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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이 죽다
행 12:20-25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행 12:20-25 / [헤롯이 죽다] 헤롯이 가이사랴에 있는 동안 두로와 시돈의 대표들이 그를 만나러 왔다. 헤롯은 본래 이 두 도시 사람들을 매우 못마땅해하고 있었으므로 이 대표들은 왕의 시종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그를 내세워 헤롯에게 화평을 청하였다. 그 두 도시는 헤롯의 영토와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특히 식량은 헤롯이 다스리는 영토에서 사들여야만 하였다. 21) 알현을 허락할 날이 되자 헤롯은 용포를 입고 왕좌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22) 연설이 끝나자 그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인간의 음성이 아니라 신의 음성입니다' 하고 소리쳤다. 23) 그러자 그 순간 주님의 천사가 헤롯을 내리쳐 헤롯은 곧 병이 들어 몸에 구더기가 가득 슬어서 죽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 사람들에게서 예배를 받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24) [바나바와 사울]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더 널리 퍼지고 새로운 신도들이 날로 늘어갔다. 25) 바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임무를 마치자 요한 마가와 함께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갔다.
헤롯 왕은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통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헤롯은(20-23)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헤롯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대단한 노여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헤롯 왕은 두로와 시돈에 양식공급을 중단합니다. 당황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을 찾아와 화친을 청합니다. 헤롯은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헤롯은 은으로 만든 빛나는 옷을 입었으며 그 옷이 햇빛에 빛나자 아첨꾼들이 그를 신으로 추대하여 소리쳤다고 전합니다. 헤롯이 연설하기를 시작하자 그 열광은 절정에 달하게 되고 군중들은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범상치 않은 사람은 신으로, 기이하거나 거대한 자연 현상은 신적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헤롯은 이런 말을 듣고 즉시 교만해졌습니다. 사도행전 14장 8-18절을 보면 루스드라의 주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추대할 때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으며 그들을 만류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했던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그 누구도 헤롯 왕과 같이 교만해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주의 사자가 곧 치니 헤롯이 충이 먹어 죽습니다. 요세푸스는 헤롯의 죽음이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 5일 후에 죽게 됐고 몸이 썩어 벌레가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24-25) 헤롯의 비참한 죽음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기록함으로써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권력자는 일순간에 죽었습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던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강하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한편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라고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각각 힘대로 헌금을 모았습니다(11:30).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동안 베드로 구출 사건과 헤롯의 죽음이 있었는지 아니면 베드로 사건과 헤롯의 죽음 이후에 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헌금을 기근을 당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달합니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기근을 디베료 율리우스 알렉산더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발생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따라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시점은 주후 46년경으로 추정됩니다. 헤롯 아그립바가 주후 44년에 죽었으므로 바울과 바나바의 예루살렘 방문은 베드로의 구출 사건과 2년이 지난 뒤의 일입니다.
적용: 헤롯의 죽음은 당신이 생각하는 죽음의 이유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교만 때문에 죽었습니다. 교만은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헤롯에게는 그것이 옷이었고 목소리였습니다. 각각 교만하기 쉬운 것들이 있습니다. 외모, 은사, 소유 등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개인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자의 마지막은 헤롯과 같은 죽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울지라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신이 되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제사하려 할 때 옷을 찢고 그들을 막았습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호크마 주석
=====12:20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 헤롯은 보복 조처로 시돈과 두로 지방에 대해 아마 식량 공급을 중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로와 시돈은 솔로몬 시대 이후(왕상 5:9;스 3:7) 식량을 유대지역으로부터 수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12: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 앞절과 연관하여 볼 때 아마도 이 `날'은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절단과 `평화 조약 체결'을 발표하는 날이었던 듯하다(Haenchen). 이와 달리 여러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글을 인용하여 이 날이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영국에서 돌아온 승리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경기일 둘째날이었다고 말한다(Lenski, Whitelaw, H. Marshall, Bruce). 요세푸스가 묘사한 당시의 장면은 21-23절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므로 이보다 더 정확한 근거가 없는 한 부정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주가가 다음절과 아무 연관이 없는 한절을 삽입시켰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헤롯은 백성들이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한 날을 정하였던 것이고, 이와같은 축제일을 기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의 사절단이 헤롯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헤롯은 은으로 만든 빛나는 옷을 입었으며 그 옷이 햇빛에 빛나자 아첨꾼들이 그를 신으로 추대하여 소리쳤다고 전해진다. 백성을 효유(曉諭)한대 - `효유하다'란 말은 군중을 향해 연설을 한다는 의미다. 이는 어떤 공식적인 행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백성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아우투스'(* )는 직역하면 `그들에게'라고 해야 한다(새번역, 현대인의 성경,KJV, NASB, RSV,JB, LB). 그런데 지시대명사의 성격상 앞에서(20절) 언급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Haenchen). 하지만 22절에서 헤롯의 연설에 반응을 보인 것은 `군중'을 뜻하는 `데모스'(* )이다. 이는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축제 행사에 참석하고 있는 모든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헤롯은 경기일 둘째날 모여든 모든 군중들을 향해 승전을 기념하는 연설을 했을 것이다.
