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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23
9월19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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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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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1-BkrHZ7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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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 ①말씀에 대한 환영 ②말씀에 대한 순응 ③말씀에 대한 충실 ④말씀에 대한 실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당연히 믿어야 할 불변의 진리이자 신조인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신비 앞에 어느 정도 확신을 지니고 있는가요?
언젠가 그간 우리가 깃들었던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날, 주님의 자비와 은총에 힘입어 우리의 영혼은 불사불멸하며,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진리에 대해서는 또 몇 퍼센트나 신뢰하고 계시는가요? 언제나 진리 앞에서 긴가민가, 알쏭달쏭한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확신에 찬 어조로 외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토 15장 42~44절)
곰곰히 돌아보니 이 세상 저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은 외면하고, 이 세상이 전부인양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 세상 좋은 것들에 푹 파묻혀 살아가다 보니, 내게 주어진 이 세상의 시간들이 조금씩 지나가는 것을 크게 슬퍼합니다.
이 세상에 목숨을 걸다보니 청춘이 가고 젊음도 가고, 하루 하루 육신이 조금씩 소멸되는 것을 그리도 아쉬워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사라지게 될 육체의 건강에만 몰두했지, 정작 중요한 영혼의 건강은 뒷전이었습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 우리의 이 소중한 육체를 경시한다거나 차원 낮은 대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대상입니다. 존중받고 사랑받고 길이 보존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들의 이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창조물 가운데 으뜸인 너무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지나침입니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편중됨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과는 완전 결별하고, 오로지 본능적·세속적·향락적·하위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권고인 것입니다. 루카 복음 사가의 표현대로 우리 각자는 하느님에 의해 지상에 뿌려진 한알의 씨앗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씨앗을 뿌리고 가신 후 악마가 나타나 활약을 시작합니다. 악마는 더 이상 어마무시하게 흉흉하고 기이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들로 가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를 항구하게 주님 앞에 머물지 못하게 유혹합니다. 수시로 우리 눈앞에 나타나 알짱거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인 것입니다. 씨앗은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아무 탈없이 무럭무럭 성장합니다.
①말씀에 대한 환영 ②말씀에 대한 순응 ③말씀에 대한 충실 ④말씀에 대한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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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빈부격차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예수님의 마음이 눈물겹게 감사하고 은혜롭습니다!>
오늘 날에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노예 제도, 이방인들에 대한 철저한 무시, 심각한 여성 차별 등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관습 안에 여성들은 공동체의 정식 일원으로 간주되지 않았음이 명백합니다. 여성들이 공식적인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성들처럼 반드시 참여해야만 하는 의무 규정이 없었습니다.예배는 최소 10명의 남자가 있어야 거행될 수 있었는데, 여성들은 그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새로운 예배에는 여러 여성들이 포함되었습니다. 특별히 갈릴래아 지방의 몇몇 여성들은 교회의 창립 멤버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행전 1장 14절)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여성들을 제자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성들은 율법을 공부하기에 부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막말까지 스스럼없이 해댔습니다.
“자신의 딸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딸을 타락하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 공동체의 중심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란듯이 가난한 사람들, 멸시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율법에 무지한 사람들을 제자로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 여성들은 그분의 계획과 사명을 실천하는 사람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었습니다. 루카 복음서에는 그 중에서 세 명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이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복음 8장 2~3절)
빈부격차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예수님의 마음이 눈물겹게 감사하고 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만날 때 어느 지방 출신인지? 어느 대학교 졸업했는지? 어느 동네 아파트 사는지? 은행 잔고가 얼마인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당신 눈 앞에 서 있는 한 인간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극진히 사랑했으며, 어떻게서든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노력하셨습니다. 여성들과 어린이들, 죄인들과 이방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즐기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그 명백한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고 우리 교회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이 세상의 ‘아싸’들에 대해 활짝 열려 있습니까? 궁지에 몰려 있는 사람들, 세상 끝에 서 있는 사람들,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환대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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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좋은 땅이 되는 길; 하느님은 정의로우시다는 믿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BtErsVNKx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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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돌아가신 한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1등을 놓쳐본 적이 없고 서울대에 들어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못 하는 것이 없었던 분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을 접고 목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문제는 이분이 칼뱅의 ‘예정설’에 지나치게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도 예정설을 바탕으로 해석합니다.
