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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옛길 걷기
춘천의 모두산악회 회원 45명은 대관령 옛길 걷기를 하였다. 일부 회원은 옛 대관령휴게소가 있던 고속도로준공기념비에서 제왕산을 경유하여 주막집 쪽으로 하산하였으나 우리 금병회원등 20여명은 대관령옛길 표시석이 있는 반정에서 주막집을 경유하여 대관령박물관 쪽으로 걷기를 하고 강릉 경포대 벚꽃축제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주문진 바다가에서 맛있는 생선회로 회식을 하고서 동해북부고속도로를 달려서 속초 울산바위 앞을 지나 미실령을 넘어 춘천으로 향하였다.
대관령은 큰 고개다. 한계령, 미시령, 진부령, 백봉령과 함께 백두대간을 넘는 5대령 중의 하나로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 지방을 연결하는 길 중에서 가장 이용량이 많다. 대관령을 넘는 길은 세 곳이 된다. 첫째는 골짜기를 따라 단거리로 개설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대관령 옛길이며, 둘째는 차량을 위해 개설된 신작로가 1975년 영동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확장된 도로다. 셋째는 대관령을 관통하는 일곱 개의 터널 구간을 통해 영동과 영서를 단번에 연결한 지금의 영동고속도로다.
대관령을 넘는 방법이 차량으로 바뀌면서 대관령 옛길은 일찍이 폐쇄되었다. 그러나 차도가 별도의 노선으로 개설되면서 도보로 올라야 하는 옛길은 다행히 옛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다.
대관령은 삼국시대부터 문헌에 지명이 기록된 곳으로 영동 사람들에게는 내륙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고개가 하도 높고 하늘이 낮아서 고개 위가 겨우 석자’라는 말이 전해지는 대관령은 고려시대 이래 주요 교통로로 수많은 민중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대관령의 명칭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곳 주민들은 예로부터 대관령의 고개가 워낙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을 빌려 대관령이 되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유래로는 영동 지방을 통과하는 ‘큰 관문에 있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대관령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차량을 이용하기 때문에 별일 아니지만 옛날에는 매우 힘든 고행길이어서 그야말로 울고 넘는 고개로 이름이 자자했다.
대관령은 신라시대에는 대령(大嶺), 고려시대에는 대현(大峴), 또는 굴령(堀嶺)이라 했으며 조선시대 《태종실록(太宗實錄)》에서는 대령산(大嶺山)이라 불렀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대관령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우리들이 어릴때는 대관령을 "대골령"이라는 사투리로 불렀었다.
대관령 옛길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 사이에 위치한 고갯길이다. 정상은 해발고도 832m이며 동쪽사면으로는 남대천이 발원하고 있다. 도보로 고개를 넘던 시절에 이용됐던 대관령 옛길은 성산면 어흘리로 들어가면 계곡으로 형성된 하천을 따라 이어진다. 이 길은 원울이재를 지나 계속된다. 원울이재는 아래제맹이(하제민원)와 웃제맹이(상제민원) 사이에 있는데 강릉에 부임한 원님이 두 번 울었다는 고개다.
첫 번째는 한양에서부터 험한 고갯길을 지나온 원님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고, 두 번째는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원님이 강릉의 후한 인정에 감동해서 울었다는 것이다.
대관령은 강릉의 진산이기도 하다. 강릉 지역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던 국사성황당이 위치한 곳으로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대관령은 영산(靈山), 신산(神山)으로 많은 전설과 민속이 전해진다. 신령스러운 장소인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4월 15일에 ‘대관령산신제’ ‘국사성황제’가 열린다. 삼국 통일을 이룩한 김유신장군을 대관령 산신으로 모시고 있고 강릉 출신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고승인 범일을 국사성황신으로 모시고 있다.
대관령도로 정상에 세워져 있는 대관령 표시석
반정에 세워져 있는 대관령옛길 표시석
옛 고속도로휴게소 자리에서 일행의 단체사진
옛 대관령휴게소 주차장에는
강원도에서 설치한 풍력발전기가 여러대 있다.
등산 안내 간판
대관령 옛길 등산코스 지도.