=====12:22
이것은 신의 소리요 -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대개의 경우 모든 자연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신들의 질서는 인간 세계와 밀접하며, 범상하지 않은 사람은 신으로, 기이하거나 거대한 자연 현상은 신적인 것으로 이해했다(14:11;28:6). 이와같은 범신론적인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신의 소리'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헤롯을 향해 `신의 소리'라고 외친 사람들을 대해 요세푸스는 막연히 `아첨꾼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아첨꾼들을 유대인들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비록 헬라나 로마 세계에서 범신론이 퍼져 있기는 해도 유일신 신앙을 가진 유대교는 그것을 배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함성은 `두로와 시돈의 사절단'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 이 말은 헤롯이 군중들이 자신을 추켜 세우는 함성을 듣고 매우 만족해 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루스드라에서 그 주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추대할 때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으며 그들을 만류(挽留)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했던 것(14:8-18)과 매우 대조적이다. 주의 사자가 곧 치니 - 헤롯의 불경건을 벌하기 위해 나타난 것은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해 나타난 것과 같은 `주의 사자'였다. 그가 행한 것은 헤롯을 `쳤다'는 것으로 7절에서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쳤을 때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리적인 힘을 가한 것이 아니라 그 사자가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어떤 조치를 취한 것으로 이해된다. 요세푸스는 헤롯의 죽음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기를 헤롯이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 5일 후에 죽게 됐는데 몸이 썩어 벌레가 생겨났다고 한다. 충이 먹어 - 헤롯이 죽어간 과정은 벌레에 먹히어 가는 과정이었다.어떻게 먹히게 된 것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교회를 박해했던 헤롯의 비참한 최후를 강조하는 것이다.누가는 이같은 묘사를 통해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맞게 되는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줌으로써 독재자들이 기타 교권주의자들이 박해를 못하도록 경고하려 했던 것같다. 헤롯을 죽게 한 것이 주의 사자였다는 것은 박해자를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 헤롯의 비참한 최후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는 본문은 기독교의 확장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이같은 형식의 문장은 6:7과 19:20에서도 나오는데 기독교의 거침없는 성장을 요약해 주고 있다.
=====12:25
부조(扶助)의 일을 마치고 - 본문은 문맥상 매우 이질적이다. 11:30과 직접 연결되는 이야기인데 사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동안 베드로 구출 사건과 헤롯의 죽음이 있었는지 아니면 베드로 사건과 헤롯의 죽음 이후에 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헌금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달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기근을 디베료 율리우스 알렉산더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발생한 것으로 기술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시점은 A.D.46년경으로 추정된다(F.F.Bruce). 그렇지만 헤롯 아그립바가 A.D.44년 죽었으므로 그들의 예루살렘 방문은 베드로의 구출 사건과 2년 이상의 시간 간격을 두고 이루어졌을 것이다.
< 설 교 >
흥망성쇠의 길
김 조 목사 / 행 12:20-25
바다이야기가 무슨 게이트인가 신비롭게 여겨 나라가 떠들썩하더니 정지적인 것보다 불법적인 도박판으로 차버린 사회의 한 면을 또 보게 되었습니다. 도박의 수법도 다양하여 가정에서 인터넷으로 까지 한다고 하니 자못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이 있어도 불법적이니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대박을 기대하는 한탕주의가 낳은 결과로 자신도 망치고 가정도 사회의 문제도 심각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업주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어떤 곳에서는 하루에도 몇 억씩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직장인들이 한평생 쓰지 아니하고 벌어도 될까 말까한 돈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쉽게 벌고 있으니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에 있으며 찾아 볼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를 원치 말지어다”(잠24:1)하셨고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니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요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라”(시37:1-2)하셨으니 악한 자와 불법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세상에서 흥하고 성하는 것 같으나 잠깐 후면 망해버릴 것이라 진정 흥하고 성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흥망성쇠의 길”이라 제목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엄청나게 핍박한 헤롯의 비참한 최후의 죽음과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였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강한 권력으로 야고보사도도 죽었고 베드로 사도마저 죽이기로 했던 헤롯이 크게 왕성할 것 같으나 실상은 패망의 길이었으니 참으로 흥하고 성하는 삶에 비결을 찾아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앞날을 생각하고 볼 줄 알아야 합니다(18-22절).
당장에 좋게 하려고 거짓으로 메꾸어 놓으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앞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현실만 생각하니 잠깐의 유익을 따라 불법과 부정으로 얼마가지 못하고 큰 화를 당하는 일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헤롯이 옥중에 베드로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구해주셨음을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앞날을 생각했다면 결코 망하지 않았을 것이요 감옥 지키던 파숫군들을 죽이라고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당장에 자기의 분노로 끔찍한 일을 했습니다. 또 외교적으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유대에서 나는 식량으로 살았는데 헤롯이 자기권력으로 현대판 식량을 무기화시켰습니다. 상대국 사람의 생존의 문제이기에 인도주의적 측면에서도 안되고 식량중단하는 비인격적이요 비정함을 보이는 것으로 자기의 감정으로 그랬으니 두로와 시돈 사람들도 얻기 위해 헤롯왕의 말을 신의 말이라고 했으니 자신의 입장과 유익 얻으려고 현실만 보고 있고 기독교 핍박이유도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했으니(3)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헤롯이나 야고보 죽은 것 같은 것 같이 보이나 헤롯의 죽음은 영원한 멸망이요 야고보 사도의 죽음은 영원한 영광임을 앞을 볼 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복입니다. 또한 하나님 위해 핍박당하는 교회의 승리입니다. 현실보다 내세를 보는 자 육의 일보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자가 흥하고 성함을 보시고 앞을 바라보고 사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22-23절).
