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는 사실보다 중요하다.(Attitude is More Important than fact)"
4년간 다녀온 직장을 관두고 한의대를 가기위해 재수를 결심하면서 스스로 주문처럼 외던 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년이 다 되었고, 문과 출신으로 이과 공부는 난생 처음이었던 나에게는 내 학업 수준을 말해주는 객관적인 사실보다 "할 수 있다"는 믿음과 긍정적인 태도가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적성과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이 친구따라 강남가듯 문과를 선택했고, 주어진 점수에 맞춰 대학에 들어가기에 급급했고, 대학을 졸업하면서는 취업을 하기에 급급했기에 내 인생은 남들에게 휩쓸려 가는 인생에 지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보수도 괜찮은 직장을 다니고 있었지만, 일을 통해 어떤 보람도 제대로 된 만족도 느끼지 못했다. 내가 하는 일은 남을 도울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자아실현이라 여기던 직업이 내게 그저 돈 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삶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평생을 남을 도우며 살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한의사가 되는 길을 떠올렸고, 내게 물질이 넉넉치 않아도 내 지식과 기술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시간이 갈수록 결심은 굳어졌다.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 했고, 노년에 접어드신 부모님과 가족들을 설득하는 일, 주변 사람들의 동의를 얻는 일부터 시작해 나갔다.
2006년 8월 공부하기로 사람들 앞에 공포한 순간부터, 조금씩이나마 마셨던 술도 완전히 끊었고 나이 어린 친구들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회사를 마치고 저녁시간에 꾸준히 운동을 했다. 그리고 재수의 가장 큰 두려움이 었던 ''수학''의 기초를 잡아두기 위해 조금씩 틈틈히 10-가,나를 공부했다.
2월 28일까지 회사에 출근했고, 3월 2일 아침부터는 세일학원 등원 버스에 올랐다. ''출근'' 대신 ''등원''을 하면서 가장 먼저 스물 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내게 다시 공부할 수 있는 여건과 기회가 주어진 것이 너무 감사했고, 스스로에게 선물한 단 한 번 뿐의 기회이니 최선을 다해도 1년 이라는 시간 안에 이루지 못한다면 미련없이 이 길을 포기하리라는 결심을 했다.
수학은 근의 공식도 생각나지 않는 상태에서 본 세일학원 반편성 고사에서 수학시험은 3번으로 주욱 찍을 수 밖에 없었고, 이런 내 자신을 본 순간 시작도 하기 전부터 수학에 대해 지레 겁부터 내기 시작했다.
빡빡한 스케줄의 학원생활은 예상했던 것 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공부하는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생활하기 위해 애를 썼고 3, 4월 달에는 학원에서 돌아오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공부하면서 스스로에게 약속한 첫 번째는 "초심을 잃지 말자"였고 둘 째는 "어떤 수업시간이건 절대로 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 처음부터 무리하게 몰아부치기 보다 계획한 공부방법을 100% 지키는 데 초점을 두었다.
대학시절 영어연수 경험이 있어 상대적으로 외국어 영역에 대한 부담이 적었던 나는 그 시간을 수학 공부를 보충하는데 할애했고, 언어영역에 점수의 기복이 심했던 것을 떠올리며 3,4월 달에는 언어영역에 매일 2시간 정도를 할애했다.
3월 모의고사 점수는 처절했다. 언어, 수학을 말 할 것도 없고 자신 만만해 했던 외국어 영역의 점수도 80점을 넘지 못했다. 총점 310점. 처음부터 높은 점수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는데도 목표로 한 한의대에 진학하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점수였기에 집에 돌아오자 마자 가방을 던져두고 무릎꿇고 울면서 기도했던 생각이 난다.
