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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앙골성지
홍산(鴻山) 도앙골은 옛 교우촌이 있었던 유서 깊은 순교 사적지로
이존창(루도비코)의 전교활동에 의해 교우촌을 이룬 곳이며,
1850년 최양업 도마 신부가 첫 사목보고서 를 썼던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김사범, 김 루카, 김 바오로, 오 요한, 오 시몬 등 다섯 분이
공주감영으로 잡혀가 순교한 교우촌이다.
현재 이곳에는 최양업 신부의 시성을 바라는 기념비가 마련되어 있으며,
기도의 집인 “우애의 집”이 있다.
현재의 행정 명칭으로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의 깊은 계곡을
‘도앙골’이라고 오래전부터 일컬어왔다.
‘금지리(金池里)’라는 동리 명칭은 그 계곡이 흘러내린 월명산 정상부(上端部) 아래에
금지사(金池寺)라는 고찰이 소재한데서 연유한다.
금지사 본전(本堂)의 뒤편 바위 밑에서 솟는 샘물은 특이한 약수로 알려져 있는데,
그 샘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물가의 좌우로는
산복사(일명 개복숭아)나무가 많이 자란다.
봄철에는 그 계곡 따라 붉은 복사꽃이 굽이쳐 피고 산골 가득 그 향기가
채워진다하여 ‘도원곡(桃園谷 혹 桃花谷)’이라 일컫던 산골 이름을
‘도왕골’ 또는 ‘도앙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홍산(鴻山)이라는 고을 명칭이 한국 천주교회 초기사 및 박해시대와
그 후대의 문헌들 가운데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사에 관련하여 ‘홍산’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내포(內浦)의 사도라 일컬어지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의 이름과 더불어 나타나고 있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이존창이 신해박해(1791) 때 체포되어
충청 감영(공주)에서 풀려나온 후
고향 여사울을 떠나 피신한 곳이 홍산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이존창의 전교활동에 의하여 신앙의 터전이 된
‘홍산 지방’의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룬 곳으로 도앙골이 지목되고 있다.
도앙골에서 잡혀간 순교자들과 출신 신자들과 관련하여
그 교우촌 형성의 정황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앙골 출신 순교자들을 다수 찾아낼 수 있고,
갈매못에서 병인년에 순교한 분들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사람들 가운데
‘홍산 도앙골’의 신자가 아주 적극적이었으며,
황석두(루카) 성인의 유해를 우선 모신 장소가 도앙골 고개 넘어
‘삽티’라는 곳인 걸 보면 이 도앙골은 일찍이 교우촌을 이룬 곳임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이 도앙골은 우리의 두 번째 방인 사제인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가 귀국하여
첫 번째의 편지를 쓰신 곳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가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여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50년 1월(혹 1849년말)이다.
최 신부는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다음
곧바로 전라도를 시작으로 공소 순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6개월간 5개도를 두루 돌았는데, 그해 가을에 자기 은사인
르그레즈와(P.L.Legregeois)신부에게 그간의 활동보고를 올리는 편지를 썼다.
그의 ‘귀국 후 첫 번째 서한’인 이 편지는 1850년 10월 1일자로 작성되었으며,
그 발신지를 ‘도앙골’이라 명기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 귀국하여 선종하기까지 12년 동안의 사목활동 중에
그분의 은사인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
도앙골에서 쓴 첫 편지가 가장 긴 문건이다.
그 편지에서 자신의 순방활동 중 발각될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을 늘 직면하고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
어떤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이장에게 달려가서 수상한 사람이
(혹 서양 사람이) 잠입했다고 알리는 바람에
이장이 마을 사람들을 소집하여 잡아 죽이자고 의논을 하는 중에
밤을 지새워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쓰고 있다.
‘도앙골’에서는 지난 2011년 12월 22일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249 현지에서 전임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 주례로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 제막식을 열었다.
해미성지 주임 백성수 신부의 글씨로 ‘鐸德 崔良業 諡聖祈願碑
(탁덕 최양업 시성기원비)’ 라고 한자로 새겨진 기원비는 높이 약 7.5m
(비석 머리 포함)로 비신(碑身, 비석 몸체), 비석 머리, 비석 받침 등을
모두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기도의 집은 2011년 9월 29일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의 주례로 축복식을 봉헌했다.
서짓골성지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의 멍덕봉(명덕산) 기슭에 위치한 "서짓골"은
옛적에 박해를 피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다수 은거했던 곳이며,
병인대박해 때인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다섯 성인 가운데 성 황석두 루카 회장을 제외한 네 성인의 유해가
1882년까지 16년 동안 안장되었던 곳이다.
