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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큰절 앞에는 항상 절에서 법회(法會, Buddhist ceremony [service])를 하는 날이면, 아침 일찍 절 입구에 초라한 거지 한 사람이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Once upon a time, in front of a big temple, there was always a Buddhist temple, Early in the morning, a humble beggar was begging at the entrance to the temple.)
그 거지는 매일 절을 찾아 들어가는 신 도(信徒, Shintoism)들을 향하여 한푼만 보태달라고 사정을 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The beggar asked for a penny for the believers who visited the temple every day, but no one looked at him.)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고 어느날, 그 절에서는 관음전 낙성식(觀音殿 落成式, Avalokitesvara Hall Nakseongsik)이 있었고, 그 날은 새로운 주지스님(住持僧, the chief priest)이 소임을 받고 그 절로 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After such a long time, one day, there was a ceremony for the completion of Gwaneumjeon Hall in the temple, On that day, rumors spread that a new chief monk would come to the temple after being commissioned.)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새로운 주지스님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다.(However, no one knew about the new chief priest.)
이윽고, 낙성식 겸 주지 스님이 부임 하는 날, 항상 절 앞에서 구걸을 하던 거지가 법당(法堂, a Buddhist temple)안으로 들어서자, 나가라고, 오늘은 큰 행사(行事, event)가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내 쫓는 것이었다. (Soon, on the day of Nakseongsik and chief monk's appointment, a beggar who always begged in front of the temple entered the hall, Let's get out, there's a big event today, and I was chasing it in unison.)
그러자, 거지는 관음전(觀音殿, Gwaneumjeon Hall) 앞 땅바닥에 주저 앉아 계속 한 푼만 보태 달라고 구걸했다.(Then, the beggar sat down on the ground in front of Gwaneumjeon Hall and begged for a penny.)
사람들은 도와주기는 커녕 자리를 슬금슬금 옮기기도 하고, 때론 화를 내며 나가라고 고함치는 사람도 있었다. (Rather than helping, people moved their seats slowly, and sometimes angry and shouted to leave.)
이윽고 행사가 진행 되는데 새로 오신다 는 주지스님은 모습이 보이지 않고, 많은 신도들이 술렁이기 시작을 하자, 거지 차림의 그 남자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앞으로 나가더니 법석에 앉는 것이었다.(Eventually, the priest was not seen coming, and as many believers began to stir, The beggar-clad man shuffled through the crowd and made a fuss.)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누가 저 사람 좀 끌어 내라고" 고함치며 장내가 아수랑장이 되자, 거지가 법석에 앉아
요지부동(搖之不動, don't know what to do)의 자세로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한마디를 던진다.(People shouted, "Somebody bring him out!" and the hall became a mess, A beggar sits in a fuss and says a word to many people in a posture of agitation.)
"이 중에 참 불자 누구인가? 이 중에 바른 눈을 가진 자 누구인가? 이 중에 보시 바리밀(布施波羅密, Bosh Barimill)을 하는 자 누구인가? 바른 눈을 가진 자 누구인가? 이 중에 보시 바리밀을 하는 자 누구인가? 이 중에 육바라밀(六波羅密①을 배운 자 누구인가?" ("Which one of them is Chambul? Who has the right eyes? Who is the one who does the boshiba remil? Who has the right eyes? Who is the one who does the boshiba remil? Who learned how to make yukbaramil?)
그리고 말을 잇는다. "내가 이 절에 소임을 맡은 새로운 주지올시다. 여러분 들이 과연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는 가?(And he continues."This is the new state that I'm responsible for in this temple. Can I say that you are Buddha's disciples?)
여러분들은 차림새로 사람을 판단하면 서 참사람 보는 지혜(智慧/知慧, wisdom)의 눈도 못 뜨고 무슨 부처님전에 공양(供養, providing with food:부처 앞에 음식물이나 재물 등을 바침.)을 올리면서 복(福, a lucky charm)을 구한다는 말인가?(Are you saying that you can't open your eyes to see the true people while judging people in your clothes and save luck by offering offerings to some Buddha?)
부처님과 거래를 하러 오는 사람이지. 어떻게 불공(佛供, Buddhist)을 드리러 오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부처님께 절하면서 뭐, 뭐 잘 되게나 해 달라고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 거래를 하자는 행이다.(He's the one who comes to do business with Buddha. How can you say someone who comes to offer a Buddhist service? If you bow to Buddha and ask him to do something well, he will make a deal with him.)
내가 오늘 찾아와 기도(祈禱, prayer) 했으니 내가 소원(所願, wish)하는 것을 들어 달라고, 부처님과 거래(去來, transaction)를 하려는 자가 어찌 불제자(佛弟子, a Buddhist priest)가 될 수 있겠는가?"(How can a man who wants to make a deal with a Buddha be a disciple of Buddha, asking me to listen to what I wish for since I came and prayed today?)
