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읽는 분들을 위하여 다시올립니다
[반도 조선사 ] 이렇게 만들어졌다.
1. 일제는 조선 삼한의 사료 20만 권을 불태웠다.
2004년은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 땅에서 전쟁을 벌인 지 1백년이 되는 해이다. 청.일전쟁(1894~1895년)의 결과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청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한국 전체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고 광산.삼림.어업.항시(港市).온천 등에서 얻은 갖가지 이권과 함께 한국의 금수출.상무역(商貿易)까지 장악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무렵 영국과 일본이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한 후 한국의 영토이었던 만주를 점령하고 러시아에 대해 철수요구를 하는 등 한국의 만주 땅을 둘러싼 국제적인 관계는 더욱 미묘하게 진행되었다. 1896년 조선 고종 재위 34년에 연호를 光武(광무)로 하고 국호를 大韓帝國(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광무 7년(1903) 4월 러시아군이 마적과 함께 한국의 땅 滿洲(만주) 국경을 넘어서 용암포(龍岩浦)를 강제 점령하자 일본은 즉각 러시아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오히려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 점령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일본측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 아래서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 중립국임을 해외에 선포하였다. 2월 6일 39도선 문제와 한국의 만주 영토문제로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고 1904년 2월 8일 여순[旅順]에서 첫 포성이 울렸다. 1904년 2월 10일 새벽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러시아 함대를 침몰시키고 서울로 입성하여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요로 공수동맹(攻守同盟)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가 체결되었다. 의정서는 6개조로서 제2,3조에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만주>영토를 보전한다고 보증되어 있으나 기타 조항은 모두가 주권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대한제국은 5월 18일자의 조칙(詔勅)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고,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할애하였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심화시켰다. 1904년 8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 사이에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을 체결함으로서 일제는 한국재정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이 시작되었다. 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려 전문 15조, 추가 약관(約款)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포츠머스회담은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에 따라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하고 결국 한국의 영토를 일본이 점령하는 월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1905년 11월 9일 일본 왕은 특명전권대사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하야시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을 을사조약(乙巳條約), 혹은 을사보호조약이라 한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토와 하야시를 통해 신협약안을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전달되었다. 이토히로부미는 하세가와 와 함께 고종을 3차례에 알현하였다. 11월 16일 정동(貞洞)의 손탁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신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17일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5시간이나 계속 강요하였으나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수십 명의 일본 헌병을 거느리고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위협하며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때 고종은 다만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하고 한규설 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閑泳綺)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었고,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모든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다. 이들을 <우리나라 만주 땅을 팔아먹었기 때문에 을사오적(乙巳五賦)이라 한다.
이토는 강제 통과된 신협약안을 궁내대신 이재극(李載克)을 통해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한 뒤 동일자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등을 중요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조인 체결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통감부는 조선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3권을 장악하여 관헌의 감독권, 병력동원권, 또한 조선의 시정 감독, 어떠한 정책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통감부는 명실공히 조선보호의 최고감독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의 국권을 탈취하여 한국의 만주 땅을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대한제국의 영토를 멋대로 조선이라 개칭하였다. 일황 칙령(勅令) 제 319호로 통감부의 이름을 고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고 통감으로 있던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조선총독부에 취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왕의 직속이며, 조선 주둔 일본 육 .