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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물찰기(觀物察己)
천지의 만물을 보고 자기 자신을 살핀다는 뜻으로, 사물과 내가 하나라는 이치다. 곧 저것이 밝아지면 이것도 깨닫게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觀 : 볼 관(見/18)
物 : 만물 물(牛/4)
察 : 살필 찰(宀/11)
己 : 자기 기(己/0)
출전 : 근사록(近思錄) 卷3 치지(致知) 12
근사록(近思錄)은 중국 송(宋)나라 때 신유학의 생활 및 학문 지침서이다.
1175년 주희(朱熹; 주자)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등 네 학자의 글에서 학문의 중심문제들과 일상생활에 요긴한 부분들을 뽑아 편집하였다. 제목의 '근사'는 논어의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切問而近思)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622조의 항목이 14권으로 분류 되었는데, 각권의 편명은 후대의 학자들이 붙인 것이 굳어진 것으로서, 도체(道體), 위학(爲學), 치지(致知), 존양(存養), 극기(克己), 가도(家道), 출처(出處), 치체(治體), 치법(治法), 정사(政事), 교학(敎學), 경계(警戒), 변이단(辨異端), 관성현(觀聖賢)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희의 설명에 따르면 학문하는 사람이 그 단서를 구하고, 힘을 쓰며, 자기 몸을 처신하고, 사람을 다스리며, 이단을 구분하고, 성현을 보는 일의 큰 줄기를 다 갖추었다고 한다.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과 함께 신유학의 필수 문헌으로 중시되었고, 채모(蔡模)의 '근사록집주(近思錄集註)' 등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한국에는 고려 말에 신유학이 수입될 때 들어와 1370년(공민왕 19) 진주목사 이인민(李仁敏)이 4책으로 복간한 바 있으며, 그 책은 지금까지 전해져 보물 제262호와 제107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세종과 문종대의 경연에서도 이 책을 강론하였지만, 일반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것은 조선 전기 훈구파의 사장(詞章) 중심의 학문을 비판하고 신유학의 요체를 깊이 이해하기 시작한 중종대 사림파 단계에 와서였다.
1519년(중종 14) 구례현감 안처순(安處順)에 의해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소학'과 함께 중종대 사림파의 상징적인 서적으로 인식되어 기묘사화 후에는 한때 엄격히 금지되기도 하였지만, 이이(李珥)의 '격몽요결' 단계에 와서는 학자가 '소학'과 사서삼경 및 역사서 등을 읽은 다음에 탐구해야 할 성리서(性理書)의 하나로 제시되었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 학자의 필수문헌으로 인식되어 수많은 판본이 간행되었으며, 17세기 중반 정엽(鄭曄)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8세기 이익(李瀷)의 '근사록질서(近思錄疾書)'를 비롯한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근사록(近思錄) 卷3 치지편(致知篇)의
'치지(致知)'는 지식과 깨달음이 통합된 수준일 것이다. '대학(大學)'에 '致知在格物'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格物'과 '觀物'이 같은 의미로 쓰인다.
치지, 즉 萬理에 통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을 하나씩 다 格해야 하느냐 아니면 한 가지만 格하면 되느냐 하는 질문을 받고 정이천(程伊川)은 격물을 거듭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활짝 트여 관통하는 때(脫然有貫通處)'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성어는 근사록(近思錄) 卷3 치지(致知) 12에 나오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치지(致知)편 정이(程頤; 이천伊川)의 문답 편이다.
問: 觀物察己, 還因見物反求諸身否.
묻기를, "사물을 보고 자기를 살핀다는 것은, 사물을 보는 것에 따라서 자기 몸에 반성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曰: 不必如此說, 物我一理. 纔明彼, 即曉此, 此合內外之道也.
말하기를,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사물과 내가 하나라는 이치다. 곧 저것이 밝아지면 이것도 깨닫게 되는 것이니, 이는 안과 밖을 합하는 길이다"고 하였다.
又問: 致知先求諸四端, 如何.
또 묻기를, "지(知)에 이르려면 먼저 사단(四端)에서 구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曰: 求之性情, 固是切於身, 然一草一木皆有理, 須是察.
말하기를, "정(情)과 성(性)에서 구하는 것은, 참으로 몸에 간절한 것이지만,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에도 모두 이치가 있는 것이니, 모름지기 이를 잘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다.
관물찰기(觀物察己)란 물(물)의 이치를 보고 자기의 이치를 관찰한다는 말이다. 자기는 본(本)이고, 물(物)은 말(末)이다. 그 말의 물(物)을 보고 이것을 내 몸에 돌려서 이치를 찾는 것을 치지(致至)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사단(四端)이란 '맹자' 공손추 상편에 나오는 말로, 인(仁), 의(義), 예(禮), 지(知)의 실마리로서 측은(惻慇),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네 가지를 이르는 말이다.
이 장(章)에서는 하나이니, 만(萬) 가지 물(物)에 있는 것이 곧 내 몸, 내 마음에 있는 것이라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그러므로 '맹자'에 나오는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사단(四端)으로 이치를 구하는 것도 간절한 것이나, 작은 사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것이다. 그 이치를 얻는바가 많을수록 깨닫는 바가 있는 것이니 끊임없이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 근사록(近思錄) 제3권 치지편(致知篇)
근사록(近思錄)은 주희(朱憙)와 그 학문적 친교가 깊었던 여동래(呂東萊) 두 사람의 합작(合作)이다. 이 서(書)는 북송 시대 도학(道學)의 대표적 사상가인 주돈이,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및 정이천(程伊川)의 저술(著述)과 어록(語錄)을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다.
성립의 사정을 알기 위하여 주자의 후서(後序)를 보면 초학자(初學者)의 입문서로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주자도 이책을 읽어 얻은바를 기본으로 하여 다음은 4자(四子)의 전집(全集)을 읽을 것이며 구차하고 번다하다고 노력을 피하고 간편한 맛에 편승하여 이것만으로써 만족하다고 여기는 일이 있으면, 본서 편집의 의도에 반(反)한다고 말하고 있다.
구성은 도체(道體), 위학(爲學), 치지(致知), 존양(存養), 극기(克己), 가도(家道), 출처(出處), 치체(治體), 치법(治法), 정사(政事), 교학(敎學), 경계(警戒), 변이단(辨異端), 관성현(觀聖賢)의14류(十四類)로 나누어져 있다.
이것에 의지하여 학문의 도(道)에 들어간 사람은 중국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학자에도 많으며 따라서 주석서도 이 3국에 많다. 그리고 또 여동래(呂東萊)의 후서(後序)에 의하면 근사록(近思錄)은 이미 되어 있었다고 하면서 주자가 실제의 편자요 여동래(呂東萊)는 이에 참여한 것같이 쓰고 있다.
1. 마음이 도에 통해야 시비를 가릴 수 있다
伊川先生 答朱長文書曰: 心通乎道 然後能辨是非.
이천 선생이, 주장문(朱長文)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마음이 도에 통한, 다음에야 능히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것이다.
如持權衡以輕重.
이것은 마치 저울을 가지고 무겁고 가벼움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孟子所謂知言是也.
맹자가 말한 지언(知言)이 바로 이것이다.
心不通於道, 而較古人之是非, 猶不持權衡而酌輕重.
마음이 도(道)에 통하지 못하고, 옛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비교하는 것은, 마치 저울을 가지지 않고 물건의 무겁고 가벼움을 달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竭其目力, 勞其心智, 雖使時中, 亦古人所謂億則屢中, 君子不貴也.
그 눈의 힘을 다하고, 그 마음의 지혜로 노력하여, 비록 때로는 맞는다고 하여도 또한 옛사람이 말한 억측이 잘 적중된 것과 같음이니, 군자는 이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언(知言)이란, 상대의 말을 듣고 그 말 속에 있는 시비곡직을 이해하는 것으로 '맹자' 공손추 상편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억측루중(억측루중)이란 말은, '논어' 선진편에 말하기를, "천명이 아닌데도 재물을 불리는 것은 억측이 잘 적중되었기 때문이다(不受命, 而貨殖焉, 億則屢中)"이라고 하였다. 곧 추측이 적중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니, 마음이 도(道)에 통하지않는 상태에서 일의 시비나 경중이 확실하다 해도, 군자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도를 통하는 것이 근본이 됨을 말한 것이다.
2. 생각해 보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잘못이다
伊川先生答門人曰: 孔孟之門 豈皆賢哲.
이천 선생이 문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공자와 맹자의 제자들이라고, 어찌 모두 현인(賢人)이고 철인(哲人)이겠는가?
固多衆人. 以衆人觀聖賢, 弗識者多矣.
평범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 평범한 사람으로써 성현(聖賢)을 본다면 모르는 것이 많다.
惟其不敢信己而信其師, 是故求而後得.
오직 그들은 자신을 믿지 않고 그 스승을 믿었기 때문에, 도를 구한 뒤에 터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今諸君於頤言, 纔不合則置不復思, 所以終異也.
지금 제군들은 이(頤: 이천)의 말에 대하여, 합당치 않은 것이 있으면 두고 다시 생각지 않으니, 결국은 의견이 다르게 되는 것이다.
不可便放下, 更且思之. 致知之方也.
생각해 보지도 않고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므로 다시 거듭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곧 치지(致知)의 방법이다"고 하였다.
이천 선생이 제자의 물음에 답한 것으로서 치지(致知)의 방법을 일러준 글이다. 자기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버리지 말고 거듭 생각해야 하며 스승을 믿는 것이 배우는 자의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3. 편견이 있으면 표현이 막힌다
伊川答橫渠先生曰: 所論, 大槩有苦心極力之象, 而無寬裕溫厚之氣.
이천 선생이 횡거 선생에게 대답하기를, "논술한 것에는 대개 고통과 힘을 다한 기상이 있으나 너그럽고 온후한 기상이 없습니다.
非明睿所照, 而考索至此, 故意屢偏而言多窒, 小出入時有之.
지혜를 밝게 비추어서 한 것이 아니고, 생각하고 찾아서 여기에 이른 것이므로, 생각에 편견이 있고 표현이 많이 막혀 다소 이치에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更願完養思慮, 涵泳義理, 他日自當條暢.
거듭 원하건대 생각을 완전히 길러서 의리에 몰입 시킨다면, 어느 날 저절로 이치에 통달하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함영(涵泳)이란 물속에 들어가 헤엄을 치는 것을 이르는 말로, 마음을 차츰 어떠한 일에 젖어 들게 하여 몰입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 대목은 이천 선생이 횡거 선생에게 답하는 글의 일부를 딴 것이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여 찾아 내는 것은 치지(致知)에 필요 하지만, 명지(明知)에 도달 하기는 어렵다. 처지에 이르는 길은 억지로 애쓰고 힘쓰는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밝히고 의리(義理)를 함양시켜서 차츰 몰입하다 보면, 자연히 도(道)에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얻어진 것이 있으면 마음이 흡족하다
欲知得與不得, 於心氣上驗之.
이치를 깨우쳤는지 아닌지를 알려면, 마음 위에서 살펴야 한다.
思慮有得, 中心悅豫, 沛然有裕者, 實得也.
생각하여 얻은 것이 마음 속에 즐거워서 비가 뿌려진 것 같이 흡족하면 이것은 실지로 얻은 것이다.
思慮有得, 心氣勞耗者, 實未得也, 强揣度耳.
생각하여 얻은 것이 있어도 마음에 수고로우면, 이것은 실지로 얻지 못한 것이니 억지로 헤아린 것이다.
嘗有人言, 比因學道, 思慮心虛.
일찍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요사이 도를 배우느라고 생각이 깊으니 마음이 허해졌다"고 하였다.
曰: 人之血氣 固有虛實, 疾病之來 聖賢所不免.
이에 말하기를, "사람의 혈기에는 본래 허(虛)와 실(實)이 있어서, 질병에 걸리는 것은 성현(聖賢)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然未聞自古聖賢, 因學而致心疾者.
그러나 일찍이 들어 본적이 없는 것은 예로부터 성현(聖賢)이 공부로 인하여 마음에 병이 들었다는 것이다.
진실로 도를 터득하였는지의 여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테스트해 보라는 것으로 두 선생 중 누구의 말인지 확실치 않으나, 이천 선생의 말이라고 보고 있다. 도를 터득한 자는 패연히 기쁜 마음이 들겠지만, 그렇지 못한자는 마음과 생각만이 복잡하여 수고로운 것이다. 성현과 범인의 학문하는 차이와 학문 으로써 이치를 깨우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다.
5. 요괴나 허황된 이설(異說)을 믿지 말라
今日雜信鬼怪異說者, 只是不先燭理.
오늘날 요괴나 허황된 이야기를 믿는 것은, 단지 이치를 분명히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若於事上 一一理會, 則有甚盡期.
만약 사물의 이치를, 일일이 완미할 수 있다면, 어찌 다하는 시기가 있으랴.
須只於學上理會.
모름지기 도리를 배우는 학문위에서 탐구해야 할 것이다.
도리를 배우는 학문은 이치가 뚜렷하여, 불교나 도교 같은 황당한 이야기로 마음을 의혹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당시에는 유교만이 숭상되었던 때였으므로 불교나 도교를 이설(異說)이라고 하였다.
6. 학문은 생각하는 데 근원을 둔다
學源於思.
학문은 생각하는 데 근원을 둔다.
학문의 이치는 옳은 사고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생각은 총명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7. 묵지(默識)하며 꾸준히 사색하라
所謂日月至焉, 與久而不息者, 所見規模雖略相似, 其意味氣象逈別.
가령 하루나 한 달 동안 인(仁)을 행하는 것과, 오랫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은, 규모가 서로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그 의미와 기상은 크게 다른 것이다.
須心潛黙識玩索久之, 庶幾自得.
모름지기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묵지(默識)하며 사색하여 찾기를 꾸준히 한다면, 거의 스스로 얻어지게 되는 것이다.
學者不學聖人則已, 欲學之, 須熟玩味聖人之氣象.
학문하는 자가 성인을 배우지 않으려면 그뿐이지만, 이를 배우고자 한다면, 반드시 성인의 기상을 깊이 완미(玩味)해야 할 것이다.
不可只於名上理會.
다만 이름만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如此 只是講論文字.
이처럼 단지 문자만을 강론(講論)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월지언(日月至焉)이란 논어(論魚) 옹야편에 나오는 말로,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이 지나도록 인(仁)을 어기지 않았으나 그 나머지 제자들은 하루나 한 달 동안 어진것에 이르렀을 뿐이다(回也其心 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고 하였다.
즉 인(仁)을 행하는 시간이 짧은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는 성인의 학문을 배우려고 한다면 먼저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완미(玩味)하고 완색(玩索)을 오래 하다 보면 스스로 도(道)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한 이천 선생의 말이다.
8. 무리하게 행하면 오래 가지 못한다
問 忠信進德之事 固可勉强, 然致知甚難.
묻기를, "충실과 믿음으로써 덕으로 나아가는 일은 힘써 노력해야 하지만 지(知)에 이르는 길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伊川先生曰: 學者固當勉强.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자는 마땅히 힘써 노력해야 한다.
然須是知了, 方行得.
그러나 완전히 알고 난 다음에 행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若不知, 只是覰却堯, 學他行事.
만약 이것을 알지 못하면 단지 요임금을 얼핏 보고서 그가 행한 것을 흉내내는 것과 같다.
