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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
信天함석헌
우리의 도덕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
오늘날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돼가는 그것도 대대로는 여기까지겠지, 이렇게 일괄적으로 하면 틀려먹었다고 할 수 있어요. 물론 극(劇)이 극으로 되려면 옛날 모양으로 현실은 도무지 생각안하고 가공적인 거를 이렇게 만들어내도 못쓰고, 또 현실에 있는 고대로 누구의 사실을 실담이라고 그러고 말합니다만, 실담대로 만해도 그건 안 되는 걸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건 딴 얘기를 합니다만, 극이 극으로써, 혹은 소설이 소설로써 이렇게 성공이 되려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려면 가공적이 아니야. 이 현실에 사실 인생에 고대로 어떤 사실이 있던 건 아니지마는, 그러나 있을 수 있는 일을 그렇게 거의 실현성이 있는 거로 그렇게 해야지.
이 서역에서 손오공이 요술하는 모양으로 그런 거 보고 재미있어 하는 점도 있지요. 그런 정도의 사람도 있고, 또 그런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돼요. 인생의 실 사실을 고대로는 아니지만, 그걸 모델로 해가지고 실 사실에 있을 수 있는 일을 대표하는, 그런 게 있어야 할 거에요. 하지만 또 한편은 사실을 사실대로만 하면 또 재미가 없어. 사실 같으면서도 조금 사실과 다른 고걸, 그런데서 소원성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현실에, 현실성도 있지만 또 현실에서 소원성, 조금 거리가 있는, 그래야 된다고.
나는 문학가가 아니라 그건 모릅니다만, 그런 말을 누가 이전에 한 거 보았습니다만, 과연 그럴듯한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러겠지만 라디오 드라마를, 우리나라 지금 주로 있는 거를 싫어하는 거는 어드런고 하니 어쩌면 그 쓸데없는, 나쁜 것만 그렇게 골라다 그중에서도 말이야. 자꾸 그 울기는 왜 그렇게 우냐? 나라 망하라고 방정을 떠냐? 가정 망하라고 방정을 떠냐? 거한다는 거 어째 그런 거만 그렇게 하냐? 도대체 그런 거보면 우리나라 문학이라고 하는 거, 생각이 어찌 다른 나라, 남의 나라 반드시 외국을 숭배해 그런 게 아니라, 좀 깊이가 있다든지, 스케일이 크다든지 그러면 좋겠는데, 아주 사람의 취미도 정도가 낮은 데서부터 이렇게 점점 높아 가는 거지. 다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돈이 되도록 하려면 소위 대중작품이라고 그래서 일반사람에게 조금 낮은 정도에 사람이 듣기 좋도록, 그렇게 해서 팔리는 걸 많이 하겠지만, 그러나 어찌 이왕 다른 건 몰라도 예술이라고 그러고, 말은 예술이라고 할진대 어찌 신인생의 목적에서 유리된 것 어디 있겠어요? 마지막에는 인생전체를 높이는 거지. 그런 게 물론 옛날 모양으로 도덕적인 교훈만 반드시 다 넣어서 그럴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고 그러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예술이라고 그러더라도 인생전체의, 그 살아가는 그 목적에서 도무지 그것과 관계가 없는, 그런 건 허용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는 낮은, 생각이 적은 사람들은 낮은 취미에 영합해서 문학예술로서의 근본 목적보다는 딴 생각, 돈을 번다든지 인기를 끈다든지, 그러니까 그래 그런지 모르지만 우선 그런 게 맞지 않는 거고. 그보다도 거기 현실성이 없어. 아주 나쁜 거는 뭔고 하니, 거기서 한번 들어놓으면 실지 사회에 있지도 않는 일을, 나이 어린 사람이 들으면 세상이 온통 다 이렇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거기서 우리의 도덕수준이 낮아지는 거지. 그런 점이 아주 난 싫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일, 알 수가 없어
그건 이제 딴 얘기 나왔습니다만 그래서 극이라 하는 건, 만일 인생의 그런 높은 목적에 관련이 없이 한다면 찬성을 할 수가 없어. 이러면 너는 문학이 뭔지 모른다고 그럴지도 몰라도 그런 거 받아도 괜찮아.