해군을 통솔하여 조선의 방위를 맡으며, 모든 정무를 총할하여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해서 일본왕에게 상주, 재가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중추원(中樞院)을 두고 이를 정무총감이 의장이 되어 관장케 하고, 그 밑에 부의장(親任官대우) 1명, 고문(勅任官대우) 15명, 찬의(贊議:칙임대우) 20명, 부찬의(副贊議) 35명, 겸임의 서기관장 1명, 서기관 2명, 통역관 3명, 속전임(屬專任) 3명으로 구성하였다. 이 가운데 의장을 제외하고 한국인 도 임명하고 그 임기는 3년으로 정하였다. 각 도에도 참여관(參與官) 참사(參事)를 두어 지방장관의 자문에 응하도록 하였으나 이들은 친일인사를 우대하는 명예직에 불과하여 실권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또, 한국인은 특별 임용령에 의해서 총독부소속 관서의 문관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구성비율은 미미하고 일본관리와는 현격하게 차별되어 모든 관서의 실권은 전부 일본인이 독점하였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한국 국민을 일본화하기 위해 소위 문화정치라는 미명하에 기만적인 동화정책을 폈는데, 그 본질은 유구한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를 말살하고 세계의 인류를 구제하신 인류의 아버지 三聖(3성: 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역사를 왜곡시켜 민족정기를 단절시키는 과업을 제1 국책으로 삼았다. 즉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조선반도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항상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는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고 일본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문명이 정체된 나라로 비하하여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국책이었다. 제일 먼저 식민지 교육정책을 강요하고 우리 어문(語文)의 사용금지, 일본어 사용 강요, 일본식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이었다. 아울러 역사 왜곡의 증거가 될 만한 문화 유적물을 파괴하여 그 흔적을 없애고 혹은 신라 김유신 장군의 능을 경북 월성군 경주에 존재한 것처럼 조작하는 등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명에 준거하여 역사왜곡을 국책 제1호로 시행하였다.
일본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초대조선총독에 취임하자,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전국 서적을 색출해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 권의 사서를 수거하여 불태우고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전초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곧이어 초대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을 담당시켰습니다.
1925년 6월 일황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되면서 조직이 확대 개편되었다.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단군조선 삼한에 대한 자료의 수집방안이었다. 초기에는 강제 수색과 압수를 통해 사료를 수집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하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대여 형식으로 방법을 위장 완화했다. 그 뒤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 4천 9백 50종을 압수하여 불태웠다.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문정창씨의 저서인 군국일본조선 강점36년사는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사학자이며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의 저서 역사와 현대(1981년 4월 25일 발행)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다수 대주구 번주(藩主영주)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혀져 있다. 일제는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무려 27년 간 고조선 삼한의 고사서를 수집하여 유구한 우리나라의 역사적 흔적을 말살하고 한국역사를 왜곡하여 『조선 반도사』를 편찬하는데 그 증서로 필요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서적만 남기고 모두 다 불태웠던 것입니다.
2, 계연수 선생은 단군사상의 회복을 부르짖었다.
1909년 3월 16일 대한자강회의 李沂(이기) 선생은 계연수,김효운, 이정보 등과 함께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 일제가 말살한 단군 조선 삼한의 역사 회복을 위해 “ 단학회 ”를 조직하였다. 李沂(이기) 선생은 단학회 발기총회를 앞두고 한일합방의 국치에 비분을 참지 못하여 서울의 모 여관에서 단식 중에 7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이기 선생이 단식 끝에 운명하시자 계연수 선생이 이기 선생의 뜻을 이어 받아 2대 단학회 회장이 되었다. 1910년 10월 3일 단학회 제 2대 회장에 취임한 계연수 선생은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천의식을 마치었다. 나라를 빼앗긴 대한제국의 주체성은 상실되고 모든 백성들이 암울한 시대에 모든 백성들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특히 지식인들은 단군조선의 역사 말살에 울분을 참지 못하였다. 계연수 선생은 나라의 독립은 오로지 민족역사(민족정기)로부터 시작되고 오직 단군사상을 회복하는 것 만이 우리민족의 살길임을 직시하고 일제가 말살한 환인, 환웅, 단군 조선 삼한의 역사를 한 대 묶어 “桓檀古記(환단고기)를 편집했다. 환단고기는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4부로 나누어져있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맥(李陌)이 편찬했는데, 환국(桓國) 신시시대.고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삼신오제(三神五帝)를 중심으로 한 신시시대와 단군조선의 삼한과 고구려.발해.고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환인의 신시부터 전해 내려온《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실려 있다.
