로 류성룡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萬曆八年조의 大文이 아닌 細注로 소략하게 처리된 “西厓柳文忠公知州事 勸課多士 公賓賓然執禮請益”과, 萬曆二十五年조의 “體察使西厓柳相國 辟爲從事”, 萬曆三十五年조의 “問西厓疾 留半月”, 같은 조 5월 戊辰의 “哭西厓喪” 등인데, 선생이란 표현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또한 연보의 補遺에서도, 예컨대 庚申春조의 “奉移西厓位版於屛山”과 같은 표현이 시정되지 않고 쓰이고 있다. 다만 정경세의 말 등을 직접 인용한 표현에서는 선생이란 표현을 빼지 못했다. 33) 이우성, <계당전서溪堂全書>, ≪한국고전의 발견≫, 한길사, 2000. 34) 이에 대한 가장 명료한 정의는 ≪安東市史≫, <퇴계학의 형성과 전개>의 안병걸의 글을 참조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