예수님의 하신 일도 이제 그건 또 교훈적인 그런 점을 강조하는 것은 남아야 하겠지만. 어떤 목적을 위해서 그걸 가르치기 위해서, 가나에서 그런 것도 실지 정말 물로 포도주 만들었다는 것보다는, 이제 인간이 변해서 새사람이 된다하는 그런 거를 가르치기 위해 된 거라 한다든지, 오천 명에게 떡을 먹인 일도, 가령 떡 먹고 실지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었다는 그 일보다는, 거기 그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다” 하는, “생명이라”하는 그 점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드라마처럼 성경의 작가가 꼭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래. 아주 드라마를 만든 거라 그렇게 말은 안하지만, 이제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도대체 찬성을 할 수가 없지. 왠가 하니 물론 객관적으로 살아계시던 예수님이, 당신의 일기를 쓰던지 뭐 전기, 자서전을 낸 것 없으니까 어디가 빙거(憑據)할 데가 없지. 그러니까 객관적인 증거가 없고 성경 자체 안에 있는 거만이니까, 객관적으로 살아계시던 역사적인 예수님이 하신 일이 어떠했는지? 그건 어디다 내놓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너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본거지 아닌 사람도 그랬냐? 그러면 그렇다할 반증할 뭣이 없지요.
그러나 나는 그 점에서는 이 근래에는 역사적인 비판은 좋아하면서도, 그러나 또 한편은 그건 어디까지든지 우리 신앙의 참고로 할 거지. 너무 또 그 점에만, 그 토론에만 그치면 아니 된다 그래. 그러니까 이게 어떤 분한테는 대단히 거리낌이 될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제 신앙은 그러니까 우리가 피차 서로 만나 이렇게 얘기를 해도 그런 줄은 아시고 오리라 그럽니다만, 어느 의미론 여기 역사적으로 비판하는, 근래에 하는 그 연구래도 폼크리티즘(Form Criticism)이라고 해서, 형식비판이라고 해서 그런 게 더 진보가 되어 나가면, 이 앞으로 더 지금보다 더 밝아질는 지 모르고, 지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되면 성경 안에 예수님이 정말 진짜로 하신 말씀은 몇 마디가 안 된다, 그러지 않아요?
그리고 대부분이 그 다음에 그 신앙, 교단이 된 다음에 교회로서의 그 생긴 말이지.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이 한 말은 실지 가운데 몇 개가 안 된다 그러지. 그렇지만 난 거기 대한 자신이 없습니다만, 설혹 그렇게 증거, 그렇게 되는 날이 온다고 그러더라도, 그게 그리 문제냐? 전혀 문제 삼지 않을 수는 없지만, 너무 그럴 거 아니라 그럽니다. 역사적으로 살아계셨던 예수님의 일을 알 수가 없어. 용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실지는 연대조차도 지금은 뭐 BC 4년, 4년 기록이 틀렸다고 그 전에 났을 거라고 통치기록이 있습니다만, 그것도 꼭 정확한 고런 무슨 증거가 없지요.
그러니까 어느 의미론 역사적으로 있던 예수를 밝힐 수도 없고, 또 역사적인 예수 밝히면 밝힌 적은 또 어쨌냐? 우리에게 관계가 되는 건 역사적으로 어떤 사람이 있었던지 간에,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인류의 주어진 이 소위 성경 혹은 이 기독교라는 그 신앙, 그게 문제니까, 우리는 이대로 역사적인 비판을 하면, 야 요것은 예수가 정말 진짜로 한말이 아니다, 고렇게 될 런지 몰라요. 그렇게 돼도 나는 상관이 없다고 그래요. 그 사람이 그렇게 말을 했던 지 안했던 지, 그러나 우리에게 수천 년을 내려오는 여기는, 무슨 이 말씀엔 그럴만한 그 까닭이 있는 데가 있어.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사실이 고대로 아니라하더라도, 그보다도 거기 중대한 의미가 있어요. 이건 요렇게만 말해가지곤 고건 제 말하는 그 속뜻이 뭔지 모르실 분도 많이 계시리라 압니다.
생명인조해도 내 신앙 상관없다
그러나 오늘은 그 토론을 하려면 뭐 시간이 길어지니까 더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한번 그런 점에 생각을 해보시라고. 그 점에서 무슨 생각이 결정 되는 것이 있어야 자유로워질 겁니다. 신앙이 무슨 조건에 걸려서 이럭하면 내 신앙 걱정이지, 이럭하면 안 되지, 그래 가지곤.