"나는 거의 달포 가까이 이 절 일주문 (一柱門, One door, one by one:절 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 첫번째의 문.) 앞에서 여러분들에게 거지 행색(行色, demeanor)을 하고 구걸을 해 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 고 돈 한 푼 기꺼이 내 놓은 사람이 있었던가?("I've been begging and begging you in front of the order almost every day, but no one has said a warm word, And was there anyone willing to pay a dime?)
복 짓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부처님전에 찾아와, 잘 되게만 해 달라고 하니 그게 거래가 아니고 무엇인가?(If you come to the Buddha's house without any work and ask him to do well, what is it not a transaction?)
부처님께서는 그런 조건부 거래하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살아오면서 전생(前生, a previous existence) 부터 금생(今生, this life)에 이르기까지 지은, 알게 모르게 쌓인 업보(業報, karma)②를 참회하라 하셨거늘,(The Buddha is not asking you to make such a conditional transaction, He told me to repent for my unknowingly accumulated karma from the past to the present)
그 일은 내 팽개치고 그냥 잘 되게만 해 달라고 해서는 불자가 아니다" 라고 하자, 어떤 이는 울고, 어떤 이는 가슴을 치고, 어떤 이는 법당을 살며시 빠져 나와 줄행랑을 치는 것이었다. (Let's say, "If you just let it go, it's not Buddhahood." Some people cry, Some were beating their chests, and some were sneaking out of the hall and running away.)
나 자신도 외모(外貌, appearance)와 조건으로 사람의 인격(人格, personality) 을 나누고 이기적(利己的, selfish)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I myself share people's personalities and live a selfish life with my appearance and conditions.)
오늘도 한 번쯤 뒤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의미있는 좋은하루되세요.(I hope you have a time to look back and have a meaningful day..)
= 華谷·孝菴의 좋은글 중에서 =
* 주석(註釋)
① 육바라밀(六波羅密)
o 정의
보살의 여섯 가지 수행덕목인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바라밀을 의미하는 불교교리.
o 내용
우리 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보살의 실천행이다. 생사의 고해를 건너 이상경인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실천수행법인 육바라밀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등의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의 인격완성을 위하여서는 원시불교의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으로 충분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보살의 수행법으로서 팔정도를 채택하지 않고 육바라밀이라는 독자적인 수행법을 설하였다. 그것은 팔정도가 자기완성을 위한 항목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타(利他)를 위하여는 충분하지 않으며, 보시와 인욕과 같은 대사회적인 항목을 포함하고 있는 육바라밀이 보살의 수행법으로 알맞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육바라밀의 수행법에서 보시를 제일 먼저 둔 까닭도 사회의 모든 사람이 상호협조적인 보시자선을 행하는 것이 대승불교로서는 가장 필요한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육바라밀에는 팔정도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이외에 팔정도에 없는 보시와 인욕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두 가지만은 대사회적인 것으로서 이타적인 대승불교의 특질을 나타내고 있다.
[보시]는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의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재시는 자비심으로서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물건을 주는 것이고, 법시는 다른 사람에게 부처의 법을 말하여 선근(善根)을 자라게 하는 것이며, 무외시는 스스로 계를 지켜 남을 침해하지 않고 다른 이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 주는 것이다.
[지계]는 부처가 제자들의 비도덕적인 행위를 막기 위하여 설정해 놓은 법규를 지키고 범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여, 가지가지 선을 실천하고 모든 중생을 살찌게 하는 행위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인욕]은 온갖 모욕과 번뇌를 참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안주하는 것으로,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인 성나고 언짢은 마음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이 인욕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복인(伏忍)으로,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먼저 성나는 그 마음을 조복(調伏)하여 억누르는 것이다. 그러나 역경만 참아서는 안 되며, 자기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순경(順境)도 참아야 한다. 그 이유는, 역경을 참지 못하면 분노가 치밀어서 투쟁하기 쉽고, 순경을 참지 못하면 유혹에 빠져서 몸과 마음을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둘째 유순인(柔順忍)으로, 사람이 참기를 많이 하면 저절로 조복이 되어서 역경이나 순경을 만날지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셋째 무생인(無生忍)으로, 참고 견디어 보살의 지위에 오른 사람의 인욕행이다. 인생이 무상하며 세상이 허황함을 깨닫고 일체만법(一切萬法)이 인연으로 모였다가 인연으로 흩어지는 진리를 깨닫고 보면 별로 성낼 것도 없고 참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넷째 적멸인(寂滅忍)으로, 이것은 부처의 지위에 있어서의 인욕행이다. 생사고해에 뛰어나서 본래부터 적멸한 열반의 경지에 서서 볼 때 한 물건도 없는 경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인욕행을 닦음이 아니라, 본래부터 한 생각도 일으킴이 없는 곳에 참된 인욕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진]은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 마음으로 항상 부지런히 닦아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다는 생각과 닦을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 정(精)은 순일무잡(純一無雜)을 의미하고 진(進)은 용맹무퇴를 말한다. 이 정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몸과 입으로써 부지런히 착한 일을 닦고 배우며 실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뜻을 항상 진리에 머무르게 하여 모든 생각이 착한 진리를 떠나지 않게 정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밖에도 사정진(事精進)과 이정진(理精進)이 있는데, 사정진은 세간사와 출세간사를 막론하고 그것을 한번 이루려고 결심하였으면 그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정진은 악한 생각을 없애고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여러 사람이 이롭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거든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기어이 성취하도록 노력, 정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정]은 수행인이 반야의 지혜를 얻고 성불하기 위하여 마음을 닦는 것이며, 생각을 쉬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생활이 불만과 고통으로 가득차게 되는 까닭은 잡다한 생각을 쉬지 못하고 어리석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정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공부로서 망념과 사념과 허영심과 분별심을 버리게 한다.
