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핀 마을
- 이방주
제이알투자운용 회장
[매경춘추]
매일경제
2025.09.09 18:54닫기
지면 A21
여러 시 중에서
'살구꽃 핀 마을'이라는 시가
필자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은,
이 시에 넘쳐흐르는 정(情) 에너지 때문이다.
요즈음 같은 각박한 세태에서는 나오기 힘든 작품이다.
그래서 이 시는 마치
어린 시절 고향으로 시간열차를 타고 간 것 같은 기분,
일종의 향수를 맛보는 느낌을 준다.
살구꽃 핀 마을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
반겨 아니 맞으리
- 이호우
이호우 시인(1912∼1970)은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를 치열하게 사신 분이다.
경북 청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도쿄예술대를 다니다 건강 문제로 중퇴했다.
정미소, 제재소 등의 사업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 같고,
가람 이병기의
추천으로 '시조문학'에 등단했다.
대구 매일신문
문화부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몇 번의 필화도 겪은 바 있다고 한다.
누이동생
이영도 시인(1916∼1976) 역시 그의 영향으로 시조시인이 됐다.
미모를 겸비한 시인으로,
청마 유치환이
20여 년에 걸쳐 수천 통의 편지를 보낸
플라토닉 러브의 당사자로서 문단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천국'은
'금은보화'
'주지육림'이 넘치는 곳이 아니라 '정'이 넘치는 곳이다.
그래서
이호우 시인이
이 시에서 창조한 '살구꽃 핀 마을'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속세인(俗世人)이 내세에 가고 싶은 곳이 또한 천국이다.
그러나
'천국의 발명
(heavens on earth)'의 저자
마이클 셔머는
천국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판타지일 뿐이라고 한다.
그는 하늘나라 천국의 존재 여부는 잘 모르지만
지상에 천국은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천국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인의 고향 주민들은
1992년 12월 청도 남성현 고개에
'살구꽃 핀 마을' 시비를 세웠다.
주민들 마음에는 자기 마을을
이호우 시인이 지상에서 창조한 천국인
'살구꽃 핀 마을'로
만들겠다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 한 사람이
이제야 잠들었도다
뼈에 저리도록
인생을 울었나니
누구도 이러니저러니
아예 말하지 말라
이호우 시인의 '묘비명'이다.
아마도 시인이 미리 준비해놓은 묘비명 같다.
찬찬히 음미해 보면
심금을 울리는 한 편의 시가 아닐 수 없다.
'살구꽃 핀 마을'
같은 정이 넘치는 세상을 꿈꿨던 시인으로서는
남다른 치열한 삶이 무척이나 힘들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누구도 이러니저러니 아예 말하지 말라"고
하는 마지막 연에 주목하고자 한다.
모두가 독립된 인격체이고
자기 인생은 자기가 주인공이며 어느 누구도 그 속을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이호우, 이영도 오누이 시인은
'살구꽃 핀 마을'
같은 작품으로 플라토닉 러브의 당사자로서
요즘 같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와 전설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이렇듯 시인의 삶은 고되지만
남다르고 아름답다.
< 끝 >
[이방주 제이알투자운용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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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 주 :
한국 연극계의 거장 고(故) 이해랑 선생의 장남으로,
1994년부터
이해랑연극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한국 연극 발전과 인재 양성을 이끌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ROTC 4기 포병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1969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고,
1999년 현대산업개발로 옮겨
2009년까지 대표이사 사장 및 부회장으로 부동산 및 건설업을 경영했다.
그 후 제이알투자운용을 공동 창업하여
부동산 관련 자산운용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