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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
임제록 특강 제3강-2 (전통불교문화원)
10-3-道流야 ~ 10-4밖에서 찾지 말라. 10-5돌아가 쉬는 곳
道流(도류)야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인댄, 도류들이여 만약 山僧의 견해에 의지한다면 與釋迦不別(여석가불별)이라. 석가로 더불어 하나도 다르지 않다. 今日多般用處(금일다반용처)가 欠少什麽(흠소심마)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말이네요. 今日多般用處가 欠少什麽오? 오늘 여러 가지로 작용하고 있는 그 곳. 우리가, 여러분 지방에서 모두 이 곳 까지 찾아왔습니다. 저도 여기 처음 왔는데요. 찾아 올 줄 알아요. 어떻게ㆍ어떻게 하여튼 찾아왔습니다. 와서 또 시간되어서 접수하고ㆍ차 마시고ㆍ강의 듣고ㆍ식사하고 할 일 다 합니다. 이것이 多般用處입니다. 그러면서 화장실도 가고ㆍ물도 마시고ㆍ잠깐 쉬기도 하고ㆍ온갖 할 것 다해요. 하루 동안에 우리가 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야말로 多般用處입니다.
신기하잖아요. 아주 신기해요. 아무리 세상에 컴퓨터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내도 이것 보다 더 신기한 물건은 없습니다. 참 신기한 겁니다. 그리고 또 잠자면서 꿈도 꿀 줄 알아요. 그리고 또 한숨 잤다 싶으면 턱 일어날 줄 알아요. 일어나면 또 어떻게 기계처럼, 기계보다도 더 정확하게 자기 할 일 척 척 척 척 다 하는 겁니다. 나가서 화장실가고ㆍ세수하고ㆍ이불개고ㆍ바깥바람 쏘이고ㆍ식사 찾아먹고, 세상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신통방통한 물건이 있는지 제가 알 수가 없어요. 이 능력ㆍ이 가치 欠少什麽오? 부족한 것이 뭐냐? 이렇게 할 줄 아는 여기에서, 내일도 또 할 수 있고ㆍ모레도 또 할 수 있고ㆍ다음 날 또 할 수 있고ㆍ또 할 수 있고... 내가,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 어마어마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거기에 뭐가 부족하냐? 이겁니다. 欠少什麽오? 부족한 것이 뭐냐?
하~~ 참! 欠少什麽오만 외워도 됩니다. 欠少什麽오만...
모자랄 欠자.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도대체 뭐냐?
이것에 대한 맛을 느끼고, 제대로 이해를 해도, 뭐 확 깨달으면 더 좋겠지만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정말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서 어떤 희열을 느끼고ㆍ맛을 느낀다면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어마어마한 행운입니다. 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으니까요ㆍ이보다 더 보물은 없으니까요.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ㆍ피곤하면 잠 잘 줄 알고ㆍ때로는 화도 낼 줄 알고ㆍ웃을 줄도 알고ㆍ슬퍼 할 줄 알고ㆍ또 울 줄도 알고ㆍ때로는 꼬롬한 생각이 들어가면 남 모함도 할 줄 알고ㆍ속일 줄도 알고ㆍ자기허물 감출 줄도 알고ㆍ남이 아픈데 찌를 줄도 알고, 이것이 전부 중생으로서 좋지 아니한 악습이라고 모두들 그렇게 지적을 하면서 “그것을 없앴을 때 부처다.” 이런 소리를 하는데, 그것은 아주 차원 낮은 불교입니다.
“善한 일만 하고ㆍ지혜만 있고ㆍ자비만 넘쳐야 이것이 부처다.” 라고 거의 일반불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데, 절대 그것은 아주 하급 불교입니다. 저기 법화경이나 화엄경, 그리고 이 조사 어록 같은, 특히 임제록 같은 입장에서의 불교적 안목은 뭐 착 하고ㆍ자비롭고ㆍ지혜롭고, 이래야 부처라는 소리는 없습니다. 그대로 남한테 해코지 하면 해코지 할 줄 아는 그 능력이 부처다 이겁니다. 슬퍼 할 때 울 줄 아는 그 능력이 부처다ㆍ남 미울 때 미워 할 줄 아는 그 능력이 부처다. 다른 불교에서는 그런 말 절대 없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무슨 부처냐?” 그러지요ㆍ어림도 없지요ㆍ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어림도 없는 소리를 여태해온 겁니다. 지금 바깥의 많은 불교는 전부 그렇게 막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선불교 차원이라는 것이 그래서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여기에 대한 그 한 물건. 이 한 물건에 대한 진정한 이해만 있으면 우리는 정말 할 일 다 마친 겁니다. 정말 無事人입니다. 그래서 조사 어록에 그런 말 많이 있지요. 大梅山(대매산) 법상선사가 마조스님 제자인데, 마조스님이 하루는 卽心是佛(즉심시불)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다. 라고 하는 소리 듣고는 ‘아! 그래? 나한테도 마음이 있고, 내가 곧 마음이니까, 내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면 더 이상 더 풀 것이 있냐?’하고 대매산에 들어가서 혼자 그냥 사는 겁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니까요.
