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
신라 무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 수도하여 큰 도를 깨친 곳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다. 원효스님이 관음보살을 만나 자신의 수행력을 인증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멀리 서라벌에서 요석공주가 찾아와 머물렀다고 전하는 집터도 있다.
자재암은 거대한 바위산 협곡에 위치하고 있어 수도처로는 더없이 좋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소요산은 곳곳에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어 놓아 만물상을 연상하게 하고, 깊은 계곡은 오묘한 정취를 보여준다. 그래서 예로부터 경기의 소금강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974년(광종 25)각규(覺圭)가 태상왕의 명으로 중창하였다. 1153년(의종 7)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각령(覺玲)이 대웅전과 요사채만을 복구하여 폐사와 다름없이 명맥만 이어 오다가, 1872년(고종 9)원공(元空)과 제암(濟庵)이 중창하여 영원사(靈源寺)라고 하였다. 그때의 당우로는 영산전(靈山殿)·만월보전(滿月寶殿)·독성각(獨聖閣)·산신각(山神閣)·별원(別院) 등이 있었다고 한다.
1907년 화재로 인하여 만월보전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소실되자 1909년 성파(性坡)와 제암이 절을 중창하고 다시 자재암이라 하였다. 이때에는 전각(殿閣)뿐 아니라 약사여래상과 지장보살상·관음보살상 등의 불상과 함께 이 절의 유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원효·의상(義湘)·윤필(尹弼) 등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봉안하였다.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으나, 1961년진정(眞靜)이 대웅전을, 1968년성각(性覺)이 요사채를, 1977년법조(法照)가 삼성각(三聖閣)을 각각 지어 현재의 당우를 완성하였다.
자재암에는 여러 전설적 설화가 전한다. 『조선지지(朝鮮地誌)』에는 이곳에 요석궁(瑤石宮)의 옛터가 있다고 하였다. 요석궁은 원효가 요석공주(瑤石公主)와 관계를 가졌던 곳이며, 나중에 원효가 이곳에서 설총(薛聰)을 길렀다고 한다. 자재암이라는 사명(寺名)을 갖게 된 것은, 원효가 요석공주와 관계를 가진 뒤 관음보살이 변신한 아리따운 여인의 유혹을 설법을 통해서 물리친 후, 다음날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고 무애자재인(無碍自在人)을 상징하며 자재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무애자재 無碍自在-어떠한 것에도 막히고 걸림없이 무슨 일에나 자유자재 하는 것. 번뇌망상을 끊고 보리심을 얻으면, 어떠한 바깥 경계나 탐진치 삼독심에도 끌리지 않아서 생사거래나 육도윤회에 자유자재 하게 된다. 무애도인이 되어야 무애자재 할 수 있다.)
절 근처에는 백운대(白雲臺)와 폐정(廢井)이 있고, 백운대 밑에 있는 폭포는 원효가 노닐던 곳이라고 하여 원효대(元曉臺)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는 소요사(逍遙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제암과 원공이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우연히 만나서 절을 중창했다는 영험담도 전해지고 있다.
자재암의 가장 큰 자랑은 보물 제1211호로 지정된 <반야바라밀다심경> 언해본에 있다. 이 경전은 당나라 현장(玄獎) 스님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에 송나라의 중희(仲希)가 자신이 지은『현정기』를 붙여 다시 편찬한 주석서인데, 1464년(세조 10년)에 금강경과 함께 간경도감에서 발간한 것으로 서지학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원효스님이 수행했던 자취와 서지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반야바라밀다심경> 언해본이 전해지는 사찰로, 빼어난 경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자재암(自在庵)」조에 의하면 654년(신라 무열왕 1) 원효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의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974년(광종 25년) 각규대사(覺圭大師)가 태조의 명으로 중창하고 소요사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1153년(의종 7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각령(覺玲)이 대웅전과 요사만을 복구하여 명맥만 이어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사찰에 대한 구체적인 연혁이 전하지는 않으나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 경기 양주도호부 소요사(逍遙寺) 조에 태조의 원당으로 하고 밭 1백 50결을 하사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범우고(梵宇攷)에 있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년)의 시에 소요사가 언급되고 있으나 페허가 되었다고 했다. 이로보아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자재암은 태조의 원당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아오다가 어느 시기엔가 폐허가 되다시피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후 조선후기 들어서는 1872년(고종 9년) 원공(元空)과 제암(濟庵) 스님이 퇴락한 자재암을 중창하고 영원사(靈源寺)라 하였다. 이때의 일은 설화같이 『소요산영원사중건기(逍遙山靈源寺重建記)』에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원공(元空)과 제암(濟庵) 스님은 같은 꿈을 꾸고 만나 영산전․만월보전을 비롯하여 모두 44칸을 중창 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07년에는 화재로 만월보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래서 1909년 성파(性坡)와 제암 스님이 다시 중창하고 절 이름을 자재암으로 고쳤다. 이러한 내용은 『자재암재차중건기(自在庵再次重建記)』에 자세히 전한다.
그후 한국전쟁 때 다시 소실된 것을 이후 1961년 진정(眞精) 스님이 대웅전을, 1968년 성각(性覺) 스님이 요사채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1982년에는 일주문을 각각 지었다. 1983~1985년에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운 중창을 하여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었다.
일주문은 정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 1982년 지은 것이다. 정면에는 「逍遙山自在庵(소요산자재암)」「京畿小金剛(경기소금강)」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있다.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61년 진정(眞靜) 스님건립. 건물의 정면에는 대웅전(大雄殿) 편액과 4점의 주련이 걸려 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좌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좌상과 대세지보살좌상이 좌우 협시로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삼존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모셔진 지장보살좌상. 웅전 삼존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모셔진 금강저를 든 입상(立像)의 동진보살(위태천)
나한전은 1980년에 확장하여 조성한 굴법당이며. 안에는 석가모니불좌상과 가섭·아난존자입상, 16나한상, 그리고 원불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나한전 앞에는 원효스님이 마셨다고 하는 샘물이 있다.
삼성각은 1977년 법조(法照) 스님이 지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1914년 무렵에 그렸다고 하는 칠성탱과 근래에 조성한 독성탱, 산신탱, 그리고 독성상과 산신상이 봉안되어 있다. 1914년 무렵에 그려진 칠성탱은 자재암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추담 대종사리탑 및 탑비가 절 입구에 있다. 말년에 이곳 주지로 있으면서 중창불사를 하여 지금의 자재암이 있게 한 추담(秋潭, 1898~1978년)스님의 사리탑과 탑비이다. 법자(法資)인 법타(法陀) 스님이 세웠다.
경내 및 주위에는 1980년에 세운 석굴, 추담대사 사리탑, 속리교, 세심교가 있고 최초의 창건자인 원효대사가 수행하는 동안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데리고 와서 지냈다는 요석공주궁지와 사자암지, 소요사지, 현암지, 원효사지, 조선태조행궁지가 있다 하나 위치는 알 수 없고 의상대, 나한대, 금송굴, 선녀탕, 선녀폭포, 청량폭포 등이 명승을 더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