예정설은 좋은 땅을 만들어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는 땅이 아니라 농부이고 그 농부가 뿌리는 씨라는 것입니다. 예정설은 주님께서 나쁜 땅도 구원하고 싶으면 구원하고 좋은 땅도 구원하기 싫으면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길이나 돌밭에 씨가 뿌려져도 그 씨가 길을 부드럽게 만들고 돌을 깨서 좋은 땅이 되게도 하며, 그 씨가 뿌려지지 않은 땅은 땅이 좋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씨가 땅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좀 억지가 심합니다.
이분은 결국 좋은 땅이었는지, 나쁜 땅이었는지는 몰라도 우울증을 겪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인을 인간이 감히 판단할 수는 없겠으나, 어쩌면 참 좋은 땅이었음에도 잘못된 믿음으로 점점 나쁜 땅에 되어버린 사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땅을 좋게 만들려는 노력보다는 씨의 힘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좋은 땅이 되어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노력해서 좋은 땅이 되면 그만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믿음입니다. 하늘은 땀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공평한 분이시라 노력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농부는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베트맨으로 유명한 ‘크리스찬 베일’은 궁핍한 가정형편 때문에 연기를 일찍 시작한 배우입니다. 어렸을 때는 명성을 얻었지만, 청소년기는 그저 연기가 평범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의 연기가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한 이유는 그의 연기에 대한 자세의 변화 때문입니다. 극사실주의 연기자로 변신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이를 메소드(인물 몰입형) 연기라고 하는데, 극 중 인물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는 55kg, 81kg, 100kg의 몸무게를 영화 때마다 맞춰 만들어냈습니다. 싸이코를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매일 싸이코처럼 살았고, 배트맨을 연기하면서는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목을 긁어댔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하루 두 시간씩만 자며 살았습니다.
물론 좀 지나친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혹사하는 데는 하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노력한 만큼 보답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참치 한 캔과 사과 하나만 먹으며 체중을 55kg으로 감량했을 때, 그는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고 합니다.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느낀 것입니다. 이런 감정이입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연기 때문에 오는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땅을 만들면 그만큼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씨가 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열매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씨는 어디에나 뿌려집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느님이 공평하다는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합니다. 흙수저, 금수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은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뇌성마비로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가 ‘나’라는 유명한 시를 쓴 이유는 주님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니 행복하다는 내용입니다. 그때 “공평하신 하느님”이라는 말은 좀처럼 쓸 수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저항하다 그 글을 썼을 때 한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가 유명해지자 미국에 사는 한 부부가 그녀를 고쳐주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송명희 씨는 “저는 주님께서 주신 몸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주신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해설을 제자들에게만 해 주십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 예언서를 반복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신다는 불공평한 말로 들리시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각자의 자유였습니다. 하느님은 그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그래서 가리옷 유다 같은 사람도 사도로 뽑혔을 것입니다. 당신께 더 머물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노력에 합당하게 보답해 주시는 이것은 예정설과 같은 차별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노력에 합당한 보답을 주신다는 주님 정의로움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여 맺은 열매를 들고 주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로또처럼 요행을 바라지 맙시다. 열매는 주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노력이 결정합니다. 주님은 노력한 만큼 갚아 주시는 정의롭고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이 믿음이 우리가 점점 더 좋은 땅이 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땀은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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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8,4-15 :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5절) 나가 땅에 씨를 뿌린다. 씨가 땅에 떨어지면 주님의 섭리에 따라 싹이 돋고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우리가 들은 말씀은 우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마태 13,8)의 열매를 맺는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의 뜻을 물었을 때, 제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하시며 비유를 설명해 주셨다.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하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신다. 그 신비는 믿음과 행실을 통하여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12절) 씨앗은 악마가 쉽게 채간다. 땅이 굳어있기 때문에 씨가 심겨지지가 않는다. 마음이 굳어 있고 고집스러운 사람들은 거룩한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더러운 마귀에게 어울리는 짓밟힌 길바닥과 같이 되고 만 것이다.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된 그 씨앗은 악마가 곧 채가고 만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서,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다.”(13절) 성당에 나와서는 신자처럼 행동하지만, 교회를 나오자마자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잊고 예전의 습관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더구나 박해가 일어나고, 진리의 원수들이 교회를 공격할 때에는 싸움에 나서기보다 도망치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14절) 말씀의 씨앗이 제대로 자리 잡고 싹을 틔운 것도 있다. 그러나 세상 걱정과 재물과 쾌락이 그것의 숨을 막아 쓸데없는 부분만 웃자라 말라버리는 현상이다.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부자 되려는 욕망은 말씀의 씨앗을 숨 막혀 죽게 하는 가시덤불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제 기름지고 잘 가꾸어진 땅에서는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좋은 땅에서는 뱁 배의 결실이라는 것으로 보아 그 땅은 기름진 땅임을 알 수 있다. 