無堯許多聰明睿知, 怎生得如他動容周旋中禮.
요임금이 뛰어난 총명과 예지가 없었다고 하면, 어찌 그 행동과 주선이 예(禮)에 맞을 수 있었으랴!
如子所言, 是篤信而固守之, 非固有之也.
그대의 말은, 믿음을 돈독히 하여 그것을 굳게 지키는 것이지, 본래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未致知, 便欲誠意, 是躐等也.
아직 지(知)에 이르지 못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는 것은 순서를 뛰어 넘는 것이다.
勉强行者, 安能持久.
힘써서 무리하게 행하는 것이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除非燭理明, 自然樂循理.
다만 이치를 확실히 밝힌다면 자연히 이(理)에 좇는 일이 즐거워질 것이다.
性本善, 循理而行, 是循理事, 本亦不難.
사람의 성품은 본래 선(善)하여 이(理)를 좇아서 행하게 되니, 이(理)에 순종하는 일은 본래 어려운 일이 아니다.
但爲人不知, 旋安排著, 偏道難也.
다만 사람이 알지 못하고 억지로 안배(安排)하고서, 도리어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知有多少般數, 煞有深淺.
지(知)에는 많고 적음의 종류가 있고, 매우 깊고 얕은 것이 있다.
學者須是眞知, 纔知得, 是便泰然行將去也.
배우는 자는 이 진실을 알아야 비로소 앎을 얻는 것이고, 태연히 행하여 나아갈 수가 있다.
某年二十時, 解釋經義, 與今無異.
나는 20세 때, 경서를 해석하였었는데 지금도 다를 것이 없다.
然思今日, 覺得意味, 與少時自別.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젊었을 때 얻은 의미와는 다른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진실로 지(知)에 이르는 것만이 이치에 따르는 행(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질문자는 원래 지(知)와 행(行)이 따로따로의 공부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이천 선생은 말하여 지(知)에 이르지 못한 학문은 오래갈 수 없으며 참되지않다고 대답한 것이다.
9. 쌓음이 있으면 관통한다
凡一物上, 有一理.
무릇 하나의 물건에는 한 가지 이치가 있는 것이다.
須是窮致其理.
모름지기 그 이치를 궁구하여 찾아 내야 할 것이다.
窮理亦多端.
이치를 찾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或讀書, 講明義理; 或論古今人物, 別其是非; 或應接事物而處其當.
혹은 책을 읽어서 의리를 밝혀내는 수도 있고, 혹은 고금의 인물을 평론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수도 있으며, 혹은 사물에 응집하여 그 마땅한 것에 처하기도 한다.
皆窮理也.
이것은 모두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或問, 格物須物物格之. 還只格一物而萬理皆知.
어떤 사람이 묻기를, "격물(格物)이란 그 사물마다 이치를 연구하는 것인가요? 또는 다만 한 가지 사물의 이치에 이르면 만가지의 이치를 모두 안다는 것인가요?"라고 하였다.
曰: 怎得便會貫通. 若只格一物, 便通衆理, 雖顔子亦不敢如此道. 須是今日, 格一件, 明日又格一件, 積習旣多然後, 脫然自有貫通處.
말하기를, "어찌 전체를 관통할 수 있으랴! 한 가지 사물의 이치에 이르고 나서, 모든 이치에 통달한다는 것은, 비록 안자(顔子)같은 사람도 감히 말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오늘 한 가지를 터득하고, 내일 또 한 가지를 터득하여, 계속해서 쌓음이 많은 연후에야, 탈연히 스스로 관통하는 점이 있게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격일물(格一物)이란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로 "치지(致至)는 격물(格物)에 있다(致至在格物)"는 말에서 온 것이다. 격(格)은 '이르다(至)'의 뜻으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아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항(項)은 '대학'의 격물치지를 논한 것으로, 사물의 이치를 궁구 하여 알려면 한 가지 한 가지를 터득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연구를 쌓아 나가면 자연히 알게된다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10. 한 가지에만 집착하지 말라
思曰睿.
생각하는 것은 예(睿)이다.
思慮久後, 睿自然生, 若於一事上, 思未得, 且別換一事思之.
사려(思慮)를 오래한 뒤에 저절로 예(睿)가 생기게 되는 것이니, 만약 한 가지의 일을 생각하여 이치를 얻지 못하면, 또 다른 한 가지 일로 바꾸어서 생각하라.
不可專守著這一事.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
蓋人之知識於這裏蔽著, 雖强思, 亦不通也.
대개 사람의 지식은 한 곳에서 막히면, 비록 무리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역시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정씨유서 제18편)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서경(書經)' 홍범편(洪範篇)의 글을 인용한 이천 선생의 말로서,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생각하다가 막히면 잠시 다른 일로 바꾸어서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풀리지 않는 일을 해놓고 계속 집착하여 생각하다 보면 머리만 무거워 질 뿐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법이다. 이럴 때에는 다른 일로 생각을 바꾸어 궁구해 나가면, 문득 막혔던 먼저의 일도 풀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11. 오직 지(知)를 이루어야 한다
問: 人有志於學, 然知識蔽固力量不至, 則如之何.
묻기를, "사람이 학문에 뜻이 있는데도 지식이 굳게 가려져서 역량을 발휘할 수 없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曰: 只是致知. 若知識明則力量自進.
대답하기를, "오직 지(知)를 이루어야 한다. 지식이 밝으면 역량은 저절로 증진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문인의 질문에 이천 선생이 대답한 말로서, 학문에 뜻이 있다면 오로지 치지(致知)에 전념해야 하며, 치지에 이르면 역량은 자연히 진보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12. 저것이 밝아지면 이것도 깨닫게 된다
問: 觀物察己 還因見物, 反求諸身否.
묻기를, "사물을 보고 자기를 살핀다는 것은 사물을 보는 것에 따라서 자기 몸에 반성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曰: 不必如此說, 物我一理. 纔明彼卽曉此, 此合內外之道也.
말하기를,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사물과 내가 하나라는 이치다. 곧 저것이 밝아지면 이것도 깨닫게 되는 것이니, 이는 안과 밖을 합하는 길이다"고 하였다.
又問: 致知先求之四端如何.
또 묻기를, "지(知)에 이르려면 먼저 사단(四端)에서 구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曰: 求之情性, 固是切於身, 然一草一木皆有理, 須是察.
말하기를, "정(情)과 성(性)에서 구하는 것은 참으로 몸에 간절한 것이지만,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에도 모두 이치가 있는 것이니, 모름지기 이를 잘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다.
관물찰기(觀物察己)란 물(物)의 이치를 보고 자기의 이치를 관찰한다는 말이다. 자기는 본(本)이고, 물(物)은 말(末)이다. 그 末의 物을 보고 이것을 내 몸에 돌려서 이치를 찾는것을 치지(致至)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사단(四端)이란 '맹자' 공손추 상편에 나오는 말로, 인(仁), 의(義), 예(禮), 지(知)의 실마리로서 측은(惻慇),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네 가지를 이르는 말이다.
이 장(章)에서는 하나이니, 만(萬) 가지 물(物)에 있는 것이 곧 내 몸, 내 마음에 있는 것이라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그러므로 '맹자'에 나오는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사단(四端)으로 이치를 구하는것도 간절한 것이나, 작은 사물에 이르기 까지의 모든 이치를 아는것이 중요하다고 한 것이다. 그 이치를 얻는바가 많을수록 깨닫는 바가 있는 것이니 끊임없이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13. 생각하는 것을 예(睿)라고 한다
思曰睿, 睿作聖.
생각하는 것을 예(睿)라고 한다. 예(睿)는 성(聖)을 만든다.
致思如堀井, 初有渾水, 久後稍引動得淸者出來.
생각을 이루는 것은 우물을 파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흐리고 탁한 물이 있지만 오랜 후에는 점차 맑은 물이 나오는 것이다.
人思慮, 始皆溷濁, 久自明快.
사람의 사려(思慮)도 처음에는 혼탁하였어도 오래되면 저절로 명쾌해지는 것이다.
사려(思慮)는 되풀이하여 충분하게 오래 할 수록 맑고 쾌활해지는 경지에 이른다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서경(書經) 홍범편(洪範篇)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우물물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사려(思慮)는 치밀해야 모든 도리를 깨우쳐 통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14. 무엇을 근사(近思)라고 합니까?
問: 如何是近思.
묻기를, "무엇을 근사(近思)라고 합니까?" 하니,
曰: 以類而推.
말하기를, "자기가 아는 것 중에 가까운 것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류이추(以類而推)란 자기가 아는것 중에 가까운 것을 미루어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즉 가까운 것들로 부터 조리있게 생각하여 먼 데까지 넓혀 나간다는 뜻이다. 이책의 제명(題名)인 '근사록(近思錄)'의 근사(近思)를 설명한 이천 선생의 말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건너 뛰거나 먼 곳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가까운 속에서부터 깨우쳐서 완전히 안 다음에 다른 이치를 생각해 나가면 모든 것을 점차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가까운 데서 미루어 생각지 않고 처음부터 한꺼번에 알려고 한다"고 하였으니, 근사(近思)의 의미를 새겨서 실질적인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5. 의문을 풀어 그 뜻을 이해하라
學者先要會疑.
배우는 사람은 먼저 의문을 풀어서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배운다는 것은 곧 의심나는 것을 순서있게 풀어 나가는 것이라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글을 처음 읽을 때에는 의문을 모르지만, 읽어갈수록 차츰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의문을 한 번 겪고 나면 자세히 이해하게 되니, 비로소 올바른 학문이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의문이 있다고 해서 나름대로 경솔한 판단을 내려 포기하지 말고 차분하게 그 이치를 풀어 나가야 학문에 진보가 있을것이며, 자신을 꾸준하게 완성시켜 나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16. 물괴(物怪)와 신간(神姦)은 말하기 어렵지 않다
橫渠先生答范巽之曰: 所訪物怪神姦 此非難語, 顧語未必信耳.
횡거 선생이 범손지에게 답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질문한 물괴(物怪)와 신간(神姦)에 대하여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나, 돌이켜 설명을 한다고 해도 반드시 믿지 않을 것이다.
孟子所論 知性知天. 學至於知天, 則物所從出, 當源源自見.
맹자가 논한 바에 의하면 '성(性)을 알면 천(天)을 안다'고 하였다. 학문이 천(天)을 아는데까지 이르게 되면, 만물이 생성되는 바를, 그 근원부터 자연히 볼 수가 있게 될 것이다.
知所從出, 則物之當有當無, 莫不心諭, 亦不待語而後知.
그리고 만물이 생성되는 근원을 알게 되면 괴물이 존재하는지 안하는 지를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니, 설명을 듣고서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諸公所論, 但守之不失, 不爲異端所劫, 進進不已, 則物怪不須辨, 異端不必攻, 不逾朞年, 吾道勝矣.
여러 유자(儒者)들이 말한 것을 잃지 않고 잘 지키며, 이단(異端)에 침해당하지 않고, 앞으로 힘써 나아가 그치지 않는다면, 물괴(物怪)를판별할 것도 없고, 이단을 반드시 공격하지 않아도 일 년을 넘기기도 전에 우리의 도(儒學)가 이길 것이다.
若欲委之無窮, 付之以不可知, 則學爲疑撓, 智爲物昏.
만약 만물은 무궁한 것이니 알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학문은 흔들려 의문이 생기게 되고 지혜는 어두워지게 될 것이다.
交來無間, 卒無以自存, 而溺於怪妄必矣.
이단사설(異端邪說)이 자주 와서 틈이 없게 된다면, 마침내 스스로를 지킬 수 없게 되어 괴망(怪妄)으로 빠져 들어 가는 것은 필연(必然)의 일이다"고 하였다.
세상의 물괴(物怪)는 이치를 궁구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물괴 신간(神姦)의 이치가 무궁하여 알 수 없다고 방관하며, 끝까지 추궁하지 않고 학문을 연구하지 않으므로 드디어는 이단에 현혹된다는 말이다.
17. 구차하게 아는 것을 터득이라 하지 않는다
子貢謂,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 旣言夫子之言 則是居常語之矣.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부자(夫子)의 어진 성품에서 나오는 말과 천도(天道)는 들어도 알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공자는 이미 그 말을 항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聖門學者, 以仁爲己任, 不以苟知爲得.
성인의 문하에서 배우는 자는 인(仁)을 자기의 임무로 삼고, 구차하게 아는 것을 터득이라고 하지 않는다.
必以了悟爲聞, 因有是說.
반드시 깨달음을 갖고 듣기 때문에, 자공의 이와 같은 말이 있게 된 것이다.
진정한 학문에 뜻을 둔 자는 듣는 것으로써 안다고 하지 않고, 오직 모든 것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 깊이 그 이치에 통달하는 것이다. 또한 하늘의 이치는 깊은 진리여서 끊임없이 정진하는 자일지라도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18. 학문이란 들뜬 상태에서는 이룰 수 없다
義理之學, 亦須深沈方有造.
의리의 학문은 또한 깊이 잠겨서 방정(方正)하게 해야 도달할 수 있다.
非淺易輕浮之可得也.
얕고 쉽고 가볍고 들뜬 상태에서는 이루어 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의리의 학문은 깊이 조용히 연구하는 데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에 주자는 "성인의 말씀은 갈수록 무거워서 깊은 곳으로 들어 가야만 비로소 얻게되는 것이니, 만약 겉만 훑어 본다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19. 마음이 거칠고 산만하면 성인에 이를 수 없다
學不能推究事理, 只是心麤.
배워도 사리를 추구할 수 없는 것은 단지 마음이 거칠고 산만하기 때문이다.
至如顔子, 未至於聖人處, 猶是心麤.
안자(顔子)와 같은 이가 성인에 이르지 못한 것도 마음이 거칠고 산만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이 세심해야 학문을 깊게 연구할 수 있으므로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안자(顔子)는 보통 사람에 비하면 정밀하지만 공자에 비하면 세심하지 않은 것이니, 안자가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은 그 마음 때문이라고 하였다.
20. 험한 경험을 한 후에 마음이 통한다
博學於文者, 只要得習坎心亨.
널리 학문을 배우는 자는 거듭 닥치는 곤란도 풀어가야 할 것이다.
蓋人經歷險阻艱難然後, 其心亨通.
대체로 사람은 험하고 어려운 일을 경험한 뒤라야 그 마음이 통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형통함을 얻으려면 많은 어려움과 거듭 닥쳐오는 곤란을 거친 다음에 얻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일에 결단성을 잘 부여한다면 이것이 곧 마음의 형통함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1. 마음에 깨달은 바가 있으면 곧 기록하라
義理有疑, 則濯去舊見, 以來新意.
의리에 있어서 의심이 나면 지금까지의 생각을 씻어 버리고 새로운 뜻으로써 생각해야 할 것이다.
心中有所開 卽便箚記.
마음속에 깨달은 바가 있거든 곧 이것을 기록해야 한다.
不思則還塞之矣.
생각을 계속하지 않으면 도리어 막히게 된다.
更須得朋友之助.
또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一日間, 意思差別.
하루 동안이라도 벗과 토론을 해보면 하루 사이에 생각하던 것이 다를 것이다.
須日日如此講論, 久則自覺進也.