헤롯이 자기 통치의 방법으로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였고 식량을 무기화하여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자기를 우상화 시키도록 했으니 헤롯의 효유즉 연설을 신의 소리라 듣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아니하여 헤롯은 패망했습니다. 그러나 14:에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쓰스와 허메의 신이라고 할 때 그들은 옷을 찢으며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신 것이라(14:8-18)한 것과 대조를 이루게 되어 흥망성쇠의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북한 김일성이 자기를 신으로 믿게 하였고 김정일 또한 그렇게 함으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지독한 패쇠주의자로 패망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말씀)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는(전12:13) 말씀에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되게 하려고 삼락교회라 이름 했습니다. 그러기에 삼락교회 성도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살아 받을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기 원합니다. 여기에 흥왕하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3. 하나님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24절).
벌레 먹어 죽는 헤롯에 비참한 최후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기독교의 부흥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6:7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교회의 수가 많아졌다고 했으니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는 것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것이 자신이 복 받고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이 흥왕하여 가는 길입니다. 이민교회에서 십일조 강조한 목사는 큰 교회되었으나 사람 눈치 보면서 그렇지 못한 교회는 성장이 없었다는 것이니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야곱이 받은 복을 주시겠다는(사58:13-14)것 기억하고 좀 미련스럽고 어리석은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 위에 굳게 서는 자가 흥왕하게 하나님이 역사해주시니 자신을 돌아보며 말씀 따라 순종하지 못하던 것 찾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하나님의 주신 복을 받아 흥왕하는 역사 있기를 축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흥망성쇠의 인생길에 흥하고 성하는 역사는 있어도 망하고 쇠잔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당장에 현실만 보고 그때만 면하려고 하니 결과는 패망입니다. 하나님의 손길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요, 흥왕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가 하나님이 축복하시니 흥왕하는 자입니다. 자기를 신격화 하려고 수단 방법 동원한 헤롯의 비참한 최후를 생각하고 삼락교회 성도들은 교회 이름처럼 삼위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삶이 형통해지시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삶이 되어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흥하고 성하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더하더라
행 12:24-25 / 양향모 목사
사도행전 12장은 교회의 수난으로 시작을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죽임을 당했고 베드로사도도 붙잡혀가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셔서 베드로사도를 기적적으로 탈옥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사도마저 죽임을 당하면 복음이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계획을 방해하는 헤롯왕을 비참하게 죽게 하심으로 사탄의 사주를 받는 세상이 아무리 방해하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은 오히려 더 흥왕하고 더 멀리 퍼져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흥왕하여 더하더라
본문 24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더한다고 하는 것은 복음전파로 인하여 많은 나라에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많은 나라에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마다 양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선포되어 바른 믿음을 가진 교회와 성도들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선포되지 않아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아무리 많아지고 성장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
오늘 본문 말씀에서 흥왕하여 더하여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부분적인 것만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넓은 의미에서 성경말씀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조금 좁히면 성경 말씀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나 혹은 사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조금 더 범위를 좁혀서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말씀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나라의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그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말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나라의 일 즉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무지 가르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면서 그들이 보고 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유독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이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흥왕하여
‘흥왕하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욱사노(αὐξάνω)라는 단어인데 자라다, 성장하다, 흥왕, 왕성, 번성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러 가지로 공격을 받지만 거기에 굴하거나 변질되지 않고 더 강하여 진다는 뜻입니다.
헤롯왕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지만 복음의 위력은 꺾이지 아니하고 점점 더 강하게 사람들에게 역사하여 더 강한 믿음으로 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헤롯왕을 처벌하시면서 그의 죄상을 몇 가지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신이 하는 말을 사람들이 신의 음성으로 듣게 한 죄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이 신의 음성으로 듣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죄였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사탄이 세상의 권력을 이용해서 공갈과 협박으로 복음을 약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복음을 변질시켜서 약하게 만듭니다. 복음에다가 다른 것을 조금씩 혼합시켜서 복음을 연약한 것으로 만듭니다. 처음에는 복음에다가 다른 것을 양념 치듯이 조금씩 넣지만 점점 더 많이 넣어서 다른 것으로 변질시켜버립니다.
오늘날 강단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 목사 자신의 경험담이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놓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의 사상이나 철학이나 도덕을 중심으로 세상에서 인간의 기쁨이나 행복을 위한 설교들이 더 많고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향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흥왕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변질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3) 더하더라
‘더하더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플레뒤노(πληθύνω)라는 단어입니다. 많은 수라는 단어에서 온 것으로 증가시키다, 증가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수가 많아졌다는 뜻이며 복음이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나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이 세계만방에 전파되어서 세계만방에 산재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도 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일에 그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세계만방에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권력을 동원하고 종교를 동원하고 이단들을 동원하고 심지어 교회 안에 거짓선생들을 침투시켜서 복음을 무력화하고 선교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이런 방해공작에 넘어가지 않고 바른 복음을 서계만방에 전파해나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모집하여 채우는 곳이 아닙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들을 이루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복음을 선포하여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이 아닌 인간의 말을 듣고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모여드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거기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도 복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하여 모인 사람이라면 그 사람들이 모인 곳은 교회가 아니고 거기 모인 사람들은 성도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이제는 세계 각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세계선교를 향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선교현장에 나가보면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제 사업을 하거나 의료 사업을 하거니 교육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제, 교육, 의료사업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보조적인 것인데 그것이 중점 사업이 되고 복음은 모습을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교사들 가운데는 이단들이나 거짓 선생들이 많이 있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바른 선교를 해야 합니다.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본문 25절에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라고 했습니다.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팔레스틴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교회에서 헌금을 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통하여 예루살렘교회에 보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조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갔던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다시 안디옥교회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잘 전달하고 무사하게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면 부조하는 일을 잘 하고 돌아 왔구나 라고 생각하면 되겠지만 이런 말씀 가운데도 잘 살펴보면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교회는 서로 협력을 해야 하는 교회였지만 여러 부분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구약의 제사나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할례를 행하는 것이나 율법을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였습니다. 사울을 중심으로 이신칭의의 복음을 강조하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예루살렘교회의 주장을 잘못된 것으로 이해하는 교회였습니다.