1911년 단학회 회장 계연수 선생은 곧바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선생 등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일제가 말살한 삼성(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 “ 환단고기 ” 30권을 편찬하였다. 30권의 환단고기는 대부분 일제에 압수 당해 불태워 졌고 몇 권은 독립운동가 안창호 신채호 등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신채호는 장차 우리나라가 멸망하는 것이 기정 사실화되자 1910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등과 중국에 망명해 있었다.
1914년 단학회 계연수 회장은 5,6명과 함께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을 참배하고 남만주 관전현 홍석납자로 옮겨가 독립운동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벽파대, 기원독립단 등과 연계하여 무장독립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계연수 선생이 편찬한 환단고기는 단군 조선 삼한의 역사를 말살하려던 일본제국의 흉계에 큰 위협 요소가 되었다.
1923년 계연수 선생은 결국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일본인 밀정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나라를 강탈한 일본인들은 계연수 선생을 처형한 뒤 머리와 사지를 절단한 후 머리는 대동강물에 던지고 몸통과 사지는 압록강에 버린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계연수 선생의 서거 이후 단학회는 독립군 천마대(天摩隊)대장 최시흥(崔始興)선생이 단학회를 계승하였으나 이석주 이상룡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다 취임한 지 얼마 안되어 역시 일본 밀정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다시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과 함께 혁혁한 무공을 세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이덕수(李德秀)장군에게 단학회가 이어졌으나 이덕수 선생 역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단학회도 침체되고 환단고기도 유실되었다. 당시 단군교는 대한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단군교는 1900년에 羅鐵(나철)이 창설하였다.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일체의 하느님으로 받들어 숭배하였다. 일제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 조상신을 숭배하는 민족 종교의 단군교가 창설되자 국민들의 큰 관심 속에 당시 신도 수는 약 2백만 명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한 민족의 구심점으로 등장하여,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발판이 되었다. 일본은 급기야 단군교 말살 정책으로 전환되면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저명한 인사들은 피살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게 된다.
3, 신채호는 일제의 역사 왜곡 철폐를 주창하였다.
신채호는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이며, 또한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 매일신문의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처음은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웅주의사관'을 갖고 있었으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면서부터 영웅주의 사관을 극복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0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초대총독으로 취임하자 신채호는 장차 우리나라가 멸망하는 것이 기정 사실화되자 1910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등과 중국으로 망명해 윤세복(尹世復)이동휘(李東輝) 등과 광복회를 조직해 부회장으로 일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본국에서 1922년 12월 일황 훈령(訓令) 제64호를 공포하여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우리나라 고조선 삼한에 대한 역사를 말살한다는 일제의 흉계에 맞서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 등의 역사서를 저술해 냈다. 1924년, 25년경 단재 선생이 중국 북경에 망명하여 쓴 것으로 짐작되는 [조선 상고사]는 1931년 6월 10일부터 6월 25일까지 14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때 '조선사'는 총 102회나 연재되었고(10월 14일까지), 이어서 '1, 조선상고문화사'가 두 번으로 나뉘어(1931년 10월 15일 ~ 12월 3일, 39회;1932년 5월 27일 ~ 5월 31일, 4회) 같은 신문에 총 43회분이 연재되었다. 조선상고문화사에서 그는 한사군에 의해 멸망한 위씨국(衛氏國위만조선)의 강역을 요동반도로 비정(比定)하여 그간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정설로 통하던 패수=대동강. 왕검성=평양설을 완강히 부정했다. 이는 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현도군(玄郡).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던 일제의 앞잡이 이병도의 논리에 큰 타격을 가한 것이었다.