공부 잘 하는 사람이 보이다가 어느 날 안 보여서 제자들한테 물으니까
“그 사람, 卽心是佛이라는 소리 한 마디 듣더니 그만 지 혼자 토굴에 가서 그냥 살고 있답디다.”
“니 한 번 가봐라. 뭘 하는지 한 번 가봐라. 어떻게 됐는지 한 번 가봐라.” 고 눈 밝은 제자한테 시켰어요. 제자가 가서
“스님 여기서 뭐 합니까?”
“아이고, 우리스님이 즉심시불이라고, 내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는데 더 이상 뭐 할 것이 있느냐?”
“그래요? 그 때는 마조스님이 즉심시불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그것 유행 지나가고 지금은 그런 말 안 한다.” 고
“요즘은 뭐라고 하느냐?”
“非心非佛(비심비불)이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라는 이런 소리한다.”뭐라고 하는가 싶어서 그렇게 한 번 떠 봤거든요.
“노장이야 非心非佛이라 하든 말든 나는 卽心是佛이다. 나하고 상관없다.” 고 또 하던 일을 그저 그대로 하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아주 참 꿋꿋한 그런 고집물통이라고나 할까요? 자기 주체성이 아주 확고한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 말을 마조스님한테 전하니까, 거기 大梅山입니다. 대매산을 빗대어가지고 “아~ 참! 매실이 참 잘 익었구나!” 하고 이렇게 인가를 했다는 이야기지요.
그런 어떤 차원의 말하자면 어떤 무위진인의 내용을 두고 부처라고 하는 것이고ㆍ그것을 조사라고 하는 것이지, 무슨 착 하다ㆍ지혜롭다ㆍ그 사람은 남 모함할 줄도 모른다ㆍ속일 줄도 모른다ㆍ슬픔도 없다ㆍ화냄도 없다ㆍ탐욕도 없다. 그래야 부처다. 라고 하는 그런 불교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이런 소리 듣고 덮어놓고 마음대로 살려고 해서는 물론 안 되고, 정말 여기에ㆍ이런 이치에 참으로 제대로 심취한 사람은 어디 가서 남 해코지 하라 해도 하지도 않아요. 이런 이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할 턱이 없지요.
경전에도요? 諸法無行經(제법무행경)이라고 하는 경전이 있는데 거기에도 보면 貪慾이 卽是道(탐욕즉시도)다. 그랬습니다. 貪慾이 卽是道다.
瞋恚도 亦復然이다(진에역부연)이다. 貪 瞋 癡(탐진치) 삼독이 그대로 도다. 如是三法中에 具一切佛法(여시삼법중 구일체불법)이라. 이와 같은 貪 瞋 癡 삼독 속에 일체불법을 다 갖췄다. 그랬습니다. 일체불법을 다 갖췄다. 보통 경전에도 대승 경전에는 그런 차원이 있습니다. 그런 차원의 설법에 얼마든지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다고 사회악을 조장하자는 그런 것 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고, 이것은 그런 것으로 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 한다면 그 사람하고는 이야기할 상대가 못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야말로 임제스님의 그 정신이 이와 같기 때문에 달리 우리가요? 수행을 해가지고 하~ 완전히 착해진 뒤에ㆍ완전히 슬픔이 없어진 뒤에ㆍ완전히 분노가 없어진 뒤에, 그때 부처다. 라고 하는 그런 말은, 그런 가르침은 답이 없습니다ㆍ영원히 답이 없습니다ㆍ영원히 답이 없어요.
그런 어떤 한계를 뛰어 넘어서 부처 된 사람 누구 있습니까? 없습니다.
