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開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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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 남한의 패자
(밀리지 말고 쓰면 좀 좋아?)
당시 한반도 남부의 정세를 전하는 사서를 살펴보면 완전히 막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지간히 엉망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까지 축적된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금석문에 비추어 볼 때, 삼국사기의 누락스럽게 부실한 기록과 일본서기의 절망스럽게 모순된 기록은 저도 모르게 안구에 습기가 솟고 분노가 치밀게 만드니 이미 어지간한 볼장은 다 본 셈이라, 사실 이것이 정상인의 반응이다.
이처럼 고대인 여러분이 일기를 삼백년이나 밀려서 쓴 덕분에 오늘날 이를 바탕으로 그 시대의 모습을 온전히 복원하기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래도 이 밀려 쓴 일기가 다른 사람 일기를 가져다 쓴 부분이 많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전하는 각종 사서와 금석문과 고고학을 멀티로 오가며 다각적인 비교 분석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원전에 비교적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므로 따라서 당대의 사실을 어느 정도 추리해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상기 지도는 연출된 것으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당시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마한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백제가 가장 큰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건국설화에 따르면 백제는 본래 부여의 지파로 고구려와 동성이고 압록강 유역에 살다가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밀려났다고도 하지만, 제아무리 가족이라도 안 보면 남이고 가까운 남이 먼 가족보다 낫다고,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당초 있었는지도 모를 친밀감은 날로 희미해져갔다. 더욱이 중원의 풍지풍파에도 굳게 제 자리를 지켜온 낙랑군과 대방군이 남북으로 구축된 두 나라 사이의 완충역할을 수행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직접 부닥치게 될 일도 없었는데, 고구려 미천왕이 바로 그 낙랑군과 대방군을 사실상 몰아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고구려가 대방을 정벌하자, 대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전에 왕이 대방왕녀 보과를 취하여 부인으로 삼은고로 가로되 "대방은 내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하였다. 고구려가 원망하므로 왕이 그 침략을 걱정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삼국사기』 24권 백제본기 2
물론 모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대방군을 몰아내고 다시 그 땅을 갈라먹는 문제로 고구려와 다투기 시작한다는 설정은 전적으로 허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실제로 고구려와 백제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상당히 어색하게 전개되었고, 인접한 두 나라 사이에 언젠가 무력 충돌이 벌어질 것은 사실상 불을 보듯 뻔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비싼 시청료 내고 보는데, 기왕이면 제대로 좀 만듭시다)
하지만 대방군이 밀려난 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직접적인 전쟁이 발발하지 않은 것은 두 나라가 각기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배후에 자리한 연나라의 압박과 함께 남진의 발판인 낙랑과 대방을 완전히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백제도 고이왕에서 그 자손으로 상속되어 이어지던 왕위가 이른바 민간 출신의 비류왕에게로 넘어가면서 내부의 불안이 고조되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비류왕 사후 백제의 왕위가 다시 고이왕의 증손자인 계왕에게로 넘어갔다가, 3년 만에 비류왕의 차남인 근초고왕에게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 행간에 숨어 있는 치열한 왕위 쟁탈전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이후 재위 중반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 대외적으로 잠잠하던 근초고왕은 아마 내부의 안정에 주력한 듯하고, 364년 갑자년을 기점으로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가는데, 비로소 외부로 나타나게 된 그 힘은 공히 삼한 전체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근초고왕이 보낸 사신은 가야와 신라를 돌며 한반도 남부의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각 소국들을 백제의 영향력 아래 끌어들임으로서 한반도 남부에 백제의 패권을 정립하였고, 그 발길은 심지어 바다 건너 왜국에까지 이르러 그 결과 369년 내지는 368년에 가야 지방의 한 나라인 탁순국에서 각국의 대표가 모여 회맹함으로서 백제의 패권은 완성되었다.
이러한 근초고왕의 패업은 당시 각지의 소국 사회가 분점하고 있던 한반도의 정치 지형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으며, 한반도에 소위 천하국가의 출현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어린 백성이 알아듣자 할배이셔도 마침내 기억을 시러하지 못할노니, 쉽게 더 쉽게 말하자면 백제가 드디어 자기 동네에서 좀 한다는 나랏님들 모아서 조직을 만들고 나와바리 관리에 전국구로 놀기 시작했다는 말씀 정도가 되시겠다.
(근초고왕이 패업을 이루다)
그러나 마치 춘추오패의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백제 중심의 국제질서는 명백한 한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직 백제의 국가적 역량이 각 소국의 영토를 집어삼켜 한반도 중남부를 하나로 아우를 만큼 축적되지도 못하였고, 그렇다고 백제가 군사적으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 것은 아니어서 구성원의 이탈도 응징 이외에 강제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이는 곧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었고, 이에 따라 근초고왕 사후 백제 중심의 패권질서는 파탄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 이야기는 일단 뒤로 미루도록 하자.
