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근초고왕 드라마 보고 어쩌구 한 글에서 "심지어 지금은 이를 위해 비류왕 초기, 두 나라가 대방고토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팽팽한 접전을 가상해내고 있으나 이것은 나중에 다시 다루는 기회를 기약하자"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올린다고 하고 싶지만, 사실 이 글은 제가 블로그에 쓰고 부흥 카페에 올린 것의 리메이크로서 부흥이 요즘 침체기인지 독자 제현의 따끔한 반응이 통 없어서 오히려 가시방석 같더라, 그래서 이쪽에도 올려보게 되었슴둥 하는 취지로 글머리에 나불나불 거립니다. 참고로 정작 대방 땅 얘기는 다음편ㅋ
廣開土
(1)
서막 : 악연과 위기
(전쟁은 그렇게 시작된다)
4세기의 동북아는 한창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물론 막장으로 소일하던 사마씨의 진나라가 강남으로 도망친 이래 어디 천하의 주인이 되어보잡시고 좀 거친 이민족 여러분이 사방에서 난입해 연장질이 난무하는 중원의 상황도 그러했지만, 그보다 조금 동쪽으로 시선을 돌려 바다 건너 세상을 보면 지난 수 세기 동안 주구장창 시동을 걸어오던 고구려와 백제가 비로소 중앙집권적 왕권을 확립하고 본 궤도에 진입해 소위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성장에는 언제나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그 잘난 중앙집권의 일환인지 큰아버지 봉상왕이 휘두르는 대숙청의 칼날 아래 소금장수로 숨어살던 을불은 반정 세력에 의해 추대되어 거꾸로 봉상왕을 몰아냈고, 이렇게 왕위에 오른 고구려 15대 미천왕은 현도군, 서안평, 낙랑군, 대방군 그리고 다시 현도성으로 전국을 한 바퀴 돌며 정력적인 연장질을 꾸준히 일삼았다. 덕분에 견디다 못한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서로 이사가는 등 고구려의 영토는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어디 그런가?
각설하고 이러한 고구려의 확장은 이내 한 가닥 한다는 주위 세력과의 충돌로 비화되었다. 그 상대는 바로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선비족으로, 당시 우문부·모용부·단부로 나뉘어 있던 동부 선비족 사회에서 모용부가 차츰 두각을 드러내자, 이에 위협을 느낀 평주자사 최비가 우문부와 단부를 사주해 고구려와 연합전선을 이룬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러나 제3자에 의해 급조된 연합군은 간단한 이간책에 너무나도 쉽게 와해되었고, 오히려 최비가 모용부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고구려로 도망치면서 모용부는 최비가 버리고 간 요서와 요동 일원을 고스란히 접수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좀 남았다)
하지만 이제 모용부가 완전히 요동과 요서의 주인이 되었는가 하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고구려는 차치하더라도 아직 요서에는 단부가 남아 모용부의 지배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고, 다시 그 너머에는 전 화북을 장악한 조나라가 전쟁광 석호의 지배 아래 버티고 서 있었다. 이런 마당에 모용부는 설상가상 모용한, 모용황, 모용인의 삼형제가 벌이는 권력 싸움으로 갈라져, 서장자 모용한은 단부로 망명하고 모용황과 모용인은 각기 요서와 요동을 갈라먹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거 어디서 본 이야기 같은데?
그래도 호랑이 새끼는 고양이가 아니라고, 모용부는 역시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극성에 본거지를 둔 모용황은 한때 모용한을 앞세운 단부의 공세로 궁지에 몰리기도 했지만, 이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개시해 이상저온으로 얼어붙은 요동만을 건너 평곽의 모용인을 기습적으로 제압하는 한편 조나라를 끌어들이고 정작 자신은 빠지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비교적 손쉽게 단부를 박살냈다. 나아가 이번에는 조나라가 모용부를 노리고 달려들자 대군에 맞서 극성을 지켜내고 화려한 역공까지 이끌어내며 승승장구, 그런 가운데 스스로 연왕에 즉위하니 이것이 바로 선비족 국가 연나라의 시작이었다.
(총대라도 맨 것처럼 액운을 죄 걸머지고 간 고국원왕)
이렇듯 요서 각지의 선비족이 모용씨의 깃발 아래 모여서 연나라로 대동단결하는 동안, 고구려에도 나름대로 변화가 있었다. 미천왕 사후 즉위한 고국원왕은 재위 초 민심의 안정에 힘을 쏟았고, 낙랑과 요동에 성을 쌓아 미천왕 대 편입된 영토를 착실히 고구려의 것으로 만들어갔다. 더욱이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모용인의 세력이 무너지면서 고구려로 망명해 온 사람들을 거두어 낙랑과 대방에 배치시킨 것도 이러한 노력의 발로였으니, 미천왕의 창업에 뒤이은 전형적인 수성 군주의 모습이지만 창업을 강요하는 난세 속에서 고국원왕은 역시 시대를 잘못 만났다.