말로만 있지요. 말로만... 그런 것을 다 이행한 뒤에 그 때야 부처다. 라고 하는 것은 말로만 있지 실질적으론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ㆍ듣고ㆍ부르면 대답하고ㆍ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ㆍ피곤하면 잠 잘 줄 아는 그 능력,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다. 라고 하는 데는 바로 그 자리에 그것이 답입니다. 그것이 답이라고요.
가장 고차원적인 불교이면서 가장 쉬운 불교고요, 그것이 가장 아주 정확한 불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요? 黄蘗佛法無多子(황벽불법무다자)라.
황벽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 바로 몽둥이 칠 줄 아는 것. 그 나름대로 살아있는 불법을 보여주는 그 사실. 그것을 떠나서 달리 없잖아요.
“배휴~” 하니까 “예” 하고 대답하는 그 사실. 거기에 무슨 선악이 붙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육조스님도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하라.
첫 법문이 그랬잖아요. 도명존자에게다... 이 자리는 선도 해당 되지 않아요ㆍ악도 해당 되지 않아요. 선하다고 부처이고, 악하다고 부처가 아니고 그것 아닙니다. 이것이 그런 차원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임제록은 “어록중의 왕” 이라고 그러고, 임제스님을 이렇게 표현 합니다. “임제이전에 임제 없고, 임제이후에 임제 없다.” 아~! 이보다 더 뛰어난 말은 없습니다. 부처님은요? 과거에 수많은 부처님이 있습니다. 미래에도 수많은 부처님이 있습니다. 임제는 아닙니다. 임제는 임제이전에 임제 없었습니다. 임제이후에도 임제 없고요. 아~! 대단한 표현이지요. 그런 임제스님을 알아주는 후손들도 또 대단하지요. 그것 다 안목이 밝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부처는 부처이전에 부처 있었고, 부처이후에 부처 있습니다. 하지만 임제는 임제이전에 임제 없고, 임제이후에도 임제 없습니다. 그런 것을 또 여기서 넘어가면서 우리가 얼마든지 맛볼 수가 있는 대목들이 많습니다. 사실 열 두 시간 이것 참, 임제록 펴놓고 너무 아까운 시간입니다. 최소한도 한 일주일은 앉아서 줄기차게 여기서, 이 좋은 환경에서 이야기를 하면 어느 정도 좀 無位眞人(무위진인)이 가슴에서 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합니다.
그 다음에 밖에서 찾지 말라 이것도 같은 형식인데요.
隨處作主(수처작주)의 의미ㆍ無位眞人의 의미, 그것이 말의 의미라기보다는 내 가슴에서 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이 임제스님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데, 여기도 그런 내용으로써... 잠깐 볼까요?
10-4 밖에서 찾지 말라
大德(대덕)아 三界無安(삼계무안)이 猶如火宅(유여화택)이라
此不是儞久停主處(차불시이구정주처)니
無常殺鬼(무상살귀)가 一刹那間(일찰라간)에
不揀貴賤老少(불간귀천노소)니라
儞要與祖佛不別(이요여조불불별)인댄 但莫外求(단막외구)어다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淸淨光(청정광)은
是儞屋裏法身佛(시이옥리법신불)이며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無分別光(무분별광)은
是儞屋裏報身佛(시이옥리보신불)이요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無差別光(무차별광)은
是儞屋裏化身佛(시이옥리화신불)이니 此三種身(차삼종신)은
是儞卽今目前聽法底人(시이즉금목전청법저인)이라
祗爲不向外馳求(지위불향외치구)하면 有此功用(유차공용)이니라
據經論家(거경론가)하면 取三種身(취삼종신)하야
爲極則(위극측)이나 約山僧見處不然(약산승견처불연)이니
此三種身(차삼종신)은 是名言(시명언)이며
亦是三種依(역시삼종의)니라
古人云 身依義立(고인운 신의의립)이요
土據體論(토거체론)이라하니 法性身法性土(법성신법성토)는
明知是光影(명지시광영)이니라.
大德(대덕)아 三界無安(삼계무안)이 猶如火宅(유여화택)이라.
此不是儞久停主處(차불시이구정주처)니 無常殺鬼(무상살귀)는
一刹那間(일찰라간)에 不揀貴賤老少(불간귀천노소)니라.
