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판지 코스모스 꽃길
며칠째 비가 오고 흐렸던 날씨가 개려는 구월 셋째 월요일이다. 어제는 외감 들녘으로 나가 가을장마에 해당하리만치 잦은 비에 보드랍게 자란 돌나물을 걷어왔다. 날이 밝아온 아침은 산행이나 산책은 자제하고 집에 머물며 도서관에서 빌려다 둔 박동욱이 풀어 쓴 ‘처음 만나는 한시’를 펼쳐 읽었다. 선인이 남긴 한시를 오늘날 감각에 맞게 적절한 비유를 들어 이해가 쉬웠다.
한시를 통해 가까이는 이삼백 년 전 선인이 살던 시대 자연과 사소한 일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돋보기를 끼지 않고 시인의 연보와 오언절구 칠언율시 원문까지 꼼꼼히 살펴 읽기는 한계가 따랐다. 아침나절은 한시에 홀려 보내고 점심때가 되어 끓는 물에 국수 면을 삶아냈다. 손수 채집해 찬으로 삼는 돌나물 물김치에 국수를 말았더니 한 끼 점심은 소박하게 때울 수 있었다.
아침나절 집에 머물며 책을 펼쳐봄은 일과 운영에 신축성을 꾀하기 위함이었다. 점심 식후는 오전에 나가지 못한 산책을 나섰다. 나중 저녁에 문학 동인이 모이는 자리가 예정되어 산책 후 그곳으로 바로 갈 셈이다. 산행이나 산책을 다녀와 귀가 후 다시 나서기는 절차가 번거로워서다. 격주 월요일 분리수거 재활용품을 챙겨 현관을 나서 아파트단지 뜰에 분류해두고 길을 나섰다.
동정동으로 나가 창원역을 출발해 낙동강 강가 신전 종점으로 가는 1번 마을버스를 탔다. 이른 아침에는 대산 일반산업단지 회사원이나 등교하는 학생들이 더러 탔으나 한낮은 한산했다. 내가 가려는 목적지는 주남저수지와 가까운 동판저수지다. 용강고개를 넘어간 용잠삼거리에서 주남저수지를 거친 동월마을을 지난 판신마을에서 내렸다. 동월과 판신의 앞 글자를 따 동판저수지다.
겨울이면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의 남쪽에 수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붙은 동판저수지다. 담수 면적은 주남저수지보다 좁으나 갯버들이 무성하고 수생식물도 가득 자랐다. 겨울이면 고니를 비롯해 쇠기러기들이 지내기 알맞은 곳이다. 동판저수지는 가을에 길고 긴 둑의 코스모스 꽃길이 유명하다. 오래전 무점마을의 한 독지가가 집념으로 심어 가꾼 코스모스 꽃길이다.
무점마을은 판신마을에서 일자형으로 아득한 저수지 둑길을 따라간 남쪽 끄트머리다. 코스모스 꽃길을 혼자 손으로 조성했던 마을의 노인은 아마 작고했을 테다. 이후 무점마을 주민들이 나서고 행정관서가 지원해 코스모스 꽃길은 잘 가꾸어져 해를 거듭할수록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 코로나가 닥치기 전에는 추석 전후 무점마을 코스모스 꽃길 축제를 열어 많은 탐방객이 다녀갔다.
보름께 전 구월 첫날 성근 빗방울이 듣는 속에 우산을 펼쳐 쓰고 주남저수지를 찾았더랬다. 그날 산남저수지와 주남저수지가 수문으로 경계를 이룬 용산마을에서 주남저수지 둑길을 걸었다. 동판저수지로 건너왔더니 주남저수지보다 꽃길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판신마을 가까이 백일홍이 화사하게 피었고 동판저수지 둑에는 코스모스를 잘 가꾸어 놓았는데 꽃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이후에도 가을장마라 할 만큼 비가 잦게 내린 속에 동판저수지 코스모스 꽃길이 궁금해 그 현장을 찾아갔다. 판신마을에서 둑길을 걸으니 백일홍은 여전히 꽃잎을 펼쳐 있고 저수지 수면에는 연잎과 등걸이 잠긴 갯버들이 무성했다. 수문을 지나 둑길로 드니 길섶 좌우에는 잎줄기가 무성해진 코스모스가 꽃봉오리를 맺어 꽃잎을 펼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들도 팔랑거렸다.
알록달록한 꽃잎을 펼치는 코스모스의 열병을 혼자 받고 지나기는 황송할 정도였다. 벼가 여무는 들녘이 끝난 진영과 자여에는 높은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산마루로는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둑이 끝난 쉼터에서 간식으로 가져간 삶은 고구마를 먹고 무점마을을 지나 덕산으로 갔다. 덕산 폐역에서 중앙천을 따라 남산리와 용전을 거쳐 신풍고개 옛길 터널을 지나 도계동까지 걸었다. 23.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