나 그전에 한말인데 또 반복을 하렵니다. 수십 년 전에 우리가 이렇게 자라날 때 뭔고 하니, 주로 많이 지금도 그런 말 많이 있습니다만,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다, 인간이 생명은 도저히 만들지 못할 거다,’ 그때 난 그랬어요. 인간이 발달이 되면 생명, 인조 할런지도 모른다, 난 생명 인조 하는 일이 온다고 해도 내 신앙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인간하고 둘 사이에, 능력이 서로 요 국경처럼 따져 네가 했냐? 내가 했냐? 네가 더 했느냐? 그런 걸 다투자는 존재가 아니니까, 도리어 그보다는 하나님이 아버지냐? 아버지가 했다면 아들도 자라나면 아버지 한 거 할 수 있지 않겠냐? 하나님이 생명 창조했다면 인간이 이다음에 가서 생명을 인조 하는 날이 올 런지 누가 알아? 온다면 하나님이 좋아하지 나빠하겠냐?
조금 우스운 말 비슷하게 그렇게 이제 합니다만, 그래 내 하나님은 이리 메쳐도 안 죽고, 저리 메쳐도 안 죽는 하나님이라 그래. 그러면 이제 신앙이 어떤 것에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하니까 인간은 못한다, 그랬다가 인간이 그럼 지금도 벌써 유기물을 합성해서 만들어내지 않습니까? 저기 저 과학자가 왔습니다만, 이제 이 이상 더 진보가 되면 그때에 가서는 그만 거기다 생명을 걸고 너희 하나님은, 생명은 하나님만이 만들어 내는데, 너 인간이 과학가지고 되겠냐? 이러다가는 그만 거기다가, 거기 조건이나 붙였다가는 우리 신앙이 설 수가 없어요.
나는 수십 년 전부터 그랬기 때문에, 과학이 진보가 아무리 된다하더라도 우주학, 요새 우주발달이 됩니다만, 가가린이 올라가서 “하나님이 여기 없다” 그까짓 소리 하겠으면 하고 문제가 되지를 않아. 정말 한 천국 위에 올라가면 하나님의 보좌가 현실적으로 있다, 믿었던 사람은 아마 낙심했을 거예요. 아이쿠! 뭐 그랬다면 그러면 이거 헛 믿었나? 그러는데 어느 무슨 조건이 붙을 수가 없어요.
그 얘긴 그만하고, 하여간 이제 이걸 그려보자. 대체 이때까지 1장에서부터 이날까지 온 걸로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뜻은 물론 그렇습니다. 우리에 물이 변해 포도주 되는 모양으로 이 인생이 한번 변할 거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 다음에 3장에 와서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찾아오지 않아? 그래 말하자면 2장에서 그렇게 기적으로 됐던 그 문제가 요 3장에 와서 니고데모와 두 사이에 문답으로 하면 그게 좀 더 내적으로, 겉에 사건으로 있었던 거지. 거기 와서 물론 그랬기 때문에 그걸 자료로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한번 생각해보시라 그 말이야. 이렇게 커버가 올라와요. 거기 올라와서 3장에서 니고데모와 토론 얘기를 들으면 그건 급속 굉장히 아주 올라가는, 도가 높은 겁니다.
4장에 가면 이제 어드런가 하니 사마리아에 가다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거기서 아까는 뭐 포도주가 떨어져서 물로 포도주 만드는 정도지만, 이건 아주 인생의 포도주가 떨어진 사람이야. 이 사람은 이 여인은 잔치 집에 포도주가 없는 게 아니라, 이 여자는 인생으로서의 생명의 포도주가 거의 다 고갈이 되 버렸던 사람인데, 그 사람을 이제 거기서 만나서 문답이 돼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정말 한 윤락의 여성이 변질이 돼가지고, 거기서 예수님 자신이 너와 말하는 “내가 그다” 하고 아주 특별한 증거를 그 사람에게 말해 주리만큼, 이제 그러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가장 높다하는, 하나님을 믿는 이가 참으로 은혜다라고하는 말씀이 나오리만큼 그래.