돌과 가시덤불과 해로운 모든 것을 없앤 마음이라는 밭에 떨어진 말씀은 뿌리를 깊이 내리고, 건강한 싹이 나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는 이 네 부류 중에 어디에 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부터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면서, 백 배의 결실을 맺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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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좋은 땅에 떨어진 것만으로는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또한 인내하여야 멋진 열매를 얻어 만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경청이 아니라 말씀의 체화입니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려 합니다. 근사한 지식의 열매를 삶의 풍요로움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 가려 하지요. ‘진즉에 공부를 좀 더 할 것을’ 하는 후회가 다양한 지식을 쌓는 열정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도 그러하였습니다. 힘든 시대일수록 지식인의 똑 부러진 단언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요.
사람들 사이에서 예언자로 이름을 날리셨던 예수님께서는 ‘씨앗의 비유’에서 말씀의 체화를 당부하십니다. 속 시원한 삶의 해답을 다른 이에게 얻는다고 네 삶이 달라질 것은 없다, 저 스스로 자신만의 고유한 열매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의 화려한 언변은 아무 쓸모가 없다며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십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그것이 길이든 바위든 가시덤불이든 아니면 좋은 땅이든 삶의 우연과 결을 같이합니다. 누구든 이 집안, 이 사회, 이 나라에 태어나고파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곳이 어디든지 일단 그곳에 떨어진 이상, 그곳에서 나만의 열매를 맺고 고유한 삶의 가치를 건져 내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타인의 지식을 배워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이 우리 안에서 소화되어 체화될 때, 우리는 구원을 얻어 누립니다.
구원은 본디 제 모습으로의 회복입니다. 다른 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과 쾌락과 유혹에 흔들려 자신을 잃어버린 이에게는 말씀도 구원도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과 좋은 땅이 있다고 한들, 열매 맺는 내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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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은 ‘비밀의 숲’을 보고 있습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검사와 경위의 이야기입니다. 극중에 검사장으로 승진한 검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법불아귀(法不阿貴), 승불요곡(繩不撓曲)” 중국의 사상가 한비자의 말입니다. ‘법은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고 먹줄은 굽은 모양에 따라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장인이 건축할 때 반드시 자를 기준삼고, 먹줄에 굽음이 없는 것 같이 법은 귀한 사람만 봐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강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비자가 2,300년 전에 한 말입니다. 검사장이 한비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아직도 법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고, 약한 자에게는 냉정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런 상황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도 합니다. 이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그 권력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언론인들이 늘 마음에 두는 말이 있습니다. “직필인주(直筆人誅), 곡필천주(曲筆天誅).”입니다. 중국의 고서 춘추(春秋)의 춘추직필(春秋直筆)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직필(直筆)은 사람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곡필(曲筆)은 하늘로부터 천벌을 받는다.”라는 말입니다. 한 언론인은 벽에 이런 글을 걸어 놓았습니다. “기자정신이 투철한 참 언론인은 늘 부정한 권력에 맞서 싸우며 정의(正義)의 진실을 혼으로 써서 세계역사에 남기는 기록자로서 국민의 알권리와 시대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언론은 “제2의 신(神)”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언론이 가지고 있는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언론이 사회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언론이 역할을 충실하게 하면 사회는 균형과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언론이 어두운 곳을 비추면 밝게 빛날 것입니다. 언론이 부패한 곳을 비추면 사회는 정화될 것입니다. 언론이 바른 길을 가면 진실을 깨우치는 목탁이 될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언론이 직필인주와 곡필인주의 정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국민들은 언론의 정의가 실현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뿌리는 분은 하느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밭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세상의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지만 유혹이 다가오면 쉽게 하느님의 말씀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이 열매를 맺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변화되고, 이웃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서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지만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유혹과 시련이 다가오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말씀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열매 맺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우리가 맺을 열매는 세상에서의 재물, 명예, 권력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맺을 열매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고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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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씨앗 품은 땅>
루카 8,4-15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그때에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씨앗 품은 땅>
씨앗 품은 땅은
결코 씨앗을
재촉하지 않아
이제나 저제나
싹을 띄우기를
묵묵히 기다릴 뿐이지
그날을 희망하며
헛것에 한눈팔지 않고
정성껏 품으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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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씨튼수도회 최혜영 수녀님]
<십자가를 살다>
날이 갈수록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유의지가 있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할 수도 있고 응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신앙이 나에게 또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준다는 깨침을 누구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제가 잘 아는 황 진(라파엘) 선배님은 척수 공동증이란 희귀병으로 30년 넘게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 제가 수도회에 입회할 무렵부터는 아예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라잉맨(누워 있는 사람)이라 부르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의 불꽃을 태우셨습니다.