1925년경 동아일보에 게재된 [전후 삼한고]는 전 삼한과 후 삼한으로 나누어 논증하였다. 전 삼한은 곧 조선의 삼한 마한.진한.변한이며 후 삼한은 곧 고구려, 백제.신라(가야)라 하였다. 단재는 이두의 해석 방법을 이용, 조선 삼한의 범위를 요동일대에 비정하고 마한 50여국과 진한과 변진 24개국의 위치 비정(比定)을 시도하고 이두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각종 전적에 대한 사료와 언어.풍속의 연구 등을 제시하며, 일제의 칙명을 받고 자신의 조국에 민족 반역 행위를 일삼던 이병도의 왜곡된 역사관을 비판하고 일제의 만행과 투쟁하였다.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조선역사상 일천 년래 제 일대사건]의 글에서 단재는 묘청이 일으킨 서경전역의 이면에는 낭.불.유(郎佛儒) 3가의 쟁투가 감추어져 있었으며, 이는 곧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다툼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낭.불 양가는 패퇴하고 유가가 집권하여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이 소멸되었다고 보았으며, '삼국사기'를 그 산물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 논문에서 김부식의 사대주의적인 중화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이 논문의 서론에서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흥망성쇠를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는 민족은 자기 나라를 애국하는 관념도 없어질 것이다. 아, 역사가의 책임이 이토록 무겁구나. 라며 한민족의 역사를 통해 민족의 자강과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흉악한 역적이라고 비판한 사론을 보고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어리석음 때문이라며 연개소문은 우리 4,000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다. 라고 주장한 데서 김부식을 혹독하게 비판했던 사실이 잘 드러난다.
1910년대 후반에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상고사에 관한 단재의 [조선 상고 문화사]는 1931년 당시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군,부여.고구려로 계승되며 전후 삼한설의 주장은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부여족의 식민지로서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우리나라의 역사로 수용하고 있다. 이와 병행하여 현장확인, 문헌수집, 유물발굴 및 실증적 방법의 적용 등으로 당시 일제학자와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주장하던 한4군(漢四郡)의 한반도 내의 존재 설을 무력화시켰다. 단재는 전후 삼한설에서 한4군(漢四郡)의 한반도 외의 존재 설을 주장하고 우리의 상고문화는 중국을 능가하는 우수한 문화임을 강조하고 일제의 식민지상황에서 남의 나라 역사왜곡을 철폐하라고 각 신문에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신채호의 주장은 일제의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학설과 대립하며 반론을 재기하며 통절이 공박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아 막대한 인적.물적 역량을 동원하여 우리역사를 왜곡하는 『조선 반도사』편수회에 맞서 “조선상고문화사.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 등의 역사서를 저술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연재하며 일제에 의한『조선 반도사』의 철폐를 주장한 신채호의 노력은 눈물겨웠으나 결국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살인적인 고문과 병마에도 불구하고 일체 타협을 불허하며 마지막 순간에도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이국 땅 여순 감옥에서 1936년에 순국함으로써 위대한 생애를 마쳤다.
신채호보다 앞서 당시 민족주의사학의 대표 박은식(1859-1925)은 1915 《한국통사韓國痛史》,1920 《韓國獨立運動之血史》와 1919 《한일관계사료》4권과 국권회복 투쟁사와, 1930년대 후반 안국선(安國善)의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김병조(金秉祚)의 《한국독립운동사략》,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 최현배(崔鉉培)의 《조선민족 갱생의 도》, 배성룡(裵成龍)의 《조선경제론》 등이 항일 민족정신을 크게 고취하여 독립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일제는 모든 출판물에 대한 사전검열제도를 확립하고 이미 출판된 모든 사서는 금서로 지정하고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게 된다.
4, 친일파 청산 제 1호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
일제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주역이었던 이병도(1896-1989)는 노론(老論) 유력 가문인 우봉(牛峰) 이씨이다. 열두 살인 1907년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일인이 경영하는 불교고등학교를 찾아가 일어(日語)를 배웠다. 나라를 빼앗겨 대한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청년 학도들이 목숨을 바쳤으나 이병도의 뇌리에는 애초부터 항일 의지 따위는 없었다.
