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일강의 갈대 상자(8월 27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출애굽기 2:1-10(구약 72)
요셉에 의해서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오랜 세월 머물게 됩니다.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기근이 끝난 뒤에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지 않고 애굽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문명이 발달한 애굽에서 살다가 가나안으로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도시 생활을 하던 분이 귀농을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시도를 하지만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가서 산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시골에서 사시던 부모님들이 도시에서 살자고 하면 답답해서 못 살 것 같다고 하지만 도시에서 사시다 보면 다시 시골로 가서 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처음에 애굽 땅에서 살 때 요셉이 나라를 구했기 때문에 애굽 사람들에게 애굽을 구한 사람의 가족이라고 해서 매우 후한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애굽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를 많이 낳았기 때문에 점점 인구수가 늘어났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처음에는 야곱의 후손들에게 감사한 마음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애굽 사람들의 마음에 이스라엘을 견제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이 죽고 세월이 많이 흐르니까 애굽 사람들이 요셉의 일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인구가 늘어남으로 인해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다가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애굽의 통치자들은 이스라엘을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이스라엘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1:11절을 보면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의 노예로 학대를 받으면서도 자녀들을 많이 낳았습니다. 출 1: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노예로 부리기는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면 통제하기 힘들어지고 나중에 애굽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세는 태어나서 3개월 되었을 때 나일강에 갈대 상자에 담겨 버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대 상자에 담겨 버려진 모세를 하나님은 바로의 딸 즉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버려지고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나일강의 갈대 상자”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위기 시대에 태어난 아기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2:1“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이 구절만 보면 모세의 부모님이 결혼을 해서 첫 번째로 모세를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세보다 3살 많은 형 아론이 있었고, 나이가 많은 누나 미리암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태어날 때는 그런 문제가 없었지만 모세가 태어날 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태어날 무렵에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하게 박해를 받는 상황이었고 남자 신생아들은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애굽 왕은 남자 신생아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1:16절에 보면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애굽 왕은 히브리인들의 출산을 돕는 산파들에게 히브리 여인이 아기를 나을 때 남자 아이면 죽이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나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애굽 왕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여인들은 애굽 여인들 같지 않아서 산파들이 도착하기 전에 아기를 낳기 때문에 죽일 수 없었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산파들에게 내린 명령은 출산할 때 사산인 것처럼 만들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여인들은 건강에서 자신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출산을 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남자 신생아를 죽이지 않은 십브라와 부아에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애굽 왕은 히브리인들에게 명령하기를 출산을 할 때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1: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애굽 왕은 십브라와 부아 대신 남자 신생아의 부모가 아이를 직접 나일 강에 버리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태어나면 바로 죽을 수도 있는 위기 가운데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1-2절을 다시보면
2: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하필이면 모세가 태어날 즈음에 애굽 왕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형 아론은 모세보다 3살 많은데 아론이 태어날 때는 그런 명령이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태어나기 얼마 전에 그런 잔인한 명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모세는 태어나면 죽을 수 있는 위기의 시대에 태어난 것입니다. 어쩌면 모세가 잉태된 다음에 그런 명령이 내려졌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모세는 모두가 살기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도 있는 위기의 시대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태어났는데 바로 나일 강에 버리지 못하고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2절 뒷부분을 보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아기가 태어났는데 너무 이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나일강에 버리라는 애굽 왕의 명령이 내려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너무나 이쁘고 사랑스런 아기를 나일강에 던져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석 달 동안 숨겨서 키웠습니다.
애굽의 관리들에게 들키면 아기를 빼앗아서 나일강에 갔다 던져버릴 것이고, 애굽 왕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모세의 가족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내려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부모는 그 어린 아기를 버릴 수가 없어서 석 달 동안 남몰래 키웠습니다.
2.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진 아기
위기의 시대에 태어난 아기는 차마 나일강에 버릴 수 없었던 부모의 손에서 석달을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나일강에 버리게 됩니다.
아기의 부모는 더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3절을 보면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더 숨길 수가 없었다는 것은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데 마치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숨기거나 또는 여자 아기가 태어난 것처럼 숨기거나 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기를 아무리 잘 돌보아 준다고 해도 우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처음에는 남자 아기인지 여자 아기인지 구분을 못할 수도 있겠지만 3개월 정도가 되면 울음소리가 분명하게 구별되기 때문에 주변에서 아이의 울음을 소리를 듣고 저 집에 남자 아기가 있는지 여자 아기가 있는 알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막내가 태어났는데 남자아이는 나일강에 버리라는 애굽 왕의 명령을 지킬 수가 없어서 석달을 키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기를 감출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이의 부모는 갈대상자에 아기를 담았습니다. 3절을 다시 보면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아이의 부모는 언젠가는 아기를 나일강에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아이의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닥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애굽 왕은 나일 강에 버리라고 했지 어떻게 버리라는 것을 구체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료들을 보면 나일강에는 사나운 악어들이 서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기를 나일강에 버리면 악어의 먹이가 되거나 물에 익사하게 되니까 어떻게 버리든 버리는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버리라는 명령을 지키면서 아이를 담아서 버릴 갈대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애굽의 갈대를 파피루스라고 하고 하는데 파피루스는 종이와 배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기도 하고 잘 만들면 물에서 가라앉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재료였습니다.
갈대를 가지고 상자를 만들었는데 상자라는 히브리어는 ‘테바’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테바라는 히브리어는 ‘방주’ 라는 의미로 구약성경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갈대 상자라는 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갈대 방주라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당시에 애굽에서는 갈대로 작은 배를 만들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갈대로 아기를 담을 수 있는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마치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서 그 가족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아기의 부모들은 갈대 방부를 만들어서 아기를 담으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같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지켜주시옵소서.