제 수도생활의 햇수만큼 그의 투병생활이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하느님, 왜?” 라는 질문과 함께 연말이면 그분이 만드신 달력을 파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그에게는 달력을 보내는 일이 자신이 아직도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그가 병만 나지 않았더라면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그림도 그리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을 텐데 하느님께서는 “왜?” 그토록 무거운 십자가를 주셨을까요?
그는 묵묵히 고통 받는 욥처럼 인내롭게 살아냄으로써 “살아 있는 존재는 누구나 존귀하며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생명이신 하느님’을 몸으로 살아준 라파엘님께 경의를 표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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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앗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보듯이 씨가 어디에 뿌려졌는지에 따라, 그 결실이 엄청나게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서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먼저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신앙의 여정을 잘 걸어가다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땅이 되려면 형식적인 종교 생활에서 탈피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 기도보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의 뜻을 찾는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우선시하여야 합니다.
개인적인 신앙, 나만을 위하는 신앙 형태에서 벗어나 이웃과 공동선을 생각하며 사회적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아울러 이에 못지않게 영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도 추구해야만 합니다.
더불어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과 함께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는 굳은 신앙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참된 하느님 체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느님을 바로 알아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기복 신앙 위에 형성된 하느님의 모습을 정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더불어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나의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께서 관리하도록 맡기신 자연과도 화해해야만 합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우리 각자는 점차 좋은 땅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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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석희 라우렌시오 신부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의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좋은 땅을 만들어 파종하는 우리의 농사법과는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성서의 주무대가 팔레스티나 지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팔레스티나 지방은 비가 자주오지 않는 척박한 지역으로 씨를 먼저 뿌리고 밭을 가는 특이한 경농법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보통 10월에 씨를 뿌려서 이듬해 4월에 수확을 거두는데 수확 후 다음 파종까지 휴경지로서 밭을 그냥 묵힌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휴경지 동안 사람들은 밭을 가로질러 다니기도 하고, 이 때문에 밭 가운데 길도 생기게 되고 오랫동안 경작하지 않기에 가시 돋힌 많은 잡초와 잡목들도 자라나게 되는 것이죠.
또 좋은 땅도 있지만 밭의 상태가 고르지 못해 바닥이 드러난 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밭에 똑같은 씨를 뿌리지만 받아들이는 땅은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애청자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적인 관습과 생활 안에서 접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말씀이 열매 맺기 위해서는 그 마음의 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무릇 농부는 씨를 뿌릴 때 수확을 생각하며, 온 정성을 다해서 밭을 일구고 돌볼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의 씨앗도 널리 전파되어 많은 이들의 마음속의 신앙의 열매로 맺어지도록 기대하며 우리에게 뿌려졌습니다.