매국노 이완용의 후손 이병도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장기적 계략에 포섭되어 일본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1919년에 졸업했다. 이때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가 이미 한국의 역사를 변조하여 저술한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을 독파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왜곡의 주역 일인 학자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와 와세다대학의 강사 츠다(津田左右吉)로부터 문헌고증학, 즉 실증사학의 기초를 다지며 한국역사 왜곡에 대한 개인적인 세뇌 지도 교육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귀국한 이병도는 이케노우치의 추천을 받아 1925년에 설치된 『조선 반도사』 편수회의 핵심위원으로 들어갔다. 이병도는 촉탁이기 때문에 무보수로 일했다고 변명하면서 이 시절 규장각 도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학문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리화하곤 했다. 이 시절 그는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등에 한4군(漢四郡)의 강역을 한반도 내의 존재 설을 강력히 주장하고 고려시대 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상, 그리고 조선시대 유학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당연히(?) 일어(日語)로 쓴 것들이었다. 이때 쓴 논문들은 문헌고증학의 관점에서는 꽤 수준이 높은 것이었으나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단제 신채호의 민족주의사학과는 서로 배치되는 논리들이었다.
1920년대 연희전문.보성전문.이화여전 등이 민립대학 건설 운동을 일으키자 일본은 경성제대의 문을 열어 이 운동을 좌절시켰는데, 경성제대는 이런 불순한 목적의 대학답게 식민사학을 맹렬히 전파하여 『조선 반도사』를 합리화 시켰다. 이외에도 호소이(細井肇)를 비롯해 아오야나기(靑柳南冥) 같은 일본 국수주의 국학자들도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과 함께 식민사학을 쏟아내어 조선국은 고대로부터 반도국가로서 미개한 민족이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일황의 칙령에 의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에 착수한 일제는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반도국가로 왜곡시킨 우리역사를 합리화하고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어용 학술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1922년의 조선사편찬위원회와 1925년의 조선사편수회였다. 『조선 반도사』편찬의 고문에는 일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포함되었는데, 일본측은 경성대 교수인 로이타(黑板勝美).미우라(三浦周行) 같은 학자들인 반면 한국 측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이완용.박영효.이윤용, 권중현 같은 역적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이 단체의 고문으로 있었다.
당시 초대조선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조선 반도사』'편찬과'를 설치하고 우리민족의 대 역적인 이완용과 권중현 등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히고 1916년 1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조선 반도사』 편집 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등 3인에게 지도, 감독을 의뢰하였다.
1922년 12월 일황 훈령(訓令) 제64호를 공포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완용, 권중현 등 역적들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합작하여 한국인 학자들의 외면으로 『조선 반도사』 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는 '『조선 반도사』편찬위원회'를 “ 조선사편수회 ”로 명칭을 바꾸고, 일황(日皇)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이고 확대 개편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일황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접 관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독립관청으로 승격된 총독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조선 반도사』편수회는 막대한 인적.물적 역량을 동원해 삼한과 삼국은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고대부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론을 수없이 쏟아내 조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시켰다.
1926년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도 식민사학을 전파한 또 다른 기관을 만들었다. 1930년 5월 경성제대 교수와 조선사편수회원,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총동원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라는 어용 학술단체를 조직하는데 이들 역시 조선총독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일제의 한반도 및 대륙침략 의도에 발맞춰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어용 단체는 저술 출판.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의 회무감독은 경성제대 교수인 일인 쇼우다(小田省吾)였고, 서기는 조선사편수회 서기인 마에다(前田耕造)였는데, 이병도는 신석호와 함께 이 단체의 핵심위원이었다. 또한 이병도는 이나바(稻葉岩吉)쇼우다 등의 일본인 및 손진태. 홍 희.유홍렬 등 한국인들과 함께 이 어용 학술단체의 기관지인 청구학총(靑丘學叢)의 주요 필자이며 또 다른 식민사학의 학술지인 조선사학의 주요필자 이었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3년 불교전문학교 강사 시절이었다.
