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2주일(다해) 강론
기도하는 원로 사목자의 삶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말씀(루카 9,28s-36)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기도 중에 거룩하게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변모 즉 현성용은 우리도 어떻게 주님 안에서 변화해야 하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기도 즉 영성생활 안에서 우리가 거룩하게 변한다는 것을 이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은퇴를 하면서 특별히 맡은 일이 많이 없으니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그동안 바쁘게 지내면서 사목에 열중하다 보니 조용히 기도할 시간이 없었는데 더 많은 기도를 통해 저 자신을 새롭게 돌아보게 되고 기도 안에서 마음의 참된 평화를 발견합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향심기도를 아침, 저녁으로 20분씩 하게 되니 마음이 풍요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사순절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매일 하며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늘 하던 것처럼 묵주기도 20단을 바치고 자비의 기도까지 하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기도는 우리 생활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기도가 무엇이기에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까?
첫째, 기도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그분의 현존(Presence)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정한 시간을 하느님을 위해 할애하는 것이고 그분과 사랑스런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도 하고 대화도 하며 다정한 친교를 갖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계시를 받고 그분의 사랑의 빛에 반사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반사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몰입되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모습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를 사랑하면 그분의 말씀, 행동, 그리고 그분이 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따라하고 싶듯이 기도를 통해 그분의 뜻을 따라 자연스럽게 모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머리 모양, 옷 모양,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따라 하듯이 말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이는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법입니다.
넷째, 기도는 우리가 흠모하는 이를 그리워하게 하며 목말라하게 합니다. 언제나 다시 보고 싶고 만나고 싶으며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라고 노래한 시편 저자의 말씀을 우리는 이 기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다섯째, 기도는 우리를 영원으로 향하게 합니다.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고 영원히 그분 안에 머무르도록 인도합니다. 수평선이 끝없이 이어지듯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삶, 구원을 얻도록 해줍니다.
여섯째, 기도는 결국 우리가 참으로 주님이신 구세주를 만남으로써 그분의 참된 자녀가 됨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 삶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왜 우리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소중한 것인지 깨달음, 각성을 갖도록 해줍니다. 즉 신앙인으로서 철이 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높은 산에서 기도 중에 예수님을 찬란하게 변모시켜주셨던 하느님은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잡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되며 부활하여 다시 살아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구원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삶일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오늘 제 1독서 창세기의 말씀(창세 15,5-12.17-18)처럼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른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풍요로운 축복, 즉 그 후손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손을 내려주시고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넓은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에서 일찍이 나타났고 이는 아브람의 굳건한 믿음에 대한 것을 의롭게 인정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뜻에서 잘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축복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오늘 제 2독서 필리피서(필리 3,20-4,1)의 말씀처럼 하늘의 시민으로서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시는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있어야 한다고 눈물로써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겨서 음미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찬양의 기도를 하느님께 바쳐드리며 그분의 사랑을 완성해나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도자 보시무스는 수도원장 아르세니우스에게 와서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더 이상 기도를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중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르세니우스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부시무스가 대답했다.
"젊었을 때만 해도 기도를 드리면 마음이 더없이 포근해지곤 했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불같은 것이 타올라 깊은 위로를 맛보곤 한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추어 기도를 드려도 무미건조하고 황량할 뿐입니다." 수도원장 아르세니우스는 아무 말 없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물주전자를 불 위에 얹었다. 그리고 물이 끓기 시작하자 잔에다 얼마간 따라서 보시무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끓는 물을 들이켜 보시오."
보시무스는 마셔 보려고 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직도 펄펄 끓고 있는 물을 어떻게 마신다는 말입니까?"
아르세니우스가 대꾸했다.
"기도도 그와 같아요. 초심자의 기도란 항상 위안이라는 열기가 배어 있어 뜨거운 물과 같답니다. 당신이 뜨거운 물을 마실 수 없듯이 하느님 역시 초심자들의 기도는 제대로 들이키시지 못합니다. 초심자들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위안 때문에 기도를 드리니까요."
"다정하신 원장님,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보시무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수도원장 아르세니우스가 대답했다.
"끓는 물은 식혀야 하듯이, 기도 역시 건조기를 거치면서 식도록 놓아 두어야 합니다. 당신이 지금 같은 상태에서 기도를 계속하기만 한다면 당신의 기도는 하느님께 더 없는 기쁨이 되리라 믿습니다."
펄펄 끓던 물이 충분히 식자 수도원장 아르세니우스는 물잔을 보시무스에게 주었고, 보시무스는 그 잔을 마시면서 깨달은 바가 있어 원장 앞을 물러 나왔다.
[앤드류 마리아,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 성바오로]
기도는 끓는 물과 같아서 우리의 기도가 당장 이루어지기보다는 기다림의 인내를 통해서 진정한 기도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당장 들어주시기 보다는 기도하는 사람이 그 의미를 깨닫고 충분히 소화할 때까지 그 시기를 연장시키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걱정 근심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기도에만 매진할 때 우리의 모습도 서서히 변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진정한 빛과 기쁨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선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