모름지기 강론을 이와 같이 날마다 계속하여 오래 하다 보면 스스로 깨닫고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치지(致至)에 이르기 위한 방법중에 앞에서는 풀리지 않는 일이 있으면 곧 다른 일로 바꿀 것을 말하였으나, 여기서는 생각해 오던 것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뜻으로 다시 생각해 볼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작은 곳에까지 심혈을 기울여 세심하게 관찰하라는 뜻이며 배우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정밀해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학자들은 살피지 않고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고 내세우니, 이를 벗어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22. 생각이 막히면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라
凡致思到說不得處, 始復審思明辨. 乃爲善學也.
무릇 생각을 다하여 말할 수 없는 데까지 왔을 때에는 처음부터 다시 깊이 생각하고 분별을 밝혀야 한다. 이것이 참다운 학문을 하는 것이다.
若告子則到說不得處, 遂已更不復求.
만일 고자(告子)와 같은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곳에 이르면 그만 두고 다시 마음에서 구하지 않았다.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그 생각이 막히는 곳이 있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거듭 생각하고 분별을 밝힐것을 말하였다. 중도에서 그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치지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학문을 얻고자 함이 아니다.
전국시대의 고자(告子)는 말하기를, "말에서 얻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에서 구하지 말고, 마음에서 얻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기(氣)에서 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횡거 선생은 이것을 지적하여 부연 설명한 것인데, 고자의 말은 맹자 공손추 상편에 나온다. 그의 이름은 불해(不害)인데, 맹자에게서 배웠고, 유가(儒家)와 묵가(墨家)의 학문을 다한 사람으로, 성무선무불선설(性無善無不善說)을 주장하였다. 곧 사람의 성품은 선하게도 만들 수 있고 불선(不善)하게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23. 문자의 뜻을 먼저 깨달으라
伊川先生曰: 凡看文字, 先須曉其文義然後, 可求其意.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대체로 문자를 보는 데는 반드시 먼저 그 문자의 뜻을 깨달은 후에 그 내용을 구해야 한다.
未有文義不曉而見意者也.
문자의 뜻을 알지 못하고 내용을 아는 자는 없다.
독서하는 방법을 설명한 이천 선생의 말이다. 즉 문자(文字)에는 글자의 뜻과 말 뜻이 있는 것이니, 글자의 의미를 명백히 알고 나서 그 내용을 파악할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글자의 뜻에만 매달려 읽다보면 자칫 내용에서 멀어질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만 할 것이다. 문자는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24. 문자의 뜻을 먼저 깨달으라
學者要自得.
배우는 자는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六經浩渺, 乍來難盡曉.
육경(六經)은 광대하므로, 별안간 그 뜻을 모두 밝히기 어렵다.
且見得路徑後, 各自立得一箇門庭, 歸而求之可矣.
먼저 배우는 방법을 찾은 다음에 각자가 스스로 하나의 문정(門庭)을 세우고 집으로 돌아와서 실행을 구해야 옳을 것이다.
경서(經書)를 공부하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6경은 그 내용이 깊고 방대하여 쉽게 이해하기 어렵기때문에 스스로 방법을 강구하고 실천하여 참뜻을 얻어야 한다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오직 배우는 자에게는 자득(自得)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25. 성인의 말은 가깝기가 하늘과 같고 땅과 같다
凡解文字, 但易其心, 自見理.
무릇 문자를 이해하려는 데는 그 마음을 가라앉혀 편안히 하면 저절로 이치가 나타난다.
理只是人理, 甚分明 如一條平坦底道路.
이치는 곧 사람의 이치로서 분명하기가 마치 한 줄기의 평탄한 도로와 같다.
詩曰; 周道如砥, 其直如矢. 此之謂也.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주(周)나라의 도(道)는 숫돌처럼 평탄하고 화살처럼 곧다"고 한 것은 이를 것을 말하는 것이다."
或曰: 聖人之言, 恐不可以淺近看他.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의 말은 얕고 가까운 것으로써 알아 내기가 어렵습니다"고 하자,
曰: 聖人之言, 自有近處, 自有深遠處, 如近處.
말하기를, "성인의 말에는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여 깊고 먼 곳도 있으며 가까운 곳도 있는 것이다.
怎生强要鑿敎深遠得.
어찌 얕은 곳을 강제로 깊게 파서 심원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揚子曰; 聖人之言, 遠如天, 賢人之言 近如地.
양자(揚子)는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말은 멀어서 하늘과 같고, 현인(賢人)의 말은 가까워서 땅과 같다'고 하였는데
頤欲改之曰, 聖人之言, 其遠如天, 其近如地.
나(頤)는 고쳐서 말하겠다. 성인의 말은 그 멀기가 하늘과 같고 가깝기가 땅과 같다"고 하였다.
우리가 배운다는것은 사람의 이치를 배우는 것이니 공부를 한다면 먼저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이치를 알기 위해서는 사의(私意)를 버리고 오직 성현(聖賢)들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관찰해야 할 것이다.
그 뜻을 이해하려고 얕은 것을 지나치게 깊게 보아서 그에 빠지지 말것을 경계하였다. 성현의 말씀은 얕은 것도 있고 깊은 것도 있으며, 하늘과 같이 아득히 먼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치는 어디에도 있는 것이다.
26. 문맥을 지나치게 깊이 파고 들지 말라
學者不泥文義者, 又全背却遠去; 理會文義者, 又滯泥不通.
배우는 사람 중에서 문장의 뜻에 익숙치 않은 자는 전부의 뜻이 어긋나서 멀어지고,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는 그것에 파묻혀서 통할 수가 없다.
如子濯孺子爲將之事, 孟子只取其不背師之意, 人須就上面, 理會事君之道如何也.
가령 자탁유자(子濯孺子)가 장군이 되었을 때의 일처럼 맹자는 다만 스승에게 배반하지 않은 뜻만을 취한 것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임금을 섬기는 도(道)가 어떤 것인가를 알려고 한다.
又如萬章問舜完廩浚井事, 孟子只答他大意, 人須要理會浚井如何出得來, 完廩又怎生下得來.
또 만장(萬章)의 물음처럼 순(舜) 임금이 창고를 고치려고 지붕위로 올라간 것이나 우물을 팠던 일을 맹자는 다만 그에게 큰 뜻만을 대답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우물 속에 파묻혔다가 어떻게 나왔는가를 알려고 하며, 창고 수리때 지붕위에서 어떻게 내려올 수 있었는가를 문제삼는다.
若此之學, 徒費心力.
이러한 학문은 심력을 소비하는 것이다.
(程氏遺書 第18篇)
책을 읽을때 글의 뜻에 마음을 쓰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한 이천 선생의 말이다. 글을 공부하는데는 내용이 뜻하고 있는 것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글자의 뜻에만 집착해도 안되고, 또 글자의 뜻을 너무 소홀히 여기면 글의 내용을 파악할 수 없게 된다고 하였다.
27. 충실의 미(美)와 시경의 미(美)는 다르다
凡觀書, 不可以相類, 泥其義.
무릇 책을 읽을 때에는 서로 비슷한 것으로써 그 뜻을 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
不爾則字字相梗, 當觀其文勢上下之意.
그렇지 않으면 한 자 한 자가 서로 막히게 되므로 마땅히 그 글 아래와 위의 뜻을 살펴 보아야 한다.
如充實之謂美, 與詩之美不同.
가령 충실한 것을 일러 미(美)라고 하는 것과, 시경(詩經)에서의 미는 같지 않은 것이다.
(程氏遺書 第18篇)
충실지위미(充實之謂美)라는 말은 충실한 마음을 미(美)라고 한다는 말이다. '맹자' 진심하편에 나오는 말로, "그와같이 되기를 원할 수 있는 것을 선(善)이라 하고, 모든 선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을 신(信)이라고 하며, 선을 행하기에 힘써서 마음속에 충만되는 것을 미(美)라고 한다(可欲之謂善 有諸己之謂信 充實之謂美)"고 하였다.
그리고 시지미(詩之美)란 '시경'속의 미(美)를 말하는 것으로, 대개 나 아닌 상대의 나타난 아름다움을 찬양한 노래가 많다. 따라서 '맹자'에 있는 미(美)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을 말하는 것이니, '시경'에 있는 미(美)는 같은 미(美)라고 하지만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글을 읽는 데 있어서 글자 한 자 한 자의 뜻에 구애받으면 연결이 안된다. 그러므로 글의 뜻을 파악해서 유사점에 조심하고 전체의 뜻에 잘못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28. 온 종일 힘쓰고 게으르지 않도록 하라
問: 瑩中嘗愛文中子. 或問學易, 子曰; 終日乾乾可也. 此語最盡. 文王所以聖, 亦只是箇不已.
묻기를, "형중(瑩中)은 일찍이 '문중자'를 애독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역'을 배우는 일에 대한 질문을 하니, 공자는 말하기를, '온종일 힘쓰고 게으르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이는 '주역'을 다한 최고의 말이다. 문왕(文王)이 성인이 된 까닭도 또한 이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므로,
先生曰: 凡說經義, 如只管節節推上去, 可知是盡.
선생이 말하기를, "무릇 경서의 뜻을 설명하는데 다만 한 귀절씩 추구해 가면 다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夫終日乾乾, 未盡得易, 據此一句, 只做得九三使.
종일 쉬지 않고 힘쓰는 것으로써 '주역'의 대의를 다 말한 것은 아니므로 이 한 귀절에 의거한다면, 다만 건괘 구3(九三)의 효사(爻辭)로서 보는 것이 옳다.
若謂乾乾是不已, 不已又是道, 漸漸推去, 自然是盡, 只是理不如此.
만약 건건(乾乾)이란 쉬지 않고 힘써 노력하는 것이니, 쉬지 않고 힘써 노력하는 것이 도(道)라 하여 이를 점차 밀고 나아가면 자연히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으나 이치는 이와 같은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程氏遺書 第19篇)
종일건건(終日乾乾)이라는 말은 '주역' 건괘 구3의 괘사로서, 종일 노력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자신을 반성하며 그로써 의(義)를 지켜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군자가 터득해야 할 바이지만, 이치 와는 다른 것이라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경서의 뜻은 각기 그 끝이 있으니, 서두른다고 얻어 지는 것이 아니므로,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
29. 밤낮으로 흘러 그치지 않는다
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言道之體如此. 這裏須是自見得.
공자가 냇가 위에서 말하기를,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 하였으니, 도의 본체가 그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이 속에서 도의 이치를 스스로 얻을 수가 있다.
張繹曰: 此便是無窮.
장역(張繹)이 말하기를, "이 말은 무궁함을 말한 것입니다"고 하였다.
先生曰: 固是道無窮, 然怎生一箇無窮, 便道了得他.
선생은 말하기를, "진실로 도의 무궁함을 말한 것이지만 그러나 어찌 하나의 무궁한 것을 가지고 다른 도를 다 말할 수 있으랴!" 하였다.
(程氏遺書 第19篇)
서자여사부(逝者如斯夫)라는 말은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냇가 위에서 말하기를, "가는 것이 이와 같아, 밤낮으로 흘러 그치지 않는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고 하였다. 곧 천지만물의 운행이 저 냇물이 흘러 가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 대목은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이천 선생의 말이다.
물이 쉬임없이 흐르는 것처럼 무구 변천하는 도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지만, 배우는 자는 무궁함을 논할 것이 아니라, 굳센 뜻을 가지고 하나씩 도를 밝혀 나가라는 것이다.
30. 지금 사람들은 독서하는 방법을 모른다
今人不會讀書.
지금의 사람들은 독서하는 방법을 모른다.
如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亦奚以爲.
논어에 "시(詩) 300편을 외웠어도 정치에 도움주는 것에 이르지 못하고, 사방의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도 혼자의 판단으로 대응할 수 없다면 비록 시를 많이 외우고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것과 같다.
須是未讀詩時, 不達於政, 不能專對, 旣讀詩後, 便達於政, 能專對四方, 始是讀詩.
모름지기 시를 읽기 전이라면 정치에도 이르지 못하고, 사신으로서도 혼자 대응할 수 없겠지만, 이미 시경을 읽은 후에는 정치에 통달하고 능히 다른 나라에 대응할 수 있어야 비로소 시를 읽었다고 할 수가 있다.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墻面.
사람이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읽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담벽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須是未讀詩時, 如面墻; 到讀了後, 便不面墻, 方是有驗.
마땅히 시경(詩經)을 읽기 전에는 담벽 앞에 선 것과 같았지만, 읽고 난 다음이라면 담벽 앞에 서있는 것과 같지 않아야 만이 읽은 효험이 있는 것이다.
大抵讀書只此便是法.
대체로 독서를 하는 방법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如讀論語, 舊時未讀, 是這箇人, 及讀了後來, 又只是這箇人, 便是不曾讀也.
논어(論語)를 읽을 때 옛날에 아직 읽기 전의 사람과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이 한 사람이 다 읽고난 뒤의 사람이나 또한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이는 읽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程氏遺書 第19篇)
논어(論語) 자로편에 있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이천 선생의 말이다. 시경(詩經)의 시는 311편(이 중 6편은 편명만 남아 있음)인데, 대부분 인간의 성정을 다룬 것이다. 이런 시들을 외우면서도 인간의 본분을 알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글을 읽은이상 이것을 일에 응용하여 실질적인 쓰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31. 문자를 볼 때는 옛일을 살펴야 유익하다
凡看文字, 如七年必世百年之事, 皆當思其如何作爲, 乃有益.
무릇 문자를 보는 데 있어서 7년이나 한 세대 그리고 100년의 일과 같은 것이 모두 어떻게 행하여 졌는지 생각해야, 유익함이 있는 것이다.
(程氏遺書 第22篇)
칠년필세백년지사(七年必世百年之事)라는 말은, 논어 자로편에 나오는 말로, "선인(善人)이 7년 동안 백성을 교화시키면 가히 전쟁에라도 나가게 할 수 있다(善人敎民七年 亦可以卽戎矣)"와, 또한 "만일 왕자(王者)가 있을 지라도 반드시 한 세대 이후에야 인(仁)하여 진다(如有王者 必世而後仁)"는 구절과, "선인이 1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 가히 잔학과 살육을 제거 할 수 있다(善人爲邦百年 亦可以勝殘去殺矣)"고 하는 세 구절을, 7년, 한 세대, 100년의 일이라고 줄여서 인용한 것이다.
이 대목은 성현의 교화정치에는 빠르고 늦음이 있다. 그 이치가 어떤것인지 생각하여 찾으면 도(道)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32. 경전 해석시 가장 중요한 곳은 같아야 한다
凡解經不同, 無害.
무릇 경전을 해석하는데 똑같지 않다고 해서 해로울 것은 없다.
但緊要處, 不可不同爾.
다만 가장 중요한 곳 만큼은 같지 않으면 안 된다.
(程氏外書)
사람마다 경전을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면 그 표현 방법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항목은 '근사록' 구주(舊註)에는 '정씨외서'에 있다고 하였으나, 오늘 날 '정씨외서'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33. 책은 반드시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焞初到, 問爲學之方, 先生曰: 公要知爲學, 須是讀書.
돈(焞)이 처음에 와서 학문하는 방법을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가 학문하는 방법을 알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책을 읽어야 한다.
書不必多看, 要知其約.
책은 반드시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그 요점만 알면 된다.
多看而不知其約, 書肆耳.
책을 많이 읽고도 그 요점을 모른다면 그것은 책방에 지나지 않는다.