이런 처절함을 비단 3월에만 느낀것은 아니었다. 4월, 5월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대했던 것 보다 점수는 쉽게 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5월즘 되니 언어영역과 외국어 영역이 점수가 90점을 넘었지만, 수학은 50점을 넘기기가 여전히 벅찼고 과학탐구도 4,5 등급 이상을 받지도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공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라고 사람들은 쉽게 말하는데, 그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 정말 느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동안 나는 ''자기자신과의 싸움''이 책상에 오래 버티고 앉아있는 것, 졸지 않는 것, 주변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내게 가장 치열한 싸움은 ''좌절감''을 극복하는 것,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매달 모의고사를 보고 나면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진아야, 네 수학점수가 50점이야. 너 이러고도 한의대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수학 5등급으로 한의대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 점수론 어림도 없어. 포기해!" 그럴 때 마다 나는 처절한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다짐하곤 했다. "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어차피 다른 거 다 잘나와도 수학 5등급 뜨면 못가는 거, 수학 점수 오를 때 까지 미치도록 하겠다"
5월 이후부터는 그야말로 수학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수업을 마친 후에는 수학 특강을 듣고, 자습실로 올라와 영어 1시간, 언어 1시간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을 모두 수학공부만 했다. 기본서로 수업 진도에 맞추어 공부해서 수업의 이해도를 높이고, 예습보다 복습에 초점을 두어 수업시간에 푼 문제들을 다시 푸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모자랐다. 자습시간에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학원 특강도 적극적으로 들었다. 현대시, 고전시가, 고전소설 등 공부할 분야가 다양한 언어영역의 부담을 덜기 위해 4, 5월 동안에는 따로 공부하는 시간보다는 학원에서 마련한 고전시가 특강으로 정리해 나갔다.
6월 평가원 모의고사를 본 후에는 과탐에 대한 압박감도 심해져서 학원에서 돌아와서는 집에서 인강으로 과탐을 보충해 나갔다. 학원 시스템에 따라 7월까지 1학기 과정이 모두 마쳐지고 나니 과탐에 대한 상대적인 부담감은 많이 감소되었지만, D-100일 전까지 모든 과탐 과목을 스스로 최소한 1번 정도는 정리해야 한다는 계획에 따라 매주 1과목씩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지구과학부터 가장 부담이 컸던 생물2까지 매일 단원별로 끊어 복습을 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언어와 외국어 영역에 할애하던 2시간을 과탐시간으로 돌렸고, 수학은 6시간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대신 수업 중간 중간의 쉬는 시간을 통해 학원 숙제와 단어 암기 등을 성실히 하여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5일간의 방학기간에는 과탐 취약과목 이었던 화학1을 강남구청 인강을 보며 총정리 했고, 수학도 ''미분과 적분'' 부분만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학원 방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수학게 투자했음에도 수학 점수는 70점을 넘지 못하고 늘 60점대에서 맴돌았고 ,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른 과목들에도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8. 9월에는 과탐과목 점수도 많이 향상되어 수학만 조금만 더 나아진다면 올 해 해낼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고, 그래서 9월까지 한 달만 더 수학에 올인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8, 9월이 되면 한 과목에 치중에 공부한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공부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어차피 수학이 3, 4 등급이 나오면 다른 과목이 잘 나온다 해도 한의대에 진학하기 어려월 것아는 생각에 한 달만 더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다. 수학 공부 시간을 늘리기 위해 8월부터는 학원도시락 대신 집에서 간단한 도시락을 싸와 먹었고, 저녁식사는 최소한으로 간편하게 싸와 자리에서 먹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수학에 투자하였음에도 수학점수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9월 평가원 모의고사에서 수리영역이 이례적으로 너무 쉽게 출제되어 만점자가 넘쳐났는데도 나의 점수는 여전히 70점을 넘지 못했다. 10월이 되면서 마음은 급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수학 공부만 하다 집으로 돌아갈 만큼 수학에 목숨을 걸고 공부했는데, 이제 더 이상 어떻게 공부를 해야하는지, 내 공부방법에 큰 결함이 있지는 않은지 답답한 마음에 수학을 담당하시는 담임선생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나의 이야기르 다 들으시고 담임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처음 학원에 왔을 때 결심했던 것이 떠올랐다. "초심을 잃지 말자! 태도는 사실보다 중요하다!" 나의 초심에는 열심히 하겠다는 겸심도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도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하나님 앞에서 무릎꿇고 다짐했던 것들,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겠다 다짐,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내려놓고 학원에 들어왔을 때의 마음가짐 등등 이런 것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가면서 지금 무너지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필요한 건 믿음이다. 눈 앞의 점수에 연연해하지 말자. 그건 사실에 불과하다. 내가 지금 껏 투자하고 노력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 자기자신과의 싸움은 너무 치열하고 힘들었다.
