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 시골 여자들 / 이미옥
깜빡이는 커서를 30분째 바라보고 있다. 종일 걸어서 발가락이 욱신거린다. 바닷바람에 묻어온 소금기인지 땀인지 모를 끈적한 몸을 씻는 것도 미룬 채. 이런 찝찝한 상태로 ‘유종의 미’를 거두려 키보드를 두드린다. 장하다. 이미옥! 아, 안 되겠다. 씻고 와야겠다. 앗, 저장해야지. 지난주는 여섯 줄 써 놓은 게 날아가는 바람에 좌절해 숙제를 포기했다. 사라진 문장, 명문장이었는데. 킥킥.
개운하다. 이제 써 볼까? 밤바람 너무 좋다. 오늘 비렁길 바람도 참 좋았는데. 산악인 엄홍길만큼이나 산을 잘 타는 친구의 꼬임에 빠져 여수 금오도에 다녀왔다. 비렁길은 5코스까지 있지만 늘 산행에서 낙오되는 나와 ㅁ언니를 고려해 가볍게 2코스에서 1코스로 돌아오자고 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자마자 바다향이 코끝에 닿는다. 이런 향이 나는 바다는 안 예쁠 수가 없다. 해변에서 석양이 질 때까지 앉아 있고 싶다. 산악인이 부른다.
이럴 줄 알았어야 했는데. 둘레길 수준이라더니 초입부터 오르막이다. 스틱도 필요없다더니, 속았다. 하던 대로 낙오자 둘은 헉헉거리며 10미터마다 주저앉는다. 스무 번 정도 쉬고 나니 1코스 시작점이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서 출출하던 참에 마을버스 기사가 적극 추천한 그 아저씨네 식당 앞이다. 앉자마자 막걸리부터 시켰다. 방풍이 특산품이라 ‘방풍 막걸리’를 맛보고 싶었는데 없어서 ‘금오도 막걸리’를 마시기로 했다. 한 병을 잔 네 개에 알맞게 나누고 금세 이슬이 맺히는 막걸리를 들이켰다. “오오오.” 동시에 같은 소리가 나온다. 창으로 들어오는 푸른 바람과 함께 넘어가는 청량한 액체. 그리고 바다. 한 병은 너무 아쉽다. 우린 반주로 세 병을 마시고 나서야 1코스로 향했다.
막걸리 덕분인지 낙오자 둘이 선두다.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바다가 보인다. 한 시간 반을 걸어 도착한 선착장에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방풍 막걸리’를 시켰다. 이제 막 잡아왔다는 생선으로 무친 회무침을 안주 삼아. 또 사이좋게 나눠 마시고 배를 탔다. 바람이 실어나르는 소금기가 팔뚝에 켜켜이 쌓일 때쯤 배에서 내렸다.
“두부 먹고 가자.” ㅁ언니의 말에 골목 안 두부 집으로 들어갔다. 다들 배가 불러 두부 작은 거 하나와 두부에 빠질 수 없는 막걸리를 시켰다. ‘개도 막걸리’가 없다며 ‘낭도 젖샘 막걸리’도 괜찮냐고 묻는다. 단맛이 강한 개도 막걸리는 다들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낭도 막걸리로 달라고 했다. 김치, 양파 장과 나온 두부는 따뜻했다. 콩맛이 나는 두부였다. 세상에는 원재료 맛이 나지 않는 음식이 많은데 이 두부에서는 고소하고 담백한 콩이 그대로 느껴졌다. 막걸리는 그저 그랬다.
체력이 별로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5코스까지 다 돌았으면 만취해 집에 올 뻔했다.
와, 숙제 끝.
교수님, 한 학기 동안 고마웠습니다. 다음 학기는 조금 더 성실한 학생이 되겠습니다.
첫댓글 하하. 이미옥 선생님의 하루가 눈에 그려집니다.
금오도 비렁길은 언제 가도 좋은 길이죠.
6월 초입의 그 길이 눈에 삼삼합니다.
개도 막걸리는 톡 쏘는 청량함이 생명인데, 단맛이 강하고 싫다는 걸 보니, 꾼 같아요. 하하하.
한 학기동안 좋은 글 읽게 해 줘서 고맙습니다.
네, 처음 가봤는데 반했답니다. 다음에 나머지 코스를 돌기로 했어요.
전 송명섭 막걸리가 좋습니다. 하하.
개도 막걸리라고? 멍멍이와 한잔하는 줄 알았네요. 하하. 금호도의 비렁길 참 좋죠.
풍경이 다시 그려집니다.
하하하. 역시 위트 있으세요. 선생님 위해 풍경 묘사 좀 더 할 걸. 술에 빠져서... 흐흐.
마음이 맞은 사람들과 막걸리 맛을 즐길 줄 안다면
인생을 논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하.
멋진 여행하셨군요.
에구, 부끄럽습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히야! 막걸리 한 잔 쭉 들이키고 바다 한 번 보고.
술꾼 여자들 부럽네요.
금오도 다시 걷고 싶네요.
막걸리 한 모금에 바다 한 번. 정말 좋았어요. 하하.
그냥 비렁길 걸은 것과 막걸리 마신 이야기네요. 그 속에 들어있는 무엇. 이거 어떻게 쓴 거죠? 아, 이게 분위기구나!
무슨 분위기요? 겨우 썼어요. 수업 시간에 혼날까 걱정인걸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여 즐거운 하루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게 바로 행복이겠지요? 미소지은 선생님 모습이 그려지네요.
네, 힘들었지만 행복했답니다. 고맙습니다.
하하하. 막걸리를 마시고 피어난 선생님의 미소를 상상합니다. 아마 작약꽃쯤 되겠군요.
음, 웬만해선 빨개지지 않아 작약꽃은 아닐듯요. 그냥 주정뱅이. 하하.
째까니가 술을 먹다니. 선생님한테 혼나요.
하하. 쪼끔 먹었어요.
비렁길에서 막걸리를 못 본 체 하면 정 없지요, 저도 옆자리에서 한잔 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낯선 모임에서 외롭지 않게 한 학기 보냈어요. 고맙습니다.
한 학기 동안 글 읽으며 많이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술꾼이셨군요. 하하. 글이 매끄러워 늘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