頤緣少時讀書貪多, 如今多忘了.
나(程頤)는 젊었을 때 책을 많이 읽기를 탐냈는데 지금은 많이 잊어 버리고 말았다.
須是將聖人言語玩味, 入心記著然後, 力去行之, 自有所得.
모름지기 성인(聖人)의 말을 완미(玩味)하여 마음속에 기억한 연후에 힘써 행한다면 스스로 얻어지는 바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程氏外書)
이 항목은 독서의 방법을 말한 것이다. 책은 많이 읽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니, 성현의 말을 완미(玩味)하고 그 요점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대로 힘써 실천해 나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이 항 또한 앞전 항목과 같이 '정씨외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부분이다.
34. 초학자가 처음 배울때는 대학이 가장 좋다
初學入德之門, 無如大學.
초학자가 덕(德)으로 들어가는 문(門)은, '대학(大學)'만한 것이 없다.
其他, 莫如語孟.
그 다음에는 논어(論語)와 맹자(孟子) 만한 것이 없다.
(程氏遺書 第22篇)
학문을 시작하려는 자는 우선 '대학(大學)' 부터 읽을 것을 권하였는데, '대학(大學)'은 학문하는 법과 규모가 갖추어져 있어서 깨닫기 쉽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와 중용(中庸)의 순서로 읽어 나가면 근본을 세울 수가 있고, 향상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옛 사람의 미묘한 깊은 뜻과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무엇 이었는지를 구할 수가 있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이천 선생이 제자인 당체(唐棣)의 물음에 답한 것이다.
35. 배우는 자는 마땅히 논어와 맹자를 읽어야 한다.
學者先須讀論孟.
배우는 자는 먼저 마땅히 논어와 맹자를 읽어야 한다.
窮得語孟, 自有要約處, 以此觀他經, 甚省力.
논어와 맹자의 이치를 다 알고 나면, 스스로 중요한 곳을 알게 되니, 이로써 다른 경전(경전)을 보면 힘을 매우 덜게 될 것이다.
論孟如丈尺權衡相似, 以此去量度事物, 自然見得長短輕重.
논어와 맹자는 자로 길이를 재고 저울로 무게를 다는 것과 비슷하여 이것으로 사물을 달고 재어 본다면 자연히 길고 짧고 가볍고 무거운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程氏遺書 第18篇)
앞에서 말한 순서에 따라 논어와 맹자를 먼저 읽고 충분히 이해 한다면, 다른 경전을 읽을 때 힘들이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36. 논어에 나오는 질문을 나의 것으로 삼으라
讀論語者, 但將諸弟子問處, 便作己問, 將聖人答處, 便作今日耳聞, 自然有得.
논어를 읽는 자는 논어에 나오는 여러 제자들의 물음을 곧 나의 물음으로 삼고, 성인이 대답한 것을 곧 오늘날 자신의 귀로 듣는 것으로 삼으면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若能於論孟中深究玩味, 將來涵養成甚生氣質.
만약 논어나 맹자 속에서 깊이 뜻을 구하고 완미(玩味)하여 마음을 기른다면 굉장한 기질이 생길 것이다.
(程氏遺書 第22篇)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문답 내용인데, 제자의 질문을 자신의 질문으로 생각하고 읽는다면 절실하게 깨달음이 클것이라고 하였다. 이 항목은 이천 선생의 말로서 그의 제자 주공선(周恭先)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37. 논어와 맹자를 숙독하고 체득하라
凡看語孟, 且須熟讀玩味, 將聖人之言語切己. 不可只作一場話說.
무릇 논어와 맹자를 읽을 때에는 모름지기 숙독하여 완미(玩味)하고 성인의 말을 자신에게 체득하여 실행하도록 할 것이다. 다만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
人只看得此二書切己, 終身儘多也.
사람이 이 두 가지의 책을 읽고 자신의 일을 실행한다면 종신토록 다해도 유익됨이 많을 것이다.
(程氏遺書 第22篇)
절기(切己)란 자신이 절실하게 받아 들이는 것으로 곧 체득하여 실행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논어와 맹자의 중요성을 말하고 이를 절실하게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면 유익됨이 많아서 많은 덕을 쌓을 수 있다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38. 논어를 읽은 다음 4사람의 반응
論語有讀了後, 全無事者; 有讀了後, 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 知好之者; 有讀了後, 不知手之舞之, 足之蹈之者.
논어를 모두 읽기를 마친 뒤에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자도 있고, 읽기를 마친 뒤에 그중에 한두 구절의 좋은 말을 얻고 기뻐하는 자도 있으며, 읽기를 마친 뒤에 좋은 것을 아는 자도 있고, 읽기를 마친 뒤에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추며 손발을 움직여 뛸듯이 하는 사람도 있다.
(程氏遺書 第19篇)
부지수지무지(不知手之舞之) 족지도지(足之蹈之)라는 구절은 '예기' 악기편과 '맹자' 이루상편에 있는 말로서, "자신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고 발이 뛴다는 것"을 말한다.
곧 마음으로 느끼는 기쁨이 자신도 모르게 동작으로 나타나 좋아서 어쩔줄을 모른다는 의미이다. 이 항목은 '논어'를 읽은 다음에 나타나는 네 사람의 유형을 들어서 설명한 이천 선생의 말이다. 같은 책이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 그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39. 논어와 맹자를 익히면 나머지 학문은 쉬워진다
學者當以論語孟子爲本.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논어'와 '맹자'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論語孟子旣治, 則六經可不治而明矣.
논어와 맹자를 완전하게 안다면 6경(六經)은 그리 힘들이지 않게 밝힐 수 있는 것이다.
讀書者, 當觀聖人所以作經之意, 與聖人所以用心, 與聖人所以至聖人, 而吾之所以未至者, 所以未得者.
책을 읽는 사람은 마땅히 성인이 경서를 지은 뜻과, 성인이 마음을 쓴 것과, 성인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과, 그리고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과, 아직 도(道)를 얻지 못하고 있는 바를 잘 살펴 보아야 한다.
句句而求之, 晝誦而味之, 中夜而思之, 平其心, 易其氣, 闕其疑, 則聖人之意, 見矣.
그리하여 한 귀절 한 귀절에 그 뜻을 구하고, 낮에는 읽어서 완미(玩味)하고, 밤에는 깊이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 앉히고, 기운을 여유있게 가져서,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무리하게 파고들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면, 성인(聖人)의 뜻이 보일 것이다.
(程氏遺書 第六篇)
논어와 맹자를 근본으로 하여 통달하면 육경(六經)은 힘들이지 않고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무리하게 파고들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면 자연히 성인의 큰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이라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40. 논어와 맹자를 읽고도 도를 알지 못한다면
讀論語孟子而不知道, 所謂雖多, 亦奚以爲.
논어와 맹자를 읽고도 도(道)를 알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읽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程氏遺書 第6篇)
소위수다(所謂雖多) 역해이위(亦奚以爲)란 말은 논어 자로편에 있는 말로서, "비록 많다고 해도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의 뜻이다. 이 대목은 논어와 맹자를 읽는 것 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속에서 도(道)를 구해야 한다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41. 배울 때는 모름지기 완미를 해야 한다
論語孟子只剩讀著, 便自意足, 學者須是玩味.
논어와 맹자를 반복하여 숙독(熟讀)하면 그 뜻은 저절로 이해될 것이니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완미(玩味)를 해야 한다.
若以語言解著, 意便不足.
만약 글자만 가지고 해석한다면 이해하는 데 부족할 것이다.
某始作二書文字, 旣而思之, 又似剩.
내가 처음 논어와 맹자 두 권의 책을 주석하였는데 만들고 나서 생각해 보니 또한 쓸데없는 것 같았다.
只有些先儒錯會處, 却待與整理過.
다만 선유(先儒)들이 약간 잘못 해석한 곳만을 골라서 정리한 것 뿐이다.
(程氏外書 第12篇)
논어와 맹자를 숙독하여 마음속에 기억해 두고 완미(玩味)하면 그 뜻이 통하게 된다. 이천 선생이 논어와 맹자의 주석을 단 것은, 선유(先儒)들의 잘못된 주석을 바로 잡으려고 한 것 뿐이라는 말이다.
42. 논어와 맹자의 긴요한 곳만 읽으면 어떻습니까?
問: 且將語孟緊要處看, 如何.
묻기를, "논어와 맹자의 긴요한 곳만 읽으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伊川曰: 固是好, 然若有得, 終不浹洽. 蓋吾道非如釋氏, 一見了便從空寂去.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참으로 좋다. 그러나 만약 얻는 것이 있다 하여도 마침내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지 않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의 도(道)는 불교와 같지 않아서 한 번 보고 공적(空寂)한 대로 가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程氏外書 第12篇)
협흡(浹洽)이란 널리 전해져서 두루 미치는 것 곧 도(道)가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것을 말한다. 도한 공적(空寂)이란 텅 비어 쓸쓸한 것을 이르는 말인데, 만물이 실체가 없어서 생각하고 분별한 것도 없는 것을 말하며, 불교에서 이르는 해탈과 괕은 의미이다.
이 대목에서는 논어와 맹자의 긴요한 부분만 읽어도 좋겠지만, 전부를 공부하지 않으면 완전할 수 없으므로, 한 부분도 소홀히 하지 말고 그 이치를 깨달아서 넓게 배울 것을 강조한 것이다.
43. 시(詩)의 성정을 읊어 도덕에 젖으라
興於詩者, 吟詠情性, 涵暢道德之中而歆動之, 有吾與點之氣象.
시(詩)에서 뜻을 일으키는 것이란, 시의 성정을 읊어서 도덕 속에 젖고 통하여 움직이는 것인데, "나는 증점(曾點)의 생각에 따르겠다"고 한 기상이 있다.
(程氏外書 第3篇)
흥어시(興於詩)란 논어 태백편에 말하기를, "시(詩)에서 뜻을 일으키고, 예(禮)에서 뜻을 확정하고, 악(樂)에서 뜻을 이룬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고 하였다. 또한 오여점야(吾與點也)란, 점(點)은 공자의 제자인 증점(曾點)을 말하며, 공자가 증점의 편에 서겠다는 것으로,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 대목은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말을 풀어서 시(詩)를 배우는 유익함과 도덕적인 면을 말한 것이다.
44. 다만 여유있게 시를 완미(玩味)하라
謝顯道云: 明道先生善言詩, 他又渾不曾章鮮句釋, 但優游玩味吟哦上下, 便使人有得處.
사현도(謝顯道)가 이르기를, "명도 선생은 시(詩)를 잘 말하셨는데, 달리 또 시의 장(章)과 구(句)마다 해석을 하지 않고, 다만 여유있게 완미(玩味)하고 높고 낮게 읊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얻는 바가 있게 하였다.
瞻彼日月, 悠悠我思. 道之云遠, 曷云能來. 思之切矣.
해와 달을 바라 보며 나의 생각은 끝이 없네. 길은 먼 데 님은 언제 오시려나! 하는 것은 생각이 절실한 것이다.
終曰: 百爾君子, 不知德行. 不忮不求, 何用不臧. 歸于正也.
시(詩)의 끝에 말하기를, '모든 군자들은 덕행(德行)을 모르는가? 구하고 해치지 않는다면 어찌 선하지 않으랴!' 하는 것은 마침내 옳은 길로 돌아가는 것이다"고 하였다.
又云: 伯淳常談詩, 竝不下一字訓詁. 有時只轉却一兩字, 點掇地念過, 便敎人省悟.
또 말하기를, "백순(伯淳)이 일찍이 시(詩)를 말하는데, 아울러 한 글자의 훈고(訓詁)도 내리지 않았다. 때에 따라서 다만 한두 자만을 바꿔 선택하여 곰곰히 생각하여 보면, 시의 뜻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였다.
又曰: 古人所以貴親炙之也,
또 말하기를, "이것이 옛사람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친히 받은 까닭이다"고 하였다.
(程氏外書 第12篇 上蔡語錄)
첨피일월(瞻彼日月)의 첨(瞻)은 시(視)의 뜻으로, 곧 해와 달을 보니 번갈아 뜨고 진다는 말이다. 시경 패풍편 웅치편(雄雉篇)에, "해와 달을 바라보니, 내 생각은 끝이 없네(瞻彼明, 悠悠我思)"라고 하였다. 또한 종왈(終曰)이라는 말은, '웅치편 시(詩)의 끝부분에 말한 것'을 의미하며 친자(親炙)라는 뜻은 '직접 냄새를 쏘인다'는 뜻으로, 선생의 가르침을 친히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 항목은 시경(詩經) 패풍의 웅치편(雄雉篇)을 인용한 것으로, 시의 본 뜻을 말한 것이다. 시를 감상하고 읊다보면 자연히 느낌으로 얻는 것이 있으니, 장(章)이나 구(句)에 구애받지 말고 충분히 완미할 것을 말하였다.
45. 배우는 사람은 시경을 읽어야 한다
明道先生曰: 學者不可以不看詩. 看詩, 便使人長一格價.
명도 선생이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시경'을 읽어야 한다. '시경'을 읽으면, 사람의 품격을 높여 준다"고 하였다.
(程氏外書 第12篇)
장일격가(長一格價)란, 학문이 한 단계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시(詩)를 읽게 되면 유익됨이 있으니, 학문하는 자는 시(詩)를 많이 접하여, 품격을 높일 것을 말한 대목이다.
46. 한개의 글자는 문이고, 구를 이루면 사가 된다
不以文害辭.
문자에 구애받아서 말의 뜻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文, 文字之文.
문(文)은 문자의 문(文)인 것이다.
擧一字則是文, 成句是辭.
한 개의 글자는 문(文)이고, 구(句)를 이루면 사(辭)가 된다.
詩爲解, 一字不行, 却遷就他說, 如有周不顯.
시(詩)를 해석하는 데 한 자의 뜻을 해석하여 통하지 않으면 다른 뜻으로 내용에 맞추어야 하는데, 유주불현(有周不顯)과 같은 것이다.
自是作文, 當如此.
시(詩)를 지을 때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程氏外書 第1篇)
불이문해사(不以文害辭)란 文(문)은 글자의 뜻이고, 사(辭)는 말이나 어귀를 의미한다. 곧 문자에 구애를 받아 말의 뜻을 그르치지 않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맹자 만장편에 나오는 말이다. 또한 유주불현(有周不顯)이란, 유주(有周)는 주나라를 뜻하는 것이고, 불현(不顯)은 나타나지 않은 것을 의미 하지만, 여기서는 반어(反語)로 쓰이어 '밝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내용에 맞추어서 풀이해야 한다는 것으로, 시경 대아의 문왕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시경을 보는 방법을 밝힌 것으로, 글자에 얽매어 내용과 본래의 뜻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다.
47. 모름지기 이제와 삼왕의 도를 살펴라
看書, 須要見二帝三王之道, 如二典, 卽求堯所以治民, 舜所以事君.
서경(書經)을 보는 데는 모름지기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도(道)를 살펴야 하며, 이전(二典)과 같은 것에서는 요(堯) 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과 순(舜) 임금이 임금을 섬긴 방법을 구해야 한다.