이런 각각 다른 견해를 가진 교회가 하나가 되기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면 복음전파에 큰 장애가 되었을 것입니다. 두 종류의 교회가 생겨서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하면 복음이 세계만방에 퍼지게 하는 일이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두 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에 바나바와 사울이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을 찾아가서 복음의 핵심을 확인하여 서로가 같은 복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확인 했습니다.
그래서 두 교회가 서로 다르거나 서로 대항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로 서로 도와주고 힘을 합하는 교회임을 확인 했습니다. 서로 힘을 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할 사명을 가진 교회임을 확인 한 것입니다.
서로 경쟁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라는 사실을 서로 느끼게 한 것이 부조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었을 때 안디옥교회에서 헌금을 하여 부조금을 보낸 것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고 서로 하나가 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지만 이 세상의 삶도 살아야 할 삶이기 때문에 육신의 양식도 중요한 것입니다. 당장 굶어서 죽는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기도 하고 무엇을 먹지 않고는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육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해서 먹고 사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중요한 일에 도움을 주는 것은 서로 좋은 마음을 가지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부조를 받은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변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을 것입니다. 장사 속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세상을 향해서 구제를 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은 이 복음이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려운 형편을 도와줌으로서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어려운 사람 약한 사람 편에서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신 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신약의 교회가 시작이 된 교회입니다. 베드로사도를 위시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복음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교회입니다. 이런 복음의 중심지이자 복음전파를 위해서 애쓰는 교회를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을 더 많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작은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많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안디옥교회로 돌아올 때 마가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왔습니다. 요한은 앞으로 바울이 세계선교를 할 때 함께 동행 하면서 선교를 도와줄 사람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복음을 많이 듣고 배운 지도자를 사울에게 붙여주었습니다. 안디옥교회를 인정하고 안디옥교회의 선교를 인정하고 협력하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잘 모르고 거부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도 복음을 잘 모르고 복음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계만방에 퍼져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늘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 우리의 사명임을 잊지 마시고 이 일에 앞장서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도우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
이규왕목사 / 행 12:25
옛날 양반에 대한 이미지는 요즈음 재벌에 대한 시선처럼 별로 곱지 않게 보는 것이 사회 통념이지만 원래 조선시대 부자들은 자기 집의 100리 안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양반들의 그러한 전통을 다 지킨 것이 아니라 상당수가 천민들을 등치는 악덕한 양반들이 더 많았지만 경주에 최 부자의 이야기는 좋은 가문의 전통을 잘 지킨 부자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경주 최 부잣집은 12대 300년에 걸쳐 ‘만석꾼’의 부(富)를 유지하는 가문으로 ‘주변 100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과 더불어 몇 가지의 철학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흉년에 땅을 사지 안 는다’는 것입니다. 재산 증식의 좋은 투자기회를 그냥 흘려버린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만 섬 이상의 재산은 내 돈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어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말하면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에 환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최 부잣집 부의 철학이 오늘날까지 잘 지켜왔다면 오늘 우리시대의 양극화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 조상들에게도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뜻하는 프랑스 격언인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전통이 우리 조상들에게도 지켜지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천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기독교회가 세계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1. 십자가 사랑을 본보인 예루살렘 교회
구약 교회도 사람들도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조상 대대로 믿어왔습니다. 물론 신약 교회도 그 전통을 따라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는 같은 교회인가 다른 교회인가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 교회일까요?
그것은 구약 교회는 유대인들만이 중심이 되어 신약교회와 동일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 신약교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신약 교회는 구약교회가 물려준 성경과 창조주 하나은 믿지만 유대인들만을 위한 전통인 장로들의 유전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유전을 구약 성경과 동등하게 여기는 유대인들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상에 최초로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는 지상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요 어머니 교회로 오늘 날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새끼를 친 교회라는 역사적인 정통성과 더불어 예루살렘교회가 물려준 신구약 성경과 안식 후 첫날인 주일마다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행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켜 지상교회의 어머니라고 한다면, 자식이 마땅히 부모의 좋은 점을 닮고 배우는 것처럼 오늘의 교회는 비록 이천년 전의 교회이지만 예루살렘 세운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번식한 오늘의 교회는 그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우고 기도를 드리고 교제를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부자들이 모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부자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로마 제국 식민지 치하에서 이리 저리 뜯기며 살았기 때문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다름 아닌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누구를 돕고 베풀기는커녕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옛글 순오지(旬五志)에 오비삼척(吾鼻三尺)이라는 말이 있는데 즉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사정이 다급하고 궁해서 다른 사람을 돌 볼 겨를이 없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바로 그러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베드로 사도로부터 십자가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는 중에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는 이기적인 사랑의 마음이, 이타적인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이 모인 예루살렘 교회는 자기보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헐벗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행 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그 이유는 다른 사람보다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재산을 팔아 교회에 가지고 나오면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예나 지금이나 너나 나나를 막론하고 아무리 재산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자기 것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자기보다 불쌍한 남을 위해 베푸는 사랑을 실천함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교회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전통을 세우고 지켜갔습니다.
