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지피티에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두 가지를 질문했는데, 의도와 작의 부분은 두 번째 질문에 있습니다. 챗지피티의 답변은 생략했습니다.
질문: 느낌이 일어날 때, 갈애가 일어날 때, 취착이 일어날 때, 각각 혼자 단독으로 일어나는지 아니면 각각 마음과 결합하여 일어나는지, 니까야에서는 어떻게 보는지를 질문드리려고 합니다.
1) ‘감각접촉(觸)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일어난다.’는 말씀에서, 느낌이 일어날 때 느낌 한 가지만 일어나는지, 아니면 느낌이 일어날 때 그 느낌은 마음과 함께 하여 일어나는지 알려 주십시오. 예를 들면, 아비담마에서는 마음과 마음부수는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한다고 합니다. 즉, 이렇게 표현합니다. ‘즐거움이 함께 하고 지혜와 결합된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가 일어났다), 또는 ‘정신적 괴로움과 함께 하고 적의(분노)와 결합된 자극받은 마음 하나’(가 소멸했다). 니까야에서도 느낌이 일어날 때에는 느낌 혼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느낌은 마음과 함께 하여 일어납니까?
2)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고 할 때에, 그 갈애는 어떠합니까? 갈애 혼자서만 일어납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구하면서 갈애를 일으켰을 때) ‘즐거움이 함께 하고 탐욕이 결합된 마음’의 갈애가 일어난 것인지요?
3)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일어난다.’고 할 때, 그 취착 한 개만 단독으로 일어납니까? 아니면 취착이 일어날 때 (그것이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원하는 것과 관련된 취착이라면) ‘즐거운 느낌이 함께 하고 사견과 결합된 마음’인 취착이 일어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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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오늘 아침에 의도(思)와 마음기울임(作意)에 대해 갑자기 조금씩 구분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틀린지를 질문드리려고 합니다.
(1) 의도(쩨따나)는 무엇이고, 작의(마나시까라)는 무엇입니까?
(2) 일어나는 순서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 의도가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작의가 일어납니까?
(3) 다음 각 사례에 대해 제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틀린지를 알려 주십시오.
1) 실참 수행에 대한 법문을 듣고 ‘나도 호흡 수행을 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의도)’. 그러고 나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마음을 기울였습니다(작의)’
2) 김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많은 지식을 바르게 전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의도)’. 그래서 유용한 정보가 있을 때마다 ‘그 정보쪽으로 마음을 향했고(마음기울임)’, 그 정보들을 기록했습니다.
3) 김 노인은 일생에 한번이라도 직접 ‘가수 조용필을 만나기를 바랬습니다(의도)’. 그래서 조용필 이름만 나와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마음기울임).
4) 떠돌이 김씨는 돈이 다 떨어져 며칠을 굶었습니다. ‘한 끼 밥 얻어 먹을 생각이 가득했습니다(의도)’. 그래서 ‘식당이나 무료급식소 간판만 보면 그쪽으로 눈이 갔습니다(마음기울임)’
5) 재가신자 김 과장은 ‘오늘부터라도 불선법을 버리고 선업을 닦자고 마음먹었습니다(의도)’. 그래서 시간날 때마다 가만히 앉아 마음을 청정히 하려고 ‘마음속으로 관심을 돌렸습니다(마음기울임)’.
첫댓글
의도(思)와 욕(chanda:intention,desire,will.)도 비슷한 듯 아주 다른 법수인 것 같습니다.
아, 그 부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래 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예, 봄봄님.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번 글 올리는 것을 보면서 생각 된 점을 여담 삼아 얘기 해 보겠습니다.
챗지피티 한테 물어보고 뭘 알아 보겠다는 의도(思)는 바르지 않은 작의라고 보여지기에 결코 정견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ㅋㅋㅋㅋ (죄송).
붓다의 경전을 참구해서 진의를 깨달아 보겠다는 의도를 일으키시면 어떨까요?
思의 출처는 六入인거 같고, 작의는 육식신 이전의 육촉입처(六入이 根의 기능으로 연기 된)에서의 갈림길에 선 작의 같습니다 만...
예, 산마루님. 말씀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니까야를 읽고 공부하는 것, 참으로 좋은 말씀입니다. 잘 기억하겠습니다.