(程氏遺書 第24篇)
이전(二典)이란 서경(書經)에 나오는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을 말한다. 그리고 이제(二帝)란 두 명의 임금이란 뜻으로, 순(舜)과 요(堯)를 말하며, 삼왕(三王)은 하(夏)나라의 우왕(禹王)과, 은(殷)나라의 탕왕(湯王)과, 주(周)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함께 칭하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는 독서의 방법을 제시한 이천 선생의 말로서, 그 조목에 따라 핵심이 되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48. 중용은 공자의 제자들이 전수하였다
中庸之書, 是孔門傳授, 成於子思孟子.
중용이란 책은 공자의 제자들이 전수하였고 자사(子思)와 맹자가 완성하였다.
其書雖是雜記, 更不分精粗, 一袞說了.
그 글은 비록 잡기(雜記)라고 하지만 자세한 것과 거친 것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서 말하였다.
今人語道多, 說高, 便遺却卑; 說本, 便遺却末.
지금 사람은 도(道)를 말하는 데, 높은 것을 말하면 비근한 것을 잊으니, 본(本)을 말하면, 말(末)을 잊는 것이다.
(程氏遺書 第15篇)
자사(子思)는 공자의 손자로서 이름은 급(伋)이고 자사는 그의 자(字)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일곤(一袞)이란 구별이 없이 하나로 뭉친 것을 이르는 말이다.
중용은 여러 사람들 손을 거쳐서 완성된 것으로 비록 잡기(雜記)이지만 대소(大小)와 본말(本末)이 잘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모든 도(道)가 통합되어 논술된 것이라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49. 이천 선생이 역전의 서문을 지었다
伊川先生易傳序曰; 易變易也. 隨時變易, 以從道也.
이천 선생이 역전(易傳) 서문에 말하기를, "역(易)은 변역(變易)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 변하며 도를 좇는 것이다.
其爲書也, 廣大悉備.
그 글은 광대하여 모든 이치를 고루 갖추고 있다.
將以順性命之理, 通幽明之故, 盡事物之情, 而示開物成務之道也.
성명(性命)의 이치에 순응하고, 밝고 어두운 일에 통하며, 사물의 성정을 다하여 개발하고 하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는 도를 보여주고 있다.
聖人之憂患後世, 可謂至矣.
성인이 후세를 근심하는 것이 참으로 지극하다고 할 수 있다.
去古雖遠, 遺經尙存.
옛날을 떠난 지 비록 멀지만 경서가 아직 그대로 있다.
然而前儒, 失意以傳言, 後學誦言而忘味, 自秦以下, 蓋無傳矣.
그러나 앞 전의 유학자들은 경서의 그 뜻을 잃어 버리고 말만을 전하고 있으며, 후세의 학자들은 말로만 외우고 그 참다운 내용을 잊어 버렸으니, 진(秦) 나라 이후로는 대체로 전한 것이 없다.
予生千載之後, 悼斯文之湮晦, 將俾後人, 沿流而求源, 此傳所以作也.
나는 천 년의 세월 뒤에 태어나서, 이 학문이 자취를 감춘 것을 애석하게 여겨, 장차 나중 사람들로 하여금 흐름을 따라 그 근원을 구하게 하려는 것이 이 '역전(易傳)'을 짓는 까닭이다.
易有聖人之道四焉.
역(易)에는 네 가지 성인의 도가 있다.
以言者, 尙其辭; 以動者, 尙其變; 以祭器者, 尙其象; 以卜筮者, 尙其占.
말로만 하는 자는 그 문사(文辭)를 높이고, 행동을 하는 자는 그 변하는 것만을 높이며, 이로써 그릇을 만드는 자는 그 상(象)을 높이고, 이로써 복서(卜筮)를 하는 자는, 그 점괘만을 높인다.
吉凶消長之理, 進退存亡之道, 備於辭.
길하고 흉하며 없어지고 자라는 이치와, 나아가고 물러나며 있고 없음의 도는 사(辭)에 갖추어져 있다.
推辭考卦, 可以知變, 象與占, 在其中矣.
이 사(辭)를 미루어서 괘(卦)를 생각하고 이로써 변하는 이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니, 상(象)과 점(占)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君子居則觀其象而玩其辭, 動則觀其變而玩其占.
군자가 평소에는 그 상(象)을 보고서 그 사(辭)를 완미(玩味)하며, 행동할 때에는 그 변하는 것을 보고서 점(占)을 완미(玩味)한다.
得於辭, 不達其意者有矣, 未有不得於辭而能通其意者也.
사(辭)만을 얻고서 그 뜻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는 있으나, 사(辭)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 뜻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至微者理也, 至著者象也.
지극히 희미한 것은 이치요, 지극히 뚜렷이 나타난 것은 상(象)이다.
體用一源, 顯微無間.
체(體)와 용(用)은 한 근원으로,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의 사이가 없다.
觀會通, 以行其典禮, 則辭無所不備.
이치가 통하는 것을 보아 그 전례(典禮)를 행한다면, 모든 도가 사(辭)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故善學者求言必自近.
그러므로 잘 배우는 자는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말(言)을 구한다.
易於近者, 非知言者也.
비근한 것을 소홀히 여기는 자는 말을 아는 자가 아니다.
予所傳者辭也, 由辭以得意, 則在乎人焉.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사(辭)인데, 사(辭)로 말미암아 본 뜻을 얻는 것은 읽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
(伊川文集 附錄 第1篇), (伊川易傳)
이 대목은 역(易)의 뜻과 체(體)를 분명히 하고, '역전(易傳)'을 짓는 본래의 뜻을 밝히고 있다. 역(易)은 성인의 도(道)를 이해하고 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50. 상(象)이 있은 다음에 수(數)가 있는 것이다
伊川先生答張閎中書曰: 易傳未傳, 自量精力未衰, 尙覬有少進爾.
이천 선생이 장굉중(張閎中)에게 답서(答書)하기를, "아직 '역전(易傳)'을 전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 보면 아직 내 정력이 쇠하지 않아 작은 진보라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來書云: 易之義本起於數. 則非也.
보내온 편지에 이르기를, '역(易)의 의미는 본래 수(數)에서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잘못인 것이다.
有理而後有象, 有象而後有數.
이치가 있은 다음에 상(象)이 있고, 상(象)이 있은 다음에 수(數)가 있는 것이다.
易因象以明理, 由象以知數, 得其義, 則象數在其中矣.
역(易)이란 상(象)으로 말미암아 그 이치가 분명해지고, 상(象)으로 말미암아 수(數)를 아는 것이니 그 뜻을 얻으면, 상(象)과 수(數)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必欲窮象之隱微, 盡數之毫忽, 乃尋流逐末.
반드시 상(象)의 은미한 것을 궁구하고, 수(數)의 조그마한 것을 다하려고 한다면 끝을 추구하는 것이다.
術家之所尙, 非儒者之所務也.
이것은 술가(術家)에서 숭상하는 일이니 유자(儒者)로서 힘쓸 일은 아니다"고 하였다.
(伊川文集 第5篇)
이 글에서 보면 장굉중(張閎中)은 '역전(易傳)'을 점치는 책으로 알고 있었던 것같다. 이천 선생은 '역전(易傳)'의 본(本), 말(末), 리(理), 수(數)가 그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역전(易傳)을 공부하는 데는 근본되는 이치를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51. 때(時)의 성쇠를 알고 강약(强弱)을 알아야 한다
知時識勢, 學易之大方也.
때(時)의 성쇠(盛衰)를 알고 강약(强弱)을 아는 것이 역(易)을 배우는 데 있어서 큰 방법이다.
(伊川易傳 夬卦篇 句二上典)
역(易)을 배우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곧 역(易)을 배우는 것은 시세의 변화를 살피고 그 속에서 이치를 찾아서, 나아가고 물러가고 움직이고 쉬는 것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그 본래의 뜻이라는 말이다.
52. 4효(四爻)와 5효(五爻)는 음효(陰爻)이다
大畜初二, 乾體剛健, 而不足以進.
대축(大畜)의 초효(初爻)와 2효(二爻)는 건체(乾體)로서 강건하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四五陰柔, 而能止.
4효(四爻)와 5효(五爻)는 음효(陰爻)로서 부드러우니 능히 멈출 수가 있다.
時之盛衰, 勢之强弱, 學易者所宜深識也.
때의 성쇠(盛衰)와 형세의 강약은 역(易)을 배우는 자가 깊이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伊川易傳 大畜卦 九二上典)
대축(大畜)이란 '주역'의 괘이름으로, 하늘의 기운을 모아 초목을 양성하는 산을 나타내며 건하간상(乾下艮上)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초이(初二)라고 하는 말은 괘(卦)의 효(爻)는 아래에서 부터 시작하여 초효(初爻), 2효, 3효, 4효, 5효,상효(上爻)라고 부른다.
아래에 양(陽)이 오면 초양(初陽), 음(陰)이 오면 초음(初陰)이라고 하는데, 양(陽)을 구(九), 음(陰)을 육(六)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 대목의 대축(大畜)이란 대(大)가 소(小)를 기르는 것으로 큰일을 성취하려는 사람은 힘과 실력을 쌓아 두어야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강건하면서도 멈춤의 도(道)가 있는 것은 하늘의 도에 순응하는 것이다. 하늘의 도에 순응함으로써 위험에 처해 있어도 탈이 없다는 것인데, 역(易)을 배우는 사람은 이로써 성쇠와 강약의 이치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53. 중(中)은 언제나 가운데 자리해야 한다
諸卦二五雖不當位, 多以中爲美.
모든 괘의 2효와 5효는 비록 그 위치에 해당하지 않아도 중(中)이 되니, 중(中)이면 자리에 맞는 것이 많아서 미(美)라고 할 수가 있다.
三四雖當位, 或以不中爲過, 中常重於正也.
3효와 4효는 비록 그 위치에 해당하지만 중(中)에 맞지 않아 허물이 되며, 중(中)은 언제나 정위(正位)를 얻어야만 귀중하게 되는 것이다.
蓋中則不違於正, 正不必中也, 天下之理, 莫善於中.
대개 중(中)은 정위(正位)에 어긋나지 않으나 정위(正位)라고 해서 반드시 중(中)은 아니므로, 천하의 이치는 중(中)을 얻는 것 같은 선(善)은 없는 것이다.
於九二六五可見.
모든 괘의 구이(九二)와 육오(六五)에서 볼 수가 있다.
(伊川易傳 震卦 六五爻篇)
부당위(不當位)란 6효의 위치는 초.3.5가 양(陽)이고, 2.4.상이 음(陰)이다. 양의 위치에 양효가 있고, 음의 위치에 음효가 있는 것을 당위(當位)라고 하고, 이와 반대의 경우가 되는 것을 부당위(不當位)라고 한다.
이 대목은 '주역'의 양효와 음효의 대립에서 정(正)과 중(中)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중(中)은 정위(正位)일 때는 귀중하지만, 정위(正位)라고 해서 반드시 중(中)은 아니다. 따라서 중정(中正)일 때 가장 좋다는 말이다.
54. 다만 한 가지에만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問: 胡先生解九四作太子, 恐不是卦義.
묻기를, "호(胡) 선생의 해설에 따르면 구4를 풀이하여 태자로 하였는데 이것은 괘의 참 뜻이 아닙니까?" 하니,
先生云: 亦不妨. 只看如何用.
선생이 이르기를, "또한 무관한 일이다. 다만 괘의 각 효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當儲貳, 則做儲貳使, 九四近君, 便作儲貳亦不害.
점을 치는 사람이 태자의 지위에 해당한다면 괘는 태자로 간주하고, 구사는 군주와 가까우니, 태자로 하는 것 또한 해롭지는 않다.
但不要拘一.
다만 한 가지에만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若執一事, 則三百八十四爻, 只作得三百八十四件事便休了.
만약 한 가지 일에만 집착하여 풀이 한다면 곧 384효가 오직 384건의 일에만 그칠 것이다"고 하였다.
(程氏遺書 第19篇)
호(胡) 선생은 호원(胡瑗)으로 자는 익지(翼之)이고, 강소성(江蘇省) 해릉(海陵) 사람이다. 안정(安定) 선생이라고도 불렀고, '역해(易解)' 12권, '주역구의(周易口義)' 10권, '계사설괘(繫辭說卦)' 3권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저이(儲貳)란 태자(太子)의 별칭이며, 구사근군(九四近君)이란 구4는 구5를 군주의 자리로 보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 삼백팔십사효(三百八十四爻)란 '주역' 64괘의 전 효(爻)의 수(數)를 말하며, 한괘가 6효이므로 384효가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는 구5를 군주(君主)로 한다면, 구4는 대신(大臣)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호씨(胡氏)는 태자(太子)에 해당시켜 해석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어떤 자가 이천 선생에게 물었던 것이다. 이에 각효(爻)는 어떤 쓰임인가에 따라 다른 것이니, 한 가지의 해석에 구애 되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한 것이다.
55. 6효는 사람마다 그 쓰임이 있다
看易且要知時.
주역(周易)을 읽는 데는 또한 때를 알 필요가 있다.
凡六爻人人有用.
무릇 6효는 사람 사람마다 쓰임이 있는 것이다.
聖人自有聖人用, 賢人自有賢人用, 衆人自有衆人用, 學者自有學者用.
성인은 성인으로서의 쓰임이 있고, 현인은 현인으로서의 쓰임이 있으며, 일반인은 일반인으로서의 쓰임이 있고, 학자는 학자로서의 쓰임이 있다.
君有君用, 臣有臣用, 無所不通.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쓰임이 있고, 신하는 신하로서의 쓰임이 있는 것이니,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因問: 坤卦是臣之事, 人君有用處否.
이에 묻기를, "곤괘(坤卦)는 신하가 힘써야 할 일이지만 임금으로서도 쓸 곳이 있습니까?"라 하였다.
先生曰: 是何無用. 如厚德載物, 人君安可不用.
선생이 말하기를, "어찌 쓸 곳이 없겠는가. 두터운 덕으로써 물건을 실은 것과 같으니 임금이 어찌 쓰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程氏遺書 第19篇)
후덕재물(厚德載物)이란 '주역' 곤괘상전(坤卦上典)에 말하기를, "지세(地勢)는 곤(坤)이다. 군자는 두터운 덕으로써 물건을 싣는다(地勢坤 君子以厚德載物)"라고 하였다. 이는 땅이 만물을 싣는 후한 덕이 있으니 곧 임금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뜻으로, 곤(坤)은 땅에 비유된다.
이 대목은 역(易)의 이치는 때에 따라서는 누구에게도 적용되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때를 살펴서 알아야 한다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56. 역(易)은 반복과 왕래와 상하를 말할 뿐이다
易中, 只是言反復往來上下.
역(易)은 단지 반복과 왕래 그리고 상하를 말하였을 뿐이다.
(程氏遺書 第14篇)
명도 선생의 말로서 역(易)의 요령을 말한 것이다. 역(易) 속에는 반복과 왕래와 상하가 있고, 이것은 하나의 도리로 이루어 진다. 그러므로 음양의 도(道)는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물러나 없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이다.
57. 주역은 도(道)에 맞지 않음이 없다
作易自天地幽明, 至于昆蟲草木微物, 無不合.
주역(周易)을 지으니 하늘과 땅으로부터 곤충과 초목과 미물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도(道)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程氏外書 第7篇)
천지유명(天地幽明)이란 하늘과 땅을 말하는 것으로 하늘은 밝으니 명(明)이고, 땅은 어두우니 유(幽)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역(易)의 이치는 천하만물 중에 빼놓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그 이치에 맞아 일관(一貫)되어 있으므로 이치의 근원이 됨을 말한 것이다.