이제 말씀의 씨가 뿌려진 우리 각자의 마음의 밭은 어떤 상태이며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마음의 밭을 네 부류로 말합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처럼 신앙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현실적인 삶에만 관심을 가지는 밭, 돌처럼 신앙은 있으나 믿음에 기초하지 아니하고 신앙을 현세적 안일과 행복을 위한 도구로써의 밭,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처럼, 신앙이 구원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씨앗임을 인정하면서도 세상의 일과 신앙을 혼동하여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밭,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여 열매 맺는 밭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천상의 농부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이에게 당신 말씀의 씨앗을 똑같이 뿌리시고 당신의 은총을 골고루 배분해 주시지만, 받아들이는 모습은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씨뿌리는 농부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이들이 삼십 배에서부터 백 배에 이르기까지 열매맺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실상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밭을 바라봅니다. 그러기에 늘 마음의 밭이 어떠한 상태인지 살펴야 합니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밭이면 날카로운 쟁기로 뒤엎는 자기성찰도 있어야 하고, 잡초와 가시덤불에 쌓여진 밭이면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오더라도 잘라 내는 반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농부가 한번의 씨뿌림으로 수확을 기대하지 않고 계속 보살피듯 마음의 밭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안에 뿌려진 주님 말씀의 씨앗이 아무런 장애 없이 자라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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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널리스트 찰스 두히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습관은 우리 뇌에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의식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말에 크게 공감이 갑니다. 갑곶성지에 부임해서 사제관에 들어갔을 때 커다란 텔레비전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워낙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또 이제까지 텔레비전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것 하나?’라는 생각으로 전원을 켜고 채널을 돌리다 보니 재미있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온종일 텔레비전을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를 위한 것은 하나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저를 위해 해 오던 기도, 묵상, 책 읽기 등이 텔레비전 시청보다 뒷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 뒤에, 텔레비전을 치워 버렸습니다. 아예 없어져야 제가 살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담배를 끊은 후에 오는 금단현상처럼 허전함이 가득했지만, 어느 순간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습관이 생기면서 이제 더는 방송 내용이 궁금하지도 않고 보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습니다. 대신 저를 위한 다른 생산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습관을 지녀야 할까요? 혹시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습관에 빠진 것은 아닙니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씨 뿌리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지요. 그리고 씨는 주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씨가 뿌려진 곳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길바닥, 바위, 가시덤불과 같은 상태가 된다면 좋은 씨인 주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좋은 습관을 간직해야 합니다. 나쁜 습관을 간직하게 되면 결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텔레비전만 보는 사람이 주님과의 대화 시간을 만들 수 있을까요? 돈에 대한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이 재화를 이웃 사랑을 위해 쓸 수 있을까요? 게으름이라는 습관을 지니고 성실하게 주님의 뜻을 따를 수가 있을까요? 좋은 땅은 우리가 간직하는 좋은 습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습관은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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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보다 장점을 보세요>
SNS(Social Networking Servic)를 하다가, ‘1년 전 오늘의 추억’이라는 게시글이 올라온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1년 전에 이 SNS에 올렸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맞아. 작년에 이런 일이 있었지.’ 하면서 1년 전 오늘의 일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괴로웠던 일을 올리면, 매년 그 사진을 괴로워하면서 봐야 하잖아?’원치 않은 기억이 나타나서 하루를 힘들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또 다른 피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가 편하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잊을 수 있는 것도 잊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어떤 것이든 장단점이 있지 않을까요? 단점이 있어도 장점이 있으므로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단점보다 장점을 보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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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수행자의 삶>
-희망, 간절함, 항구함, 인내-
어느 은퇴한 유명정치인과의 인터뷰중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 생각납니다. 배우는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민주당이 배출한 대통령 세 분의 리더십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일단 공통점은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합니다.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김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보니까, 생각하고 사람 만나고 일하는 양이 나보다 두 배는 됩니다. 그때 그분이 70대이고 제가 40대 중반일 때인데도 그래요. 세 분 다 마찬가지입니다. 차이라고 하면, 김대통령은 진짜 인동초忍冬草입니다. 참고 참고 또 참아요. 하도 억압을 받아서 그런가 싶습니다. 노대통령은 격정적이고 직선적이죠. 문대통령은 또 굉장히 인내심이 강하고 균형을 잡으려 노력합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더 그러는 것 같아요. 싫은 소리를 거의 안해요.”-
특히 마음에 와닿는 말마디가 ‘인내’입니다. 요셉수도원에 부임 얼마후 원장과 나눴던 대화중 수도생활중 필요한 덕목이 ‘사랑’이라 제가 말했을 때 원장은 ‘인내’라 대답했던 기억이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오늘 복음의 총결론과도 같은 마지막 절에서도 ‘인내’라는 말마디가 새삼 크게 와닿습니다. 오늘 새벽에야 비로소 발견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8,15)
참 수행자의 삶을 드러내는 좋은 구절입니다. 인내가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기다림의 인내, 믿음의 인내, 겸손의 인내, 사랑의 인내, 희망의 인내 등 모든 덕목을 총괄하는 말마디가 인내입니다. 인내로써 열매를 맺습니다. 인내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만큼 인내하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 분도회 수도승들의 정주서원의 특징도 항구한 인내의 믿음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을 ‘참 수행자의 삶-희망, 간절함, 항구함, 인내-’로 정했습니다.
