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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는 그립다.
1997년 6월
얼마 전 운이 집에 다녀간 이후로 어머니는 물론이고 수인이까지 운이 매우 맘에 들었는지 매일같이 오늘은 놀러오지 않았냐며 닦달을 했다. 덕분에 그는 일주일에 두 어 번 씩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고 매번 메뉴에 골몰하면서도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어머니는 연신 웃음을 지으셨다. 웃음이 부족했던 우리가족에게 그렇게 따스한 훈풍이 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이 말했다.
“우리 집에도 오고 싶다고 했었지?”
라고.
뭐 사실 운만 우리 집에 온다면 조금 억울할 것 같아 내뱉은 말이었지만,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가고는 싶었지만 왠지 모를 부담감과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진운이야 여타가 보증하는 모범생에 수재였지만 나는 누가 봐도 양아치에 날라리였으니, 그쪽부모님이 탐탁치않아 하실 것 같다는 두려움이었다. 우리 집 가족들은 그를 좋아하는데, 그의 가족은 나를 싫어한다면 왠지… 정말 슬플 것 같았다.
그래서 대충 얼버무리며 미루기를 한참, 운이 오늘 낮에 통보를 하고는 먼저 하교를 해버렸다.
‘위치는 찾기 어렵지 않을 거야.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구경한다고 생각해. 오늘 부모님 안계시니까. 알겠지?’
왜 안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운은 내가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내 고민을 이해하고 신경써주는 그의 자상함에서 왠지 모를 먹먹함을 느끼면서 그가 내미는 종이 조각을 받아들었다. 손바닥 만 한 메모에는 주소와 간략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딱 보기에도 길이 어려워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손에 쥐고 있던 메모를 보다 잘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가방을 들었다. 이제는 고등학교 과정으로 수업 진도가 나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책가방을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운은 복습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서 집에 가서 한번이라도 더 볼 것을 요구했고 나는 두말없이 그 방침을 따랐다. 덕분에 내 어깨에 제법 무게감이 느껴지는 가방을 매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하나하나 내 생활과 삶을 변화시키는 운을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졌다. 치열했던 10대의 후반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학교가 가장 큰 선물을 쥐어준 것 같았다.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다잡고 교문을 나섰다.
운의 집은 우리 집과는 반대방향으로 걸어서 10분정도 걸리는 주택단지였다. 어스름이 내리는 길을 걸어가면서 시간을 확인하니 6시 30분이었다. 7시까지 오라고 했기 때문에 아직은 여유가 있었지만 조금쯤 일찍 가도 괜찮겠지 싶어 지름길로 들어섰다. 이제는 완연히 여름이 되어 가는지 해도 길어서 골목안도 조금 어두울 뿐 완전히 캄캄하지는 않았다. 조금 빠른 발걸음으로 가볍게 골목을 빠져나와 방향을 트는 순간 섬칫한 느낌에 몸을 숙였다.
부웅- 하는 소리와 바람이 뒷목을 스치고 지나갔고 나는 바로 몸을 굴려 서 있던 자리에서 피했다.
“여어, 이재인”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요즘 모범생인척 하고 돌아다닌다며?”
“……”
“우리를 개 패듯 패놓고 이제 와서 꽁무니를 빼면 우린 뭐가되는데~”
마치 내가 가해자인척 말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운을 처음만난 그날, 끈질기다 못해 지긋지긋한 이놈들과 싸웠었다. 마지막에 운이 구해주긴 했지만 결국 혼자서 여섯을 때려눕힌 건 나였다.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덤비는걸 보니 그때 내가 손속에 여유를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앙?!”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놈들이 달려들었다. 나직하게 욕을 씹으며 가방을 구석에 내려놓았다. 시간은 6시 40분.
늦을 거 같아, 운아. 미안.
# # #
“허억… 헉…”
폐가 터질 것 같다.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벽에 기대놓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머리를 잘못 맞았는지 깨진 부분에서 피가 흘러 시야를 가렸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들어 발치에 닿는 주머니칼을 노려보았다.