우리가 그 자리, 無位眞人의 자리를 증명하지 못하고 내버려 둔다면 우리가 현실에 이대로 살면서 끊임없이 그야말로 三界가 편안하지 못한 것이 마치 불난 집과 같아요. 오래있을 곳이 못 돼요. 無常殺鬼가 一刹那間에 貴賤.
귀한사람ㆍ천한사람ㆍ늙은 사람ㆍ젊은 사람을 결코 가리지 않고, 순식간에 들어온다 이겁니다. 이것은 늘 겪고 있는 겁니다. 늘 겪고 있는 것.
그런데 無位眞人의 자리에만 들어가 버리면 거기는 眞空(진공)상태입니다. 眞空상태. 그리고 저~ 기 태풍의 눈과 같은 곳입니다. 거기는 조용해요. 조용한 자리입니다. 태풍 주변으로ㆍ변두리로 나와서 휘둘리고ㆍ바람맞고ㆍ비오고 그렇지, 태풍의 그 눈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본성자리에 딱 차고 앉아 버리면ㆍ그것이 내 삶이 돼버리면ㆍ내 인격이 돼버리면 다른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것 하고는 관계없습니다.
儞要與祖佛不別(이요여조불불별)인댄, 그대가 조사와 부처로 더불어 다르지 않고자할진댄, 但莫外求(단막외구)로다. 다만 밖을 향해서 구하지 말지어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 자신 안에 있다. 그리고 이미 있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 만드는 것이 아니야ㆍ다듬는 것이 아니야. 무슨 조각품 같으면 다듬어서 되지만, 이것은 본래 갖추어진 것이기 때문에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淸淨光(청정광)은, 너희들 한 마음, 한 생각 마음 위에 淸淨한 빛은 是儞屋裏法身佛(시이옥리법신불)이며,
이것을 그대들 집, 屋裏法身佛. 여기서 그대의 屋裏. 집 속이라고 하는 것은 그대의 육신 속에 있는 법신불이고,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無分別光(무분별광)은, 분별이 없는 그 빛은
是儞屋裏報身佛(시이옥리보신불)이요. 그대들 속에 있는 보신불이다.
儞一念心上(이일념심상)의 無差別光(무차별광)은, 차별이 없는 광명은
是儞屋裏化身佛(시이옥리화신불)이라. 그대들 육신속의 화신불이다.
우리가 法身ㆍ報身ㆍ化身. 이것을 교학 상으로는 대단히 참 심오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임제스님 보기에는 그것 전부 無位眞人. 지금 말하고ㆍ듣고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저 편의상 이래 저래 나눠놓고 이야기한다.
此三種身(차삼종신)은 是儞卽今目前聽法底人(시이즉금목전청법저인)이라. 했지 않습니까? 法身ㆍ報身ㆍ化身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대들 바로 이 순간 目前에서 법문 듣고 있는 그 사람이다. 법문 듣고 있는 그 사람입니다ㆍ말하는 소리 듣고 있는 그 사람입니다. 무엇이 듣고 있는지 그것은 저도 모르지요.
그래 우리가 “눈으로 본다ㆍ귀로 듣는다” 이런 말이 불교적으로 보면 상당히 그것 의미 있는 말입니다. 귀가 듣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듣는 겁니다.
돋보기로 글자 크게 보잖아요. “돋보기로 본다.” 하듯이... 돋보기가 보는 것이 아닙니다. 돋보기로 보는 것이지요. 귀가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귀로 듣는 것이지요. 눈으로 보는 겁니다. 이 말도 상당히 의미 있는 말입니다. 좋은 말입니다. 그것이 꼭 불교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만, 어쩌면 불교 역사가 깊으니까 불교에서 나온 말일 것 같아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다 쓰는 말이지요. 여러분도 돌아가서 포교 일선에서 그 한 마디만 가지고도 임제록 다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본다ㆍ귀로 듣는다ㆍ돋보기로 글자본다. 하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 해가지고, 임제록 펴놓고 주해를 달기 시작하면 다 달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 보십시오. 卽今目前에 聽法底人이다.
법신ㆍ보신ㆍ화신, 아무리 현묘한 소리를 이끌어다 이야기해봐야 바로 눈앞에서 말하고 말 듣고 하는 그 사실 = 그 當體(당체) = 그 사람. 그리고 우리가 심성이라는 性자. 마음심이라는 心자. 이런 소리를 잘 쓰는 조사 스님이 있는가 하면, 이 임제스님은 사람 人자를 잘 씁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아주 직접적입니다.