나는 속에 빛을 가진 사람이다
그럼 그게 이제 셋째 날 그러고 나면 5장에 가서, 그 안에 가면 베데스다 행각에서 또 38년 앓던 사람이 있어. 고쳐주지 않아요? 또 그래서 6장에 가서 오천 명 모아놓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지. 그런 다음엔 거기 말하자면, 이것 또 그 기적이 있은 다음에는, 거기 부합하는 의미를 이제 풀어하시는 모양으로, 사실이 그렇지요.
그래서 6장에서는 유명한 그 “하늘에서 내려 온 양식” 이라는 그걸로 많은 가르침을 누리지 않아요? 그래 그다음 7장에 가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오고, 또 들쳐보세요. 처음으로 충돌사건이 생기고 그래요. 그랬다가 8장에 가면 인제 그보다 또 한충 더, 이제 더 높아지는 셈이에요.
이젠 아주 현장에서 음행을 하다가 잡힌 여인이 오지 않아요? 뭐 포도주가 속에 있는 생명이 포도주가 마르는 정도가 아니에요. 그랬다가 그걸로 인해서 바리새교인들 하고 문제가, 아주 그땐 극단으로 싸움까진 아니지마는, 이제 그걸 가지고 “선생님 이 사람 어떡하렵니까?” 그러고 해서 그래 마지막에 말씀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 던지라”고. 그래서 그냥 헤져 갔다고 하는, 그리고 그다음에 나면서 눈 먼 사람, 도저히 저런 건 뭐 세상에 있는 의술로서는 고칠 수가 없다고, 고치질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해하기도 “왜 저건 나면서 소경이 됐을까? 저것이 그 사람의 죄일까? 그 부모의 죄일까?” 육체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돼요. 그래가지고 와요. 그래 그 사람 고쳐줬는데, 그걸로 인해서 정말이지 충돌이 심히 돼서 이제 죽인다, 그런 소리까지 나게 됐어요.
그러곤 이제 여기 지금 10장을 거쳐서 11장이 나사로 얘긴데, 나사로라 하면, 이건 정말 아주 죽은 사람 살리는, 그래서 이렇게 선을 그려보면, 대체로 너무 기계적으로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마는, 대체로 보면 이렇게, 이렇게, 자꾸 이렇게 높아가다 이제 11장에 나사로 살렸다는 이게 클라이막스에요. 종점이야. 그래서 종당에 이걸로, 이것 때문에 다른 것도 물론 있긴 있지만, 직접적인 또 십자가 지기로 결정을 하고, 아주 이 사람들이 잡아 죽이기로 결정을 하게 되는 동기는,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 살렸다는 데가 그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다음엔 십자가의 정말 비극이 나와요. 우리 요전번에 보았을 때에 “내 친구 나사로가 잠드니까 가서 깨우자” 그러니까, “아유 선생님, 먼저 번에도 유대사람들이 돌로 치려고 했는데, 또 갈려고 그러십니까?” 그러고 도마는 “야, 우리도 선생님을 따라서 같이 죽으러 가자” 그러니까 죽으러 가자고 해.
사실은 사람 살리려 가는 건데, 사람 살리려 가는 걸음인데, 도마의 눈에 보이기는 “우리 죽으러 가자” 꼭 그렇게 도마가 악으로 한 거는 아니지마는, 하여간 사람을 살리려면, 아닌 게 아니라,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호랑이 잡을 수 없다하는 모양으로, 죽음을 이기려면 자기가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예수님으로서는 죽을 각오, 먼저 번에는 돌로 친다고 그랬으니까 그건 그럴 겁니다. 물론 자기로서는 그렇지. 야, 낮이 12시 아니냐? 12시 긴긴 낮에 아무리 다녀도 넘어지지 않지 않아? 왜 그 빛이 태양빛이 환한 광명 속에 걸으니까 문제없지, 그러나 그럭하던 사람도 밤에 걸으면 넘어지길 잘하지. 왜 빛이 없으니까 속에 빛이 있다면 안 넘어질 거야. 낮에 이 걸어 다니는 이 육신이 걸어 다닌다는 건 외부에서 오는 빛에 의존해 있으니까 그것 있는 한 안 넘어지지만, 그게 없으면 넘어진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하니, 나는 속에 빛을 가진 사람이다, 속에 빛을 가졌으면 넘어질 염려가 없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또 올라가면 무슨 저 사람들한테 만나서 인심이나 나지 않을까? 무서워하는 것은 속에 빛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냐? 그렇게 말씀을 돌려는 안했습니다만, 말하자면 그런 의미가 거기 들어있지 않아요?