58. 효사(爻辭)에만 집착하지 말라
今時人看易, 皆不識得易是何物.
지금 사람들은 '주역'을 읽어도 모두 '주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只就上穿鑿.
오직 효사(爻辭)에 대한 것만 파고들 뿐이다.
若念得不熟, 與就上添一德, 亦不覺多, 就上減一德, 亦不覺少.
만약 읽기만 하고 본뜻을 모르면 덕을 하나 더한다고 하여도 또한 많음을 깨닫지 못하며, 나아가서 덕을 하나 빼어도 또한 적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譬如不識此兀子.
비유하자면 올자(兀子)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若減一隻脚, 亦不知是少, 若添一隻, 亦不知是多.
만일에 한 쪽의 다리를 빼어도 또한 적음을 알지 못하고, 만일에 한 쪽의 다리를 더해도, 또한 많음을 알지 못한다.
若識則自添減不得也.
만약 이것을 안다면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을 것이다.
(程氏外書 第5篇)
올자(兀子)란 네 발이 달린 의자의 일종이다. 이 대목에서는 지금 사람들은 '주역(周易)'을 읽으면서도 그 내용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그 이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뜻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더하거나 뺄 수 없다는 이치를 알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효사에 대한 것만 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59. 처음 배울 때는 쉬운 것부터 택하라
遊定夫問伊川, 陰陽不測之謂神.
유정부(遊定夫)가 이천 선생에게 묻기를, "음양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고 합니까?"고 하니,
伊川曰: 賢是疑了問. 是揀難底問.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는 이것이 의심나서 묻는 것인가? 아니면 어려운 것을 택하여 묻는 것인가?" 하였다.
(程氏外書 第12篇)
유정부(游定夫)는 이정(二程)의 제자로 이름은 초(酢)이고 정부(定夫)는 그의 자(字)이다. 호는 치산(廌山)으로,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 사람이다. 이 대목에서는 처음 배울 때에는 쉬운 것부터 구하고, 또 어려운 것이라도 잘 생각하여 고구(考究)하라는 말이다.
60. 뒷 사람들은 노력하여 스스로 체득하라
伊川以易傳, 示門人曰: 只說得七分, 後人更須自體究.
이천 선생이 '역전(易傳)'을 제자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다만 10분의 7을 설명하였으니, 뒷사람들은 더욱 노력하여 스스로 체득(體得)해야 한다"고 하였다.
(程氏外書 第11篇)
'역전(易傳)'은 그 이치의 설명을 다할수 없어서 부족한 점이 많으니 모름지기 공부하는 사람은 몸소 연구하여 자세히 살펴서 더욱 노력하고 스스로 체득할 것을 당부한 대목이다. 성인의 도(道)는 광대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글로써 다할 수 없음을 헤아려서 깊이 살펴야 할 것이다.
61. 이천 선생이 춘추전 서문에서 말하였다
伊川先生春秋傳序曰: 天之生民, 必有出類之才, 起而君長之, 治之而爭奪息, 導之而生養遂, 敎之而倫理明.
이천 선생이 '춘추전(春秋傳)' 서문에 말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낳음에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사람을 있게 하여 백성의 군주가 되게 하니 나라를 다스려서 싸우고 빼앗는 일이 없게 하고, 잘 이끌어서 육성하여 만족을 이루게 하며, 가르쳐서 윤리를 밝게 하였다.
然後, 人道立, 天道成, 地道平.
그렇게 한 뒤에야 인도(人道)가 서고, 천도(天道)가 이루어 지며 지도(地道)가 평탄해 지는 것이다.
二帝而上, 聖賢世出, 隨時有作, 順乎風氣之宜, 不先天以開人, 各因時而立政.
요(堯)와 순(舜) 두 제왕 이상까지는, 성현(聖賢)들이 세상에 나타나서 때에 따라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 왔으며, 풍기(風氣)의 마땅함에 좇아서, 하늘에 앞서지 않고 사람을 깨우쳐서 각각 때를 따라서 정치를 세웠던 것이다.
曁乎三王迭興, 三重旣備, 子丑寅之建正, 忠質文之更尙, 人道備矣, 天運周矣.
삼왕(三王)이 번갈아 일어나 나라를 세우고, 세가지 큰법이 이미 갖추어 지자 자(子), 축(丑), 인(寅)의 달을 정월(正月)로 정하고, 충(忠), 질(質), 문(文)을 숭상하게 되니 인도(人道)가 갖추어 졌으며 천운(天運)이 골고루 미치게 되었다.
聖王旣不復作, 有天下者, 雖欲倣古之跡, 亦私意妄爲而已.
그러나 성왕(聖王)이 다시 나오지 않게 되자 천하를 가진 자는 비록 옛 성인의 업적을 본받고자 하였을지라도 또한 그것은 사사로운 뜻이라 망령될 뿐이었다.
事之繆, 秦至以建亥爲正, 道之悖, 漢專以智力持世, 豈復知先王之道也.
일이 잘못됨으로써 진(秦)나라가 건해(建亥)를 정월로 삼고 이를 바르다 하기에 이르렀으며, 도(道)가 잘못된 것은 한(漢)나라가 오로지 지력(智力)만을 가지고 천하를 유지한 것이니 어찌 선왕(先王)의 도를 알 수가 있었겠는가.
夫子當周之末, 以聖人不復作也, 順天應時之治不復有也, 於時, 作春秋, 爲百王不易之大法.
공자는 주(周)나라 말에 이르러 성인이 다시 나오지 않자, 하늘에 따르고 때에 응하는 정치가 시행되지 못할 것을 생각하여 그 때에, '춘추(春秋)'를 지어, 백 왕이 바꿀 수 없는 큰 법을 삼게 하였다.
所謂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者也.
이른바 삼왕의 일에도 잘못되지 않고, 천지의 도(道)에 세워도 어긋남이 없으며, 귀신에게 물어도 의문이 없어서, 백세(百世)를 지내며 성인을 기다린다고 해도 의혹지 않는 것이다.
先儒之傳曰; 游夏不能贊一辭. 辭不待贊也, 言不能與於斯耳.
선유(先儒)의 전(傳)에 말하기를,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游)와 자하(子夏)도 한 마디 말조차 덧붙일 수 없는 자였다'고 하였으니, '문장은 칭찬을 기다리지 않고' 이 말은 성인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다.
斯道也, 惟顔子嘗聞之矣.
이 도(道)는 오직 안자(顔子)만이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此其準的也.
하(夏)나라의 역법을 시행하고, 은(殷)나라의 검소한 수레를 타고, 주(周)나라의 예법에 맞는 관복을 입고, 음악은 순(舜)임금의 소무(韶舞)를 쓰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기준이었다.
後世, 以史視春秋, 謂褒善貶惡而已, 至於經世之大法, 則不知也.
후세에 와서는 '춘추'를 사서(史書)로 보아서 착한 것은 칭찬하고 악한 것은 비방하였을 뿐이라고 하니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에 이르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春秋大義數十, 其義雖大, 炳如日星, 乃易見也.
'춘추'의 대의는 수십 개가 있으며, 그 뜻이 비록 크다고 할지라도 밝기가 해와 별 같아 보기가 쉽다.
惟其微辭隱義, 時措從宜者, 爲難知也.
다만 그 은미한 말과 뜻은 때에 따라 마땅함을 따르니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或抑或縱, 或與或奪, 或進或退, 或微或顯, 而得乎義理之安, 文質之中, 寬猛之宜, 是非之公.
혹은 억누르기고 하고 록은 따르기도 하며, 혹은 더불어 하기도 하고 혹은 빼앗으며, 혹은 나아가고 혹은 물러나며, 혹은 감추기도 하고 혹은 드러내기도 하니, 이를 얻어 의리(義理)의 안정과, 문식(文飾)과 질박(質朴)의 조화와, 너그럽고 매서움의 마땅함과, 시비 판단의 공평함을 얻을 수 있다.
乃制事之權衡, 揆道之模範也.
'춘추(春秋)'는 곧 중요한 일을 제정하는 저울이요, 도(道)를 헤아리는 모범인 것이다.
夫觀百物然後, 識化工之神, 聚衆材然後, 知作室之用.
무릇 백물(百物)을 살핀 후에야 조화(調化)의 묘를 알게 되고, 많은 재목을 모은 후에야 집을 짓는 법을 알게 된다.
於一事一義, 而欲窺聖人之用心, 非上智不能也.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뜻에서 성인의 마음씀을 살피려면, 뛰어난 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故學春秋者必優游涵泳, 黙識心通然後, 能造其微也.
그러므로 '춘추'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마음을 여유있게 길러서 묵묵히 배우고 마음으로 통한 후에야 그 은미한 뜻을 알게 된다.
後王知春秋之義, 則雖德非禹湯, 尙可以法三代之治.
후세의 왕이 '춘추'의 뜻을 알게 되면, 비록 그 덕이 우왕과 탕왕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의 다스림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自秦而下, 其學不傳.
진(秦)나라 이후부터, '춘추'의 학문이 전하지 않았다.
予悼夫聖人之志, 不明於後世也.
내가 애석히 여기는 것은 무릇 성인의 뜻이 후세에 밝혀지지 않을까 해서이다.
故作傳以明之, 俾後之人, 通其文而求其義, 得其意而法其用, 則三代可復也.
그러므로 '춘추전'을 지어 이를 밝힌 것으로 후세의 사람들에게 그 글에 통하여 그 의미를 구하고, 그 뜻을 얻어서 그 쓰는 것을 본받게 하는 것이니, 삼대(三代)의 정치가 되돌아 올 것이다.
是傳也, 雖未能極聖人之蘊奧, 庶幾學者得其門而入矣.
이 춘추전(春秋傳)이 비록 성인의 깊은 뜻을 나타내었다고 할 수 없으나, 배우는 사람은 그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伊川文集 附錄第1篇), (春秋傳 序篇)
춘추전(春秋傳)은 공자(孔子)가 은공(隱公) 원년에서 부터 애공(哀公) 14년까지 242년 간의 역사적 기록에 대하여 정사선악(正邪善惡)의 가치판단을 내린 것인데, 이천 선생이 중요한 곳 만을 가려서 설명을 더하고, 71세 때 춘추전(春秋傳) 서문(序文)을 지었다.
그리고 자축인지건정(子丑寅之建正)이란 말은 주(周) 나라는 자(子)의 달인 11월을 정월로 삼고, 은(殷)나라는 축(丑)의 달인 12월을 정월로 삼았으며, 하(夏)나라는 인(寅)의달인 1월을 정월로 삼은 것을 이르는 말이다.
선유지전(先儒之傳)이란, 사마천이 지은 '사기' 공자세가 에서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춘추'를 지었을 때 써야 할 것만 썼으므로, 그의 빼어난 제자인 자하(子夏)와 자유(子游)도 '춘추'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덧붙일 수 없었다"고 하였는데 이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행하지시(行夏之時)란, 하(夏) 나라 때의 역법을 행하는 것, 곧 인(寅)의 달을 정월로 쓰는것을 말하며, 논어 위령공편에 말하기를, "하(夏)나라의 역법을 쓰고, 은(殷)나라의 수레를 타고, 주(周)나라의 면류관을 착용하고, 음악은 순(舜) 임금의 소무(韶舞)를 해야 한다(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고 하였다.
수레는 소박하게 나무로 크게 만든 것을 임금이 탔으며, 소무(韶舞)는 진선미를 다한 음악을 말하는 것으로, 이말은 안연(顔淵)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한 말이다. 포선폄악(褒善貶惡)이란 착한것을 기리어 칭찬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여 비방하는 것을 말한다.
또 문질지중(文質之中)이란 문식(文飾)과 질박(質朴)의 중간에 있는 것, 곧 문장의 아름다운 꾸밈과 바탕이 소박함의 중간이라는 의미로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이 대목은 이천 선생이 쓴 '춘추전(春秋傳)' 서문의 전부로서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의 중요한 곳을 골라 설명을 붙인 것이다. '춘추'의 은미하고도 깊은 뜻을 헤아리고 마음에 새겨 넣으면서 숙독한다면 성인 시대의 올바른 규범을 되찾을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62. 시경과 서경은 도(道)를 담은 책이다
詩書, 載道之文; 春秋, 聖人之用.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은 도(道)를 담은 책이요, 춘추(春秋)는 성인이 쓰는 것이다.
詩書如藥方, 春秋如用藥治病.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은 약의 처방과 같고, '춘추(春秋)'는 약을 써서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다.
聖人之用全在此書. 所謂不如載之行事, 深切著明者也.
성인이 쓰는 것은 전부 이 책에 들어 있다. 이른바 행사에 실어서 깊이 생각하고 밝히는 것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有重疊言者, 如征伐盟會之類.
춘추(春秋)에는 중복된 말도 있는데,, 정벌(征伐)이나 회맹(盟會)과 같은 것들이다.
蓋欲成書, 勢須如此, 不可事事各求異義.
대개 글을 완성시키려면 모름지기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니 사건마다 각기 다른 뜻을 찾아서는 안 된다.
但一字有異, 或上下文異, 則義須別.
단지 한 글자가 다른 것이 있다든가, 또는 위와 아래의 글이 다르다면 뜻은 반드시 다르게 되는 것이다.
(程氏遺書 第2篇)
시경과 서경은 정치, 풍속, 인륜의 도에 치중하여 기술한 책이고, 춘추는 권선징악의 실례를 들어 기술한 역사서로서 성인들의 행동을 밝힌 것이다. 춘추의 내용에는 중복된 곳이 다소 있으나 그 뜻을 잘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63. 춘추는 법률의 판례와 같다
五經之有春秋, 猶法律之有斷例也.
오경(五經)에 춘추(春秋)가 있는 것은 오히려 법률에 판례가 있는 것과 같다.
律令唯言其法, 至於斷例, 則始見其法之用也.
율령(律令)은 오직 그 법을 말할 뿐이나, 그 판례에 이르러 비로소 법의 쓰임을 볼 수가 있다.
(程氏遺書 第2篇)
오경(五經)이란, 주역(周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다섯 경서를 말한다. 그런데 이 춘추(春秋)를 판례(判例)로 비유하고, 나머지 사경(四經)을 법률로 비유하여 중요한 '춘추'의 쓰임을 말한 것이다.
64. 춘추는 중용(中庸)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學春秋亦善.
춘추를 배우는 것은 또한 좋은 일이다.
一句是一事, 是非便見於此, 此亦窮理之要.
한 구절에 한 가지 일을 말한 것인데, 여기에 옳고 그름을 볼 수 있으니, 이것 또한 이치를 궁구하는 데 요긴한 것이다.
然他經豈不可以窮理.
그러나 다른 경서라고 해서 어찌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겠는가?
但他經論其義, 春秋因其行事, 是非較著, 故窮理爲要.
다만 다른 경서는 그 의리를 논하였고, '춘추'는 그 행사의 옳고 그름을 명백하게 밝힌 것이므로 이치를 궁구하는 데 요긴하다는 것이다.
嘗語學者.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말한 바 있다.
且先讀論語孟子, 更讀一經, 然後看春秋.
먼저 논어와 맹자를 읽고, 다시 다른 한 경서를 읽은 다음에 '춘추'를 읽으라고 하였다.