“개…자식들”
힘을 짜내 칼을 발로차자 골목어귀 쓰레기더미사이로 들어간다. 그것을 확인하고 완전히 벽에 기대어 호흡을 골랐다. 바닥에 쓰러진 놈은 두 명으로 나머지 셋은 중간에 도망갔고, 이 둘이 끝까지 남아 그나마도 칼까지 꺼내드는 최악의 수까지 두었다. 결국 별 효용은 없었지만…
몸은 맞은 곳이 욱신거릴 뿐 괜찮은 듯 했지만 머리가 울리는 것이 확실히 잘못 맞긴 한 것 같았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자 벌써 7시가 넘은지 오래다.
아아… 운아. 정말 미안. 늦는 게 아니라 못 갈 거 같은데 어떡하지.
-저벅저벅
그때 골목어귀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워낙 외진 곳이라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데, 이런 곳에 사람이라면… 이놈들의 패거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세 명은 도망친 상태니까.
알 수 없는 위기감에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간신히 벽을 짚고 다리에 힘을 주자 일어설 수는 있었지만 시야조차 제대로 확보되지를 않았다. 그 와중에도 발소리는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저벅. 지익.
그리고 바로 근처에서 멈춰 섰다. 상대를 확인하기위해 소맷자락을 끌어 눈가를 닦아냈지만 그전에 바로 피가 눈앞을 적셨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순간 다가온 이가 내 앞에 섰다. 붉게 흐려진 시야사이로 어두운 실루엣이 잡혔다. 걱정과는 달리 상대에게서 공격의 의사가 없었기에 나는 안도했다. 그리고 비척비척 벽에 손을 짚고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무릎이 꺾였고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 단단한 팔이 나를 잡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불안함과 짙은 피 냄새에 갇혀 맡지 못했던 향. 운의 향기가 주변에 은은하게 피고 있었다.
“…진 운”
이름을 부르자 그는 대답하지 않고 잡은 팔을 당겨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한 내가 비척거렸지만 이미 힘이란 힘은 다 빠져버린 내가 그를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를 떨어뜨리는 것을 포기함과 동시에 걱정된 것은 조금 어이없게도 잔뜩 지저분해져있을 내 몸 때문에 그의 옷까지 더럽히는 것이었다.
“나… 지저분해…”
들릴까 말까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듣지 못했는지 그는 팔을 풀지 않았다. 더욱 어둠이 깔리는 그의 어깨너머를 보면서 나는 어색하게 공중에 벌어져있던 팔로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분명 나는 더러울 텐데도, 지저분할 텐데도 왠지 모르게 깨끗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향기가, 나까지도 물들이는 기분이었다.
# # #
“아야…”
한참을 골목에서 그를 마주안고 있던 나는 갑자기 그가 포옹을 풀고 손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정신없이 끌려와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 걷지 않아 한 주택의 대문 앞에 도착했고 운이 이끄는 대로 대문 안에 들어섰다. 아담한 정원도 미처 둘러보기 전에 집안으로 이끈 운은 너덜너덜한 나를 거리낌 없이 소파에 앉혀놓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 구급상자를 들고 와서 나를 치료해주고 있었다.
평소에는 내지 않는 신음소리까지 흘려가면서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그는 묵묵히 굳은 얼굴을 하고 내 이마의 상처를 소독할 뿐이었다. 그리곤 어느 정도 지혈도 되자 거침없이 내 셔츠 단추를 풀어헤쳤다.
“내, 내가할게!”
내말에 그가 손을 치우고 나는 단추에 손을 가져갔지만 이상하게도 잘되지가 않았다. 툭툭 작은 단추들이 자꾸 손끝에서 미끄러져 몇 개 되지 않는데도 쉽지 않다.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내손을 잡아왔다.
“……?”