서기 339년, 다시 한바탕 조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연나라 내부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모용황은 갑작스레 신성 방면으로 고구려를 압박해 들어갔다. 진서와 삼국사기에는 연나라가 쳐들어오자 고구려가 먼저 화친을 요청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모용황의 침공 의도 자체가 싸움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것이었으니 사실상 맹약의 주요 골자는 상호 불가침 정도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로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연나라는 순순히 물러갔고, 실제로 조나라의 침공이 있던 이듬해에는 고구려가 세자를 보내 연나라에 입조했으니 이것은 사실상 인질 내지는 불가침의 담보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앞서 고구려를 취하고 다시 우문을 멸하여 …… 연후에 가히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
『자치통감』 97권 진기 19
하지만 그 모든 노력도 헛되이, 새로 쌓은 용성으로 천도하고 종묘와 궁궐을 세워 나라 꼴을 갖춘 연나라는 기세를 몰아 본격적으로 중원 진출을 도모했고, 단부가 망하자 다시 연나라에 귀순해 건위장군이 되었던 바로 그 모용한은 먼저 후방의 고구려와 우문부를 정리해서 역시 후방의 화근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따라 연나라의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이 이루어진 것은 342년, 맹약으로부터 고작 3년이 지난 겨울이었다.
(시밤, 이쪽으로 안 온다매!)
연나라 군대의 강도 높은 공격과 함께 고구려 지휘부가 적의 진로 파악에 실책을 범하면서, 고구려는 우회하는 연나라 군대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환도성이 무너지면서 기본적으로 수행되는 약탈과 함께 궁궐은 불타고, 태후와 왕비가 사로잡힌 것으로도 모자라 무덤 속에 잠자던 미천왕의 시신까지 탈취당했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무엇보다 가장 큰 피해는 포로가 되어 연나라로 끌려간 5만여 백성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구가 곧 국력이던 시절이니, 이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는 명예와 실리 모두에 있어 말 그대로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의 막심한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천왕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고구려에도 아직 희망은 남아있었다. 애시당초 연나라 군대의 우회 기동은 최대한 단시간 안에 기대 이상의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자칫 현지에 고립되어 몰살당하는 작전이었고, 마찬가지로 현지에 익숙한 방어군의 유격전과 후방의 불안한 보급선도 고려해야 할 대상이었다. 명예 그딴거 없고 일단 살아남고 보자고 단웅곡으로 달아난 고국원왕은 숨어서 종적이 묘연하지, 한겨울에 접어들면서 동장군이 서서히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데, 후방에 고스란히 버티고 있던 고구려 5만 주력군이 견제차 보낸 1만 5천 별동대를 그대로 발라버리는 기염을 토하자 이러한 위험은 현실로 다가왔다.
(지당하신 말씀)
고구려의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은 달아나고 백성은 흩어져 산골에 숨어있지만, 대군이 물러나면 반드시 돌아와 모이고 그 살아남은 무리를 거두어 오히려 족히 근심거리가 됩니다. 바라건대 그 아비의 시신을 싣고, 그 생모를 잡아 돌아갑시다. 그가 몸을 묶어 스스로 귀순하길 기다린 연후에 돌려주고 은덕과 신뢰로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삼국사기』 18권 고구려본기 6
마침내 위험을 감지한 모용황은 그 해가 지나기 전에 고구려에서 철수했고, 봄이 되자 무너진 환도성으로 돌아온 고국원왕은 동생을 연나라에 보내 신하를 자처했다. 이에 따라 미천왕의 시신은 고구려로 돌아왔지만 태후는 여전히 연나라에 남아 인질이 되었고, 이로서 연나라의 우위는 확실하나 두 나라 사이의 책봉-조공 관계는 성립되지 않은 다소 애매한 상태로 13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리고 355년, 고국원왕의 조공에 따라 드디어 태후를 돌려보낸 연나라는 여기에 더해 고국원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아 낙랑공으로 책봉하고 두 나라 사이의 책봉-조공 관계를 확립했다. 이것은 화북을 장악하고 있던 조나라가 붕괴된 뒤 관동을 점거함으로서 중원으로 진출한 연나라의 자신감이었고, 그만큼 연나라가 고구려를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기라면 …… 기죠)
사정이 어찌되었든 이로서 고구려는 연나라의 일방적인 갈굼에서 벗어났으며, 덕분에 서방 전선이 일단락되자 한숨 돌린 고국원왕은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백제가 있었다.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이거 광개토대왕까지 연재하시는건가염?
가능하다면요 ㅋ
데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