先識得蓋義理, 方可看春秋, 春秋以何爲準.
먼저 하나의 의리를 알고 나서, '춘추'를 보는 것이 좋은데, '춘추'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無如中庸, 欲知中庸, 無如權, 須是時而爲中.
그것은 '중용'만한 것이 없으며, 중용을 알고자 하면 권(權)할 만한 것이 없으니, 모름지기 때에 따라서 중(中)을 지켜야 한다.
若以手足胼胝, 閉戶不出, 二者之間取中, 便不是中.
만약 수족변지(手足胼胝)와, 폐호불출(閉戶不出)의 두 가지 중에서 중(中)을 취한다면, 이는 중(中)이 아니다.
若當手足胼胝, 則於此爲中, 當閉戶不出, 則於此爲中.
만약 수족변지(手足胼胝)에 당하면, 여기에서 중(中)을 행하고, 폐호불출(閉戶不出)을 당하면, 여기에서 중(中)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權之爲言, 秤錘之義也.
권(權)이란 말은 저울의 추를 뜻하는 것이다.
何物爲權. 義也, 時也.
무엇을 권(權)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의(義)이며, 시(時)인 것이다.
只是說得到義, 義以上更難說, 在人自看如何.
다만 의(義)라고 하는 것은 설명에 이르는 것이고, 의(義) 이상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니, 사람마다 스스로 무엇인지를 보는 데 달려 있다.
(程氏遺書 第15篇)
폐호불출(閉戶不出)이란, 두문불출(杜門不出)과 같은 말로 문밖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가 시골 구석에서 두문 불출하고, 학문에 힘썼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변지(胼胝)란 말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이르는 말인데, 우(禹)가 순(舜)의 명령을 받고 홍수를 다스릴 때, 게으름 없이 부지런히 일하였으므로, 손과 발에 못이 박혔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에서 나온말이다.
이 대목은 '춘추'를 읽는 올바른 법에 대한 이천 선생의 말로서, '춘추'를 읽기 전에는 반드시 이치를 알기 쉬운 책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중용'을 기준으로 삼아 중도(中道)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65. 춘추는 전(傳)으로써 일을 상고한다
春秋傳爲按, 經爲斷.
춘추는 전(傳)으로써 일을 상고하고 경(經)으로써 시비를 판단한다.
(程氏遺書 第15篇)
'춘추'의 삼전(三傳)으로써, 좌전(左傳)과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의 세가지가 있는데, 사적(史跡)의 득실을 상고하고 경문으로써 전(傳)의 시비를 판단한다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본향의 본주(本註)에 정자(程子)는 또 말하였다. "내가 20세때 '춘추'를 보니, 황오우(黃聱隅)가 읽는법을 물었다. 나는 전(傳)으로써 경(經)의 사적을 상고하고, 경(經)으로써 전(傳)의 진리를 판단한다고 말해 주었다"고 하였다.
66. 사서(史書)를 읽을 때는 사적(史跡)만을 읽지 말라
凡讀史不徒要記事迹, 須要識其治亂安危興發存亡之理.
무릇 역사서를 읽을 때에는 사적(事迹)만을 읽지 말고 모름지기 그 치란, 안위, 흥폐, 존망의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且如讀高帝紀, 便須識得漢家四百年終始治亂當如何. 是亦學也.
또 한서(漢書)의 고제기(高帝紀) 같은 것을 읽을 때에는 한나라 400년간의 시작과 종말및 치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학문이다.
(程氏遺書 第18篇)
사서(史書)를 올바르게 읽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단지 역사에 기록된 사적을 기억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치란과 안위와 흥폐와 존망의 이치를 살펴야 할 것이다. 흥망은 반드시 그렇게 되기 까지의 원인이 있는 것이므로, 이를 잘 살펴서 깨닫는 것 또한 학문이라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67. 책을 읽을 때는 성공과 실패를 살펴보라
先生每讀史到一半, 便掩卷思量, 料其成敗, 然後却看.
이천 선생이 사서를 읽을 때에는 매번 반쯤 읽고서는 책을 덮어두고 두루 생각하며, 그 성공과 실패를 이해한 뒤에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有不合處, 又更精思.
그러다가 합당치 않은 곳이 있으면 다시 생각을 정밀하게 하였다.
其間多有幸而成, 不幸而敗.
그 사이에 다행히 성공한 때도 많이 있었고 불행히도 실패한 때도 있었다.
今人只見成者, 便以爲是, 敗者便以爲非.
지금 사람들은 성공한 것을 보면 옳다고 생각하고 실패한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不知成者煞有不是, 敗者煞有是底.
성공이 매우 옳지 않은 경우도 있고 실패가 매우 옳은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程氏遺書 第19篇)
사서(史書)를 읽을 때에는 실패의 원인과 성공의 원인을 살피고, 연구하여 터득해 한다. 정밀하게 생각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서 판단하는 것이 사서를 읽는데 의의가 있다는 이천 선생의 말이다.
68. 독서시에는 선인들의 출처진퇴를 살펴라
讀史須見聖賢所存治亂之機, 賢人君子出處進退. 便是格物.
사서를 읽을 때에는 모름지기 성현이 남긴 치란의 기미와, 현인이나 군자의 출처와 진퇴를 살펴야 한다. 이것이 격물(格物)이다.
(程氏遺書 第19篇)
사서(史書)를 읽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데 전항에 이어 계속되고 있다. 사서를 옳게 읽는 것이, 곧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라는 이천 선생의 말로서, 사서를 옳게 읽으려면 뜻하는바를 깊이 연구하여 관찰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현의 치란이나 출처진퇴에서 알 수가 있다.
69. 당감은 3대(三代) 이후 이러한 의론이 없었다
元祐中, 客有見伊川者.
원우(元祐) 연간에 이천 선생을 찾아 온 손님이 있었다.
几案間, 無他書, 惟印行唐鑒一部, 先生曰: 近方見此書, 三代以後, 無此議論.
책상에는 다른 책은 없었고, 오직 인쇄된 '당감(唐鑒)' 한 부가 있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최근에 이 책을 보고 있는데 삼대(三代) 이후에 이러한 의론은 없었다"고 하였다.
(程氏外書 第12篇)
원우(元祐)는 송(宋)나라 철종(哲宗) 때 연호이다. 그리고 당감(唐鑒)은 당(唐) 나라 때의 득실과 시비를 논한 것으로, 송(宋)나라 범조우(范祖禹)가 저술한 24권의 책 이름이다.
70. 목수의 솜씨를 어찌 한 자루의 도끼로 아랴?
橫渠先生曰: 序卦不可謂非聖人之縕. 今欲安置一物, 猶求審處, 況聖人之於易.
횡거 선생이 말하기를, "서괘(序卦)를 성인의 심오함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지금 한 가지 물건을 놓으려 해도 그 자리를 구하는데, 하물며 성인의 역(易)에 있어서랴.
其間雖无極至精義, 大槩皆有意思.
그 속에 비록 더 이상의 정밀한 이치가 없다고 해도 대개 모두 뜻과 생각이 있는 것이다.
觀聖人之書, 須遍布細密如是.
성인의 글을 읽을 때에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세밀하게 살펴야 하는 것이다.
大匠豈以一斧可知哉.
목수의 뛰어난 솜씨를 어찌 한 자루의 도끼로써 알 수 있으랴"고 하였다.
(張子全書 第11편 易說序卦傳)
성인의 글은 평범한 대도 깊은 뜻이 담겨 있으니 깊고 넓게 생각해야 한다. 이항은 진(晋)나라의 한강백(韓康伯)이 '주역'의 서괘전에는 의미가 얕아서 성인의 깊은 뜻이 없다고 한 것을 반박한 글로, 아무리 뛰어난 목수라고 할지라도 도끼 한 자루만을 가지고 그 솜씨를 평가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71. 마음을 크고 넓게 가져라
天官之職, 須襟懷洪大, 方看得. 蓋其規模至大.
주례(周禮)의 천관(天官)의 직책은 모름지기 마음이 넓고 커야만 이해할 수가 있다. 대개 그 규모가 아주 크기 때문이다.
若不得此心, 欲事事上, 致曲窮究, 湊合此心, 如是之大, 必不能得也.
만약 이 마음을 얻지 못하고, 일마다 자세히 살펴 궁구해 나가려고 한다면, 마음을 끌어 모아서 이와 같이 크게 한다고 해도 반드시 얻기 어려운 일이다.
釋氏錙銖天地, 可謂至大, 然不嘗爲大則爲事不得, 若畀之一錢則必亂矣.
불교에서는 천지를 아주 작은 물건처럼 보고 있는데, 이 이론은 정말로 크다고 할 것이나, 일찍이 큰 일을 하지 않으면 일을 얻을 수가 없으니, 일전(一錢)을 준다면 반드시 어지러움을 일으킬 것이다.
又曰: 太宰之職難看, 蓋無許大心胸包羅, 記得此, 復忘彼.
또 말하기를, "태재의 직책은 보기가 어려운 것이니, 대개 큰 마음으로 포용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기억한다 해도 저것을 다시 잊어 버릴 것이다.
其混混天下之事, 當如捕龍蛇搏虎豹, 用心力看方可.
그것은 물이 솟아나듯 생기는 천하의 일들이 용과 뱀을 사로 잡고 범과 표범을 결박짓는 것과 같아서, 심력을 기울여 보아야만 되기 때문이다.
其他五官, 便易看, 止一職也.
그 외의 오관(五官)이 보기 쉬운 것은 하나의 직책에 그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張子全書 第4篇 江註語錄)
주례(周禮)는 중국 국가의 제도를 적은 것이다. 관제(官制)를 설명하고 총괄하는 직책인 태재(太宰)는 마음이 넓고 커야 한다고 하였다.
72. 시(詩)를 이해한 자는 오직 맹자뿐이다
古人能知詩者, 唯孟子, 爲其以意逆志也.
옛사람으로 능히 시(詩)를 잘 이해한 자는 오직 맹자뿐이니 자기의 마음에 시인의 뜻을 맞아 들였기 때문이다.
夫詩人之志, 至平易, 不必爲艱嶮求之.
대체로 시인의 뜻은 지극히 평이하여 반드시 어렵게 구할 필요가 없다.
今以艱嶮求詩, 則已喪其本心, 何由見詩人之志.
지금 시의 뜻을 어렵게 구하려고 한다면 그 본심을 잃어 버릴 뿐이니, 어찌 시인의 뜻을 볼 수 있으랴.
詩人之情性, 溫厚平易老成, 本平地上.
시인의 감정과 성질은 따뜻함과 두터움이 쉽고 까다롭지 않게 노련해져서 본성은 평지처럼 평탄한 것을 으뜸으로 한다.
道著言語, 今須以崎嶇求之, 先其心已狹隘了.
도(道)를 나타내는 언어(말)들을 지금은 어려운 방법으로 그것을 구하고자 하지만,그 마음은 이미 협소해진 것일저.
則無由見得, 詩人之情本樂易, 只爲時事拂著他樂易之性故, 以詩道其志.
곧 보아서 얻는 것이 없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시인의 감정은 본래 즐겁고 평안한 것인데, 다만 하는 일마다 다른 즐거움이 본성에 쉽게 침범하므로, 시로써 그 뜻을 도(道)로 나타내는 것이다.
(張子全書 第四篇 江註語錄)
이의역지(以意逆志)의 역(易)은 '맞아 들인다'는 뜻으로, 곧 시인의 뜻에 자신의 마음을 받아 들인다는 의미이다. 시(詩) 라는 것은 원래, 알기 쉽고 편하게 쓴 것 이다. 이것을 공연히 어렵게 해석하려고 하면 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73. 다만 글의 뜻을 알고자 하면 어렵지 않다
尙書難看. 蓋難得胸臆.
상서(尙書)는 보기 어렵다. 대개 그와 같이 큰 것을 마음에 터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如此之大, 只欲解義, 則無難也.
이와 같이 마음을 크게 하고서 단지 글의 뜻만을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려울 것이 없다.
(張子全書 第四篇 江註語錄)
상서(尙書)란 서경(書經)을 달리 이르는 말인데, 서경은 천하의 정사를 말한 것이므로, 크고 넓은 마음으로써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우나, 대체의 뜻만을 알려고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크고 넓은 마음을 길러서 경서를 읽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74. 일시라도 책을 놓으면 덕성이 태만해 진다
讀書少, 則無由考校得義精.
책을 적게 읽으면 생각하여 이치를 정밀하게 얻을 길이 없다.
蓋書以維持此心, 一時放下, 則一時德性有懈.
대개 책은 이 마음을 유지시키므로 일시라도 책을 놓으면 한 때의 덕성이 태만하여 진다.
讀書, 則此心常在, 不讀書, 則終看義理不見.
책을 읽으면 이 마음이 항상 있게 되고, 책을 읽지 않으면 끝내 의리를 볼 수가 없다.
(張子全書 第六篇 江註語錄)
책을 많이 읽고 적게 읽음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자연히 덕성이 갖추어지는 것이니, 글을 많이 읽어서 참뜻을 구하고 실행할 것을 말하였다.
75. 글은 반드시 암송을 해야 한다
書須成誦.
글은 반드시 암송을 해야 한다.
精思多在夜中, 或靜坐得之.
생각을 정밀히 하는 것은 밤중에 많이 하고, 혹은 조용히 앉아서 그 뜻을 얻어야 한다.
不記則思不起,
기억하지 못하면 생각이 나지 않는다.
但通貫得大原後, 書亦易記.
단지 의리의 근본이 통한 뒤에라야, 글 또한 기억하기가 쉬운 것이다.
所以觀書者, 釋己之疑, 明己之未達.
책을 읽는 까닭은 자기의 의심나는 것을 풀어 주고, 자기가 통달하지 못한 것을 밝게 해주기 때문이다.
每見每知新益, 則學進矣.
매번 책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더하여 알게 되면, 곧 학문이 진전되는 것이다.
於不疑處有疑, 方是進矣.
의심이 없던 곳에서 의심이 생기면, 이것이 곧 진전인 것이다.
(張子全書 第六篇 江註語錄)
독서의 방법을 논한것으로 글은 번드시 암송을 해야하며, 암송하려면 그 글의 내용을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억할수 있을 때까지 읽으라고 말한 것이다.
76. 육경(六經)은 되풀이하여 읽어라
六經須循環理會.
육경(六經)은 되풀이 하여 읽어서 이해해야 한다.
義理儘無窮, 待自家長得一格, 則又見得別.
이치는 무궁한 것이므로 자기가 한 단계 진보하면 또 다른 이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張子全書 第六篇 江註語錄)
성인의 책은 한 번 읽었다고 해서 버려두지 말고 되풀이하여 읽어서 이해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 속에는 범인이 상상할 수 없는 무궁한 이치가 담겨 있으므로, 한 번 읽은 것으로써 터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 가지씩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발전이 되는 것이다.
77. 이해한 구절은 서로 관련시켜 뜻을 밝혀라
如中庸文字輩, 直須句句理會過, 使其言互相發明.
중용(中庸)의 문자같은 것은 구절마다 이해하고 지나서 그 말들을 서로 관련지어 뜻을 밝혀야 한다.