갈대로 만든 배에는 역청과 나무 진을 칠했습니다. 이것은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수작업을 한 것입니다. 아이의 부모들은 나일강에 버리라는 애굽의 명령을 이행하면서 방주를 만들면서 하나님의 손이 임하길 기도한 것입니다.
아이의 부모는 갈대로 만든 방주를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3절을 다시 보면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나일강은 원래 급류가 많고 급경사 지역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버릴 때 갈대가 많은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갈대 사이에 갈대 방주를 놓아두면 갈대에 걸려서 떠내려가지 않고 머물러 있게 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바로의 공주와 같은 사람들이 와서 목욕을 하는 곳을 택한 것입니다. 공주가 목욕을 하는 곳이라면 물결이 잔잔할 것이고 평소에 사람들도 많이 왕래하는 곳이기 때문에 아기가 갈대 사이에서 울면 누군가 불쌍히 여겨서 데려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급류 지역에 버려진 아기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부모는 지혜롭게 나일 강에 버리라는 명령을 지키면서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서 갈대 방주에 담아서 갈대 사이에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생명을 살리신 하나님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갈대 방주를 만들어서 방수를 철저하게 한 다음에 아기를 담아서 갈대 사이에 떠내려가지 않게 해 놓고 애굽 왕궁의 공주와 시녀들이 목욕하러 오는 곳에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갈대 방주에 있는 아기를 향한 부모의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공주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4-6절을 보면
2: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2: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2: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바로의 딸이라고 소개된 이 사람은 애굽 18 왕조의 창설자인 아모세의 아들 아멘호텝 1세의 딸과 투트모세 1세 사이에서 태어난 무남독녀 ‘핫셉슈트’라고 합니다.
바로의 공주는 목욕을 하러 와서 갈대 사이에 있는 갈대 방주를 발견했습니다. 공주는 시녀들에게 갈대 사이에 있는 갈대 방주를 가지고 오라고 했고 갈대 방주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예쁜 아기가 있었습니다.
갈대 방주의 뚜껑을 열자 예쁜 남자 아이가 울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기를 천사라는 표현을 하는데 바로의 공주가 예쁜 아기가 우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기의 우는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마음이 여린 공주가 아기를 볼 때 너무 사랑스럽고 이쁜데 버려진 채로 울고 있는 것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바로의 공주에게 아기를 사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공주는 이 아기가 히브리 사람의 아기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애굽왕이 남자 아이를 나일강에 버리라고 명령한 것을 알고 있었고 나일강 갈대 사이에 버려진 아기를 발견했기 때문에 히브리인의 아기라는 것을 금방 알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고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고 말했습니다. 7-9절까지를 보면
2: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2: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2: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아기의 부모는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갈대 방주에 아기를 담아서 공주가 목욕하러 오는 잔잔한 물가에 갈대 사이에 아기를 담은 방주를 놓아두었고 아기의 누나는 어떻게 되는지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공주가 아기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공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할까요?
아기의 누나 미리암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들었고 판단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의 공주가 아기가 히브리인의 아기라는 것을 알고 불쌍히 여기자 재빨리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구해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겠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는 미라암에게 가라고 하자 미리암은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왔습니다. 바로의 공주는 미리암이 데리고 온 아기의 엄마에게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그러면 내가 삯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아기의 엄마는 자기 아들에게 젖을 먹이고 유모의 삯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기의 생명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에게는 애굽의 공주가 주는 물질적인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기의 엄마는 자기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키우지만 애굽 왕의 딸의 아들로 키우는 것이기에 아기의 생명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아기를 버려야만 했던 부모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사랑스런 아기의 생명을 살려주셨고 죽지 않게 보해주셨고 애굽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란 신분을 얻게 하셨습니다. 아기의 부모는 바로의 공주가 주는 생활비를 받았습니다.
바로의 공주는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고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남자 아기들을 나일강에 버려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은 아기의 부모에게 지혜를 주셔서 갈대 방주에 담아서 갈대 사이에 두어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기의 부모는 아기가 자랄 때까지 유모의 신분으로 자기 아들을 양육했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자라서 바로의 왕궁에서 생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공주는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어주었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그의 부모가 아닌 바로의 공주가 지어진 이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애굽어로 ‘모’는 ‘물’이란 뜻이고, ‘우세스’는 ‘건져냄을 받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원래 이름이자 애굽식 이름인 ‘모우세스’는 ‘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애굽 공주가 아이를 물(나일 강)에서 건져낸 것을 기념하여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애굽식 이름은 히브리인들의 발음을 따라 히브리식 이름인 ‘모세’로 고쳐졌는데, 그 뜻은 ‘건져내는 자’란 뜻입니다. 바로의 공주는 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자라고 불렀는데 히브리인들은 물에서 건져내는 자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출애굽하게 할 것에 대한 예언적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일강 갈대 상자 즉 갈대 방주에 담겨서 버려진 모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애굽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을 위기에 있던 모세를 살려주셨고, 그의 가족에게도 물질적인 도움을 받게 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손으로 지켜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을 위기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노아의 방주와 같이 갈대 방주를 만드는 성령이 주시는 지혜입니다.
나일강의 갈대 상자는 죽음의 상자가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방주였습니다. 위기 속에서 생명을 주시고, 더 큰 일을 이루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참빛 가족 위에 임하길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