좋은 전통은 세월이 아무리 오래 흘러가도 잘 지켜져야 하고 더 발전해 나가야만 희망이 있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물려준 아름다운 전통을 과연 오늘의 교회들이 얼마나 잘 계승발전 시켜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족하기 그지없으나 예루살렘 교회가 물려준 전통 중에 가장 잘 지키지 못하고 있는 취약한 점이 무엇이며 이제라도 그것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에 가장 취약한 점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나보다 못한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교회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 모델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안디옥교회와 성도들입니다.
2. 십자가의 사랑을 본받은 안디옥 교회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처음 시작이 매우 미미했던 예루살렘 교회가 120명에서 3000명으로 5000명으로 급성장하고 부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외부적인 핍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힌 베드로가 풀려나는 일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는 정말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함께 하심을 예루살렘 전 교인들이 확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더불어 에서 십자가의 사랑의 깨달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모범적인 교회로 사람들에게 한번 교회를 와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좋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와 같이 아름답게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을 시기하는 마귀가 훼방하기 위해 유대인들과 헤롯왕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핍박을 벌렸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교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떠나고 예루살렘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귀로 듣고 배우고 눈으로 목격하고 삶으로 체험한 십자가의 복음을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결과 예수께서 마지막에 명령하고 약속하신 십자가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지금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의 안디옥 지방까지 확산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구약의 율법처럼 유대인만을 위한 민족종교의 교과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민족과 국가를 뛰어 넘어 주님이 약속하신대로 만민에게 확산되어지는 세계종교임이 입증되었습니다.
(행 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행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물론 그 비결은 예루살렘 교회를 크게 부흥케 하신 성령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와 더불어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깨달은 성도들의 변화된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행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그 손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손이며,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손이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손이며 낮은 자를 높이시는 손이며 교만한 자를 낮추는 손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교회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받아야 할 가장 큰 복이 바로 전능하신 주님의 손이 함께하시는 복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그와 같은 주님의 손이 함께하실 때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서 배우고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로 인도하는 중에 교회는 점차 부흥 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은 지중해에서 동으로 27㎞ 지점에 '오론테스'산을 등지고 있는 도시로 주전 300년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중에 하나였던 '셀레우쿠스 니카토르'(Seleucus Nicator)에 의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도시입니다.
당시 인구는 50만을 넘는 대도시로 추측되며, 교회사가 '요세푸스'(Josepus)에 의하면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 세 번째로 큰 도시로 '동방의 여왕' 혹은 '동양의 로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위용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안디옥 지방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헬라 문화권 속에서 세계 복음화 전략에 있어서 매우 좋은 전진기지였습니다.
그와 같은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를 전담하기 위한 지도자로 바나바를 파송하므로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주님의 교회로 인정하고 받아드렸습니다.
(행 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행 11: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그러한 뜻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다른 사도가 아닌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담임목사로 파송한 것은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파송한 지도자인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까?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는 구브로 섬 출신의 부자였습니다. 그러한 바나바가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받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지체하지 않고 마음에 감동이 되는대로 자기의 소유지를 팔아 그 값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바쳐 가난한 형제들의 구제 자금으로 바쳤던 사랑의 실천가였습니다.
(행 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행 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예나 지금이나 자기의 재산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밭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결단은 아닙니다.
또한 바나바는 온화한 성격을 가진 조정자였습니다. 실 예를 들면 전에 기독교의 박해자였던 사울(바울)이 개종을 하고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고자 했지만, 다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 됨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러한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다메섹 길에서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또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했는가를 변호함으로 모든 불신을 없애주는 중재 사역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와 같은 바나바가 이제 첫 은혜를 받은 안디옥 교회를 아름답게 성장 시킬 좋은 지도자로 인정하고 파송을 한 것은 이방 교회라고 차별하지 않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교회로 공인을 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자기 혼자서가 아니라 유대인의 핍박을 피해 고향으로 간 사울을 찾아가서 설득하여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가서 함께 교회를 섬겼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말씀을 굳게 붙잡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세운 신학적인 전통을 전수시켰습니다. 예배를 접목하였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는 양적으로 부흥 성장하였으며, 질적으로 예루살렘 교회 못지않은 모범적인 교회로 성숙해졌습니다.
그것은 안디옥 교회 주변 사람들이 안디옥 교인들을 어떻게 불렀는가 하는 것을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행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닮고 배우고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호의적인 표현입니다. 안디옥에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듣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당시 안디옥은 도덕적으로는 가장 추악하게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르낭에 의하면 헬라의 아데미와 아폴로 신을 숭배한 데페네(Daphene) 신전에서는 음탕한 종교 의식이 행해졌고 각종 경기, 오락, 춤, 축제 등 방탕한 사치와 주연으로 가득 찬 제 2 의 소돔과 같은 도시였다고 합니다.
이 죄악의 도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이방인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처음으로 부여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물려준 신학적인 전통과 더불어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전통을 계승한 교회였습니다.
신앙은 뻥튀기가 아니기 때문에 신앙연조가 짧은 안디옥 교회는 신앙연조나 영적인 수준으로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비해 어리고 신앙이 미숙한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부모의 얼굴과 성품을 빼어 닮는 것처럼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의 좋은 전통을 빼어 닮은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어렵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십자가 사랑의 실천을 빼어 닮은 것입니다.