사람이라는 것 속에는 그대로 마음이 다 있지요. 마음 없는 사람 없습니다. 마음 없는 사람은 송장이지요. 육신 없는 사람은 뭐지요? 귀신이지요.
사람이라는 것 속에는 완전해요. 완벽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임제스님은 사람이라는 말을 제일 잘 쓰셨는데요. 無位眞人이라든지ㆍ聽法底人이라든지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祗爲不向外馳求(지위불향외치구)하면, 다만 밖을 향해서 치구하지만 아니하면, 밖을 향해서만 구하지 아니하면 有此功用(유차공용)이니라.
이러한 功用이 있다. 무슨 功用이요? 법신이니ㆍ보신이니ㆍ화신이니 하는 것, 이것 전부 우리가 밖을 쫓아 헤매다 보니까 그런 능력을 다 잠재워 두는 것이지, 그렇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자리에 제대로 앉아 있으면 법신ㆍ보신ㆍ화신이, 경전에서 설명한 그런 능력이 다 있다 이겁니다.
據經論家(거경론가)하면, 경론가에 의거한다면
取三種身(취삼종신)하야, 三種身을 취해서
爲極則(위극측)이나, 極則을 삼는다. 그렇지요. 三種身을 가지고 최고 極則이라고 삼습니다. 그 중에서도 법신불은 부처중의 부처를 법신불이라고 할 정도거든요. 極則을 삼나니 約山僧見處不然(약산승견처불연)이니,
山僧見處에 의거하면 그렇지 않다 말입니다.
此三種身(차삼종신)은 是名言(시명언)이며, 이름이고 말일 뿐이다 이 말입니다. 亦是三種依(역시삼종의)니라. 또한 세 가지의 의지처다 이 말입니다.
이름을 만들어놓고 그 이름에 우리가 의지하는 겁니다.
古人云(고인운), 古人이 말하기를
身依義立(신의의립)이요, 몸이라고 하는 것은 뜻에 의지해서, 법신ㆍ보신ㆍ화신하는 것은 전부 뜻에 의지해서 세운 소리이고,
土據體論(토거체론)이라하니, 土. 토가 있어요, 무슨 법신은 大寂光土(대적광토)ㆍ大寂光殿(대적광전). 그러잖아요. 그런 국토도 있습니다.
국토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국토라고 하는 것도 전부 이 신체에 의거해서 논하는 것이다. 法性身法性土(법성신법성토)는 明知是光影(명지시광영)이니라. 분명히 알건데 이것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무슨 神이니ㆍ무슨 국토니, 부처 따라서 국토가 다 있습니다.
경전에 보면 어느 국토에서 어떤 부처님이 왔다. 전부 부처 있는 데는 국토가 다 있거든요. 경전에는 그런 식으로 이야길 펼쳐놨어요. 그것도 또 방편이지요. 전부가 방편이지요. 우리 한 마음 떠나서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여기 돌아가 쉬는 곳 했는데요. 49재 할 때 제일 많이 인용하는 법문입니다.
메모 해놨다가 49재 법문들 이것 가지고 하세요.
10-5 돌아가 쉬는 곳
大德(대덕)아 儞且識取弄光影底人(이차식취농광영저인)하라
是諸佛之本源(시제불지본원)이요 一切處(일체처)가
是道流(시도류)의 歸舍處(귀사처)니라
是儞四大色身(시이사대색신)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며
脾胃肝膽(비위간담)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며
虛空(허공)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나니
是什麽(시심마)가 解說法聽法(해설법청법)고
是儞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시이목전역역저물일개형단고명)
한 是這箇(시자개)가 解說法聽法(해설법청법)이니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便與祖佛不別(변여조불불별)이니라
但一切時中(단일체시중)에 更莫間斷(갱막간단)하야
觸目皆是(촉목개시)언마는 祇爲情生智隔(지위정생지격)하고
想變體殊(상변체수)로다 所以輪廻三界(소이윤회삼계)하야
受種種苦(수종종고)하나니 若約山僧見處(약약산승견처)하면
無不甚深(무불심심)하며 無不解脫(무불해탈)이니라
大德(대덕)아, 아~ 좋네요. 우리를 보고 大德아, 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大德입니다.