[반야]는 지혜라고 번역한다. 모든 사물이나 이치를 밝게 꿰뚫어보는 깊은 슬기로서, 지식과 다른 점은 지식이 분별지(分別智)인 데 반하여 지혜는 무분별지이다. 보살이 피안에 이르기 위하여 수행하는 육바라밀 중 마지막의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의 어머니라 하며, 다른 5바라밀을 형성하는 바탕이 된다. 반야는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① 문자반야(文字般若)는 부처님이 설한 경(經)·율(律)·논(論)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고, ② 관조반야(觀照般若)는 경·율·논의 문자반야를 통하여 진리를 알아내고 진리에 의하여 수행하는 것이며, ③ 실상반야(實相般若)는 부처가 체득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상의 육바라밀을 보살이 무량한 세월 동안 수행함으로써 성불하게 되는데, 뒤에 육바라밀에 네 가지 바라밀을 첨가하여 십바라밀을 갖추게 되었다.
② 업보(業報, karma)
행위[業, karma]의 결과(보報, vipāka)로서 받는 것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과보.
[개설(槪說)]
업보는 깨달은 존재인 붓다와 윤회하는 존재인 중생의 차이, 중생들의 윤회하는 영역과 인간사회의 사회적·경제적 차이가 생기는 이유에 대한 불교적 설명 방식이다. 또 불교의 근본 주장인 연기(緣起)를 도덕적 차원에서 구체화한 이론이라 할 수 있으며, 민간에서는 이른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포괄적 도덕 법칙으로 이해되고 있다.
[내용(內容)]
업보는 크게 총론과 각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실론』에 따르면 총론은 선한[善] 행위와 선하지 못한[不善] 행위는 과보를 낳지만 선악미정인[無記] 행위는 과보를 동반하지 않는다. 또 선한 행위는 좋아하는 과보[愛報]를 낳고 선하지 못한 행위는 싫어하는 과보[不愛報]를 낳는다는, 행위와 그 결과의 대응 법칙이다. 각론은 이것을 중생과 인간 사회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인데, 『구사론』에 따르면 인업(引業)이 윤회하는 중생 중 어떤 형태로 태어나는지 전반적인 과보[總報]를 낳고, 만업(滿業)이 그 중생의 외모·부귀·수명 등의 구체적 과보[別報]를 낳는다고 한다.
또 『구사론』의 사업(四業)은 총론을 보다 세분화하여 중생과 인간사회의 차이뿐만 아니라 붓다와 중생의 차이까지 포괄하여 그 상응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즉 첫째, 흑흑업(黑黑業)은 악한 과보를 낳는 악한 행위이며, 둘째, 백백업(白白業)은 선한 과보를 낳는 선한 행위이며, 셋째, 흑백업(黑白業)은 선악이 혼재된 과보를 낳는 선악이 혼재된 행위이며, 넷째, 불흑불백업(不黑不白業)은 선악을 벗어난 열반(涅槃)을 낳는 무루업(無漏業)을 의미한다.
[의의와 평가(意義와 評價)]
인과응보로 불리는 업보 사상은 한국인의 윤리의식과 내세관에 깊은 영향을 끼쳐 현재의 삶의 의미 발견과 미래를 위한 윤리적 노력의 철학적 바탕이 되었다. 예컨대 한국사찰 예불을 구성하는 「이산선사발원문(怡山禪師發願文)」,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 등의 설화, 「회심곡(回心曲)」 같은 불교가사 등에 잘 드러나 있다. <끝>
첫댓글 성불 하십시요~拜上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