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8d7ZgOxIAkk?si=MOZ_VfgcAdqM7BjH
이분이 현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보이는 거야!(어린 왕자)"
필자의 졸작 <무현의 금>을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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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絃의 琴 / 정임표
문학공부에 몰두해 있던 어느 날 신비한 악사 한분을 만났다. 나는 그분을 잘 알지도 못하고 그 분 또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분이 아니다. 나는 그가 타는 금의 소리에 끌려 자다가도 일어나 오도카니 혼자 앉아 있곤 했는데, 그가 금을 타면 소낙비가 내리는 듯, 시냇물에 달빛이 부서지는 듯, 때로는 소복한 여인이 흐느끼는 듯 하다가 어떤 때는 기화요초들이 만발한 정원을 정인의 손을 잡고 거니는 듯 하기도 했다. 그런 날이 여러 번 되풀이 되자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 분을 찾아 갔다.
달빛이 쏟아지는 초가집 툇마루에 늙은 노인 한분이 앉아 있었다. 노인의 손에는 아무런 악기도 들려 있지 않았다. 노인은 양반다리를 하고 소반 앞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사람의 기척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노인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큰 소리로 “어르신!” “어르신!” 하며 불렀다. 노인이 비로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다보았다. 음악 소리가 그쳤다.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금 소리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는데 혹시 방금 어르신께서 금을 연주하셨는지요?”
노인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금의 이름이 무엇이며 지금 그 금은 어디에 있는지요?”
노인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만 느닷없이
“자네는 금이 궁금하여 여기까지 왔는가?”
하고 되물었다.
달빛에 비치는 노인의 얼굴이 온화하고 거룩해 보이기까지 하여 나는 저절로 공손하게 답을 하였다.
“ 그게 아니고 금의 소리에 끌려 저도 모르게 이리로 왔는데 연주하는 분을 만나 한 곡조 가르침을 청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다시 되물었다.
“젊은이는 한 곡조를 배우는 일이 열 곡조를 배우는 일보다 훨씬 더 쉬울 것이라 여기는 가?”
순간 나는 내 말의 실수를 깨닫고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노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학교에서 음계를 배웠는가?”
나는 얼떨결에 “ ‘도래미파솔라시도’ 그 음계 말입니까” 하고 되물었다. 노인은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음에는 도래미파솔라시도의 팔 음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네. 음계와 음계사이에는 수도 없는 음이 있지. 그 음들을 많이 잡아 낼 수 있는 악기가 명기인데 세상에서 가장 여린 금(琴)이 바이올린이지. 바이올린만이 음계 사이에 있는 이러한 미세한 음들을 잡아낼 수가 있지. 세상 사람들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을 가리켜 바이올 리스트라 부른다더군.”
나는 노인의 말이 참으로 황당무계하게 들렸다. 무명베적삼을 입고 상투를 튼 노인이 바이올 리스트라니. 그래서 다시 물었다.
“어르신께서 연주하신 바이올린은 어디 있는지요?”
노인은 툇마루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알듯모를듯한 미소를 짓더니만 오른 손 인지를 펴서 내 가슴께를 겨누었다. 나는 내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내 그림자만이 기다랗다 마당에 드리우고 있었다. 노인은 어리둥절해 있는 나는 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이 혼자서 말을 이어 나갔다.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금이 있다. 그 금은 바이올린보다 몇 만 배나 더 미세하고 여린 악기다. 사람들은 다들 그 금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한다. 그 금(琴)의 이름이 심금(心琴)이다. 보이는 금을 연주하는 사람을 악사라 한다면 보이지 않는 금을 연주하는 악사를 문학가라 부른다. 심금은 새의 날갯죽지 겨드랑이에 붙은 솜털보다 더 여린 것에도 소리를 낸다. 악기를 모르는 자가 악사가 될 수 없듯이 심금을 모르는 자는 문학가가 될 수 없다. 수다와 문학이 다른 점은 소음과 음악의 다른 차이와 같다. 문자로 심금을 울려, 사람을 울리고 웃기고 뛰고 춤추고 때로는 고요하게 잠들게 할 줄 알아야 진정한 문인이라 할 수가 있다.”
말을 마친 노인이 책을 다시 집어 들더니만 달빛아래 펴들었다. 한 개의 달이 즈믄 강물에 비취는 소리가 들렸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었다. 나는 귀신에 홀렸는가 하여 눈을 부비고 노인을 찾으니 노인은 간곳없고 내 발걸음이 어느 빈 초가의 뜰에 머물러 있었다. 월하에 그렇게 혼자 상상하며 홀로 산책하던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