“후우…”
무언가 억누르는 듯 한숨을 내쉰 운이 내손을 꾹 쥐어 치우더니 다시 자신이 단추를 끌렀다. 순식간에 벗겨져 나가는 붉게 물든 셔츠를 멍하니 보다가 몸에 닿는 따뜻한 온기에 놀라 몸을 움츠렸다. 내려 보자 어느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따뜻하게 적신 수건으로 지저분하게 피와 먼지가 엉겨 붙은 내 상체를 닦아내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왠지 그가 하는 대로 두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입을 닫았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내 몸을 닦아내고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 무뚝뚝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표정이었지만 그의 손길에는 말할 수 없이 따뜻한 배려가 있었다. 검붉게 말라붙었던 핏자국이 하나도 남지 않게 처리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곤 곧 돌아와 내게 반팔 티셔츠를 내밀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받아 옷을 꿰어 입었다. 그사이 구급함과 수건을 치우고는 그가 돌아왔다. 그의 체취가 배어있는 셔츠끄트머리를 잡고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바로 앞에 서있는 그의 얼굴을 보기에 힘들어서 나는 그의 허리께를 보며 말했다.
“너네 집에 오려는데, 갑자기 달려들어서… 싸우려고 싸운 게 아니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도 순간적으로 내가 왜 변명을 해야 하는 지 의아해졌지만 내 입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쏟아냈다.
“적당히 하고 가려고 했는데 칼을 들이미는 바람에 좀……. …?! 운아?”
한참 말을 고르며 말하는 중 그가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덕분에 나는 그의 배에 얼굴이 묻혀버렸다. 나를 안은 그가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더니 천천히 쓰다듬었다. 얼굴에 와 닿는 그의 단단한 배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머리를 쓸어주는 그의 다정함에 나도 모르게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부볐다.
“재인아”
“…으응?”
“다신 그러지마”
“응…?”
“싸우지 마”
“……아”
“다치지 마”
“……”
“응?”
“응…”
난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옷이 내 움직임에 구겨졌지만 나도 그도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곧 그가 떨어졌고 나도 팔을 풀었다. 다시 앞에 한쪽무릎을 꿇은 그가 한 번 더 확인하려는 듯 내 상처를 둘러보았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약속해줘”
“뭘?”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싸우지 않는다고. 싸움을 걸어와도 마주 싸우지 않는다고”
“……”
“차라리 도망쳐”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운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면서 자신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증명했다. 한참을 서로 얼굴만 보고 있던 우리 중에서 먼저 진 것은 나였다. 난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정리하려고 했다. 돈을 벌기위해 시작했던 주먹질이었고, 고등학교 3학년인 지금은 슬슬 이것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코 묻은 돈을 모아 살 것도 아니고. 또 대학까지 가겠다고 한 마당에 동네깡패마냥 살고 싶지도 않았다.
나 스스로 다짐했었다. 경찰대에 가기로. 운과 함께 꿈을 이야기 했던 그날, 꿈이 아닌 현실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던 그날. 그러니까 철없는 시절의 주먹다짐으로 쌓았던 권력은 버릴 때가 되었다.
“알았어. 이제 안 싸워”
내 말을 들은 운이 활짝 웃음 지었다. 그의 집에 와서 처음 보는 그의 밝은 표정이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지만 나는 생각해둔 말을 마저 하기위해서 억지로 표정을 굳혔다.
“다만, 딱 한번만 봐줘”
“왜?”
“정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
“제대로 안하면 오늘 같은 일이 계속 생길거야. 그러니까 완전히 끝낼 수 있게 해줘”
여럿이서 몰려다니는 걸 싫어해서 딱히 패거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따르는 녀석들은 많았다. 중학교 때부터 근방에서 맨몸으로 덤비는 놈들을 전부 때려눕혔기에, 어떤 이에게는 구제불능의 양아치일지는 몰라도 주먹 좀 쓴다는 것들 사이에서는 이름값이 좀 된다. 그 밑으로 모여든 녀석들이 만만치 않은 숫자였던 것이다. 물론 최근에 내가 ‘모범생’흉내를 낸다는 것 때문에 몇몇은 알아서 등을 돌린 듯도 했지만 남은인원수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그들도 정리하고, 어제처럼 포기를 모르고 덤비는 것들도 정리를 하고, 대충 괜찮은 놈이 있으면 인계도 해줘야 했다. 내가 무책임하게 혼자 발을 뺀다면 그들 사이에서 또 정신없이 피 터지는 싸움을 해댈 테니.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건 내가 없더라도 함부로 덤비지 못하게 완전히 밟아놓는 것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내가 완전히 관계를 끊어내도 내게 싸움을 걸지도 않을 테고…
“좋아. 단-”
“음?”
