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감(尹堪)...아들 윤경주(尹慶胄)
윤중삼(尹重三)
[문과] 선조(宣祖) 39년(1606)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7위(27/36)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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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지임(志任)
생년 계해(癸亥) 1563년 (명종 18)
졸년 기미(己未)(주1)【補】 1619년 (광해군 11)
향년 57세
합격연령 44세
본인본관 파평(坡平)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 후기에, 장령, 강원도관찰사, 수원방어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지임(志任).
윤희인(尹希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흥효(尹興孝)이다. 아버지는 윤범룡(尹范龍)이며, 어머니는 이창(李昶)의 딸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시와 진사시 모두 합격한 뒤 죽산과 예산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08년 호조의 좌랑과 정랑을 거쳐 정언·사간원보덕 겸 필선·지평·문학·장령 등을 지냈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이 일어나자 문사랑(問事郎)에 추천되어 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당상관에 올랐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1614년 승지를 거쳐 이듬해 수원방어사가 되어 신경희(申景禧) 등이 능창군 이전(綾昌君 李佺)을 추대하려는 사건을 적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영평군(鈴平君)에 봉하여졌다. 1618년 한성부우윤과 형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생원]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1위(81/100)
[진사]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9위(24/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6명 [甲3‧乙7‧丙26]
전력 현감(縣監)
관직 호조참판(戶曹參判)
타과 1588년(선조 21)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51위
1588년(선조 21)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19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윤범룡(尹范龍)
[조부(祖父)]
성명 : 윤흥효(尹興孝)
[증조부(曾祖父)]
성명 : 윤희인(尹希仁)[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창(李昶)[生]
본관 : 양성(楊城)【補】
[처부(妻父)]
성명 : 신진(申津)
본관 : 미상(未詳)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만력16년무자2월24일사마방목(萬曆十六年戊子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1588)])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윤희인(尹希仁)
[문과] 연산군(燕山君) 12년(1506) 병인(丙寅) 별시2(別試2) 병과(丙科) 1위(04/15)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24D76CC778B1465X0
자(字) 자응(子應)
생년 을유(乙酉) 1465년 (세조 11)
졸년 무술(戊戌)(주1)【補】 1538년 (중종 33)
향년 74세
합격연령 42세
본인본관 파평(坡平)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응(子應).
윤태산(尹太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암(尹巖)이고, 부친은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윤준정(尹俊丁)이며, 모친은 통례원봉례 이효조(李孝祖)의 딸이다. 부인은 현감 유의습(柳義濕)의 딸이다.
문음으로 출사하였다.
1506년(중종 1) 사평(司評)으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07년(중종2)왕비가례도감낭청(王妃嘉禮都監郞廳)으로 종사하고 품계가 오르면서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었다.
1509년(중종 4) 장령(掌令)이 되고, 황해도어사로 파견되어 민정과 군사를 적간(摘奸: 난잡한 행동이나 부정한 사실의 유무를 조사 적발함.)하였으며, 다음해 집의(執義)에 승직하였다.
1513년(중종 8)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서 박영문(朴永文)과 신윤무(辛允武) 등의 역모사건을 다스리기 위한 문사청낭관(問事廳郞官)에 선임되고, 그 공로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516년(중종11)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除授)되고,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교체되었다.
이듬해 좌부승지‧우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으나 ‘추고관(推拷官)으로서 부당하게 교체되었다’는 탄핵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이 일로 인해 대간의 탄핵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사간, 예조참의를 역임하고 1518년(중종 13)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가 호조참의로 중앙으로 돌아왔다.
곧 형조참의로 옮겼으며, 대사간으로서 조광조(趙光祖)를 구원하는 계문(啓文: 왕에게 구두나 간단을 서식을 갖춰 올리는 글)을 올리고, 그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후 3년간 도승지에 재직하면서 안처겸(安處謙)의 옥사를 추국(推鞫: 왕의 명을 받아 죄인을 신문함.)하고 종2품 가선대부에 승자했다. 근신(勤愼)한 근무로 세상 사람들의 인망을 받았다 한다.
1522년(중종 17) 예조참판에 오르고, 곧 경연특진관을 겸대하였으며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파견되고, 사옹원제조를 거쳐 1527년(중종 22) 병조참판에 제수(除授)되었다.
이어 공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을 거쳐, 1530년(중종 25) 이조참판을 지내고 황해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옮겼고, 1532년(중종 27) 형옥을 살피지 못했다는 이유로 탄핵되면서 파직되었으나 곧 서용되었다.
1534년(중종 29) 다시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除授)되고, 1538년(중종 33) 전주부윤(全州府尹)에 파견되었다가, 탐오(貪汚: 욕심이 많고 깨끗치 못함)한 일로 인해 파직된 뒤 사망하였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외서산(外西山) 고곡(高谷)에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坡平尹氏族譜
[이력사항]
선발인원 15명 [甲1‧乙2‧丙4‧丁8]
전력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
관직 이조참판(吏曹參判)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윤준정(尹俊丁)
[조부(祖父)]
성명 : 윤암(尹巖)
[증조부(曾祖父)]
성명 : 윤태산(尹太山)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효조(李孝祖)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유의습(柳義濕)
본관 : 미상(未詳)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