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인지 진눈깨비인지 말해줘, 회화나무야 외 1편
권현형
겨울 새벽 회화나무는
수백만 번의 망설임을 끝내고
창문 안쪽 불빛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눈인지 비인지 진눈깨비인지 말해줘, 회화나무의 회화야
짙은 그늘을 거느린 활자마다
눈꽃 송이가 맺혀 있다
고통은 눈 녹듯 사라지지 않는다
누가 대신 호랑이 꿈을 꿔주진 않는다
아침 창문을 뚫고 망막을 뚫고
빛 치료를 해 주는 태양에게
약병을 들고 있는 여래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올 한 해 우리는 각자의 고통으로 더 멀어지겠군요”
다른 사람을 위해 호랑이 꿈을 꿔주지 않은 사람은
나쁜 사람, 나는 나쁜 사람
이틀 연달아 호랑이 꿈을 꾼 사람이 있는
새해 첫날에 모두가 버릇처럼 행운을 빌고 또 빌 때
결혼을 앞둔 젊은 하청 노동자가 이만 이천 볼트의 고압 전류에
녹아버렸다, 십 미터 상공 전봇대에 혼자 올라가 작업을 하던
그의 머리카락이 나무 꼭대기처럼 치솟아 불타오르고 있었다
실금 단위로 그물에 걸려 한없이 헝클어지는 마음
아픈 부처가 산등성이에 누워 있는 꿈을 꿨다
무수한 엽맥 모양의 손바닥을
부처의 번뇌를 강물 들여다보듯 구경했다
식물들이 왜 말이 없어지는지 알겠다
빛 한 상자
사물이 있던 자리의 잔상은
빛을 받고 있어도 가파르게 어둡다
난간 위의 햇볕과 난간 위의 물방울은
연설과 웅변으로 생을 낭비하지 않는다
놓쳐버리기 쉬운 이정표들은
들어가도, 들어가도 거울 속이다
평생 쓸 수 있는 햇볕이 그곳에 모여 있다
베어진 마음, 베어진 언어들의 씨앗이 먼 곳으로 날아가
맨드라미로 채송화로 피어 있다
오래 불행한 사람, 병이 깊은 사람은
자신을 감자 싹 도려내듯 파내버린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파내버리지 않겠다
부적 삼아 지도 삼아
늘 상자에 담은 시를 안고 표류해왔다
이정표를 놓친 즈므*에서도 시는 주근깨처럼 갖고 있었다
빛을 타고 나지 않았을 때는 스스로 빛이 되어야 한다
*강릉의 큰길 안쪽에 숨어 있는 마을
권현형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포옹의 방식, 아마도 빛은 위로 외.
미네르바 작품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