당시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도착하여 곧 일어날 한 가지를 예언하였습니다.
(행 11: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행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역사가 요세푸스의 말을 빌리면 A.D. 41-54 로마 제국의 4대 황제 시대에 큰 흉년이 네 차례나 있었는데 재위 4년과 7년 사이에는 팔레스타인에 큰 흉년이, 9년에는 헬라에 흉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안디옥교회는 아가보로 부터 들은 그 예언대로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을 만나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로 하고 헌금을 하였습니다.
(행 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행 11: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그것은 안디옥 교회가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교인들이 부자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천하에 흉년이 든다고 한 예언처럼 그들도 어려웠지만 안디옥 교회가 일찍이 예루살렘 교회에 복음의 빚진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전해 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교회가 물려준 전통이 아니었으면 안디옥 교회가 존재할 수 없고 자신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십자가의 사랑의 깨닫고 바나바로부터 예루살렘교회가 어떻게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였는가 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귓전으로 흘린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기고 그것을 본받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자고 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부자교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가보의 예언을 빌리면 천하에 흉년이 든다고 한 것을 보면 안디옥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배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준 예루살렘 교회를 도운 것입니다.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그것은 십자가 사랑이 바로 형제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고통을 자신들의 고통처럼 생각하였을 때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하나님은 그 같은 안디옥 교회를 예루살렘 교회 못지않게 세계 선교의 중심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후로 나머지 세계 선교는 예루살렘 교회가 아닌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확산되어 나가게 하셨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불신자들의 축복은 남에게 좋은 것을 거저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에게 좋은 것을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축복임을 깨닫고 십자가 사랑을 대물림하는 아름다운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행 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그것이 바로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이 이어가야 할 예루살렘교회가 세운 아름다운 전통이요 안디옥 교회가 본받아 실천한 아름다운 전통이요 오늘 우리 교회가 본받고 실천하여 대물림을 해야 할 아름다운 전통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많은 부채가 있음에도 선교를 축소하지 않고 확대해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우리 성도들이 이를 위해 헌금을 하고 밀알부 노숙자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공부방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아름다운 교회 전통을 이어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중국 선교와 실크로드 선교와 나머지 세계 선교를 위해 계속 쓰임을 받게 하시는 것은 바로 안디옥교회와 같은 축복임을 깨닫고 크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라
사도행전 12:20-24 / 김상복 목사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로 충만해 있습니다. 웃음이 충만한 사람은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은 언제나 착한 모습으로 충만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충만하신지요? 우리에게 충만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금년에 사도행전을 살펴보고 있는데, 사도행전은 오순절 이후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과 그 사역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충만한 것이 있습니다. 시편 86편 15절에 하나님은 긍휼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시다고 했습니다. 충만한 자비와 은혜와 긍휼로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 같아도 다 용서하시고 우리가 열 번씩 잘못하고 돌아와도 그대로 품어 주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오늘 성찬을 받을 것입니다. 성찬을 받으면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고백하고 우리에게 있는 질병과 고민과 문제들을 내어놓을 때 긍휼과 자비와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시고 축복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했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왔으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시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고 몸을 찢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 주셨으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속에 가득한 것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지요.
납달리 족속은 “주님의 축복으로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가문도 납달리 가문처럼 주님의 축복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충만했다”고 합니다. 너무 지혜로워서 하나님께서 “내가 여호수아를 네 후계자로 삼겠다. 네가 손을 얹어 안수하고 후계자로 임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렇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주님의 축복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다 가지고 계신 것들입니다. 은혜가 필요해서 은혜를 구하고, 진리가 필요해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해서 축복을 구하고, 지혜가 필요해서 지혜를 구할 때마다 언제나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하게 주십니다. 여러분이 이 성령으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부와 명예가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부와 명예도 하나님을 통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희망을 잃었으면 희망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요셉의 꿈처럼 희망을 꿈꾸십시오. 꿈이 없는 사람은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자신을 향한 꿈, 자녀를 향한 꿈, 하는 일에 대한 꿈, 무엇이든지 꿈으로 충만해야 삶에 생동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오순절 이후 기쁨이 충만하다”고 했고 “스데반과 집사들은 믿음, 지혜, 성령, 능력이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욥바의 다비다라는 여인은 “선행과 구제가 충만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 주셔서 평생 많은 선을 행하고 구제하며 살 수 있는 능력과 은총을 충만케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할 뿐 아니라 “선함이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善)이십니다. 하나님의 선이 가슴에 가득하여 말과 행동이 착한 바나바를 보며 사람들은 ‘저 사람은 어쩌면 저렇게 착하지?’라고 말합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여러분에게서 선이 쏟아질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로마교인들을 향해 “선함과 지식과 격려가 충만한 사람들”(롬15:14)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야고보는 “하늘의 지혜가 충만하면 순결해지고 평화와 부드러움과 양보와 자비와 선한 열매와 편견이 없고 위선이 없는 선한 것들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로 충만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하늘의 지혜로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선한 모습들이 예수 믿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열매들입니다.
