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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9: 27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고전 9: 27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
성도도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의 욕망대로 따라가면 실수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전도자라 할지라도 죄 가운데 빠져 산다면 그는 남은 구원해 놓고 자신은 버림받는 자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상적 경고이다.
참으로 중생한 자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고는 성경에 종종 나오고 또 필요한 경고이다.
* 롬 8: 13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러므로 바울은 주께서 주신 영혼 구원의 임무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범사에 절제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일이었다. 우리의 몸은 편안하고 세속적인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며 몸의 욕구대로 살면 실패자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도 영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앞에 놓고 자신을 절제하고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할 것이다.
1] 내가 내 몸을 쳐
(1) 쳐
'쳐'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피아죠'(*)는 '휘포'(*, '...아래')와 '옵스'(*, '눈')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눈 아래 부위를 친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매우 사실적인 표현으로서 당시 권투 선수들이 상대방의 얼굴 부위를 공격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권투 시합을 연상하면서 자신의 싸울 대상이 자기 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2) 몸
'몸'에 해당하는 '소마'(*)는 고린도전, 후서에서 '영'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본 절에서는 세속적이고도 육체적인 욕구를 제어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기 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2] 복종하게 함은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라고고'(*)는 '둘로스'(*, '종', '노예')와 '아고'(*, '데려오다', '끌고 오다')의 합성어로서 전쟁에서 승자가 패자를 종으로 끌고 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패배시킨 후 이제는 온전히 복종시켜 종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바울은그의 육체적인 본성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죄의 성향과 욕망까지 복종시키려고 하였다(Hodge).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 시간도 인내하며 기도할 수 없었던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마음(프뉴마)은 원이로되 육신(사르크스)이 약하도다”라고 하셨다. (막 14: 38)
일반적으로는 육신은 건강해도 기도할 마음이 없을 때가 많은 데, 그러나 주님은 (반대로)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셨다. 육신의 건강도 중요하다. 육신이 약하여 건강하지 못한 나에게는 이 말씀이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고, 건강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깊이 새겨진다.
육신이 약하면 아무리 영혼이 원해도 기도도, 찬송도 할 수 없고, 영적인 사역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이 충만하지 못해서 이기도 하면서도 또한 건강에 있어 육신이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이렇게 서로에게 깊이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영적인 것과 육신의 건강을 같이 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건강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한 주님의 의도를 살핀다면 “육신이 약하다”는 의미는 단순히 건강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육신은 헬라어로 '소마'body가 아니고, '사르크스'flesh이다. 전자는 단순한 동물적 육체이고, 후자는 육체는 육체이지만, 영혼이 거할 수 있는 육체를 뜻한다.
어부로써 육신이 단련된 제자들이 어찌 육신이 약하겠는가! 또한 육신이 건강한 사람이, 병약한 사람보다 더 열심히 기도를 한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육신이 약하다는 더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신진대사나 근육의 힘이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의 요구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순종하고 따를 수 있는 힘이 약하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 복종케 했다는 것은 실제로 자기 몸을 때렸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영적인 요구에 따르려고 하지 않는 육신적 본능을 쳐 복종케 했다는 뜻이다. 마치 야수를 채찍으로 길들이듯이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본능을 길들여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의 힘은 넘치지만, 주인의 요구에 따를 힘이 없는 야수처럼 그렇게 우리 육신은 건강하지만, 영적인 요구에 따를 힘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육신을 길들이고 따를 힘을 키워 주는 것은 육신의 훈련이 아니라 경건의 훈련으로 가능하다.
* 딤전 4: 7-8 –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3]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전파한'의 헬라어 '케뤽사스'(*)는 헬라어 '케뤽스'(*, '전달자')에서 유래하였다.
운동 경기에서 '케뤽스'의 임무는 경기규칙을 설명하고 선수들을 소집시키며 나팔을 불어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일 등을 하였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달자인 '케뤽스'에 비유하였다.
4]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
버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도키모스'(*)는 '도키마조'(*, '조사하다', '시험하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불합격자'의 뜻을 갖는다. 또한 이 단어는 옛날 화폐로 사용된 주화의 무게를 달아서 제 무게를 지닌 주파와 그렇지 못한 불량 주화를 가려내는 것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었다.
바울이 버림받는다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다.
(1) '구원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는 의미이다(Lenski, Godet).
(2)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Morris).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 얻은 자로서 주님을 마땅히 섬기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9장의 마지막 절로 인하여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교리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가 않다. 그러니까 칼뱅주의는 한번 구원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그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알미니안주의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봐라 사도 바울도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고 말씀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 시대에 장로교는 칼뱅주의를 따른다고 하고 감리교와 기타 여러 교단들은 거의 알미니안주의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누가 더 옳다고 생각을 합니까? 장로교는 분명히 칼뱅주의를 배우고 있지만 그들이 교회에 나와서 그러니까 개척을 해서 운영을 해 보니까 알미니안주의가 더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는 칼뱅주의나 알미니안주의가 다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왜 그들의 교리가 틀렸는가 하면 그것은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사람의 육체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영의 일이 빠진 교리는 세상 말로 앙꼬없는 찐빵과 같다. 성경은 영의 일이다. 육체의 일을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 신체가 구원을 받는다는 칼뱅주의나 알미니안주의가 맞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의 일을 알고 있는 성도는 신체의 구원이 아니라 영의 구원을 성경말씀을 따라 믿고 있기에 그러한 교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본 장은 바울이 자신의 독신 생활과 손으로 일한 생활을 들어 우리의 절제 생활을 권면한 말씀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복음에 장애를 없게 하려고 하나님의 은혜로 독신(獨身)의 길을 택했고 또 손으로 일하면서 전도 활동을 했다.