“나도 간다”
“…뭐?”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이 내 옆에 털썩 앉으면서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말에 내가 멍하니 쳐다보자 그것엔 아랑곳 않고 편하게 소파에 몸을 기댄다.
“걱정 마. 싸움 잘 해. 나 단수도 꽤 높아. 검도, 유도, 태권도, 합기도. 전부 다하면 8단”
“…하아?”
“내가 공부만 하는 것 같지?”
나는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못한 채로 새삼 녀석의 몸을 살폈다. 나보다 반 뼘 정도 큰 키, 그리고 잘 잡힌 골격.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그러고 보면 공부하는 녀석치곤 몸이 꽤나 단단했었다. 그의 어깨부터 천천히 눈으로 훑어 내리는데 그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너무 뜨거운 눈길로 쳐다보는 거 아니야? 아예 벗어서 보여줄까?”
씨익 웃으며 말하는 녀석의 눈에는 장난이 한 가득이었지만, 나는 정말로 진지하게 그를 마주봤다.
“어? 정말? 진짜 벗어?”
그러자 되려 당황한 녀석이 내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안 벗어도 대충 보여”
“……. 그거 좀 위험한 능력 아니야?”
“뭐?”
“아니야”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냥 평범한 체격의 남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 매일같이 공부하느라 바빴을 텐데 언제 이렇게 운동까지 했을까. 도합 8단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아 더 궁금했다. 내 의문을 담은 시선에 그가 답했다.
“그냥…뭐, 오히려 대학가면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사법고시 준비하려면. 그래서 미리미리 했어. 그리고 성장기에는 하는 대로 근육도 붙고 골격도 커지니까 오히려 좋았지.”
“그럼 이것도…”
“응. 나중에 검사 되서도 현장에 가게 되면 몸 사리고 싶지 않아서. 짐이 되지 않으려면 미리미리 몸을 단련해둬야 하지 않겠어? 몸으로 뛰는 걸 경찰들만 하란 법은 없잖아. 뭐… 그래서?”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감탄했다. 물론 운동이란 것이 안하는 것보단 훨씬 좋은 것이긴 하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서 꾸준히 해주는 게 좋다. 하지만 이렇게 장기적으로 미래를 보고 몸을 단련하는 것은, 결심은 쉬울지 몰라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단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처음에 너 만났을 때도 여유만 있었으면 책 같은 거 던지지 않았을 거야. 그것보단 주먹이 낫지. 다만 유단자는 함부로 일반인을 때리면 안되는 게 있긴 한데…”
“그럼 날 따라올 필요 없잖아”
날 도울 수 없는 게 아니냐는 말에 그가 씨익 웃었다.
“우리만 입 다물면 누가 나인 줄 알겠어. 그치?”
장난을 치기 직전의 개구쟁이의 얼굴을 한 그는 싸움판에 끼어들려는 것치고는 너무나 천진난만해보여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네가, 나는 그립다.
2011년 2월.
사건이후 나는 혹시 모를 감염의 가능성에 대비해 병원에 호송되었고, 검사결과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상처역시 뼈나 신경이 상한 것은 아니어서 무리하게 팔을 쓰지 않으면 충분히 회복가능 한 외상이었다.
가해자였던 놈들은 독방에 갇힌 후로 몇 번 외부인과 접촉하는 듯하더니 교도소에 송치되었다고 했다. 들어보니 진행 중인 재판을 포기했다고 한다. 분명 놈들도 조직의 윗선을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쓰고 들어온 것일 테고, 나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 한 이상 조직의 뒷배를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뭐, 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그 정도 놈들은 금방 칼 받이로 짧게 명이 끝나기 마련이긴 하지만.