제가 성령의 열매를 공부하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그동안 아홉 가지의 성령의 열매 중에 몇 개나 맺었나?’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언제 이 모든 영적인 열매를 맺을 것인가?’ 보통 고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너는 그런 열매가 하나도 없어도 괜찮아. 네 안에 살아계시고 너와 함께 영원히 계시는 성령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는 네 것이 아니고 네 안에 계신 성령님의 것이다. 네가 순결을 원하면 순결을,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부드러움이 필요하면 부드러움을, 양보와 용서가 필요하면 그것을 성령님께 구하라. 성령에 구할 때마다 주신다.’ 성령님께서 여러분 속에서 무엇인든지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성령님 안에 충만하게 있습니다. 선함과 영적인 열매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필요한 그 때와 장소에서 주저하지 말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여, 제가 세 번이나 참았습니다. 이제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그러나 참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인내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성령님께서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할 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것임을 알고 늘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헤롯왕은 분노로 충만했습니다. 헤롯이 스데반을 죽였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예수쟁이 한 명을 죽였더니 저렇게 좋아하네! 한 명 더 죽여야지’하고 베드로를 잡아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베드로를 끌어내어 죽이려고 했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옥문을 열고 베드로를 감옥에서 빼갔습니다. 헤롯은 너무 화가 나서 베드로를 이중 삼중으로 감시하던 보초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분이 가득 찬 헤롯은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라는 서북쪽 해안가에 쉬러 갔는데 그곳에서 두로와 시돈 사람들 때문에 “대단히 노여워했다”고 합니다. 헤롯은 분노와 증오가 충만했습니다.
분노가 가득한 사람은 위험합니다. 심하면 죽지요. 한 번 화를 낼 때마다 수억 개의 뇌 세포 덩어리가 죽습니다. 두려워하고 놀라고 화내고 짜증낼 때도 뇌 세포는 죽습니다. 모든 세포는 죽으면 재생이 되는데 뇌 세포는 재생이 되지 않습니다. 분노, 증오, 염려, 근심, 의심, 놀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주 놀라면 빨리 죽고 자주 화내도 빨리 죽습니다. 아마 치매에 걸릴지도 몰라요. 여러분 가운데 혹시 분노가 가득 한 채로 한 주를 보내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어느 사람 때문에, 어떤 일 때문에 가슴 깊숙이 분노나 미움이 자리 잡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조심하십시오.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어두워지면 세포들이 어두워지고 생명이 사그라집니다. 에너지가 소진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한참 욕을 했으면 그 분노 때문에 여러분이 죽습니다. 옛말에 욕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죠. 욕먹는 사람은 별 것 아닙니다. 그러나 욕 하는 사람은 분노와 미움이 가슴속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이는 것입니다. 혹시 그런 일이 있다면 오늘 성찬예식을 하면서 주님 앞에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끌어안고 있지 말고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평화를 체험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헤롯은 교만으로 충만했습니다. 헤롯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화가 잔뜩 나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 이유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곳 사람들이 헤롯의 지방에서 나는 양식을 먹고 산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 양식을 갖고 가서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의 부하를 시켜서 화평을 청했습니다. 헤롯왕 멀리서 왔으니까 세 도시가 합해서 헤롯왕 환영대회를 한 번 열자고 합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해변에 큰 돌로 만든 그리스 식 야외극장에 군중들이 모였습니다. 헤롯왕이 번쩍이는 하얀 옷을 입고 보좌에 앉으니 햇살이 비치자 그 모습이 너무 찬란합니다. 백성들은 환호를 하고, 헤롯은 연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21절). ‘효유’라는 말은 지금은 쓰지 않는 옛말인데 큰 소리로 연설한다는 뜻입니다. 연설하는 음성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사람들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다. 저 사람은 우리의 신이야!”라고 지나친 아부성 칭찬을 합니다.
지나친 아부를 하면 안 됩니다. 아부는 과장된 것이니까요. 헤롯왕은 “여러분, 그게 무슨 말 입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절대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가 신 인가 봐!’하며 자기가 그 신의 영광과 경배를 다 받았습니다. 큰 실수를 한 것이지요. 여러분이 남의 칭찬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목소리가 좋으시네요”라고 하면 “아니에요. 뭐가 좋아요. 나빠요”라고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내게 주신 은혜를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날 때부터 아주 멋진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십시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아,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 있나!’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선천적으로 아름답게 태어난 것을 보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할 때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해 여러분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부모님으로부터 그저 받은 것 밖에 없습니다.
선천적인 것은 너무 칭찬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잘 난 줄 알아요. 교만해져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너무 예쁘게 생긴 여덟 살 난 사내아이에게 “얘, 너 참 예쁘게 생겼구나!”했더니 이 아이가 "I know"(저도 알아요) 하더라고요. 사람들마다 예쁘다고 하니까 본인도 자기가 예쁜 것을 알고 있어요. 예쁘거나 선천적인 장점들에 대해서는 너무 칭찬하면 안 됩니다. 선천적인 장점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칭찬을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칭찬해야 할 것은, 자기 노력으로 잘 해서 성취하는 사람입니다. 아이가 늦게까지 앉아서 공부하고 있으면 칭찬해줘야 합니다. 올림픽 선수 중 장미란 씨 같은 분들은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얼마나 노력하는지 TV를 통해서 다들 보셨죠? 땀을 흘리며 애쓰고 애써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렇게 애써서 성취하는 사람들은 칭찬을 많이 해줄수록 좋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너무 칭찬하면 안됩니다. 제 딸 셋 중에도 그런 아이가 하나 있는데, 책을 읽으면 사진 찍어놓은 듯 몇 페이지, 몇 줄에 뭐가 있는지 다 알아요. 머리가 좋으니까 평소에 공부를 안 하고 시험 전날 공부해 버리고 말아요. 그런 것은 너무 칭찬할 일이 못 되지요. 노력한 것, 수고한 것, 성취한 것을 칭찬해 주면 힘을 얻어 더 잘하게 됩니다.