그래 그럭하시곤 자기는 올라가셨으니까, 적어도 옆에서 볼 때에는 뭔고 하니 죽을 각오하고 올라가는 거예요. 나사로로선 그러니까, 그 위에서 유명한 “내가 양의 우리요, 내가 양의 문이다. 내가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그럴 때 그렇게 하신 말씀은 말만이 아니에요. 친구 나사로가 죽는 줄은 저 멀리 또 얼마나 멀리 계셨는지 모르지만, 멀리 계셔서 벌써 이틀 전에 며칠 전에 아셨어요. 죽은 줄 아시면서 그렇게 하고도 소식을 듣고 있다가 오셨는데. 여유작작이라면 참 여유작작한 태도 아니에요? 그런 건 자기로서의 자신이 있어. 그 생명 죽음이요, 산다는 문제에 관한 자기로서의 아주 확신이 있는 그런 태돕니다. 그렇게 하고는 오셨는데, 자기로선 자기 확신이 계시니까, 물론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 모양으로 문제없이 걸어가. 뭐 턱 맘 놓고 걸어가지. 다른 사람이 보면 뭔고 하니, 도마, 그런 확신이 없는 사람 편으로 보면, “야, 같이 죽으러 가자” 그러고 가서 그 나사로를 살려요. 그랬는데, 또 한 번 이제 참 모순되는 아이러니컬한 거는, 나사로 살렸는데, 그가 살린 것 때문에 자기가 정말 죽게 돼요. 다른 것도 물론 쌓이고 쌓여 된 거지만, 그 요한복음에선 그걸 아주 밝히 말하잖아요?
예수라는 청년을 통해 하나님 체험
나사로를 죽은 데서 살렸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미움이 잔뜩 올라가지고, 저 사람을 저대로 두었다가는 안된다하고 아주 죽이기로 결정을 했다는 거야. 그러면 사람을 살린 거, 자기 목숨을 내던져 내놓고라도 친구 나사로를 살리러 가서 살린 고로, 정말 자기가 죽게 돼. 이제 그게 밑이 가장 깊은데, 가장 비극적인 골짜기에 내려오죠. 그러니까 거기서도 뭘 이제 정말 부활이라는, 그 다음에 십자가에 자기가 죽었다가 부활이라든지, 일이 나오잖아요? 그런 걸 이렇게, 이렇게, 한번 보시라.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얘기하는 거는 겉에 나타난 예수의 하신 일 우선하고, 그 절정에 뭐 우리는 수천 년 후에 예수님을 벌써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다 이렇게 인정을 해놓고, 그러고 보니까, 그걸 모르는, 후대에 이렇게 난 사람이 성경에 있는 말대로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이 더 있다, 그건 그렇지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 복이 있지만, 그러나 다른 면에서 또 우리가 하면 우리는 지금 낳기 때문에 참 믿기가 어렵지 않아요? 왜 그런가 하니 예수가 벌써 하나님의 아들이 다 돼 놨어. 그때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기성품이 아니야. 그 예수를 누가 접촉을 해가는 가운데 그를 통해서 나와 마찬가지로 밥 먹고 옷 입고 살아가는 그 예수라는 청년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을 정말 체험을 하는 거야.
한데 우리는 그런 거 아니라, 예수라는 것이 하나의 기성품이 떡 돼 놨어. 그러니까 그게 받아들이기 대단히 쉬워요. 받아들인다는데 그것이 체험이 아니라, 남이 한 체험을 받아들이니까, 그것은 저번에도 했습니다만, 이차적인 이렇게 받아다 파는 세컨핸드리즘(Secondhandism)인데, 내 체험이 아니라 남의 체험을 맡아오는, 주로 그를 통해서 혹은 우리에게서 말하면 교리라는 걸 통해서, 이제 그렇게 되면 진짜 체험이 못 됩니다. 그 점이 우리의 좋으면서도 그 수천 년이 가도 그를 보지 못하고, 그래서 후에 직접 보지 못하고 믿는 자리에 가는 건 좋다면 좋은 편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러니만큼 다 돼놓은 거기 때문에 체험에 들어가기가 도로 대단히 어려워. 우리는 아닌 걸 가지고 속기가 쉽다 그래. 확실히 내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베드로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보았다 그런다든지, 그러니 저는 제가 자꾸 그렇게 오늘날까지도 그러는 사람이니까, 회개하는 심정으로 하는 말입니다마는, 거기가 아주 나쁜 거예요.