그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기꺼이 제한하였고 심지어 포기했다. 또 그는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비웠고, 자신을 현실의 여러 환경에 최대한 적응시켰다. 물론 죄 되는 일이 아닌 한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울처럼 헌신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예는 우리에게 놀라운 도전이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은 바울의 삶에 비교하여 어떠한가?
우리는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일을 위해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어느 정도나마 제한하고 포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달리기 경주자가 이기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며 힘써 달리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능과 돈을 주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드리며 모든 일에 절제하며 영생과 천국을 향해 힘써 달음질하여야 한다.
5] 아무쪼록 몇몇을 : 박조준 목사
사도 바울은 사도직에 대한 이견 때문에 여러 편지에서 비난에 대해 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령한 바울이었지만 그가 복음 전하는 사역을 하는 동안 외부로부터 반대를 당하고 자기 자신이 또한 실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거짓 형제들은 그의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인격과 명성을 저하시키기 위해서 비열할 정도의 일을 했습니다. 더구나 바울이 오랫동안 선을 행한 곳이고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만 할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 그랬습니다. 그 중에는 바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역자가 사명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여 주의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돌본다고 해도 아주 불친절한 대우를 받는 것은 이상한 일도, 새로운 일도 아닌 것입니다.
여기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의심했습니다. 그들의 불평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대답합니다. 앞서서 살펴본 우상의 제물 한 가지만 생각해도 바울이 성도들에 대한 자세를 엿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우상은 사실 믿는 사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당시 고린도 지방에서는 고기라면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이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사먹는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인데 한편에서는 고기를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며 먹었고, 다른 편에서는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믿는 사람의 양심상 먹을 수 없다고 해서 먹지 않았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지식으로 하지 말고 사랑으로 해결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다”고 하면서 “그런즉 너희의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은 “이렇게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면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게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지 않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가짐입니다. 얼마나 훌륭하고 희생적이고 존경스러운 삶의 자세입니까?
로마서 14장에서 고기 먹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도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기 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자기 희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본문에서 자기의 사도적 사명과 자격을 주장합니다. “비록 내가 주의 부활 이후에 즉시는 아니지만 승천 이후에 주님을 보지 못하였느냐?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내가 다른 사도들과 같이 같은 사명, 같은 부탁, 같은 능력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다른 사도들이 요구하는 존경과 부양과 명예를 내가 받을 자유가 없겠느냐?”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에 대한 증거로서 그의 사역의 성공과 그들에게 준 유익을 말합니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나의 사역에 대한 그리스도의 축복으로 너희 중에 내가 교회를 세우지 아니하였느냐? 주 안에서 나를 사도로 인친 것이 바로 너희니라. 너희가 이방 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바로 나의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확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다른 사람의 경험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으로 사도의 증거를 세우는 것이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무례하게 그러는 것에 대해서 책망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라”고 2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그렇게 오래 너희 가운데 있으면서 성공적으로 일했는데 너희가 나의 사도 됨을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지 않고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충실하게 일하는 일꾼들이 인정을 받거나 존경받는 대신 비난을 받고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사명을 믿고 인정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를 존경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알도록 하였습니다. 거의 2년 동안 그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한다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내가 누구를 통해서 예수를 알게 되었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내가 하나님의 일꾼, 그리스도의 사도로써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다. 즉 나의 권위를 조사하며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의 이유를 묻는다면 사도인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혹은 부양의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우리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을 부양 받을 권이 없겠느냐?”