덕분에 이번일로 말미암아 자유 시간에 대한 감시와 감독이 엄격해졌고, 화장실과 같은 밀폐된 공간에도 모두 교도관들이 따라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관리 소홀이라구요. 이거 구치소 고소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재판은 3주가 남았고 변호사와의 면담은 일주일이란 시간이 더 있었지만, 일이 터지고 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이 찾아왔다. 유성민 변호사와 진 운.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이재인씨 같은 경우는 조직의 간부였기 때문에 감시 1순위이기도 하지만 보호1순위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교도소도 아니고 재판이 진행 중인데”
유 변호사의 시선이 붕대를 감은 내 팔에 와 닿았다. 그 눈 한가득 걱정이 들어있어서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운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처음 날 보고 황당하다는 듯 한마디를 던지더니 이후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이 화가 난 듯싶기도 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재판에 유리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재인씨 제 말 듣고 있어요?”
“……”
“아…”
유 변호사가 눈을 마주친 채로 미동도 없이 서로를 보고 있는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씩- 웃었다. 왠지 꺼림칙한 표정에 내가 운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그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뭐, 오늘은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얘기를 나눠볼까 했지만… 약속했던 것이 다음 주였으니 그때 보도록 하죠. 아아, 진 검은 좀 더 있어. 나 먼저 갈게”
“……”
“밖은 제가 잘 이야기 해둘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다음 주에 뵙죠. 이재인씨”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따라 일어서자 그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섰다.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나는 탁-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옆에 온 것인지 가까이 다가온 운이 내 손목을 잡아 팔을 들어올렸다.
“…아파?”
“……. 이제 괜찮아”
지난 시간동안 흘린 피와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생각해면 정말 별것 아닌 것이었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횟수도 열손가락에 차고 넘칠 정도다. 하지만…
붕대에 감겨 보이지도 않는 상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운을 보면서 그런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왠지 나보다 그가 더 아파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정말이야”
“……”
닿을 듯 말듯하게 오가던 손길이 거두어졌다. 하지만 이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조금 내려가더니 내 손을 잡아왔다. 거친 일을 오래 해온 덕에 굳은살이 박힌 내 손은 치렛말로도 예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운의 행동은 마치 여성의 손을 만지는 듯 조심스러웠다. 가만히 보고 있던 나는 문득 떠오른 옛 생각에 입을 열었다.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 했었는데. 미안”
“……. 기억… 하고 있었어?”
“뭐… 이미 오래전에 깨버린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나는 더 네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난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으니까.
가만히 보고 있던 운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응?”
“다시 약속하자”
“뭐…?”
“다치지 않는 약속.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 다시 하자 재인아”
말없이 보는 시선 속에서 운이 잡고 있던 손을 꾹 쥐어왔다. 나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보다가 밖으로 터지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내게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비록 지금 3심이란 재판이 남아있다고 해도 엄연히 사형수인데. 다치지 말라니…
“그리고…”
“……?”
“죽지 않겠다고 약속해…”
“……!”
“죽으려 하지 않겠다고… 살려고 노력하겠다고… 약속해.”
“……”
“약속해줘 제발…”
“진 운…”
운이 잡은 손 너머로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 덩달아 처음 재회하던 날 가로막힌 플라스틱 창을 두드리며 소리치던 네가 떠올랐다. 나를 찾았다던, 지난 시간동안 나를 쭉 찾아 헤맸다던 너의 그 말들. 가슴을 두드리던 너의 격정에 차있던 목소리. 그것들이 지금 너의 애원과 겹쳐 생소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그 불편함에 나는 조급하지 않게, 하지만 조금 매정하게 손을 뿌리쳤다.
“난… 유 변호사랑 약속했듯이, 진술은 할 거야. 하지만… 거기까지야. 그이상은 하고 싶지도, 할 필요도 없으니까”
“재인아”
“그거 알아? 난 말야…”
“……”
“1심에서 처음 사형선고를 받았던 그 순간- 해방감을 느꼈어. 마지못해 살아가던 인생, 이렇게 끝난다고. 드디어 끝낸다고. 더럽지만, 편안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드디어 끝낼 수 있다고 생각 했어”
“이재인”
“내게 살라고? 살기위해 발버둥 치라고? 하하. 넌 나한테 그게 어떤 말인지… 모를 거야”
세상의 어둠이란 어둠은 모두 나의 등에 지고 있었다. 태양같이 빛나던 단 하나와 꿈을 내버린 그 순간부터 나는 천천히 몸이 잠겨드는 늪에 서있었다. 차라리 어서 빨리 목숨이 끊어져버리길 원하게 되는 순간순간들이 지난 10여년의 전부였다. 숨통을 죄어오는 더러움과 죄들 속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내가 떳떳치 못한 일을 한다는 자괴감과 최소한의 양심마저 사라지는 것이었다.
