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욥23:10~17
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설교>
욥은 인생의 길에서 행복과 불행 모두를 겪습니다. 욥의 행복에 대해서는 누구나 부러워했겠지만 불행에 대해서는 판단과 비난으로 반응합니다. 어쩌면 그동안 욥의 행복이 부러웠던 것에 대한 복수의 기회로 삼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는 없는 행복이 욥에게만 있을 때의 부러움의 감정이 욥의 불행을 보면서 ‘내가 더 낫다’는 쾌감이 판단과 조롱으로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길을 가면서 그러한 것을 충분히 경험합니다. 나에게는 없는 행복이 타인에게만 있다고 생각될 때는 부러움이 되었던 것이 타인이 행복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면 쾌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생각하는 욥 친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제가 자주 말씀드렸던 친구들의 문제는 욥의 재앙의 원인을 죄로 여기는 시각이었습니다. 죄로 인한 재앙이기에 죄를 해결하면 재앙도 해결된다는 시각이 잘못되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에 부합되는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는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은 욥을 순금 같은 신앙인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단련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고난을 받는 것도 순금 같은 신앙인이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단련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단련한다고 해서 인간이 순금 같은 존재로 변할 수 있을까요? 순금 같다는 것은 다른 불순물이 들어 있지 않은 금이라는 하나의 성분으로만 존재하는 깨끗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질 자체가 악한 인간이 단련을 통해서 순금 같이 변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고통이 되는 상황을 많이 접해 보셨을 것입니다. 비록 욥처럼은 아니라 해도 고통을 겪으며 가는 것이 인생길입니다. 그러한 고통이 과연 여러분을 달라지게 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의 강도가 약해서 효과가 없는 것일까요? 그러면 순금 같은 사람, 군금 같은 신앙이 되기 위해 욥과 같은 강도의 고난을 받을 생각은 있습니까? ‘아마 지금 수준의 믿음으로도 충분하니까 고난은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요?
욥은‘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도 자기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내 길을 내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가는 길에서 주어지는 좋고 나쁜 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괜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이런 뜻으로 고난을 준다’라고 말씀이라도 하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전혀 통보 없이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주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좋은 것이 주어지면 행복하다 하고 나쁜 것이 주어지면 불행하다 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편으로 살면 미래가 원하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기대를 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인간의 허약한 생각과 환상일 뿐입니다.
욥이‘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고 말하는 것은 미래의 인생에 기대를 건다기보다는 지금까지 나아온 것이 자기의 길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에 의한 길이었음을 고백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 또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가게 됨을 믿는 믿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가는 길을 아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고통이 있게 하셨다면 그것은 정당한 일일까요 불의한 일일까요?‘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무조건 정당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게는 반항하면 안된다는 고정된 인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신앙에 의한 고백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나는 행복만을 누려야 할 자격과 이유가 있는가?‘나는 고통을 누리면 안되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이 질문에 대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답은‘없다’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신앙의 명목으로 행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가는 길을 아신 하나님이 우리의 길에 행복만 있게 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친구들의 본질적인 문제는 인간됨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 하나로만 모든 문제에 접근할 뿐입니다.
10절이 공동번역에는“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다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로 되어 있습니다. 단련이라는 말 대신에 털고 또 턴다는 말로 번역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더 본문의 의미를 깊이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을 아무리 턴다 해도 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욥의 죄 여부와 무관한 하나님의 뜻에 의한 행복이고 불행이기에 욥의 재앙도 죄와 무관하다는 결론입니다. 욥을 털고 털어도 욥의 죄와는 무관한 재앙이기에 비록 재앙을 겪고 있긴 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길을 아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욥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욥이라는 인간의 본질 자체가 순금처럼 깨끗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순금 같이 되어 나온다는 욥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친구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함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욥의 죄의 행위에 초점을 두고 재앙을 해석할 뿐입니다.
11-12절을 보면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교만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욥은 재앙 받기 전의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재앙 받기 전에 욥은 죄를 멀리하며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재앙이 주어지는 것에서 하나님은 욥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3,14절에서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것, 작정하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은 인간과 타협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즉‘회개하면 재앙에서 건져주겠다’는 것이나‘신앙생활 잘하면 복을 주겠다’는 조건적 거래가 없습니다.
타협을 위해서나 거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인간이 그만한 위치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과 거래 할 수 있는 조건과 위치에 있다면 예수님이 굳이 세상에 오실 이유는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욥 친구들은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그러면 욥이 자기의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아시고 따라서 재앙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까요? 비록 재앙이 있어도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을까요? 여전히 욥은 답답함과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15-17절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신앙은 내가 평안해 지는 것을 목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신앙의 길은 내 힘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도 나의 힘이나 열심과는 무관할 뿐이고 오직 하나님의 열심과 신실하심에 의한 결과임을 믿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믿음에 있는 것이 순금 같은 것입니다. 나의 행위는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