조선 후기 정조시대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그린 대관령 그림
반정의 구 영동고속도로에서 옛길로 내려가는 입구에 세워 놓은 대관령 옛길 표시석
반정(半程)은 강릉 사람들은 이 반정을 ‘반쟁’이라고 한다. 고갯길의 절반 정도에 위치한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지명이므로 옛날에는 이곳이 대관령옛길의 중간지점인 것이었다 금병회 회원
일행
가파른 하산길 시작
사임당 신씨의 시판 조선시대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친정이 있는 강릉을 떠나서 대관령을 넘으면서 이 고갯마루에 올라 산 아래로 멀리 펼쳐진 고향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았다. 신사임당은 고향집의 노모를 떠올리고는 애틋한 마음에 젖는다. 친정 어머니가 계신 강릉을 떠나 서울로 가는 신사임당이 대관령을 넘으며 지은 시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慈親鶴髮在臨瀛 이몸은 홀로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身向長安獨去情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回首北村時一望 흰 구름만 저문산을 날아 내리네-白雲飛下暮山靑 』
첫번째
휴식
두번째
휴식
강릉이 본관인 조선 초기의 학자, 문인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대관령 한시비
『大嶺雲初捲(대령운초권) 대관령 구름이 처음 걷히니 危顚雪未消(위전설미소) 꼭대기의 눈이 아직도 남아있네. 羊腸山路險(양장산로험) 양장처럼 산길은 험하기도 한데. 鳥道驛程遙(조도역정요) 새의 길 같은 역으로 가는 길은 멀기도 하네. 老樹圍神廟(노수위신묘) 늙은 나무 신당을 에워싸고 晴烟接海嶠(청연접해교) 맑은 안개 바다 산에 접했구나. 登高堪作賦(등고감작부) 높이 올라 글을 지으니 風景使人遼(풍경사인요) 풍경이 사람의 흥을 돋우네』
조선 말기의 학자, 문인이였던 남당(南塘) 韓元震(한원진)의 대관령 한시비
『鳥道懸天去(조도현천거) 새가 다닐 험한 길은 하늘에 걸렸고 我行在半空(아행재반공) 이 길을 가는 나도 반공중을 걷고 있네 山蓮雲岳白(산연운악백) 연이은 산들에는 눈이 내려 흰 빛이고 水湯火輪紅(수탕화윤홍) 물을 붉은 해에 씻기어 붉게 비친다 關海天里遠(관해천리원) 훤히 트인 바다는 아득히 천리에 뻗었고 雲烟一望通(운연일망통) 구름은 한 눈에 시원히 트였구나 平生四方志(평생사방지) 평생에 품었던 온갖 뜻이 今日駕長風(금일가장풍) 오늘에야 긴 바람을 타는구나』
강릉 출신 소설가이며 대학교수를 역임한 작가 신봉승의 시비
『저기 물안개 소낙비 아련한 산을 그려도 움직이는 한 폭의 비단 저기 빨간 단풍으로 색칠한 산을 어연히 손짓하며 우릴 부르네. 대관령 아흔 아홉 대관령 구비 구비는 내 인생 초록물들이면서 나그네 되라네. 저기 찬바람 하얀 눈 소복한 산을 누구를 기다리다 봄은 머언데 저기 진달래 철쭉으로 불타는 산을 구름도 수줍어서 쉬어 넘는데 대관령 아흔 아홉 대관령 굽이굽이는 내 인생 보슬비 맞으면서 나그네가 되라네.』 ♪
관동대로, 대관령옛길과 조선시대 교통로 표시판
옛날 주막터에 초가로 복원되었다. 대관령 옛길을 넘나드는 많은 길손들이 지치고 허기진 몸으로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다.
주막터의 초가집 복원
설명판
하제민원마을에 있는 식당
건물들
일행의
점심시간
우리 일행의
점심시간
눈 녹은 물이 작은 폭포를 만들었다.
많은 눈 녹은 물이 고여 소를 만들었다.
반정에서 6.2km 거리를 3시간 동안 걸어서 내려왔다.
대관령 옛길 시작지점인 제민원 대관령박물관 주차장의 누각에서 잠시 휴식
대관령박물관 건물- 시간이 없어 둘러 보지 못하였다.
벚꽃이 한창인
경포대
경포호와
벚꽃
경포호변에서
주문진 바다가에서 회식
속초 설악산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건강하십시요.
Jong Y. Lee |
첫댓글 동과 서를 잇는 대관령 옛길의 무수한 애환과 숨결을 고스란히 전해주심에 찬사를 드립니다하신 모습으로 산행길에 나선 여러 선배님들의 모습에 힘찬 를 보냅니다
더욱이 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