제 의견으로는(표현으로는): ‘觸이 일어나기 때문에 思가 일어나고, 作意는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갈애에도 있고,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取에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참고로 이쪽 사정(가르침을 숙고해서 이해하는 저의 경우)을 좀 알려 드리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참석하는 수행 센터가 있다면 그곳 스님이나 도반에게 묻고 답을 들으면 아주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혼자 공부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그때 자신이 공부하고 이해한 것이 과연 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 알아놓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챗지피티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참으로 제게는 좋은 도반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입장이 서로 다른 경우에는, 예를 들어 대승의 空을 니까야의 기반에서 이해하면 대승의 空을 대승의 입장으로는 이해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입장이 서로 다른 주제에 대해 도반끼리 법담을 나눌 때 상대의 의견에 대해 어떤 때에는 50% 정도 동의하고, 어떤 때에는 70 ~80% 정도 동의하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산마루님께서는, 제가 혹시라도 챗지피티의 답변을 철석같이 믿기만 하여 니까야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취지의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이점 깊이 성찰하겠습니다.
또 한편, 제가 챗지피티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는 것은 다른 분들께서도 그러하시겠지만, 제가 잘 몰라서이기도 하고, 또는 제가 이해한 것이 경의 가르침에 들어맞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카페에 글을 올린 이유는: 저와 같은 문제 의식을 가지신 회원분이 혹시 계신다면 저의 질문을 참고하시어(변형하시거나 제 질문의 오류를 수정하시어) 무료 사용 챗지피티 등에 질문해보시라는 마음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면 실제 도반을 만나서 법담을 나누는 것 이상으로 도움을 받으실 수 있다고 생각했니다.
그리고 이곳에 오신 분들은 대체로 30년, 40년 이상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해 오신 분들이라서, 챗지피티의 답변이 어느 쪽을 바탕으로 답변했는지, 또는 어떤 논문이나 책을 참고했는지 대충 짐작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챗지피티의 답변에서 자신의 공부에 어떤 실마리를 찾으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상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이고 이와 같은 마음인데, 저도 이와 같다고 말씀 올립니다.
예, 산마루님. 감사합니다.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의(作意, manasikāra)'와 '사(思, cetana)'는 모두 초기 불교 교리 체계에서 '명(名, nāma)' 또는 '명신(名身, nāmakāya)'의 구성 요소에 속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방향성에 있어서 큰 차이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확정이 아니라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작의의 갈림길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경문, “작의의 집이 법의 집”이라고 하여 작의를 선법 혹은 불선법의 지속을 위한 전제로 지적합니다. 반면 사(의도)는 육입 단계에서 ‘의사식’이라는 아하라로 한번, 행취온인 육사신으로 또한번 언급되면서 신행의 시작과 완성에 개입합니다. 즉 ‘식집이 신집’이라는 말씀이겠지요. 이미 식식의 영향권 아래에서 진행되는 명색화의 흐름을 탄 것입니다.
@새벽 (1)의사식은 이미 저질러 버렸고, (2)육사신은 이미 식을 거친 촉을 연하여 성립하여 버렸으니 식을 배제할 도리가 없는 상태인 것이므로 돌이킬 방도를 찾을 위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벽 이때, 현실적인 관점에서 중시해야 할 ’부분‘은 아직 식의 분별이 완료되기 전인(분별되어질 법들) 육촉입처 입니다. 이 곳에서 식을 배제한 채로 니미따를 ‘올바로’ 혹은 ‘올바르지 않게’ 작의(의에 새김) 함으로써 불선의 뿌리인 탐진치를 증장할 것인지, 선법인 정견을 선두로 한 팔정도라는 막가를 걸을 것인지 선택하는 상황일 것입니다.
@새벽 법의 구분을 ‘선/불선’을 기준으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요즈음 법의 구분을 ‘위치’적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즐겨 합니다. 그러할 때, [작의]와 [사]는 같은 것은 아니되 다른 것도 아니지 않나….라는 단상이 스쳐가기도 합니다.
예, 새벽님. 말씀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을 들으니, ‘아, 어려운 말씀이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예전에 몇 번 공부했지만, 지금은 잊어버린 그 내용들(身, 食)을 다시 찾아서 읽고 공부하려니까 ‘아, 힘들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들 아비담마의 이 부분 해설을 읽어보셨겠지만, 직접 댓글에서 읽어보시면 또 다른 생각이 드실지도 모른다.’라고. 그래서 저는 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모든 마음에는 7가지 법은 반드시 들어있다고, 깊은 잠에 빠진 그 마음에도 7가지 법은 반드시 들어있다고, 그것은 바로 ‘촉, 수, 상, 사, 집중, 생명기능, 작의’이라고 한다네요.