“내가… 있잖아. 네게 내가 남아있잖아…”
운이 안타까움을 한껏 담아서 내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는 나는, 그 사이 견고한 벽을 쌓아올렸고 더 이상 흘러나올 감정도, 흘러들어올 감정도 없었다. 그것은 내가 14년이나 공들였던 것이었으므로.
“이만 돌아가. 할 말 끝난 것 같으니”
“재인아”
“그리고 검사가 자꾸 들락거리는 거 보기 안 좋아. 다음부턴 그냥 유 변호사만 보내”
“재인아!!”
돌아서는 나의 어깨를 운이 잡았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잠시 가만히 있던 운이 등 뒤로 다가왔다. 그 상태로 운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울린다.
“난 포기하지 않아”
“……”
“네가 모두 잃어버린 희망, 살아갈 힘, 포기했던 꿈. 전부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재인아”
“……”
“또 올게”
그리곤 손을 떼고 미련 없이 문을 열고 나섰다. 닫힌 문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른 나도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끼익- 이음새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린다.
문 너머에는 늦겨울 정오의 따스한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슬슬 날씨가 따뜻해지는데 오늘은 비가 내리네요
*순살,, 連理枝, 효나★, 하와이갑부, hideri, 동글태양이님 댓글감사합니다~
+ 추천해주신 분들도 정말정말 싸랑해요
*정말 평일은 바빠서 기절할것 같아요. 할일이 너무 많아서 집에 들어와 있는 시간도 얼마 안된답니다 ㅜㅜ
그래서 아마 매주 금,토,일 중에 하루, 혹은 이틀씩 연재가 될거고
일주일에 한번 올리게 될때는 최대한 분량을 많이 빼는 쪽으로 할게요.
*쓰고있는 부분도 중반부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완결까지 걱정이 큽니다 흑흑
끝까지 함께 달려주세요 대댓글은 달아드리지 못하고있지만 요즘엔 스맛~트한 세상이라 댓글이 달릴때마다
알림이 오니까 진짜 기분 좋거든요 !! 띵동! 하면서 댓글이 달렸다는 알림이 올때의 기분이란...
*3월이 끝났습니다. 시간 참 빠르네요...
첫댓글 제가 댓글 처음이에요? 이런 행운이..^^
글 정말 끝까지 잘 읽을겁니다..그러니 걱정 마시고..재미나게 써 주셔요..
기다림은 언제나 설레이면서도 두근거리면서도 행복합니다..*^^*
재밌어요~ 작가님힘내세요^^~
비 조금 내리고 엄청 바람이 세지고 있어요. 내일 기온이 내려가 반짝 추위 온데요. 감기 조심하세요.
포기하지 않고 재인이를 기다려주는 운이가 너무 좋아요. 내것 할 수 없나...
매일 확인하러 왔는데 이제 주말쯤만 오면 되는건가봐요. 다음편도 기대하면서 일주일 기다릴게요.
잘 읽었습니다.
율님 정말 바쁘신가봐요.
이러다 완결 안 지어주시고 병나면 어케...
운이 품었던 감정(설마 제가 놓친 건 아니겠죠?)이 뭘까... 궁금해지는군요.
대충 짐작은 가지만, 14년을 공을 들일 감정 말이죠.
잘읽었습니다.!!
재미있게봤습니다~ 다음편도기대할게요^^!
이제 들어와서봤어요~ㅠㅜ 너무 좋다~6편~^^
얼른 둘사이가 좋아지면 좋겠어요~^^
자주 자주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