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ngest Day (3): 양평
78년 4월. 우리 부대는 전방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4월이 맞을 것이다. 4월 경. 나는 그 때 “꽃피는 봄인데 왜 이렇게 추워?” 하며 연신 불평을 말했으니까. 그리고 4월 중순 이전이 맞다. 내가 그 해 김일성 생일(4월 15일)을 맞은 곳은 양평이 아닌 전방이니까. 하여간 그 때쯤 우리 부대는, 혹은 조이병, 아니 조일병은 양평을 떠났다. ‘정든 양평’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 햇 겨울을 난 곳이니 기억이 없을 수 없다.
추웠다. 그 때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 치악산 자락의 원주통신훈련소도 추웠다. 그 때는 아직 가을이었는데, 이미 야전 잠바가 지급되었고, 모포 속에 들어가서, 역시 후라쉬를 켜고 철학자 김형석의, 아무런 철학도 없는 맹물 같은 수필집을 읽을 때에는 몸을 꼬부린 채 내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양평의 겨울은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지금도, 야간에 초소에 나가 보초를 설 때라거나, 기상하여 연병장에서 점호를 받던 때, 개울가에 가서 식기를 닦던 때 등을 떠올려 보면 몸에 한기가 든다. 그렇게 항상 추웠다. 항상 추웠지만, 특별히 추웠던 적이 있다.
그 날은 내무반의 분위기가 일석점호 때부터 벌써 심상치 않았다. 지적 사항도 별로 없었고 기합도 없었다. 그래서 점호가 아주 일찍 끝났다. 잠자리를 펼 때부터 본격적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아예 잠들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도 들렸고, 겨울만 되면 이게 무슨 지랄이냐라는 말도 들렸고, 낮에 인사과의 장기 하사 변하사와 말년 병장 김병장이 치고받고 싸웠다는 말, 그 사실을 포대장이 알게 되었다는 말도 들렸다. 어떤 고참들은 펜티만 입고 잠자리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내무반은 곧 소등이 되었고 정적에 휩싸여 좀 전까지의 술렁거림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내무반 방문을 워카발로 걷어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빤스바람 집합. 통일화는 싣는다. 열외 한 명도 없다. 2분 주겠다.” 부관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다. 중위. 사격 훈련을 할 때면 불합격자를 얼음물에 집어넣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리하여 외곽 보초을 제외한 본부 포대 전원은 꼬박 두 시간을 눈밭에서 굴렀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하기 어렵지만,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막판에 시행한 허수아비라는 것이다. 팔을 들고 허수아비처럼 그냥 서 있는 것이다. 아 양평의 모진 겨울 바람.
양평에는 눈이 많이 왔는데, 눈이 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연병장의 눈을 치우는 것은 한가하면서 낭만적인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눈가래로 밀어 눈을 한 곳에 모으면, 단가 — 일본말 ‘탕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 에 담아 나른다. 나는 헤어진 지 2년도 더 된 옛날 애인이 갑자기 생각나서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고 싶은데, 따로 쓸 데가 없어 그 여자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시작했던 것 같다.
“이곳에서는 눈 치우는 것이 하루 일과입니다.”
나는 주읍산을 기억한다. 우리 부대 근처에 있는데, 봉긋 솟은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유선병들을 따라 보선 작업 — 끊어진 전화선을 연결하는 일 -- 을 나가 쏘주를 먹던 일도 기억난다. 동네 가게에서 사홉 들이 쏘주와 노가리 몇 마리를 샀다. 구자갑 상병은 나뭇가지를 태워서 정성스럽게 숯을 만든 후 그 숯에다 노가리를 구웠고, 그것을 다시 정성스럽게 잘라 한 사람 앞에 반마리 정도씩 배급을 해 주었다. 보초를 서던 일도 기억난다. 그 초소는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있어서 부대 바깥이 다 보였는데, 야간에는 부대 바깥에 난 상당히 긴 직선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해드 라이트가 시선을 끌었다. 간혹 자동차가 나타나곤 하였는데, 하이 빔으로 켜면 라이트가 수백 미터를 뻗어나간다. 깊은 밤 초소에 홀로 서서, 자동차의 소음은 들려오지 않는 먼 곳에서 뻗어나가는 전조등의 기나긴 불빛을 보고 있으면, 갑자기 주변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집 생각이 나곤 하였다. 나는 수첩을 꺼내어 모나미 볼펜으로 끄적거렸다.