근초고왕 생전에 백제 중심의 패권질서를 위협한 것은 고구려의 도전이었다. 지난 화에서 연나라에게 처발리고 간신히 한숨 돌린 고국원왕은 이 즈음에 들어서 그 피해를 어느 정도 회복했고, 이제는 연나라가 서서히 무너질 조짐까지 보이자 드디어 나날이 커지는 백제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나섰다. 이에 고국원왕은 2만 군대를 이끌고 직접 치양으로 내려와 분탕질을 일삼으며 무력 시위를 감행하였고, 새로 정복한 남방 영토를 시찰하느라 타이트한 스케줄에 쫓기던 근초고왕은 자기 대신 옆에 있던 태자 수에게 일단의 군대를 주어 들려보냈다.
(대망의 다크호스 태자)
사실 태자를 보낸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더욱이 왕위 쟁탈전을 겪으며 즉위해 왕위 쟁탈전을 마무리지은 근초고왕이니, 그에게 있어 태자가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중대한 것일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그런데도 굳이 태자를 보낸 것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역시 고구려를 상대로 한 전쟁은 소국들과 투닥거리던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고, 나아가 태자는 전쟁에서 세운 전공으로 차기 대권에 확고히 자리를 굳히게 되어 할아버지 대부터 시작된 고질적인 왕위 쟁탈전을 완전히 끝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태자는 근초고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왕이 태자를 보내 병사와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급히 쳐서 깨뜨렸다. 5천여 급을 얻었는데, 그 얻은 포로는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삼국사기』 24권 백제본기 2
전장에 도착해 적의 주력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백제 태자는 고구려군을 서둘러 공격했다. 고구려의 2만 대군에 비해 백제군은 고작 수천 정도의 기동대로 보이지만, 고구려군은 민가를 약탈하느라 전열이 흐트러져 있었고 지름길로 도착한 백제군의 갑작스러운 집중 공격으로 주력이 먼저 무너지자 그마저도 급속히 붕괴되었다. 달아나는 고구려군을 수곡성 이북까지 추격한 태자는 그곳에 돌을 쌓아 표지를 만들고 돌아왔는데, 대개 이 사건을 기점으로 치양에서 수곡성에 이르는 대방 영토 대부분이 백제에 편입되었다고 본다.
(숫자가 다는 아니라는 진리)
다음해 절치부심하던 고국원왕에게 연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로서 배후의 걱정이 사라진 고구려는 마음껏 백제 공략에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고, 고국원왕은 재차 군사를 일으켜 백제로 진군했지만 이번에는 백제 측에서도 근초고왕이 직접 전장으로 나와 매복 작전으로 고구려군을 패퇴시키는 바람에 고국원왕은 패하를 넘지 못하고 평양성으로 쫓기듯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겨울이 되자, 근초고왕과 태자 수가 이끄는 백제의 3만 대군이 북으로 치고 올라와 평양성을 에워쌌다.
371년 10월 23일, 졸지에 평양성 안에 갇힌 고국원왕은 백제군의 공세 속에서 재수 없게 화살을 맞아 밥숟갈을 놓아버리고 말았지만, 근초고왕도 결국 왕의 목숨으로 지켜진 평양성을 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근초고왕은 이 사건으로 절정을 맞아 강남의 사마씨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영동장군 영낙랑태수로 책봉받고 국제사회의 한 축으로 당당히 입성하게 되었으며, 왕을 잃은 고구려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전면적인 재정비에 들어갔다. 이제 그 막중한 책임은 소수림왕에게로 넘어간다.
첫댓글 오~ 재밌다~ 재밌어요.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이만한 찬사도 없습니다 ㅠㅠ
근데 확실히 역사 가지고 웃기기 어려워요;
이정도면 웃기게 잘쓰셨어요 ㅋㅋ
근데 원 사료와 각주, 참고문헌 목록이 있으면 더 좋을듯요.
선구자 게볼햏께 이 영광 돌립니다? (참고문헌 목록은... 만약 다음편을 쓰게 된다면 그때를 기약할게요;)
절묘한 묘사시네요
재미있게 잘읽고 있습니다 근데 부여님께서는 드라마에 나온것처럼 백제의 왕위대툼의 원인이 온조직계인 비류계와 방계인 고이계의 다툼이라고 보시나요?근초고왕이나 고이왕에 대해서는 굉장히 논란이 분분하더군요 둘다 백제의 전기를 새로 마련한왕이고 또한 고이왕은 온조계 아닌 비류계 또는 사반왕의 외가인 진씨계 찬탈자라던지 아니면 근초고왕은 아예 북방계 유목민 정복왕이라는 갠적으로 좀 믿기힘든 설까지 있더군요
저는 온조계, 고이계, 비류계가 각기 딴 집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온조왕 이하 사반왕까지를 해씨로, 고이왕 이하 계왕까지를 우씨로, 비류왕 이하를 부여씨로 보는 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100% 믿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한쪽이 다른 쪽의 방계일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가문일수도 있으니 가능성은 열려 있지요. 그래도 같은 집안의 직계 방계든 완전히 딴 집안이든, 일단 온조계 고이계 비류계로 왕통이 교체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근데 근초고왕은 제2자라는 표현과 계왕의 3년 천하라는 주위 정황으로 보아 비류왕의 아들이 맞는 것 같습니다.)
글 잘 보고 갑니다....수고 하셨습니다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