참으로 희망이 있을 때,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간절할 수 있고, 항구할 수 있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기에 끝까지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부활의 궁극의 희망이 간절하고 한결같은 인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간절한 소망은 바오로 사도와 같은 부활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은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15,42-44).
죽어서의 부활이 아니라 희망과 인내의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게 시작된 이런 부활의 삶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된 그 사람, 아담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파스카 예수님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점차 그분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이미 실현되기 시작한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그리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의 세부분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앞서는 씨뿌리는 사람이 중심이라면 뒷부분은 씨가 뿌려지는 마음 땅이 중심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이 상징하는 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일희일비함이 없이 한결같이 씨뿌리는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길바닥, 돌땅, 가시덤불땅, 좋은 땅 어디든 상관없이 끝까지 인내하며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음은 하느님께 희망을 둔 간절함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결과의 성취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과정을 보십니다. 하여 실패인생 같지만 결국은 성공인생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루카8,8).
앞부분의 결론입니다. 그러니 씨뿌리는 삶에 한결같이 충실했다면 결코 상심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어디선가의 좋은 땅에서는 무럭무럭 노력의 씨앗들이 자라나 익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런 씨뿌리는 심정으로 매일 강론을 씁니다.
결국은 내 문제입니다. 문제도 나한테 있고 답도 나한테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한결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씨뿌리는 삶에 충실했던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말씀의 씨앗들과 더불어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땅입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앗이 좋아도 마음이 길바닥, 돌땅, 가시덤불 땅같이 나쁘면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 말씀의 씨앗들이 아니라 내 마음 땅입니다.
하여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만들기 위한 부단한 수행의 노력을 필요로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참으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행虎視牛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기적처럼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마음 땅도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땅의 마음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들도 잘자라 풍성한 해피엔드 인생으로 끝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모시켜 주시고 말씀의 씨앗들도 잘자라게 하시며 참된 수행자로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카8,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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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좋은 땅을 방치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땅은 다 좋은 땅입니다.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잘 자라고 진흙땅에선 미나리가 자라고 습한 땅에서는 버섯이 잘 자랍니다. 기름진 땅에는 콩이나 고추가 잘 자랍니다. 각기 주어진 땅에서 알맞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도 관리하지 않을 때 못 쓰는 땅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는 수고와 땀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준비된 씨앗도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마음의 밭은 선합니다. 선하신 분께서 당신의 숨, 얼을 불어 넣어주셨으니 당연히 선합니다.
좋은 밭입니다. 이 좋은 땅이 어느새 길바닥으로, 바위로, 가시덤불로, 방치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고 그 땅을 결코 못쓸 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다 좋은 땅이 분명한데 관리를 하지 못해 폐허가 된다면 그 책임은 관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씨의 운명은 그 씨가 떨어진 땅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씨앗이 싹트지 못하고, 자라지 못할 땅이라면 지금 갈아엎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리게 됩니다. 많은 경우 자기가 잃어버리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주어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루가8,15)을 두고 하는 말이니만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길바닥이라는, 바위라는, 가시덤불이라는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워 말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 발 내딛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만나려면 사랑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하느님의 숨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좋은 밭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 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왜 주저하고 좋은 밭을 묵혀 두려하십니까?
풍성한 열매를 기대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신 말씀입니다.
듣고 싶은 것을 듣는 데 익숙하다면 들리는 것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 내 말을 적게 하게 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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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주님의 적극적인 불굴의 열성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루카 8,8)
성경 안에는 예수님의 큰 목소리가 들리는 대목이 가끔 등장하는데, 오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듣기를 간절히 바라시기에 그렇게 외치실 겁니다. 이 외침에는 군중의 무관심하고 건조하고 냉랭한 마음의 벽을 뚫으시려는 절절한 바람이 묻어납니다.