병든 시인이 든 곳은 객지의 남의 방
시인의 우와기는 그를 따라오고
그의 식솔들은 경성에 남아있는데
나는 총을 메고 보초를 서고 있다
시인 이상의 감성적인 수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상은 요양차 평안도의 산골을 찾은 적이 있는데, 숙소로 잡은 농가의 허름한 방에 들어가 드러누웠다가, 벽에 걸어놓은 자기의 우와기를 보았다. 시인은 “저 옷이 나를 따라 여기까지 왔구료.”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경성에 두고 온 식솔들을 생각한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회상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충정 훈련. 병사들은 대오를 갖추어 발을 구르면서 앞으로 밀고 나갔다. 싱거운 동작이었는데, 데모 막는 훈련이라고 하였다. 군인이 이런 훈련을 한다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우리 부대만 이 훈련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양평에 주둔한 사단만 이 훈련을 하게 되어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5 ·18에 광주에 투입된 부대가 20사단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진압군의 신분으로 그 때 그곳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영화 박하사탕을 볼 때면 진압군이었던 설경구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설경구처럼 그곳에 끌려가 그런 실수를 했었을 수도 있고, 그 이후 딴사람이 되어 그처럼 인생을 망쳤을 수도 있다. 어떤 때는 광주시민들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척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자동차에서 들려오는, 아니 지옥에서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 피를 토하는 듯 울부짖는 여자의 목소리. 지금 도청에는 우리 이웃들이 모여있습니다. 당신과 똑같은 그냥 동네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나와주지 않으면 그들은 죽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주면 모두가 삽니다. 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고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온몸을 떨었다.
군대가는 것이 두려운 것은, 군대 생활이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군대 생활에서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나의 일을 내가 결정할 수 없다. 나는 논산으로 보내졌다가 원주 통신훈련소로 보내졌으며, 거기에서 나온 후에는 101보충대로 보내졌고, 거기에서 다시 5사단의 보충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나는 안경다리를 부러뜨려서 한동안 안경을 쓰지 못한 채로 생활하였다. 부대 바깥으로만 나가면 읍내였고 안경점이 있었는데, 군대는 나를 바깥으로 내보내주지 않았다. 아침에 기상하여 어둠 속에서 구보를 할 때가 제일 힘들었다. 땅바닥도 잘 보이지 않았고 눈앞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주어진 속도로 달려야 하였기 때문이다.
모포 속에 들어가 후라쉬를 켜고 책을 읽은 것, 보초을 서면서 수첩을 꺼내 습작을 한 것과 더불어 ‘디바리’니 ‘콰리’니 하는 단어의 어원을 찾아다닌 것, 즉 어원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는 고참과 상관들에게 그 어원을 묻고 다닌 것은 그들에 대한 반항심의 발로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것이, 내가 그것을 묻고 다닐 때, 나는 속으로는, 따지듯이, 혹은 나무라듯이, 혹은 경멸하듯이 그렇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도 이 점을 막연히 느끼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러한 내 행동을 싫어하고 미워하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그런 방식으로 애매하고 소심하게 반항한 상대는 그들 군인들이 아니라 군대 자체일지도 모른다. 안경을 벗긴 채 나를 자기 마음대로 끌고 다닌 군대 말이다. (계속)
첫댓글 워카빨!!
글을 읽으며 왜 이 단어가 연상되어지지..?
충정 훈련? 무슨 얼어죽을 충정??.....
살짝 열 받기 시작한다
조교수님은
군대가서도 시와 수필도 읽고
어원을 묻고 다니고
천상 문과 교수님이네
평생을 곱게
꾸준하게 지내오니
지금의 얼굴에도 다 나타나 보여
좋아보이고
나는 군대에서 영어 때문에 많이 맞아서
술먹고 깽판치는 후배때문에 군기 못 잡는다고 또 맞고
단체 기합도 많이 받아
내가 고참이 되면 절대로 소대내 때리는 문화를 없애겠다고
다짐 또 다짐하고
말년 6개월 동안 아무도 못 때리게 하고 기합도 없앴다가 전역했는데
6개월 후에 자대 방문 해보니
도로 때리고 기합주고 그러더만
누구 때문에 때리는게 아니고
원래 천성들이 그런 사람이 있는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