가령 바울이 말하길 “내가 죄인의 괴수다”, 그러면 바울이 “죄인의 괴수다” 하는 말은 그거는 피가 도는, 피가 나는 말입니다. 자기의 그 생을, 그 진즉 바울이 성격이 어떻게 된 사람인지, 우리가 대개 알지 않아요? 그런데 그러는 가운데서 참 그 새로운 생명에다가 자기를 실증하는 말인데, 예수 믿어서 저 뭐 주일에 몇 번 나가고, 거기 뭐 성경학교까지나 몇 달 동안쯤 나간다든지, 곧 눌러 건너 뛰어,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의 괴수입니다.” 죄인의 괴수가 어떤지 알고 그러냐? 모르고 그러냐? 여기가 남의 종교를 받아들이면 그 걱정 되는 데가 거기 있어.
너무 쉬워. 기성품을 사다 입으니까, 거긴 쉽긴 쉽지만 기성품치고 몸에 꼭 맞는 법이, 맞긴 내 옷이 아니야. 남의 옷이지. 암만 그 점이 오늘 우리에, 지금은 더구나 이 시대가 지식의 시대기 때문에 종교도 종교 지식 돼버렸어. 그 점이 우리 걱정입니다.
나도 장로파 중에서 자라났다
이제 중 가운데 여담이 됩니다마는, 나 요새 보는 책에 본거니까, 생각이 나서 소개하렵니다. 하워드 브린튼이라는 지금 미국에 살아있는 분입니다만, 그분이 뭐 그이 혼자만 하는 말 아니야. 다른 학자들이 많이 하는 말입니다 신앙의 요소를 넷으로 뽑았어요.
첫째는 신비적인 요소, 둘째는 복음적인 요소, 셋째는 합리적인 요소, 넷째는 인도주의적인 어느 종교에나, 어느 신앙에나 그 네 요소가 다 들어있다는 거야. 없는 법은 없어. 그런데 그 네 요소 중에 어느 것이 이렇게 주되는, 위에 있나 하는 걸 따라서 달라진다는 거야. 인제 그러면 우리는 지금 여기 어느 분들이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대부분 우리는 다 어떤 사람인고하니 소위 복음적인 종교 형에 많이 익숙해진 사람이야.
가톨릭은 모르겠습니다만, 프로테스탄트, 미국을 가보면 또 안 그러는데 본래 우리나라에 전도를 온 게 미국에서 왔는데, 미국에서도 장로파 감리파에서 왔는데, 장로파 감리파라는 그 파가 한마디로 말하면 반드시 보수, 자유에서 보수는 나쁘고, 자유는 좋고 그런 의미로 하는 거 아닙니다만, 일반 말을 빌어한다면, 대게 보수적으로 된 신앙, 미국에서 장로파나 감리파 반드시 그렇게 우세해? 더구나 장로파가 그렇게 우세한 게 아닌데, 한국에 장로파가 아주 우세하다면 그래 놀랍니다. 아유! 그래? 어떻게 장로파가 한국에서 그렇게 강하냐? 그러고 말하는 걸 저도 당했습니다만, 나는 한국에 장로교 신앙이 들어오게 된 게 난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거 좋아요. 장로교신앙이 들어왔다는 데는 나도 좋아요.
나도 장로교에서 자라났든. 바울모양으로 나는 히브리사람 중에 히브리사람이요, 그러곤 했습니다만, 나도 장로파 중에서 어려서부터 자라났습니다. 그러니까 난 장로파 나쁘다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건 이젠 우리로선 그 전에는 우리가 뭘 모르고 왔지만, 지금 와서 모든 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스스로 우리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반성도 해보고 그럴 필요가 있어요.