"길, 바위, 가시덤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씨가 자랄 수 없는 세 종류의 환경이 등장합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기는 하지만, 짓밟히거나 말라버리거나 숨이 막히는 고통 속에서 씨앗이 새 생명을 틔우지 못하고 죽게 되는 상황들입니다.
"악마, 시련의 때,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
따로 비유의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심어진 말씀이 맥없이 스러지게 되는 원인들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 요소들은 인생길에서 우리 힘으로 피해가거나, 없는 듯 무시해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까지 포함해 삶이니까요.
'씨뿌리는 사람'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또 씨앗이신 말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관상합니다. 그분은 땅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길바닥이건 바위건 가시덤불이건 개의치 않고 뿌려지십니다. 충분히 대접도 받고 이익이 될 곳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셔도 그러지 않으시지요.
그분은 짓밟히고 먹히고 말라버리고 숨막히는 고통에 삼켜지거나, 설령 죽음까지 당하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치지 않고 우리의 딱딱한 길바닥같은 마음, 물기도 온기도 없는 돌같이 굳은 마음, 세속적 욕망과 탐욕의 가시덤불이 무성한 복잡한 마음을 마다하지 않고 오시고 또 오십니다.
긴 세월 동안 말씀은 번번이 우리에게 거절당하고 외면 받고 문전박대를 당해오셨지요, 하지만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이 당신을 받아들여 품고 새 싹을 틔울 때까지, 열매를 맺을 때까지 다가오고 또 다가오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시랍니다!
제1독서에는 대비되는 개념이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썩어 없어질 것, 썩지 않는 것"
"비천한 것, 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 강한 것"
"물질적인 몸, 영적인 몸"
"첫 인간 아담, 마지막 아담"
"생명체, 생명을 주는 영"
"물질적인 것, 영적인 것"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 하늘에서 오신 분"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본래적으로 타고난 육적인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을 이처럼 구체적 언어로 대비시켜 반복합니다. 전자에 나열된 내용들이 우리에게 퍽 익숙한 인간의 실존적 상태라면, 후자에 나열된 말씀들은 은총으로 얻는 새 희망의 실체들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9)
오늘 제1독서의 대목은 양 극단의 개념들이 이처럼 조화하고 통합될 가능성을 제시하며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육의 지배를 받는, 물질 세상에 속한 인간이지만,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지요.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카 8,15)
땅의 토질이나 상태를 가리지 않고 당신 자신을 던지신 말씀께서 비로소 생명을 틔우실 곳을 만나십니다. 이 땅에서는 그간 겪으신 짓밟힘도 질식도 죽음도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그분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시고 녹아들어 씨앗과 땅이 한몸이 됩니다.
육의 조건에 갇힌 우리와 영이신 말씀께서 함께 머물며 서로에게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곳이 곧 성경이 "좋은 땅"이라 일컫고 그분이 열렬히 갈망하는 우리의 존재입니다.
이는 흙으로 된 우리가 영이신 말씀을 품을 때 일어나는 신비입니다. 우리가 나약하고 불결한 육적 조건을 떼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조건 안에 하늘을 품고 함께 변모하는 것이지요. 하늘에 속한 분의 모습을 담아, 그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벗님! 내가 어느 땅인지, 무슨 땅이었는지 아픈 과거를 헤집으며 뉘우치느라 귀한 기도의 시간을 흘려버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이미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지닌 인간적 한계와 죄스러움을 활짝 열어 말씀을 품고 머무르면 잠시 피폐해지고 퇴락했던 땅은 본래의 제 모습을 되찾을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치유하도록 내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 희망을 이야기하러 여기 모인 것이지요.