儞且識取弄光影底人(이차식취농광영저인)하라, 그대들은 또한 識取.
알아서 취하라. “너희 것으로 만들라.” 하는 뜻에서 알 識자만 놔둔 것이 아니고, 취할 取자까지 만들어 놨습니다. 識取 = 알아가지고 너희 삶으로 하라ㆍ너희 인격으로 만들라. 이 말입니다. 무엇을요?
弄光影底人, 빛과 그림자를 희롱하는ㆍ가지고 노는 그 사람. 이것은 빛이라는 것은 별 의미 없고, 그림자를 가지고 노는 그 사람ㆍ그림자를 조종하는 그 사람을 잘 알아서 取하라. 이런 말입니다.
是諸佛之本源(시제불지본원)이요,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다.
어떤 깨달은 사람도 이것, 이 몸뚱이. 光影 = 몸뚱이입니다. 이 몸뚱이를 조종하는 사람을 잘 알아라. 이 몸뚱이를 조종하는 그 사람은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다ㆍ근원이다.
一切處(일체처)가 是道流(시도류)의 歸舍處(귀사처)니라.
그렇게 되면ㆍ그것을 알게 되면ㆍ그 자리만 알게 될 것 같으면 一切處.
어디, 어느 곳에 가든지 간에 그 곳이 전부 여러분이 돌아가 쉴 그대들의 집이다. 집에 돌아갈 곳이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부터입니다.
是儞四大色身(시이사대색신)이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며,
그대들의 四大色身. 지ㆍ수ㆍ화ㆍ풍 사대로 된 이 육신이 설법하고 청법 할 줄 알지를 못해. 말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말을 들을 줄도 몰라.
脾胃肝膽(비위간담)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며,
脾胃肝膽도 또한 설법하고 청법 할 줄을 몰라. 그렇다고 허공이 하느냐
虛空(허공)도 不解說法聽法(불해설법청법)하나니
虛空도 설법하고 청법 할 줄을 알지를 못해. 그러면
是什麽(시심마)가 解說法聽法(해설법청법)고? 무엇이 설법할 줄 알고 청법 할 줄 아는가?
是儞目前歷歷底勿一箇形段孤明(시이목전역역저물일개형단고명)한
是這箇(시자개)가 解說法聽法(해설법청법)이니라. 目前에. 그대들 目前에서 너무 歷歷해ㆍ너무 역역하다고요. 그러면서 一箇形段도 없어ㆍ一箇形段도 없어요ㆍ그 물건은 먼지만한 꼬투리도 없어요. 이 우주를 다 덮고 있어요.
꽉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먼지만한 꼬투리 하나 없어요.
勿一箇形段입니다. 一箇形段도 없는, 그러면서 그것만이 홀로밝아요.
孤明. 그것만이 있다 이겁니다. 그것만이 있다. 그것만이 이 우주를 꽉 채우고 있습니다. 여럿이 같이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각자마다 다 채우고 있습니다. 여기에 등불 하나만 켜놔도 이 방 가득 차고, 두 개 켜놔도 그 등불 하고 관계없이 그 등불은 그 등불대로 꽉 채웁니다. 천개 만개 등불 켜놔도 역시 똑 같이 천개 만개는 각자 빛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그것이 孤明입니다. 홀로 밝힌다 이겁니다. 目前에 있습니다. 분명히 目前에... 너무 歷歷합니다. 먼지만한 꼬투리 하나 없습니다. 勿一箇形段. 그러면서 그것만이 비추고 있습니다.
孤明입니다.
이것이, 這箇가 = 이것이 聽法說法할 줄 앎이니,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이와 같이 본다면 便與祖佛不別(변여조불불별)이니라. 곧 조사와 부처로 더불어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것만 알면ㆍ그 실체에 대한, 거기에 대한 이해만 깊으면 그대로 부처입니다. 그대로 조사입니다.
但一切時中(단일체시중)에 更莫間斷(갱막간단)하야
觸目皆是(촉목개시)언마는, 정말 그 물건, 그것은 但一切時中에 更莫間斷입니다.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ㆍ한 번도 멈춘 적이 없어요.
뭐 잠깐 기절해도 그것은 우리의 육신이 기절하는 것이지, 그 물건이 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들었다고 그것이 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간단이 없어요ㆍ사이가 없습니다. 허공이 사이가 없듯이, 허공이 사이가 없듯이 우리의 그 물건도 사이가 없어요. 觸目皆是입니다. 보는 것 마다 다 그것입니다.