대체로 우리가 복음주의라 하는 에반젤리칸(evangelical), 요새 순복음주의라 간판을, 순복음주의라면 우리나라에선 신앙의 제일 뭐 한 걸로 아주 돌아가는 말 아니에요? 그럼 그 복음주의라는 건 뭐냐? 복음주의라 하는 말은 또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이 구원되는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신학을 말하면 칼빈신학을 주로 많이 말하잖아요? 인간은 타락이 극도로까지 갔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될 가망이 없어. 그러니까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이 미리 다 예정해 놓으신 구원의 방안에 따라서, 그걸 우리가 받아들이므로 인해서만 구원이 될 수가 있다, 그래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공로를 강조하는 게 그게 이제 다른 점도 있긴 있습니다만, 복음적이라고.
그러나 이제 우리가 차차 신앙도 자라가고 생활 내용도 이렇게 궁구해지면 그것이 반드시 기독교에, 기독교 전체가 다 그러는 거 아니라는 것쯤 알아야 돼. 다른 이유 있어. 신비주의적인 형은 극단으로 말하면 이제 야곱 베매(Jakob Böhme) 라든지, 뭐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게까지가 아니라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유럽에 많이 있었고, 그다음 교파로 지금 있는 걸로는 메노나이트, 퀘이커 이런 사람들이 이제 비교적 미스틱(mystic)한, 신비주의적인, 그럼 신비주의라는 것은 무엇이냐? 신비주의란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체험 할 수 있다, 직접 만나는 거지.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유교, 불교 자체가 나쁜 것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은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는 신약 때 다 완성이 돼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 계속해 계시가 있을 수 있고, 뭐 반드시 그렇게 말하는 건 이제라도 우리가 성경을 더 고쳐 쓰자, 66권 외에 더 쓰자 하는 말이 아니라, 이런 것을 말할 때에 완결이 됐다는 게 아니라, 그때 성령이 작용할 수가 있으니까, 지금도 작용하시니까, 사람이 직접 그때 성경을 쓰던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에 접해서, 이 성경을 썼던 모양으로, 지금 우리도 하나님의 성령에 직접 접할 수 있다, 이런 면을 강조.
그러니까 자연히 성질을 갈라 말하면, 하나는 대단히 내적이 되고 하나는 외적이 됩니다. 복음주의라 그러면 역사적인 사실에다가 치중을 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 사흘 만에 무덤 속에 살아났다는 사실, 그래 이게 근거가 돼가지고 거기를 중대시해서 그러니까, 그거는 내게 대해서는 내가 나하고 하나님하고 하나님을 전연 부인하는 거는 아닙니다마는, 그 면보다는 우리는 능력이 아무 것도 없으니까, 순전히 구원이 된다면 하나님의 위로부터 거저 주는 은혜에 의해서 돼야 된다는 것을 설명하려니까, 자연히 돼있는 그것을 강조하지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우리에게 대해서는 외적인 거, 밖에 있는 것이 돼. 은혜가 내속에서 나오는, 저 위에서 어디서 오는지 모르지만, 친구들이 떨어져 와야 돼. 이렇게 와야 된다고 하는 그런 거는,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겸손하게 하는 데는 좋은 점이 있습니다마는, 반면에 어떤 일이 있냐하면, 사람의 속에서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만 말살을 시켜버려. 전혀는 아니지만, 아주 약화시켜 버려.
이론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실체가 뭔고 하니, 처음에 내가 장로교 들어올 때 참 좋았습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니 우리나라에 유교, 불교로 인해서 사회가 극도로 유교, 불교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우리 역사가 발달해 내려오다 보니 아주 형편이 없이 타락이 됐어. 나이 어린 여러분들은 모를 거예요. 우리가 살던 그때로 하면 정신계에 침체, 물질도 그렇지만, 정신계의 침체가 형편이 없어. 유교라는 종교, 인심에 관해서 생생한 지배력이 없어. 양반계급에서 자기네 계급을 유지해 가기 위해서 요 삼강오륜을 모른 놈…, 사람의 마음에 정신을 높여가는 활력이 아무것도 없어. 불교는 더구나 중의 마음은 잿밥에 있다고 하는 말, 증거 하는 모양으로 불교는 그렇게 되 버렸지. 본래 불교 뭐 불교에 깊은 거 그런 작용, 인심위에 두지를 못하게끔 그랬던 때에…(녹음12, 3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