세상에서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일로 살아갑니다. 군인은 군대에서 먹고 삽니다. 농부와 목자들은 그들의 노동으로 살아갑니다. 포도를 심고 재배하면 그 열매를 기대합니다. 가축을 기르는 사람은 그것으로 먹고 입습니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사역자들이 그들의 하는 일로 먹고 사는 것은 타당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며 사람을 위하여 곡식을 밟을 때는 먹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 율법은 소를 위해서 말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어진 명령입니다. 수고하는 사람들은 그 수고의 열매를 맛보아야 합니다.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을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리를 따져도)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그들이 뿌린 것은 기대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그들은 영생의 길을 가르쳤고,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몸바쳐 일했으므로 인생의 부양을 기대하는 것이 과한 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을 부양하는 일에서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라고 말합니다. 사역자들은 그들의 가치에 대하여 평가되고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복음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곤경을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의 사도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였지만 목회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 그의 권리를 인정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아마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너그러운 사역자들에 대해서 변명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의 말은 자기를 두고 한 말이 아니며 공정을 원리로 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했는데, 옛날 유대의 제도에서도 유대인 제사장이 성전에 바쳐지는 거룩한 것으로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그 사역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이론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그리스도가 세운 법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사도들의 권리에 대해서 길게 말하고 나서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사도적 특권을 포기한 것과 그 이유를 말합니다. 지난날 바울은 그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5절에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비용으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고, 그들이 부양할 아내도 동반하지 않았고, 살기 위하여 자신이 일을 했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더라도 고린도 교인들로부터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했습니까? 그는 자기의 영광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바울은 아무런 부담이 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즐거움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하는 일이 그의 영광이요, 그는 그것을 자기의 권리와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삯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복음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할 각오가 서 있었습니다. 목사가 자기의 유익보다 목회를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섬기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그의 영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며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많은 만족과 위로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이것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요, 이것이 나의 사도 된 이유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부과된 의무입니다. 자유의 일이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사역을 위해서 선택된 사람들은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운 보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기쁘게 하는 봉사입니다. 그저 의무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꺼이 자원하여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보답하시기로 약속된 일입니다. 마음에 없는 일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원하여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일꾼은 충성과 정열과 열심에 따라서 보답을 받습니다. 일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는 보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주어진 목적에 위배되게 사용하면 권력의 남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적에 위배되게 그의 권력이나 부양받을 특권을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흔쾌히 자기를 부인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모든 교역자의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19~23절은 남을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예를 듭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약한 자들에게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그의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유인으로 태어났고 로마의 시민이며 그는 아무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살기 위해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종처럼 살았습니다. 종과 같이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하는 것처럼 기쁘게 하려고 주의했습니다. 그에게 아무 특권이 없는 것처럼 행했습니다. 이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로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자기는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정열을 쏟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을 열심히 산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풍성한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열을 갖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와 같은 정열을 고취시킬 수가 있습니까? 큰 꿈을 가지는 일입니다. 물론 모든 꿈을 성취하는 데는 거기에 해당되는 대가가 있습니다. 높은 명예를 추구할수록 그 대가는 더욱 높아집니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희생이 없이 성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헌신 없이 성취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몰두하는 생각이 없이 헌신이 있을 수 없고, 자기 부정이 없이 몰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은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했습니다(빌 3:10~14).
여기 “좇아가노라”라는 말이 두 번씩 반복됩니다. 사도 바울은 매일매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삶의 정열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열이 필요합니다. 정열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가 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정신과 정성을 한데 묶어 무엇이 되어 보겠다고 뜨거운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삶의 정열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복잡한 생각이 들어올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는 위험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정열이 있는 사람은 이것들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삶의 정열이 있을 때 밀어닥치는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정열을 가진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성공으로 이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어야만 합니다. “사랑이란 너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만드는 결단이라”고 한 말은 의미 깊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룩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문제를 하나님 자신의 문제로 삼아 친히 해결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수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무한한 가치를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에게서든지 죄와 수치를 없애 주시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친히 치르시겠다는 뜻을 이 세상에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공을 목표로 하는 것은 십자가를 생명의 길로 택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많은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과 같은 삶의 정열이 필요합니다. 강력한 동기가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하는 마음, 끊임없는 정열의 원천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을 때 실패는 자명한 일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그는 이 목표를 위해서 자기를 부정하는 종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자기 부정은 자신의 이름, 명성, 자아 전체를 하나님의 부르심의 제단 위에 담대히 바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십자가는 여지없이 실패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추구하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자기의 자아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적극적인 자기 부정입니다. 그러므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꿈을 실현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이것은 어디서 생깁니까? 이기심에서부터 생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자기 부정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은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하는 데 헌신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는 위대한 과업을 수행할 수가 있었습니까? 믿음을 통한 자기 부정에서 이런 놀라운 창조적인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으로 모세가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자기 부정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사명입니다)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습니다.
믿음의 행위는 희생에의 부르심입니다. 이와 같은 결단을 내리는 믿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쓰시옵소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삶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헌신입니다. 거기에 썩을 면류관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하는데, 우리의 삶의 절제를 통하여 다른 심령을 구원하는 승리의 열매를 거두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 장의 교훈을 정리해 보자.
첫째, 신앙의 경주를 잘하는 사람은 상을 받을 것이다.
달리기 경주자가 잘 달릴 때 상을 얻는 것과 같이, 신앙의 경주도 잘할 때 상을 얻을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영생의 상이라고 증언한다.
* 갈 6: 8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빌 3: 14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둘째, 이기는 자가 상을 얻을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기는 것은 계명에 순종하여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요, 지는 것은 범죄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이기는 자가 될 것을 교훈하셨다(계 2-3장).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주 예수께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중생시키신 자들은 다 이길 것이다.
* 요일 5: 3-4 –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셋째, 신앙의 경주를 잘하고 이기려면 모든 일에 있어서 절제해야 한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사람들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 절제하며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교훈하셨다. (눅 9: 23).
자기를 부인하는 자는 절제할 수 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다.
* 갈 5: 23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구원 얻은 성도는 범사에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