그 놈이 본다 이겁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지요. 보는 것 마다 전부 그것다.
皆是다. 그렇지만 우리는 왜 그렇게 못 되는가?
祇爲情生智隔(지위정생지격)하고 想變體殊(상변체수)로다.
이것도 유명한 말입니다. 情生智隔 想變體殊. 다만 情이 생기니까 지혜가 막힙니다. 情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색이 칠해지는 겁니다.
情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心 = 忄(심방변)에 푸를 靑(청)자 했잖아요. 그것이 제대로 투명하게 똑바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 내 나름의 어떤 인연 따라 보는 것이고ㆍ내 나름의 지식 따라서ㆍ내 나름의 가치관 따라서ㆍ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것. 이것을 동원해 가지고 보는 겁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고 제가 여러분을 보는 것도... 저에 대한 이해가 여기에 100명 모였으면 100명 다 다릅니다. 다 달라요. 여러분이 저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서 이해하는 겁니다.
실체 없습니다.
그 어떤 오랜만에 만난 도반 스님이, 어디 가면 자기를 아는 사람은 아주 존경하고 위해주고 뭘 어떻게 해줄 줄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스님 자기 말이라면 아주 모든 걸 다 잘 믿고요. 그런데 어디 암자에서 한 다섯 명인가 모여서 정진을 했는데요. 다섯 명 모였는데 두 사람은 자기를 그런대로 보는데, 두 사람은 자기를 아주 안 좋게 보더래요.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아주 안 좋게 보더라는 겁니다. 자기하고 같이 사는 것을 아주 부끄럽게 생각하고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할 정도로 그렇게 보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180도로 자기를 다르게 보더라. “내가 실체가 있으면 어지간히 모두 비슷비슷하게 볼 텐데, [나] 라고 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모든 사람은 실체가 없어요ㆍ실체가 없습니다.
전부 내 깜냥대로ㆍ내가 축 쌓은 어떤 이해대로ㆍ이해정도 따라서 보는 겁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서로가 다 그렇습니다. 어느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자신에 대해서 너무 믿을 것도 아니고, 남이 누가 “어떻다.” 라고 하는 것, 그것도 절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절대 그것 휘둘려가고 같이 어울려가지고 같이 미워하고, 같이 좋다고 하고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情生智隔입니다. 그 마음에 색깔이 칠해지니까, 그것이 情이거든요.
자기 나름의 情입니다. 자기 나름의 이해를 情이라고 그래요. 情이 생기면 지혜가 막혀버립니다. 투명하게 보는, 전부 안경에 색이 칠해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고,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想變體殊라. 생각이 변하면 體가 달라져요. 心體가 달리보인다고요.
심체는 변하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다르게 느껴집니다.
所以로 輪廻三界(소이윤회삼계)하야, 그러므로 삼계에 윤회해서
受種種苦(수종종고)하나니, 갖가지 고통을 받게 되나니, 밖으로 팔려 다니니까 그래서 그런 것이지요.
若約山僧見處(약약산승견처)하면, 山僧의 견해에다가 = 見處. 견처라는 말도 잘 쓰지요. 우리가 익숙하면 “견해ㆍ소견” 이런 말 안 쓰고 見處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것은 어록에서 아주 잘 쓰는 말이니까요.
山僧의 見處에 의지한다면 無不甚深(무불심심)하며 無不解脫(무불해탈)이니라. 내가 보기에는 모든 사람의 본성은 無不甚深이야. 매우 깊고 깊은 그 자리가 아닌 사람이 없어. 해탈되어 있지 아니한 사람이 없어. 내가 보기에는 전부 해탈이네. 임제스님 말씀, 임제스님 자기가 보기에는 전부 해탈되어 있는데...
해탈한 사람이 보니까 다 해탈되어 있겠지요. 해탈한 우리의 본성을 보는 것이지요. 그 사람은 [진짜 나] 를 보는 것이지요. 임제스님은 [진짜 나] 를 보는 것이고, 우리는 내 자신이지만 [가짜 나] 를 보는 것이고요.
그래 가짜를 보다 보니까 말하자면 이 사람은 이렇게 밉게 보고, 저 사람은 곱게 보고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정말 깊고 깊은 경지이고ㆍ그대로가 해탈된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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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釋대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