그렇다면 우리는 명색에 나오는 ‘수, 상, 사, 촉, 작의’와 ‘육입-촉’을 거친 ‘수, 상, 사, 작의’는 어떻게 다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먼저 저는 ‘촉’을 이해할 때, ‘촉이 닿는다/닿게 한다면, 아마 그 촉이 일어난 마음을 대상에 닿게 하고, 뒤이어 일어나는 마음들도 대상에 닿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저는 챗지피티 등에서 읽은 글귀가 떠올라(즉, 챗지피티에서는 (촉은 마음이 대상에 닿도록 해주는 역할이 있다고만 했지, 뒤이어 오는 마음들을 대상에 닿게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게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아, 그렇구나. 마음이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난 촉은 그 마음이 소멸할 때 함께 소멸하고, 다음 마음이 일어날 때 다음 촉이 다시 일어나는구나. 그러므로 ‘촉은 다음에 잇따르는 마음들이 대상에 닿게 한다.’고 하면 잘못된 말이구나. 라는 그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육촉처가 소멸하는 것은 유전문에서는 안 되고, 환멸문에서는 된다. 그러니 유전문의 흐름에서 육촉처의 소멸을 말하지 말고 환멸문의 과정에서 육촉처의 소멸을 말하면 되겠구나. 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다시 명색의 ‘수, 상, 사, 작의’가 어떻게 ‘육입-촉’ 다음에 일어나는 마음들에 있는 ‘수, 상, 사, 작의’와 다른가를 살펴보면, 저는 이런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감독이 있습니다. 그 감독은 점심을 항상 선수 다섯명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래서 점심을 먹는다고 하면 반드시 감독과 선수 다섯 명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수 다섯 명이 점심을 먹는다고 하면 반드시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합을 하게 되면 감독과 선수 다섯 명이 운동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시합을 마치고 난 다음날에 감독과 선수 다섯 명이 점심을 먹을 때에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시합을 치렀기 때문에 감독과 선수 다섯 명은 그만큼 실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유가 적절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뜻입니다. 점심을 먹을 때 이 팀은 감독과 선수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식과 명색은 ㄱ렇게 마음이 일어날 때에는 명색이 함께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마치 우리반에는 선생님과 학생 20명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직접 운동장에서 시합하는 것은 ‘눈-형색-눈의 알음알이’가 화합하여 촉이 일어난 이후의 일에 비유되며,
이때 생겨나는 마음에 포함된, 우리 삶의 실질적인 ‘수, 상, 사, 작의’를 듯합니다. 시합을 마치고 나면 감독과 선수는 달라져 있을 것이므로, 그 다음에 구성되는 ‘식-명색’은 조금씩 변할 것 같습니다. 이상이 저의 의견이었습니다. 저의 추론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저의 잘못입니다. 이점, 널리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고요2님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추가해 주신 아비담마 내용은 잘 읽어 보았습니다. 고요2님의 방식대로 공부를 잘 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응원합니다. 두 가지만 짧게 이야기 하고 가겠습니다.
(1) 촉은 명명촉, 유대촉, 무명촉의 구분이 존재한다는 것,
(2) 식과 명색의 호연연기 관계에서 윤회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연기는 결국 고를 경험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인데, 식-->명색(식식), 명색-->육입(의사식), 육입-->촉(촉식), 이후 애, 취, 유, 생 등등(물질식)의 과정으로 이해 합니다.
질의하신 육입에서의 의(사)가 기반이 되어 마지막 처(육촉입처)에서 상에 대한 작의 여부에 따라 선법이나 불선법이 집 한다고 봅니다. 육입에서의 사는 단수안에 묶인 사이고, 작의는 두겹의 처에서 복수의 법들을 집 하는 것이지만 결국 명이나 사나 의가 같은 뿌리인데 과정만 그렇다고 이해 합니다.
제가 일전에 오프라인 모임을 제안 했었는데요, 이 카페를 통한 후학들이 모여 서로의 이해를 점검하고 공통되게 제기되는 이견이 있으면 같이 아위자 선생님께 오프라인으로 배움을 청하는 기회도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만... (물론 기회가 허락 되신다면 이라는 가정 하에)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감개무량합니다.
예전에 많은 분들께서 지나오셨던, 겨울이면 황량한 들판, 텅 빈 산길, 그리고 외로움(고독한 공부)이 느껴지는 그런 때가, 제게도 다시 찾아왔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제가 아직 수행이 부족하여 두 분의 말씀을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산마루님의 모임 제안과 계획은 너무 좋은데, 저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 ...)
그럼, 모든 분들께서 원하시는 바를 꼭 이루시기를 기원드리며, 오늘 많이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