수능을 보기 전까지 내 수학점수는 단 한번도 70점을 넘은 적이 없다. 다만 예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풀지 못하고 답안지를 작성해 내었는데, 10월 11월 부터는 모든 문제를 시간 안에 한번 정도는 건드려 볼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졌고, 지금 하던대로 꾸준히 한다면 수능보는 날 잘 볼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3월 부터 매일 자습실에 올라가 공부 시작 전에 성경책을 읽었는데, 마음이 아무리 급해도 성경읽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영어 공부를 따로 할 시간이 없을 만큼 수학에 모든 걸 걸었기 때문에, 영어 성경을 읽으며 영어 공부를 대신했다. 도서관 책상 맞은 편에는 아래 성경구절을 써두고 매일 주문처럼 소리내어 읽으며, 힘을 얻었다.
"또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뤄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겨라. 저를 의지함녀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편 27:4-6)
믿음을 갖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공부한 결과 수능에서 수학이 92점을 얻는 쾌거를 이뤘다. 수학이 너무 쉽게 출제되어 100점이 넘쳐났고, 나는 3등급을 받았지만 내가 90점을 넘었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기뻤다. 다행히 나머지 과목들이 적절히 잘 나와주어 한의대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고, 수능 후에는 논술을 준비하여 상대적으로 논술의 비중이 큰 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상지대학교 한의예과에 합격하여 98학번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한 이후 10년 만에 08학번으로 다시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게 인생의 전환점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드린다. 스물 아홉살의 딸에게 다신 한번 공부할 기회를 허락해 주신 부모님께 너무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무모한 도전을 묵묵히 지켜봐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자기 자신의 일처럼 헌신적으로 가르쳐 주신 세일학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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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지대 한의대 개빵꾸군..역시 한의대는 추락이 대세인가 ?
역훌인가?
감동먹을 뻔 하다가 리플보고 뭔가 흠짓한다
뭥..
아씌벨 ㅋㅋ 난 수리 50점대에서 96맞고도 공대 ㅋㅋ 걍 한의대나 쓸껄 ㅋㅋ 걍 붙었겠다.....
마치 딴 과목은 다 1등급인것처럼 말하는구나 병신 ㅉㅉ
남을 도우려고 한의대를 가다니.. 보통은 의대를 생각하지않나?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서 그런게 아닐까요.. 의대를 가기엔 좀 나이가 많으신듯 한데;
상지대 한의예 역훌이네
그냥 운빨이다...운좋게 08수리가형이 졸 쉽게 나와서 망정이지...07수준으로만 나왔어도 이여자 그냥 50점대 맞고 원서도 못썼을듯... 08수학 완전 개쓰레기...평소에 50점대 맞던놈이 96점 뜨고...거의 매번 100점 나온놈이 92점 뜨고...
평소에 50점대 아녔다 쉬펠로마 ㅋㅋ 점수 계속 올라서 한달전에는 90점대 계속 나왔어 ㅡㅡㅗㅗㅗㅗㅗㅗㅗㅗㅗ
07도 쓰레기인건 마찬가지 06까지가 정확한 변별인데..쳇.. 08수학 진짜 저주다.진짜 5등급으로 도배하던 색기가 수능 땐 2등급 맞더이다.
07이 무슨 쓰레기냐 07 1등급 컷트라인은 아냐??06,07 정도로만 나오면 변별력은 확실하다. 08은 갑자기 개좆
ㅋㅋㅋ 댓글하고는, 조낸 훌리스럽다 ㅋㅋㅋㅋ
내 친구 상지대 한의대 붙고 서울대 인문 수석 했는데
인문계에서 쓸수 있는 대학이 몇개 없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