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ngest Day (2): 양평
그런데 포병단을 어째서 ‘디바리’라고 부르지? 디바리는 무엇의 약자지? 나는 이것이 궁금하였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새까만 신병 새끼가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면서 나를 미워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반응은 내 호기심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 씩 -- “야 디바리하고 교신했냐?” -- 그 말을 쓰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 말의 어원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 때 내 앞에 육사 출신이라는 소위 두 명이 나타났다. 이들은 영내의 BOQ(Bachelor Officers’ Quarter)에 머물렀는데, 우리 부대로 전입해오자 마자, 이 부대는 병사들의 군기가 엉망이라면서 우선 보행 군기를 확립하겠다고 선포하였다. 그 두 사람으로 인해 우리들은, 식당에 갈 때건, PX(Post Exchange)에 갈 때건, 제식 훈련을 할 때처럼 팔을 높이 흔들면서 걸어야 하였고, 두 명 이상이 같이 움직일 때에는 발을 맞추어 걸어야 하였다. 그랬거나 말거나, 나는 기회를 만들어 그들에게 다가갔으며, 다가가서는 내 궁금증을 진지하게 털어놓았다. 이들이야말로 내 궁금증을 풀어줄 귀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내 질문을 다 듣지도 않고 화를 내었다. 나중에 정보과 선임하사에게서 들었는데, 디바리(D/A)는 Division Artillery(사단 포병)를 축약한 것이다. 그리고 콰리(C/A)는 Corps Artillery(군단 포병)를 축약한 것이고, 205FA의 FA는 Field Artillery(야전 포병)를 축약한 것이다.
내가 궁금해한 용어들은 그것들만이 아니었다. 지금 회상되는 것으로, 총기 수입의 ‘수입’이 있다. 나는 동료들과 더불어 충성스럽게 총기 수입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배신자처럼 딴 생각을 하였다. “수입? 영어인가? 한자말일까?” ‘마킹’도 지금 생각난다. 내무반장은 매일 저녁 점호를 취할 때가 되면 “마킹 어디 있어, 마킹”하면서 마킹을 찾았다. “총원 00명, 휴가 0명”하는 식으로 인원 현황을 적는, 비닐을 씌운 판대기가 있어서, 거기에 색연필로 그 날의 상황을 나타내는 숫자를 적어넣게 되어있었다. 나는 내무반장을 돕기 위해 마킹 혹은 색연필을 찾으면서, 또 혼자서 그 단어의 스펠링을 찾았다. 그러다 어느 날 참지 못하고, 색연필을 어째서 마킹이라고 부르는지, 그것이 영어단어인지를 내무반장에게 물었다. 내무반장은 기분을 잡친 것 같았다. 영어를 전공한 측지과의 서상병에게 나중에 들었는데, 그것은 mark(표시하다)에서 온 단어이다.
자대에 떨어져서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허리를 잘못 맞아 의무실에 입원한 우리 과 김상병에게 밥을 타다 주는 것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친해져서 나는 정비병인 김상병이 관리하는 통신 기자재 창고에 자주 놀러갔다. 거기에도 현황판 — 기자재 현황판 — 이 있었는데, 그것은 암호와 같은 영어 약어들로 뒤덮여 있었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A/S(After Sale Service)밖에 없었다. 나는 그 약어들에 대해 하나하나 물었고, 김상병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것은 무전기의 일종이고 저것은 안테나야.”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이상의 것이지 않은가? 가령 RC-292은 안테나의 일종인데, 내가 알고 싶은 것은 RC가 무엇의 약자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런 식의 문답이 몇 달간 계속되자 사람 좋은 김상병도 짜증을 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나를 기자재 창고로 부르지 않게 되었으며, 사단 통신대로 출장을 갈 때에도 나를 대동하지 않게 되었다. (RC는 Radio Communicator, 즉 무전기를 가리키지 않을까?)