말씀이신 그분이 지치지 않으시니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분은 짓밟혀 죽더라도 우리에게 뿌려지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니, 그분께서 이토록 적극적으로 우리 구원을 위해 다가오시는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벗님! 우리에게 오신 말씀을 겸손히 듣고 소중히 받아안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불확실성과 고통, 근심으로 복잡한 지상 생활에 지쳐가더라도, 하늘을 품을 수 있는 이 놀라운 신비에 감사드리며 마음껏 누립시다. 이 여정을 통해 부족한 우리가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말씀 안에서 지치지 말고 서로 격려하며 함께 나아갑시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하늘 냄새 언뜻언뜻 풍기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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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정신적 변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어요. 마음에 맺힌 것이 없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로망 아닐까요. 자기 마음에 한이 많은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못한 상태를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변비’에 걸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관심의 대상을 바꾸면서 삽니다. 즉, 주 관심사와 부 관심사가 끊임없이 순환합니다 예컨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인데, 배가 고플 때 금강산 구경은 부 관심사가 되고, 먹을 것이 주 관심사입니다.
♣먹을 것을 먹고 나면 주 관심사는 뒤로 물러나서 부 관심사가 되고, 금강산 구경이 주 관심사가 되어 앞으로 나옵니다.이렇게 주 관심사와 부 관심사를 원활하게 순환하면서 사는 사람을 ‘복 많은 사람, 팔자 좋은 사람, 여한이 없는 사람, 참으로 행복한 사람’ 등등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배고픔이 해결 안 된 채로 억지로 금강산을 가게 되면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기에 주 관심사가 해소되지 않으면 소위 ‘정신적 변비 현상’이 생깁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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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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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가 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그 해설까지도 직접 해주셨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씨”와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시며,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씨 뿌리는 사람은 그 길바닥이나 바위나 가시덤불이나 좋은 땅이거나 땅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느 곳에나 씨앗을 뿌립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씨앗도 그 영혼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느 누구에게나 뿌려집니다. 마치 “아버지께서는 악한 이에게나 선한 이에게나 똑같이 햇살을 비추시고 옳은 이에게나 옳지 못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듯이”(마태 5, 45)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같은 씨앗’이 뿌려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이요, 그 씨앗은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리고 그것은 선사된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동시에 우리에게 씨앗을 틔워 결실을 맺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는 말씀을 실현해야 할 소명, 곧 사랑을 실현해야 할 과업을 짊어진 존재들임을 말해줍니다.
<둘째>는 “땅” 혹은 “밭”에 대한 것입니다. 좋은 씨가 좋은 열매를 맺듯, 열매는 씨앗에 따라 수확량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어느 밭에나 동일한 ‘같은 씨’가 뿌려졌습니다. 그러니 수확량은 ‘씨앗’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땅의 차이에서 오게 됩니다.
이는 씨앗이 싹을 잘 틔우도록 ‘땅을 일구는 일’과 잎이 잘 자라고 꽃이 잘 피어나고 열매가 잘 맺도록 ‘나무 자체를 잘 돌보는 일’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귀 기울임과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죽어야 맺는 과정이요, 자신이 죽어서 타인을 먹여 살리는 열매가 되는 과정입니다.
<셋째>는 “결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실은 자신을 떠나 타인을 위할 때만 타인 속으로 들어가 썩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어야 그 열매를 맺는 이 과정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더불어 바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 구원의 협조자요 도우미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의 구원에 공동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들 입니다. 결국, 말씀의 씨앗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 가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이 됩니다. 말씀이 열매 맺어가는 자리요 거처가 됩니다. 따라서 내 형제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내 가정, 내 공동체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할 인인지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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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8,5)
주님!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을 일구게 하소서.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하소서.
형제들 가운데 당신 사랑 번져가고, 세상이 거룩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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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qEkklJXKeo&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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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 15)
모자람과
서투름 사이에
우리가 있다.
삶에 서툰
우리들이다.
아직도 삶을
모르는
우리들이다.
점점 바르고
착한 마음을
잃어가는
우리들이다.
점점 소중한
것을 듣고
간직하며 사는
인내의 마음까지
놓치며 사는
우리들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이란
말씀의
연속이다.
사랑하기에
말씀이 있고
사랑하기에
좋은 열매를
맺으려 한다.
말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동안 말씀을
많이도 놓치며
살았다.
말씀으로
열매를
맺는다.
자연스러운
말씀의
열매이다.
땅은 열매로
드러나고
드러난 열매는
땅을 다시
성찰케 한다.
모든 열매는
말씀의
열매이다.
좋은 땅은
인내의
사랑이다.
사람의 삶이
말씀의
열매이다.
말씀을 듣고
간직해야할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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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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