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집총간 > 동고유고 > 東皐先生遺稿卷之一 > 祭文 > 李浚慶 祭壺山君 宋世珩 文 惟靈。孝友生知。忠義夙負。施諸朝著。爰自畎畝。樂善之誠。憂國之衷。雖遭讒謗。心無替隆。蓄積旣素。發見斯豐。策勳鍾鼎。盟被帶礪。方期相業。翼亮聖世。何圖一疾。終至不起。雍雍之色。謇謇之議。幽明一隔。存沒百年。言念及此。腸摧心煎。初聞移病。謂是或然。遷延晨夕。竟孤一問。謂有勿藥。豈意訃聞。生不握手。沒不親斂。負心天地。赧顏難掩。立朝廿載。憂患多岐。君實過許。唯我知子。靑眼長昏。朱絃已絶。哭奠一杯。終天永訣。靈乎有知。一酹是格。嗚呼哀哉。尙饗。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壺山君 宋世珩을 위한 제문 오직 영혼이시여. 당신은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으며,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을 일찍이 품으셨습니다. 그 덕행은 조정에서 드러났으며, 들판에서부터 시작된 선행을 즐기시는 진심과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은 늘 한결같으셨습니다. 비록 중상모략을 당했으나, 마음은 굳건하여 흔들림이 없으셨습니다. 평소 쌓아온 덕을 바탕으로 더욱 큰 결실을 보았고, 공로를 쌓아 이름을 알리셨습니다. 맹세한 뜻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데까지 미쳤고, 오직 국가의 영광을 기약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 병환이 닥쳐 결국 일어나지 못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온화한 모습과 굳건한 의지를 지녔던 당신과 이제는 저승과 이승이 나뉘어 백 년이 지나도 다시 뵐 수 없게 되니, 이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내장이 찢기고 마음이 끓습니다. 처음 병환을 들었을 때는 그저 잠시 아프신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기약하며 소식을 기다렸으나, 결국 묻지 못하고 외롭게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약을 쓰면 회복될 것이라 여겼으나, 뜻밖에 비보가 들려왔습니다. 살아계실 때 손을 잡지 못했으며, 돌아가신 후 직접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습니다. 하늘과 땅 앞에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조정에서 20년을 지내며 수많은 걱정과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초월하신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당신의 진실함을 아는 사람은 오직 나뿐입니다. 이제 푸른 눈이 영원히 감기고, 붉은 현은 끊어졌습니다. 이 한 잔 술을 올리며 당신과 영원히 이별하니, 만약 혼령이 계시다면 이 술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아, 슬프고 애통합니다. 부디 이 제사를 흠향하소서. 이 제문은 壺山君 송세형을 추모하며 쓴 것입니다.
한국문집총간 > 동고유고 > 東皐先生遺稿卷之六 補遺 > 七言律詩 > 李浚慶 挽壺山君 宋世珩 功在王家官又達。聲名於此幾人攀。曾通祕府三朝籍。歸托先塋七寶山。鍾鼎勳庸名獨在。英靈河岳氣應還。空將知己無窮恨。未覺縱橫老淚潸。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 壺山君 宋世珩을 위한 만사 공적은 왕실에 있고 관직 또한 뛰어났으며, 그 명성과 덕망을 따를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세 조정의 기록에 비밀리에 관여한 적도 있었고, 이제는 칠보산의 선영에 돌아가셨습니다. 공로와 업적은 오로지 당신의 이름 속에 남아 있으며, 당신의 영혼은 마치 강산의 기운과도 같이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지기(知己)를 잃은 끝없는 슬픔만 남아, 흘러내리는 노년의 눈물을 막을 수 없음을 느낍니다. 이 만사는 壺山君 송세형의 업적을 기리며 그를 애도하는 시입니다.
송세형(宋世珩) 본관은 礪山. 자는 헌숙(獻叔), 호는 반곡(盤谷). 宋繼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宋復利이고, 아버지는 군수 宋演孫이다. 어머니는 김보첨(金甫添)의 딸이다. 형은 교리 宋世琳이다. 문장에 능했으며 1524년(중종 19)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성균관에서 수업하면서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다. 1528년 진사로서 사행무역(使行貿易)의 폐단 등 시폐(時弊)를 상소하여 거의 모두 채납시켰다. 153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발탁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 일당에게 배척되어 크게 진출하지 못하였다. 중종이 잠저시(潛邸時: 왕에 즉위하기 전의 시기) 아버지 송연손이 중종의 사부(師傅)였던 관계로 어려서 중종과 같이 지낼 때가 많았다. 뒤에 왕위에 오르자 중종이 이를 잊지 않고 자주 불러 안부를 물었는데, 김안로 일당은 그들의 간사한 행동의 정상이 위로 알려질 것을 염려, 모함하고 배척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려나자 비로소 중용되어 이듬해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42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에 올랐다. 이 때 이황(李滉)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청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장령·사간을 거쳐, 1544년 국왕의 특지로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여 소윤일파가 득세하면서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에 책록되고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예조참판으로 승진하고 호산군(壺山君)에 봉해졌다. 1547년(명종 2) 외직으로 나가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이듬해 내직으로 돌아와 공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아울러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하고, 곧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대사헌·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551년 다시 호조판서가 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호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국가 재정을 절약하였다. 그 해에 이조판서가 되어 당시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연결되어 불교 세력의 강화를 꾀하고 있던 보우(普雨)의 불법함을 여러 차례 상소하고 탄핵하며 그를 주살할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조판서를 연임하던 중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면서 행정 능력도 있었는데, 특히 재정에 밝아 시폐 개혁에 힘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