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공산주의자 피카소의 入國을 不許했다! 趙甲濟
공산당원이 예술가면 무조건 그를 포용하고 추앙해야 한다는 좀 모자란 생각을 하는 자칭 지식인들이 더러 있다. 조국을 배신하고 김일성을 추종했던 작곡가 윤이상, 남침 북한군과 중공군의 음악선동대 역할을 했던 정율상을 숭배의 대상을 삼고 그 일에 국민세금을 쓰는 공무원들은 형사처벌해야 한다. *2021년 6월1일 게재 1950년 3월 미국 정부는 프랑스 공산당원인 피카소가 '평화 빨치찬 세계 총회'란 단체의 대표 12명을 이끌고 미국에 들어오려는 것을 入國 금지시켰다. FBI(연방수사국)는 피카소를 안보에 危害한 공산주의자로 분류, 그가 죽을 때까지 감시 파일을 유지하였다. 평화 빨치산 세계 총회는 소련 공산당 간부 주다노프가 조종하던 공산당의 선전 조직이었다. 문재인 때의 한국 특검이라면 이런 FBI를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수사하였을 것이다. FBI는 예술은 국경이 없지만 예술인은 국경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미국은 공산주의자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를 뉴욕에서 보관하였다가 돌려주었다.) 피카소는 미국에 가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原爆 제조 금지를 설득하고, NATO 창립에 항의하며, 미국의 공산당을 지원하고, 할리우드의 10인을 체포한 데 항의하려고 入國을 신청하였던 것이다. 피카소가 美軍이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실제로 이런 학살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을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제목의 그림에 담은 것은 訪美가 좌절된 이듬해였다. 세계공산주의자들은 이 그림을 反美 선동에 악용하였다. 이 선동 그림은 미국에서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미술적으로도 惡評을 받았다. 피카소는 1944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들어가 1973년에 죽을 때까지 열성 당원이었다. 수백만 프랑의 기부도 했으며 黨의 선전에 필요한 그림도 그려주었다. 그림 '비둘기'는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평화공세에 악용되었다. 소련과 중공의 우표에도 실렸다. 한국전 휴전회담 때 판문점에도 등장하였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피카소는 화가이고 나도 그렇다. 피카소는 스페인 사람이고 나도 그렇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이고, 나는 그렇지 않다!' 피카소는 프랑코의 독재를 비판하였지만 그보다 심한 스탈린의 독재엔 침묵하였다. 그는 1950년에 스탈린 평화상을, 1962년엔 레닌상을 받았다. 소련 당국은 그러나 피카소의 그림을 '타락한 것'으로 규정, 전시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미국이 공산당원 피카소를 入國금지시켰다고 해서 미국을 욕하는 이는 없다. 미국 정부는 예술이 반역의 면허증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윤이상과 이응노의 反國家的 행위를 음악과 미술의 이름으로 덮으려는 수작은 상식에 反한다. 강규형 교수는 오늘 '피카소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은 6·25전쟁 허위 선전물이다'는 칼럼을 조선일보에 실었다. 피카소 탄생 14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 110여 점이 서울 예술의전당에 전시 중인데, 가장 주목받는 작품은 국내 처음 전시되는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라고 했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6·25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 지역 주민들 간에 발생한 참상이다. 강 교수가 정리한 전말은 이렇다.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기에 앞서 신천의 공산주의자들이 우익 인사를 많이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맞서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한 우익 진영이 봉기를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상호 살육전이 벌어졌다. 좌·우익의 충돌로 약 3만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북한은 사건 직후부터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신천 학살’이라는 거짓 프레임을 씌워서 국내외에 알렸다.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이 허위 선동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이 사건 이후 당원인 피카소에게 반미 선전을 위한 작품을 의뢰했다. 프랑스 공산당원인 세계적 철학자 사르트르는 6·25를 “미국의 사주를 받은 남한의 북침”이라고 허위 주장한 당시의 대표 인물이었다. 피카소는 공산당 선전을 믿고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1951년 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작품 설명에서 이런 배경을 고의로 빠트렸다. 결과적으로 이 그림은 북한 선전·선동의 산물로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것이다.> 강 교수는 한국 좌익들이 이 그림을 악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좌파 진영의 반미 선전에 꾸준히 활용됐다. 북한은 1960년에 신천박물관을 만들어 아직도 이 허위 사실을 선전하고 있다. “한국에서 미군의 양민 학살”을 배경으로 했다는 설명은 한국은 물론 세계 어디를 가나 읽고 들을 수 있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그릴 때 고야(Goya)의 작품인 ’1808년 5월 3일'의 구도를 그대로 사용했다. 고야의 그림이 소장된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가이드들이 이 그림을 설명할 때 천편일률적으로 도록에 있는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을 보여주며 미국이 주도한 ‘신천리 학살 사건’을 그린 것이라 비교 설명해 주고 있을 정도다. 더 큰 문제는 거짓으로 판명 난 이 선전용 그림이 한국의 교과서들에 무차별적으로 실렸다는 것이다. 미군에 의한 ‘신천 학살’이라는 것이 완전히 거짓임이 밝혀지자, 한국 좌파는 국제 좌파 세력과 입을 맞춰 “피카소가 표현하려 한 것은 특정 전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였다”고 항변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런 프레임으로 몰고 가고 있다. 그러나 피카소는 일평생 공산 세력에 의한 전쟁을 비판한 적이 없다.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중공·소련에 대해선 철저한 굴종과 협력의 길을 택했던 사람이다.> 그는 전시회 주최 측의 양식있는 행동을 촉구했다. <스페인인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피카소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고, 그 이듬해 한 인터뷰에서 “나는 공산주의자이고 나의 그림은 공산주의 그림이다”라고 밝혔다. “미군이 저지른 신천 학살 사건”이란 것이 거짓인 게 밝혀지고 나서도 이 그림에 대한 물타기가 계속되고 있고 서울 전시에서도 이런 노력은 필사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 그림이 서울에서 전시된 것은 좋으나 적어도 이 그림의 허구성과 잘못된 배경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명시돼야 한다. 아쉽게도 그런 최소한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에 관한 허위 사실에 대해 정확히 언급하는 것이 관람객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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