순교한 다섯 명의 성인 중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는
184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1857년 보좌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가 순교하면서
1866년 3월 7일 교구장이 되었으나 4일 만인 11일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그의 복사로 활동하던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카)가 함께 체포되었고,
이어 인근에 피신해 있던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와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가
더 이상 신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자수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3월 23일(음 2월 7일)에 군문효수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때 충청도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장주기(張周基, 일명 樂韶, 1803~1866, 요셉)도
이튿날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섯 성인 중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는 곧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 졌고,
나머지 네 유해는 3일 뒤 형장의 모래사장에 묻혔다가
6월 초 신자들에 의해 홍산 남포의 서짓골로 이장되었다.
네 성인의 유해는 장주기 성인의 아들 장노첨의 간청으로
"서짓골" 이화만(바오로)과 그의 아들 이치문(힐라리오) 및
"도앙골" 김순장(요한 금구)의 주도로 그해 4월 8일(양력 5월 21일) 이후
갈매못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곳에 1차 암장하였다.
그러나 그 암장묘를 산짐승들이 해칠 우려 때문에 안전지대로 모시기로 하여,
"도앙골"에 사는 김순장 요한 금구를 만나 의논이 되어 그로부터 경비를 충당 받고,
멀리 공주 국실(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에 사는 신 회장과
이치문 가족들의 추렴을 보태서 오천에서 삯배를 빌려
보령→남포→부사만→완장내 포구(현 웅천 하수종말처리장)까지의 해로와
웅천천을 거쳐 이동한 다음에 육로를 통하여 남포 서짓골까지 유해를 운송하여
서짓골 담배밭 한가운데에 광중 4개를 파고 봉분은 하나로 하여 안장하였다.
유해 운송과 안장을 담당하였던 "서짓골" 신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후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하였고,
나머지 신자들은 차차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서짓골"을 떠나게 되었다.
이 성인들의 유해는 그로부터 16년 후 파묘되어
1882년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용산 신학교와 명동대성당에 머물다가
지금은 절두산 성지에 모셔저 있다.
그러나 이 4위의 순교성인들 유해가 육탈(肉脫)되어 그 뼈들만 옮겨가고
그분들의 살이 흙에 섞여 남은 진토는 아직도
이 서짓골 외교인들의 묘지들 사이에 묻혀 있다.
※ 서짓골 성지 봉헌식
대전교구 하부내포성지(전담 윤종관 신부)는 2013년 10월 31일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67-2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서짓골'성지 봉헌식을 거행했다.
봉헌식에는 유 주교를 비롯해 사제단 20여 명, 파리외방전교회원 서봉세 신부,
수도자, 평신도 등 800여 명이 함께했다.
서짓골 성지는 2013년 5월 미산면 평라리 일대 886㎡(268평) 크기 시유지에
6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부지를 정비하고 화장실과 파고라(정자), 주차장 등
기반을 조성한 후 야외 제대와 순교자 현양비, 성지 안내 비석,
성역 표지 시설공사를 마치고 이번에 봉헌식을 갖게 됐다.
무게가 50t이나 되는 제대석은 오석을 3.6×1.7×1.35m 크기로 잘라 만들었으며,
전면에 서짓골에 묻혔던 네 성인의 유해를 새겨 성인 무덤 모양으로 형상화했다.
8m(좌대 1.5m 포함) 높이 순교자 현양비에는 '한빛이어라,
임께 다다른 숨'이라는 뜻의 '광영위주치명(光榮爲主致命)' 한자 구절을 새겼다.
보령시 측에서 만든 파고라는 다블뤼 주교의 한국식 이름인
'안돈이(安敦伊)'에서 따와 '안돈정'으로, 제대석 주위는 '돈이정원'으로 각각 명명했다.
안돈정은 순례자들을 편안하게 맞는 정자,
돈이정원은 후덕함이 넘치는 정원이라는 뜻이 담겼다.
이로써 서짓골 성지는 2011년 9월
충남 부여군 내산면 옛 교우촌 도앙골 기도의 집인 '우애의 집' 축복과
지난해 11월 천방산 줄기 옛 교우촌 산막골 작은재 줄무덤 터 현양에 이어
하부내포성지에서 세 번째로 봉헌된 성지가 됐다.
삽티성지
부여 삽티는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 루카 성인이 안장된 곳이다.