일본인 학자들과 함께한 청구학총이 어용단체로 밝혀지자 이를 두려워한 일제와 이병도는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1934년 5월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설립하였다. 즉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국내 및 주변 지역에 대한 역사.언어.문학 등 인문학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국어로 발표하려는 의도 하에 창립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 이병도(李丙燾)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면서 기관지인 진단학보(震檀學報)를 발행하고 일제강점기 1941년 6월 제14호로 종간하고 해산되었다. 그 후 1945년 8.15광복 후 다시 진단학회가 발족된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유포시킨 식민사학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 인데, 그 하나는 사대성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정체성이론이다. 한국 역사는 고대부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역사이자, 고대 이래로 발전하지 못한 정체된 사회라는 것이 두 이론의 논리였다. 따라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의 퇴보가 아니라 진보라는 것이 이들의 식민지 지배논리였다.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홍희(洪憙) 같은 한인학자들이 참여하여 드디어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이 완간 했던 것이다.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1922년 12월 일황의 칙령에 따라'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때부터 1938년 3월까지 만 16년 동안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을 완간하였다. 일본의 계략대로 우리 역사를 왜곡한 이병도는 일본의 제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일본천왕으로부터 거액의 포상 금과 금시계를 받았다.
1945년의 8.15 해방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에는 꾸준히 나가던 이병도는 해방 후 경성대학과 그 뒤를 이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곧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때 김상기.이상백.이인영.유홍렬.손진태 등 사학자들과 조윤제.이숭녕 등 국문학자들이 서울대 교수로 취임해 진단학회는 친일 학자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이병도의 해방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해방 다음날 경제사학 계열의 백남운을 중심으로 조선학술원이 결성되고, 같은 날 진단학회도 재건되었으나 진단학회가 곧 “ 친일파 제명운동 ”에 들어간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조윤제가 주도한 이 운동의 제명 범주에 이병도가 들어간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이병도는 재건된 진단학회를 주도할 수 없었고 송석하와 조윤제가 위원장과 총무를 맡고, 송석하가 사망하자 1948년 8월 이상백이 그 뒤를 이었다. 이병도의 일제시대 행보는 떳떳할 수 없는 경력이었다. 그러나 친일파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남한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50년 6.25전쟁이었다. 6.25전쟁은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납북됨으로써 남한 학계를 가짜 실증사학의 이병도 독무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남북휴전 다음해인 1954년에 이병도가 진단학회의 이사장으로 취임 할 수 있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이병도는 친일파 청산 제 1호에서 벗어나 국사학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 이병도는 식민사학을 유포하던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대학원장과 학술원 부원장을 맡아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로 부상했다.
이병도는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학술원 회장에 선임되었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6년 동도학원(東都學院)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1980년 85세의 고령으로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되었다. 그 동안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하였다. 1986년 10월 9일(목)자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우리나라 국조이며 "역대왕조의 단군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 라는 제목으로 특별기고 하여 우리나라 고대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하고 1989년에 죽었다. 또한 이병도의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고려시대 연구》등이 있다.
5, 7천만 한겨레여...! 깨어나라....!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일제가 한국역사를 왜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 한국의 역사 변조 연구기관이다. 반도 조선사의 편찬 주역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 와세다대학의 츠다(津田左右吉), 일본 국수주의 국학자 호소이(細井肇), 아오야나기(靑柳南冥),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경성제대 교수 쇼우다(小田省吾), 조선사편수회 서기인 마에다(前田耕造), 이나바(稻葉岩吉)쇼우다,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국 측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이완용 박영효 이윤용, 권중현 같은 역적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이병도(李丙燾), 신석호(申奭鎬), 홍희(洪憙) 같은 한인학자들이 일황의 칙령에 따라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때부터 1938년 3월까지 만 16년 동안 24,409쪽에 달하는《조선사》(37책),《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20종),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3책) 반도 조선사 34권을 간행하여 일본왕의 뜻에 맞게 우리나라 고대역사 말살에 큰 성공을 이루었다.
