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매번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오직, 예수주의 신앙을 추구해야 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오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런 제목의 이해로 오늘의 말씀을 받기를 바랍니다. 오늘 제가 전할 말씀의 제목에 나오는 오직, 이라는 부사는 복수, 부사가 아닙니다. 단 하나를 의미하는 절대 단수, 부사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 주(主) 자에 해당하는 이 예수주의라는 표현도 이 세상의 그 어떤 다양한 주,의와 비교할 수 없는 절대 1인칭 단수 대명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왜! 오직, 예수주의 신앙을 추구해야 하는가?" 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요즈음 우리 한국의 기독교에는 노골적으로 드러난 매우 부정적인 난제들이 있습니다. 이런 불법에 해당하는 문제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주인이고,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배제된 모양이나 형식주의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사자성어처럼 요즘의 우리 한국의 기독교에는 예수 영접 믿음을 통한 절대 예수가 주인되는 예수주의 신앙과 성품이 있는 삶은 실종되고 오히려 그 껍질에 해당하는 피상적 형식주의를 우리 기독교의 주인과 주체와 목적으로 추구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에서 정해진 여러 규칙이나 예전, 또는 그와 관련된 여러 형식을 쫓아 행하는 모든 일들은 매우 소중합니다. 각각의 교인들이 교회에서 물 세례를 받고 성례전에 참여하는 일은 매우 소중합니다. 장로와 권사, 또는 집사와 같은 직분을 받는 일도 매우 소중합니다.
같은 의미의 말씀으로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일이 매우 소중합니다. 물론 예배 중에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도 매우 소중합니다. 매번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송을 드리는 것도 너무 소중합니다. 또한 남달리 온 몸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매우 소중합니다.
또는 어떤 특별한 사명자가 신학을 하거나 또는 성경 제자 훈련에 집중하는 것도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일과 형식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 그 나라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과정이고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소중한 과정과 형식이 아무리 소중해도 그 모양이나 격식, 형식이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어떤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여러 격식과 형식은 강조하고 집착하면서도 정작 그 격식과 형식의 주인이시고 주권자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그 의 성품과 삶은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 옥한흠 목사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한평생 몸바친 제자 훈련은 실패한 훈련이라" 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꽤 긴 기간 동안 사랑의교회에서 제자 훈련을 받았던 수 많은 교인들이 "제자 훈련"이라는 그 과정과 형식에는 열심했지만 정작 그들의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은 온갖 "불법과 불의, 교만, 허세, 허영, 사치, 간음, 방탕" 에 연루된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겉으로만 율법이라는 규칙과 형식적 행위(안식일, 기도, 금식, 등)는 철저히 지키면서도 그 율법의 주인이시고 그 형식을 만드신 하나님께는 진정한 경배심이 없었던 것과 일치합니다. 또한 모든 율법의 완성을 일컷는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섬김이 없었던 것과 일치합니다.
이런 모순된 이유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뼈와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도다"(23:27) 라는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정코 우리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예수님은 4복음서를 통해 " 나, 또는 내가, 나의." 라고 하는 절대적 1인칭 단수 대명사를 수십회 사용하셨습니다.
이만큼 우리 예수님은 우리 기독교의 절대 주인이고 주권자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 기독교의 절대적 근원이고 근본이고 원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필연코 예수가 주인이 되는 예수주의 신앙과 그의 성품과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우리 한국의 기독교회 안에는 여전히 예수가 주인이 되는 예수주의가 무시되고 배제된 채, 신학에 집중하는 신학 형식주의자가 있습니다. 같은 의미에서 오직 교리를 강조하는 교리 형식주의자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목회자는 오직 설교에만 집착하면서 그 설교가 자기 신앙의 중심이 되고 목적이 되는 설교 형식주의 목회자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신학에서는 기독교 개혁자 칼빈이 주인이 되는 칼빈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칼빈주의자가 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예수 영접 믿음을 통한 예수가 주인이 되는 예수주의 영성을 품은 삶은 없고 오직 교회의 예배를 강조하는 예배 형식주의자가 있습니다. 같은 의미의 뜻으로 예수주의 영성과 성품을 품은 삶은 없고 오직 기도를 강조하는 기도 형식주의자가 있습니다.
또 어떤 교인들은 오직 물질적 돈 축복이 진정한 축복이라고 말하면서 오직 물질의 물량적 축복을 추구하는 기복주의자가 있습니다. 또 어떤 교인들은 자기 스스로 참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오직 세상을 사랑하는 세상적 세속주의자가 있습니다.
또 어떤 교인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시키고 오직 은사적 신비에 집착하는 신비주의자가 있습니다. 또 어떤 교인들 중에는 자기의 심령 속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에 합당한 영성과 삶은 없으면서 오직 세상의 종말에 집중하는 종말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또 어떤 교인들 중에는 진정한 복음의 진실과 진리를 전혀 깨달아 알지 못한 채 무조건 열심하는 맹신주의자와 광신 주의자가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요즈음의 우리 한국의 기독교회 안에는 이와 같은 피상적 어둠의 타성에 깊이 빠진 지도자와 교인들이 분명코 있습니다.
다시금 거듭 말합니다. 요즘의 우리 한국의 기독교회 안에는 기독교회의 근본 원형이시고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배제된 피상적 형식주의가 너무 심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부정적 타성의 "매너리즘,mannerism"에 대하여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Tolstoi"는 악마의 이빨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악마의 이빨은 자기를 망하게 하고 남을 망하게 하는 해악한 이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 요즈음의 우리 한국의 기독교에 만연한 부정적 의미의 타성은 매우 위험한 수준에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타성 정도가 너무 심해서 변화의 희망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돌처럼 굳어버린 타성의 "도그마,δογμα" 신념에 종속된 기독교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들은 자기들의 신앙에 무엇이 문제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무감각한 교회의 지도자와 교인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여기에서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큰 물줄기와 같은 주류에 속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피상적 형식주의 신앙을 자기의 눈으로 읽거나 귀로 듣더라도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과 오해된 모습들을 통해서 맹인된 타성의 병적 증상이 얼마나 심각하고 위험한 영적 중병인지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치명적 신앙의 문제들을 올바로 파악하고 자기의 신앙을 자기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더불어 항상 깨어있으면서 특히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가 주인되는 예수주의 믿음으로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항상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