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행복한 날, 행복한 아침입니다. 새 날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 불행하게 보이는 일이 사실은 축복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은 요시야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제 39세가 된 요시야의 죽음은 참으로 불행한 죽음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요시야는 8세에 즉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일하였습니까? 국운이 기울 대로 기울어진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열마나 심혈을 기울였습니까? 그는 남유다의 역대 왕들 가운데 이번 죽음을 불러온 사건을 제외한다면 전혀 흠이 없는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가를 지어 부름으로써 그를 추모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요시야의 죽음은 과연 그렇게 불행하기만 한 죽음이었을가요? 요시야의 죽음이 남유다 전체로 보아서는 비극적인 일이지만 요시야 개인으로 봐서는 비극적인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오히려 그의 사후, 남유다의 멸망 과정에 있었던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의 결과였습니다. 남유다의 멸망은 여선지자 훌다의 예언대로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선한 왕인 요시야라고 해도 남유다가 멸망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요시야가 살아 남유다가 멸망하는 것을 보았다면 그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었겠습니까? 남유다가 멸망할 당시의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나라가 유린되고 그의 처자식들이 자기 눈앞에서 살륙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야만 하였습니다. 만일 요시야가 끝까지 생존하였다면 이러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시야가 이러한 불행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요시야가 하나님께 충성스런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시야 당대에는 유다를 멸하지 않기로 하시고, 그가 평안히 열조의 묘실에 들어간 후에 유다를 멸하기로 하셨습니다(34:27,28). 오늘 본문의 요시야의 죽음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요시야의 죽음은 그 자체로는 비극처럼 보이지만 그의 시신이 유린되지 않고 열조의 묘실에 들어갔다는 점, 또 나라가 멸망하는 비극을 목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요시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고 무시한 데 대한 심판까지도 그에 대한 축복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불행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사실은 축복일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에게는 사업의 실패가 불행한 일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그것이 축복일 수 있고, 어떤 성도에게는 중한 질병이 불행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축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타난 현상만으로 일희일비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에 힘쓰고, 특히 우리에게 불행;하게 보이는 일까지도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축복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불행한 상황을 만날지라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각자 기도드리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