소위 반도 조선사는 어떠한 내용인가? 우리나라 환국시대 3,301년 -배달국시대 1,565년 -조선국 삼한시대(진한, 마한, 변한) 2,096년과 동북부여시대 204년 도합 7,166년의 역사를 말살하고 삼한과 삼국은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변조하여 한민족은 고대부터 중국의 속국이라고 왜곡하여 편찬된 책이 바로 [반도조선사]이다.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우리나라 고조선 삼한의 역사는 물론 箕子朝鮮(기자조선)의 정통도 없애버리고 마치 衛滿朝鮮(위만조선)이 우리나라를 계승한 정통 조선국으로 날조하였던 것이다. 즉 조선 삼한의 제 74대 번한왕 기준(箕準) 재위 28년(BC 194)년에 떠돌이 도적인 위만(衛滿)의 꼬임에 빠져 패하니, 조선 삼한의 번한은 망하게 되었다. 기준이 위만에게 왕위을 빼앗기자 그는 무리를 이끌고, 배를 타고, 마한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이를 기씨 마한이라 한다. 마한의 기준이 도읍을 금마로 정하였다. 금마(金馬:전북 익산시 금마면(金馬面)이다. 계유(BC 108년)에 漢(한)의 劉撤(유철)이 右渠(우거:위만의 손자)를 멸망시키고 한무제(漢武帝)는 한반도 내에 漢四郡(한4군)을 설치하고 조선은 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에 한국의 국사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끌어내렸던 것이다.
위만조선과 漢四郡(한4군)은 한반도 내에 없었고 금마(金馬)도 전북 익산이 아니었으나 이병도는 금마를 전북 익산으로 조작한 것과 같이 삼국사기의 모든 지명을 마치 한반도에 내에 존재한 지명인 것처럼 註釋(주석)하여 지명을 조작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오늘날 우리 국사는 위만조선이 한반도 내에 존재한 것처럼 위만조선이라고 교육하고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설치된 것처럼 국사교과서를 저작하여 교육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조선 반도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간 앞장서서 관여했던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와 일본왕의 특명을 받고 조국을 배신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 신석호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한국사를 왜곡 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병도가 주역이 되어 편찬된 조선사, 조선사료총간, 조선사료집진을 증서로 삼아 한민족의 국사로 둔갑하여 한민족의 넋을 빼앗는 흡혈귀가 되었다. 넋을 빼앗긴 한민족은 오히려 이병도를 민족사학의 선구자로 맹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도 조선사의 망령이 세계 인류의 문명을 주도하고 세계 인류를 구제하여 인류역사상 평화시대를 이루었던 九夷國(9이국: 단군 조선 삼한)과 부여의 역사는 암흑 속으로 묻어버렸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심지어 태조 왕건이 개국한 高麗(고려)국의 영토 역시 한반도 속으로 쪼그라들었다. 세계 인류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남의 나라를 강탈한 해적이 남의 나라 역사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나라를 강탈한 일본왕의 지령에 따라 민족반역자들이 만든 국사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단 한번의 비평과 검증도 없이 모두 수용하고 그대로 교육하고 있는 민족이 도대체 세계에서 어느 나라가 또 있겠는가...? 자기 나라의 국사를 자기 국민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하고 나라를 강탈한 남의 나라 손으로 만들어준 국사로 오늘날까지 교육하고 있으니 어찌 “ 얼빠진 민족 ” 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환국, 배달국, 단군 조선 삼한의 광활했던 강역이 쪼그라들고 뒤틀린 이 나라 역사를 바로 세우기 전에는 세계 인류의 문명을 주도하고 세계의 인류를 구제하였던 宗主國(종주국)의 거룩하신 聖人(성인) 국조와 대한독립을 위해 돌아가신 순국선열의 영령은 결코 편안히 잠들지 못할 것이다.