병인박해(1866) 때인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섯 명의 성인,
즉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와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카) 회장과 장주기(張周基, 일명 樂韶, 1803~1866, 요셉) 회장은
그 머리들을 사흘 동안 장깃대에 매달았다가
그 몸과 함께 아무렇게나 모래밭에 군인들이 묻었다.
이에 다섯 성인 가운데 황석두 성인의 시신은
그 조카이자 양자인 황천일(요한)이 주선하여 황기원(안드레아) 등의 가족들이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거두어 현 홍산면 상천 2리에서 내산면 금지 2리로 넘어가는
지방도의 고개인 "삽티"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안장한 곳으로 추정되는 홍산 삽티의 "즘터"에서는
1964년에 산림개간 작업을 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박해시기의 성물(聖物)이 담긴 옹기가 발견 되었다.
당시 산림작업에 참가하여 현장에서 그 발견을 목도한 박종선(안드레아)은
현재 금지2리(산정말)에서 살아온 신자로서 그 사실을 증언한다.
그 "즘터"는 금지2리에서 삽티를 남쪽으로 넘어 홍산면 상천2리에 닿기 전
오른쪽 계곡 너머 경사지에 위치한다.
그 경사지는 상천리에서 도앙골(내산면 금지1리)로 넘어가는 오솔길의
성화당 고개 아래 계곡과도 만나는데, 그 현장은 현재 개인사업자가 절개 평토하고
여러 동(棟)의 공장을 건축하였다.
그 경사지였던 "즘터"는 아마도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였고
성물이 담긴 옹기도 황 성인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차기진 박사는 추정하고 있다.
그 "즘터"의 윗자락은 모 문중의 재실과 묘원이 10여 년 전에 조성 되어 있고,
그 옆 경사지 일부를 천주교회 측에서 2013년 초에 매입하여 성역화를 계획하고 있다.
도앙골의 신자들은 아마도 삽티의 그 "즘터"로 넘어 다니며(성황당 고개를 넘어)
홍산 지역의 다른 곳 신자들과 연통하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금지1리의 주민들도 도보로 홍산 읍내 방향에 일보러 다니던 과거사를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성물 옹기를 발견한 곳을 "즘터"라 일컫는 것으로 추정하건대,
"삽티 교우촌"의 잔류 신자들이 대를 이어 살던 옹기 제작지로 추정할 수도 있다.
삽티 계곡은 황석두 루카 성인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황기원(안드레아)과
황천일(요한)이 주도하여 교우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이었다.
그곳에 황석두 루카 성인은 산막골에서부터 가끔 찾아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이 황씨 조카들도 잡혀가 서울에서 순교하게 되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를 안장해드린 사람들마저 순교하여
그 후 정확한 위치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전주교구 정읍 신성리 공소에서 살던 황 마르타는
1922년 4월 6일 정식 증언자로서 치명자들에 대한 증언을 하였는데
그는 황석두 성인의 종손녀(從孫女)로서, 그의 백부인 황 예로니모가
직접 갈매못에서 치명 장면을 목격하고 와서 들려준 얘기를 증언하였다.
시복재판에서 증언하기를 갈매못 모래밭에 가매장된 황석두의 시신을
황석두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황천일 요한이 4월 그믐에서 5월 초승 사이에 수습하여
홍산 삽티에 이장했는데(《병인박해 순교자 시복재판기록(1차)》6권 1095쪽과 1111쪽),
"4월 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鴻山)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1964년에 그곳 일대를 개간 작업하던 외교인들이 항아리와
그 속에 들어 있는 십자가 및 성모상을 발굴하였다.
그 발굴 유물은 지금 서울 절두산 성지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그 유물이 발굴 된 그곳은 아마도 황석두 성인의 유해 안장 사연과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추정지는 신천 강씨(信川康氏) 종산의 재실 뒷편이다.
대전교구 하부내포 성지 전담 윤종관 신부는 최근 황석두 성인의 추정 안장지 일대
8만 2500㎡(약 2만 5000평)를 매입해 훗날의 성지 조성에 대비하고 있다.
첫댓글 전국 성지순례를 마친 교우를 보고 몹시 부러웠습니다.
두 가족이 어울려 하였다는데 전 운전을 못한 관계로
엄두도 못 냅니다.옆지기도 장거리 운전을 피하고 있으니까요.
앉아서 이곳저곳 성지를 훑어봅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전교구] 도앙골성지, 서짓골성지, 삽티성지 등 3곳의 성지에 대한 설명과 사진 그리고 영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