(張子全書 第九篇 江註語錄)
중용(中庸)의 공부 방법을 말하고 있다. 중용은 구절마다 이해하고 의리를 밝혀서 그 말들이 서로 연결지어 뜻을 이루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78. 춘추는 오직 맹자만이 알고 있었다
春秋之書, 在古無有.
춘추라는 책은 옛날에는 있지 않았었다.
乃仲尼所自作, 惟孟子能知之.
공자가 지은 것인데, 오직 맹자만이 잘 알고 있었다.
非理明義精, 殆未可學.
춘추는 이치에 밝고 정밀한 의리(義理)가 아니면, 거의 배울 수가 없는 학문이다.
先儒未及此而治之故, 其說多鑿.
선유(先儒)들은 이 이치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학설에 제멋대로 해석한 것이 많은 것이다.
(張子全書 第14篇 江註語錄)
'춘추'는 이치에 밝고 정밀한 사람이 읽어야만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여러 유자(儒者)들은 자신의 학문만을 믿고, 각기 이치에 맞지 않는 해석을 하면서 글을 읽었으니, 그 말에 천착함이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 觀(볼 관)은 ❶형성문자로 覌(관), 観(관)은 통자(通字), 观(관)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볼 견(見; 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雚(관)으로 이루어졌다. 자세히 본다는(見) 뜻이 합(合)하여 보다를 뜻한다. 늘어 놓아 보이다, 자랑스럽게 남에게 보이다, 잘 본다는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觀자는 '보다'나 '보이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觀자는 雚(황새 관)자와 見(볼 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雚자는 隹(새 추)자 위에 큰 눈과 눈썹을 그린 것으로 '황새'라는 뜻을 갖고 있다. 雚자는 큰 눈과 눈썹이 도드라지는 황새를 잘 표현한 글자이다. 이렇게 황새를 그린 雚자에 見자를 결합한 觀자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황새처럼 넓게 '보다'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觀자에는 '용모'나 '모양'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는 황새의 자태가 의미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觀(관)은 (1)한자어로 된 어떤 명사 아래에 붙어 체계화된 견해를 뜻하는 말 (2)관괘(觀卦) (3)도교(道敎)의 사원(寺院) 등의 뜻으로 ①보다 ②보이게 하다 ③보게 하다 ④나타내다 ⑤점치다 ⑥모양 ⑦용모(容貌) ⑧생각 ⑨누각(樓閣;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 ⑩황새 ⑪괘(卦)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살필 찰(察), 살필 심(審), 조사할 사(査), 검사할 검(檢), 볼 시(視), 볼 감(監), 바라볼 조(眺),보일 시(示), 볼 견(見), 볼 람/남(覽), 볼 열(閱), 나타날 현(顯)이다. 용례로는 다른 지방이나 나라의 명승이나 고적과 풍속 등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을 관광(觀光), 자연 현상의 추이를 관측(觀測), 사물을 잘 살펴 봄을 관찰(觀察), 사물을 관찰하거나 고찰할 때 그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각도를 관점(觀點),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 앉히고 깊이 생각하는 일을 관념(觀念), 영화나 연극이나 무용 등의 무대 공연을 구경하는 사람을 관객(觀客), 연극이나 영화 따위를 구경함을 관람(觀覽), 사물을 꿰뚫어 봄을 관철(觀徹),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거나 음미함을 관조(觀照), 마음의 본성을 살핌을 관심(觀心), 구경하는 무리를 관중(觀衆), 사람의 상을 보고 재수나 운명을 판단하는 일을 관상(觀相), 인과 불인은 곧 알 수 있다는 말을 관과지인(觀過知仁),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얼굴빛을 자세히 살펴봄을 일컫는 말을 관형찰색(觀形察色), 풍속을 자세히 살펴 봄을 이르는 말을 관풍찰속(觀風察俗), 과거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미래를 미루어 짐작한다는 말을 관왕이지래(觀往以知來), 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당하여 옆에서 보고만 있는 것을 이르는 말을 수수방관(袖手傍觀), 우물 속에 앉아 하늘을 쳐다본다는 뜻으로 견문이 매우 좁음을 말함 또는 세상 물정을 너무 모름을 이르는 말을 좌정관천(坐井觀天), 우물 속에 앉아서 좁은 하늘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소견이나 견문이 좁음을 이르는 말을 정중관천(井中觀天), 불을 보는 것 같이 밝게 보인다는 뜻으로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함을 이르는 말을 명약관화(明若觀火) 등에 쓰인다.
▶️ 物(물건 물)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소 우(牛=牜; 소)部와 음(音)을 나타내며勿(물)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만물을 대표하는 것으로 소(牛)를 지목하여 만물을 뜻한다. 勿(물)은 旗(기), 천자(天子)나 대장의 기는 아니고 보통 무사(武士)가 세우는 색이 섞여 있는 것, 여기에서는 색이 섞여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物(물)은 얼룩소, 나중에 여러 가지 물건이란 뜻을 나타낸다. 그러나 옛 모양은 흙을 갈아 엎고 있는 쟁기의 모양과 牛(우; 소)로 이루어져 밭을 가는 소를 나타내었다. 나중에 모양이 닮은 勿(물)이란 자형(字形)을 쓰게 된 것이다. ❷회의문자로 物자는 '물건'이나 '사물'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物자는 牛(소 우)자와 勿(말 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勿자는 무언가를 칼로 내리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物자는 소를 도축하여 상품화시키는 모습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다양한 색이 뒤섞여 있던 '얼룩소'를 物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후에 다양한 가축의 종류나 등급과 관계된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지금은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제품'이나 '상품', '만물'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物(물)은 (1)넓은 뜻으로는, 단순한 사고(思考)의 대상이건,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이건을 불문하고, 일반으로 어떠한 존재, 어떤 대상 또는 어떤 판단의 주어(主語)가 되는 일체의 것 (2)좁은 뜻으로는, 외계(外界)에 있어서의 우리들의 감각에 의해서 지각(知覺)할 수 있는 사물(事物), 시간(時間), 공간(空間) 가운데 있는 물체적, 물질적인 것 (3)사람이 지배하고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구체적 물건. 민법 상, 유체물(有體物) 및 전기(電氣) 그 밖에 관리할 수 있는 자연력(自然力). 사권(私權)의 객체(客體)가 될 수 있는 것 등의 뜻으로 ①물건(物件) ②만물(萬物) ③사물(事物) ④일, 사무(事務) ⑤재물(財物) ⑥종류(種類) ⑦색깔 ⑧기(旗) ⑨활 쏘는 자리 ⑩얼룩소 ⑪사람 ⑫보다 ⑬살피다, 변별하다 ⑭헤아리다, 견주다(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기 위하여 서로 대어 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물건 건(件), 물건 품(品), 몸 신(身), 몸 궁(躬), 몸 구(軀), 몸 체(體)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음 심(心)이다. 용례로는 사람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내거나 가공하여 어떤 목적으로 이용하는 들고 다닐 만한 크기의 일정한 형태를 가진 대상을 물건(物件), 물건의 본바탕으로 재산이나 재물을 물질(物質), 물건 값을 물가(物價), 쓸 만하고 값 있는 물건을 물품(物品), 물건의 형체를 물체(物體), 물건의 분량을 물량(物量), 물건을 만들거나 일을 하는 데 쓰는 여러 가지 재료를 물자(物資), 어떤 사람의 좋지 않은 행동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이러쿵 저러쿵 논란하는 상태를 물의(物議), 마음과 형체가 구별없이 하나로 일치된 상태를 일컫는 말을 물심일여(物心一如), 사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다는 뜻으로 사물의 질서를 일컫는 말을 물유본말(物有本末),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한가하게 지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물외한인(物外閑人), 바깥 사물과 나 그리고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울려 한 몸으로 이루어진 그것을 이르는 말을 물아일체(物我一體), 무엇이나 제각기 그 주인이 있다는 뜻으로 무슨 물건이나 그것을 가질 사람은 따로 있음을 이르는 말을 물각유주(物各有主), 생물이 썩은 뒤에야 벌레가 생긴다는 뜻으로 남을 의심한 뒤에 그를 두고 하는 비방이나 소문을 듣고 믿게 됨 또는 내부에 약점이 생기면 곧 외부의 침입이 있게 됨을 이르는 말을 물부충생(物腐蟲生), 나는 물건이 많고 지역이 또한 넓음을 일컫는 말을 물중지대(物衆地大), 만물이 한 번 성하면 한 번 쇠함을 이르는 말을 물성칙쇠(物盛則衰), 물건이 오래 묵으면 조화를 부린다는 말을 물구즉신(物久則神),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의 양면을 일컫는 말을 물심양면(物心兩面), 사람과 사귀는 데 선물이나 음식 대접은 다소 박하더라도 정만은 두터워야 함을 이르는 말을 물박정후(物薄情厚), 세상이 시끄러워 사람의 마음이 안정을 얻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물정소연(物情騷然), 사물은 바뀌고 세월은 흘러감을 이르는 말을 물환성이(物換星移) 등에 쓰인다.
▶️ 察(살필 찰)은 ❶형성문자로 詧(찰)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갓머리(宀; 집, 집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祭(제, 찰)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察(찰)은 조상을 모시다, 친절하게 자잘한 일을 하다, 더러움을 깨끗이 하다의 뜻인 祭(제)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집에서(宀) 빠짐없이 생각하여 살핀다는 뜻이 합(合)하여 살피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察자는 '살피다'나 '자세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察자는 宀(집 면)자와 祭(제사 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祭자는 제단 위에 고기를 얹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제사를 지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제사'라는 뜻을 가진 祭자에 宀자를 결합한 察자는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큰일을 치를 때는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察자는 제사를 지내기에 앞서 빠진 것이 없는지 두루 살펴본다는 의미에서 '두루 살피다'나 '자세히 알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察(찰)은 ①살피다 ②알다, 살펴서 알다 ③상고(詳考)하다 ④자세하다(仔細), 밝고 자세하다 ⑤조사(調査)하다, 생각하여 보다 ⑥드러나다, 널리 알려지다 ⑦깨끗하다, 결백(潔白)하다 ⑧밀다, 천거하다 ⑨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살필 심(審), 조사할 사(査), 검사할 검(檢), 볼 시(視), 볼 감(監), 살필 성(省), 보일 시(示), 볼 람/남(覽), 볼 관(觀), 살필 체(諦), 볼 열(閱)이다. 용례로는 잘 조사한 후 들어 줌을 찰납(察納), 환히 들여다 봄을 찰람(察覽), 얼굴빛을 살펴 봄을 찰색(察色), 문서나 편지 같은 것을 자세히 읽어 대조함을 찰조(察照), 대중을 규찰함을 찰중(察衆), 미루어 명백히 앎을 찰지(察知), 직무를 총괄하여 보살핌을 찰직(察職), 너무 자세한 모양을 찰찰(察察), 잘 살펴 보고 생각함을 찰험(察驗), 현명함 또는 총명하다는 찰혜(察慧), 검사하여 살핌을 검찰(檢察), 사물을 잘 살펴 봄을 관찰(觀察), 허물이나 저지른 일들을 반성하여 살핌을 성찰(省察), 환히 내다봄이나 꿰뚫어 봄을 통찰(洞察), 감시하고 살피는 것을 감찰(監察), 남의 행동을 조사하여 살핌 또는 그 사람을 사찰(査察),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며 사정을 살핌을 순찰(巡察), 잘 생각해서 살핌을 고찰(考察), 돌아다니며 실지 사정을 살펴 봄을 시찰(視察), 남의 사정이나 비밀 따위를 몰래 알아냄을 염찰(廉察), 소리를 듣고 그 거동을 살피니 조그마한 일이라도 주의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을 영음찰리(聆音察理), 지난 일을 밝게 살피어 장래의 득을 살핌을 일컫는 말을 창왕찰래(彰往察來), 과거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미래를 미루어 짐작한다는 말을 이왕찰래(以往察來),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얼굴빛을 자세히 살펴봄 또는 잘 모르는 사물을 자세히 관찰함을 일컫는 말을 관형찰색(觀形察色), 급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일을 살핌을 일컫는 말을 불급지찰(不急之察), 아랫사람을 두루 굽어 살피고 윗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우러러 봄을 이르는 말을 부찰앙관(俯察仰觀), 부모의 상복보다 시마나 소공을 더 중히 여긴다는 뜻으로 큰 일은 깨닫지 못하고 작은 일에만 골몰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시소공지찰(緦小功之察) 등에 쓰인다.
▶️ 己(몸 기)는 ❶상형문자이나 지사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래 구불거리는 긴 끈의 모양을 본떴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모양에서 일으키는 일의 뜻으로 쓰인다. 일으키다의 뜻은 나중에 起(기)로 쓰고, 己(기)는 천간(天干)의 여섯번째로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己자는 '몸'이나 '자기'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몸'이란 '나 자신'을 뜻한다. 己자의 유래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사람이 몸을 구부린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굽의 있는 새끼줄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己자와 결합한 글자를 보면 새끼줄이 구부러져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다만 己자가 단독으로 쓰일 때는 여전히 '나 자신'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己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상용한자에서는 뜻과 관련된 글자가 없다. 다만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새끼줄이나 구부러진 모양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으니 상황에 따른 적절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래서 己(기)는 ①몸 ②자기(自己), 자아(自我) ③여섯째 천간(天干) ④사욕(私慾) ⑤어조사(語助辭) ⑥다스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여섯 번째를 기사(己巳), 열여섯째를 기묘(己卯), 스물여섯째를 기축(己丑), 서른여섯째를 기해(己亥), 마흔여섯째 기유(己酉), 쉰여섯째를 기미(己未)라 한다. 그리고 자기의 물건을 기물(己物), 자기 마음을 기심(己心), 자기가 낳은 자녀를 기출(己出), 자신의 의견이나 소견을 기견(己見), 자신의 초상을 기상(己喪), 자기의 소유를 기유(己有), 자기의 물건은 기물(己物), 제 몸이나 제 자신 또는 막연하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을 자기(自己), 자기 이익만 꾀함을 이기(利己), 자신의 몸을 닦음을 수기(修己), 안색을 바로잡아 엄정히 함 또는 자기자신을 다스림을 율기(律己), 자기 몸을 깨끗이 함을 결기(潔己), 몸을 가지거나 행동하는 일을 행기(行己), 신분이나 지위가 자기와 같음을 유기(類己), 자기를 사랑함을 애기(愛己), 자기 한 몸을 일기(一己), 자기에게 필요함 또는 그 일을 절기(切己), 자기가 굶주리고 자기가 물에 빠진 듯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함을 일컫는 말을 기기기익(己飢己溺), 중종때 남곤 일파 조광조 등을 쫓아내어 죽인 사건을 일컫는 말을 기묘사화(己卯士禍), 기미년 3월1일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한국의 독립운동을 일컫는 말을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자기 스스로를 돌이켜 봄을 일컫는 말을 자기관찰(自己觀察), 모든 사고와 판단과 행동을 자기 중심으로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자기본위(自己本位), 자기의 이해와 쾌락과 주장을 중심으로 삼고 남의 처지를 돌보지 않는 주의를 일컫는 말을 애기주의(愛己主義), 자기 존재를 인정 받으려고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는 심리적 경향을 일컫는 말을 자기과시(自己誇示), 스스로에게 황홀하게 빠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자기도취(自己陶醉), 자신의 생활은 검약하게 하고 남을 대접함에는 풍족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약기유물(約己裕物)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