일황의 칙령에 의하여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켜 『조선 반도사 : 삼국의 영토를 한반도 내로 쪼그라들게 만든 우리역사』를 만들도록 명령을 내린 主犯(주범)은 바로 일왕이다. 일왕은 진실로 天子國(천자국)을 찬탈하고부터 자칭 천왕이라 참칭하였던 것이다. 민족의 역사는 자존이며 족보와 같다. 우리대한민족은 진실로 천자의 자손이다. 천자의 자손을 비열한 민족으로 만든 일왕의 만행을 어찌 하느님이 용서 할 수 있겠으며 반민족 범죄 행각을 일삼은 이병도의 범죄를 어찌 천손들이 용서할 수 있겠는가? 일왕은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한 진실을 천하에 밝히고 7천만 한민족 앞에 무릅 꿇고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해야 마땅 할 것이다.
일왕의 음모에 따른 이병도의 주도하에 왜곡되게 만들어진 반도 조선사가 오늘날 우리나라 국사로 둔갑된 진실을 확실히 깨우치고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7천만 한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마땅 할 것이다.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일제가 36년 동안 통치한 만행보다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여 무려 100년 동안 7천만 한민족 정기를 말살한 이병도의 범행은 7천만 한민족이 용서 못할 죄인이다. 그러나 이병도를 민족사학을 정립한 선구자로 착각하고 있으니 어찌 넋이 살아있는 민족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친일파 청산을 외치는 단체들도 많이 있으나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주역이었던 이병도의 반민족 범죄행각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한 민족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민족이 제 몸에 제 정신이 살아 있다면 생각해 보라...! 중국의 황제헌원(BC 2692-2592)과 唐堯帝(당요제:BC 2357-2258)의 역사를 인정한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중국 보다 무려 2500년이 늦은 위만조선(BC 194년)부터 시작된 것처럼 국사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다. 일본의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이병도는 황제헌원과 당요제의 이름도 알지 못했을까요? 중국의 역사는 물론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통달한 이병도가 일황의 지령을 받지 않고서야 어찌 단군 조선의 삼한 역사를 말살하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마치 위만조선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왜곡 할 수 있겠으며 한민족의 반역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왜곡된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여 조국의 미래를 끌고 갈 청년 학도들에게 왜곡된 국사를 교육할 수 있겠는가?
제 몸에 제 정신이 살아 있는 민족이라면 유구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한 이병도를 민족의 반역자로 곧 바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족정기를 말살한 이병도의 범행을 깨닫지 못하고 친일파 청산의 명단에 빠져있으니 어찌 얼빠진 민족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7천만 한민족의 반역자 " 이 병도 "의 범죄행각으로 인하여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왜곡된 국사 교육에 오랜 세월로 세뇌되고 각인된 지식에 고착되어 우리나라의 대다수 사람들과 소위 정통 사학계는 물론 정부당국자도 우리나라의 국사가 왜곡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겨레여...! 어찌 땅을 치며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범행에 더욱 통탄 할 일은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락국은 중국 대륙에서 개국한 사실을 삼국사기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황의 음모에 동참한 이병도는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 2권에 준거하여 " 고구려, 백제, 신라 "의 3국 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조작하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중국의 지명을 한반도의 지명과 억지로 짜 맞추고 자기 임의대로 註釋(주석)하여 마치 4국이 한반도에서 건국된 것처럼 국토를 축소하여 그야말로 이름과 같이 반도 조선사를 편찬했던 것이다.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개국한 고려시대 역시 중국 대륙에 있었으나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로 인하여 한반도 내로 쪼그라들었다. 따라서 이병도의 저서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고려시대 연구, 국사와 지도이념, 등은 반도 조선사를 합당화시켜 7천만 한민족의 얼을 빼앗는 흡혈귀와 같은 책이므로 당연히 불태워 없애야 한다. 또한 1932~1938년에 일본인 이마니시와 이병도, 신석호 등이 편찬한 조선사 37책, 조선사료총간,20종, 조선사료집진 3책, 등은 한민족의 국치보물로 지정해야 마땅할 것이다. * 송준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9-11 1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