사단 통신대 출장에 따라나서는 것은 아주 신나는 일이었다. 부대 바깥의 공기를 콧구멍에 집어넣는다는 것 자체가 새까만 이등병에게는 환상적인 일이지 않았겠는가? 나는 그 출장에서 충격적인 것들을 보기도 하였다. 그 중 하나는 우리 과의 선임하사들이 사단 통신대의 사병들에게 굽신굽신거리는 것이었다. 권순호중사만이 아니라 호랑이 쪼인타상사도 “김김김병장, 우우우우리 꺼 좀 먼저 고쳐줘”라고 하면서 사제 담배를 찔러넣었다. 다른 하나는 트럭 위에서 본 것이다. 사단 본부에 가까워지자 제법 번화한 거리가 나타났다. 허름한 식당도 보이고 여관과 여인숙의 간판도 보이는 어느 지점을 지날 때였다. 김상병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씨팔 년들아” 젊잖고 얌전한 김상병이 그런 상소리를 내 지르다니...... 그러나 아직 놀랄 것이 더 남아있었다. 김상병은 ‘아’자를 길게 끌었는데, 돌림노래를 할 때 그렇게 하듯이, ‘아’자가 아직 끝나기 전에 화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 씨팔 놈들아.” 트럭은 이미 몇 십미터를 달아났지만, 그 거리와 트럭의 소음을 뚫고 그 여자들의 그 소리가 똑똑하게 들려왔던 것이다. 뽀얀 먼지 뒤로, 전봇대에 기대서 있는 여자와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들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이제 개운해졌다는 듯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김상병이 말했다. “여기 지날 때는 원래 이렇게 하게 되어있는 거야.” 그래서 나도 시원하게 소리를 한번 질러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만 일이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김상병이 더 이상 나를 대리고 다니지 않기로 한 것 말이다.
중학교를 다니는 대대장의 아들에게 붙여줄 과외공부 선생을 물색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 뒤에는 ‘영어 도사’ 조이병과 영어과 출신인 측지과 서상병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인사 문제는 역시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 최종적으로 낙점을 받은 것은 유동년 이병이었다. 나보다 3개월 정도 늦게 입대한 사람인데, 울산여고에서 수학선생을 하였던 사람으로, 우리보다 5, 6년이나 위라서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유이병은 매일 저녁 점호가 끝나고 잠자리를 펴놓으면 귀대하였다. 항상 먹을 것을 들고 들어왔는데, 주로 땅콩이었다.
그러다가 봄이 왔다. 78년 4월. 우리 부대는 전방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사실, V-46이니, V-49니 하는 신형 장비가 지급된 것도 우리가 전방으로 올라가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총도 바꾸어 주었다. 양평에서는 M-1을 사용하였는데, M-16으로 교체해 준 것이다. 그런데 M은 또 뭐지? Military?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계속)
첫댓글 유운학 중령 월북 사건으로 사단 교체될 무렵 이야기네~~ 그때쯤 원통에서 서울로 출장 오다가 20사단 병사들 행군해 오는 걸 본 적이 있는데, 12사단 본부대장인 선탑자가 물어보니까 5사단과 교체중이라고 하더군~~
철로가 쇠냐? 아니면 박달나무냐? 쇠라고 해도 터지고 박달나무라고 해도 터지고..
그런 시절에 별걸 다 묻고도 멀쩡히 전역을 했으니~ ㅎㅎ
앗, 승일형. 우리가 올라갈 때 그들은 내려왔겠군. 어쩌면 같은 길로.
성택성이 모델이라니 모델이 맞겠지.
철로가 쇠지. 쇠리고 하는데 왜 얻어터져? ㅋㅋ
고참께서 철로는 박달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면 박달나무라는 겨~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고참 말 들으라는겨~ ㅎㅎ
그 당시 전방에서는 하사와 병장의 갈등이 많았었지
성택성은 단기 하사라도 병들과의 관계는 좋았을끼야
하여간 조 교수 기억력 하나는 끔찍할 정도여
수십년전 친구들 이름과 세세한것 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
기억 용량이 남 달라. 대단하셔
나는 일주일 지나면 웬만한 거는 다 잊어 버려서
밥 할때 백미와 잡곡 구분과 압력 무압력 버튼 틀려서
마눌님한테 매일 갈켜줘도 모른다며 허구 헌날 욕 먹으며 살아
중요한 거 빼고 모두 잊어벼려야
새로운 것을 넣을 수 있다는
변명과 자위로 사는데
그러면서 기껏 피타고라스의 정리 증명하는 것과
2차 방정식 근의 공식, 삼각형 합동기준 뭐 이따위 거
몇가지 기억하며 스스로 위로하며 사는데
조교수님 대단한 기억력
짝짝 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