교만은 위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무척 싫어하십니다. 베드로전서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5:5)고 했습니다. 자기가 잘 하는 것을 잘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노래 참 잘 하시네요.” “아니에요. 저 노래 못 해요.” 이것은 비굴한 것이지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모든 영광을 언제나 하나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전도폭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1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훈련을 받은 분들의 공통적 특징이 있는데, 말씀하시고는 마지막에 하는 말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훈련 내용 속에 아예 들어 있습니다. 어떤 좋은 것, 선한 것, 축복, 장점이 있든지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줄 알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이 표현을 자주 쓰십시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해롯은 교만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요한에게 빛나는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요한이 놀라 엎드려 경배를 하자 천사가 요한의 손을 잡고 “이러면 안 됩니다. 나와 당신은 동료요,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종입니다. 나에게 절하고 경배하면 안 됩니다. 일어나시오.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계22:9)라며 요한의 경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즉시 장충(腸蟲)으로 충만해 죽었습니다. 헤롯왕은 자기가 하나님인 양 모든 영광을 받았습니다. 분노와 교만으로 충만한 헤롯에게 불행한 결과가 닥쳤습니다. 그의 몸이 장에 충(蟲)으로 충만해 졌습니다. 충이 갑자기 엉켜서 돌덩어리처럼 되어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졌습니다.
요세푸스라는 유대인 역사가가 쓴 책에 당시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사도바울 시대의 갈릴리의 장군이자 역사가로서 세 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의 책에 의하면 두로 사람들이 헤롯왕에게 “오늘 당신을 보니 보니까 당신이야 말로 인간이 아니고 인간을 능가하는 신이군요! 앞으로 당신을 신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헤롯은 갑자기 복통이 생겨서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졌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쳤다고 합니다. 헤롯은 집에 돌아간 지 5일 만에 죽었습니다. 그 때가 통치 7년, 그의 나이 54세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리며 사십시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름답게 만드실 때, 능력 있게 하시고 하는 일 마다 잘 되게 만드실 때, 여러분의 영적인 아름다움이 인격과 말과 표정에 나타나 칭찬받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림으로써 늘 주님의 축복을 체험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행 12:20-24 / 김이봉 목사
장로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잘 체계화 시킨 죤 칼빈은(John Calvin)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가진 모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지금까지도 모든 후진들에게 귀감이 되는 좋은 책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종교개혁 45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제네바에는 칼빈 교회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설교하던 단을 보니 본래는 카톨릭 성당이었던 건물이었기에 제단을 다 치우고 기둥에 나선형으로 올라 가는 계단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성경책 하나 올려놓을 만한 보면대 하나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설교자들의 의상과 심지어 안경까지도 금테 안경은 착용치 말라고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전하는 <말씀>보다 전하는 사람이 들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의 묘가 어느 것인지 조차 잘 모른다고 합니다.
저도 그 무덤을 보았지만 묘비도 없고, 오직 JC 라는 두 글자뿐인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아마 John Calvin의 약자가 아닌가 해서 그 무덤을 칼빈의 무덤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는 철저하게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라는 것으로 일관된 평생을 살고 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헤롯은 그와는 반대의 인물이었습니다.
1. 헤롯은 어떤 왕이었는가?
신약 성경에는 헤롯이 몇 사람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헤롯 1세의 손자 벌 되는 헤롯이었습니다.
이 자는 당시 로마 황제의 조카인 <가이우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차 이 <가이우스>가 로마 황제가 되면서(37년) 팔레스타인 지방에 왕으로 임명되어 <아그립바 1세>라는 호칭으로서 왕의 자리에 오른 자입니다.
본래 아부를 잘해서 얻은 왕위였다고 봅니다.
요즘도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면, 주변에서 잘 보인 사람들을 등용하는 것이 세상의 권력자들임은 변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헤롯은 왕이 된 후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덤으로 얻었고, 그 후 <가리우스>가 암살되고 <글라우디오>가 황제가 되었을 때(41년) 그에게도 어떻게나 잘 보였던지 총독들이 다스렸던 유다 지방까지 권한을 주어 방대한 권한을 행사했던 자입니다.
이 헤롯은 고도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당시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으려고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야고보>사도를 칼로 참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로부터 잘했다고 칭찬하니, 이제는 더 많은 기독교인들을 처단하려고, 예수의 수제자격인 베드로를 잡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적혀 있습니다.
베드로를 검거하여 옥에 감금하고, 보통 죄수들에게 하지 않는 이중 삼중의 경비를 강화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가 유월 절기인지라 유월절이 지난 후에 집행하려고 베드로를 단단히 가두고 지키게 했으나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베드로를 옥에서 꺼내 주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2장의 내용입니다.
권력의 자리에 올라서 자기의 힘이 강화되고 커지면 사람들은 다 변하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헤롯이 바로 그런 인물이 되었습니다.
권력자들이 교만해지면 사람들의 아부하는 칭찬에 도취되어 신격화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헤롯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2. 결국 헤롯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칠 때 도리어 크게 권세의 자리에 오르게 한 후에 그 교만으로 무너뜨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세계를 정복한 후 로마의 황제는 신이라고 하여 황제를 신격화 시키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기독교인들이 많은 박해와 수난을 당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헤롯도 자신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주변국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키면서 자신의 세력을 더욱 확장시키려 했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두로>와 <시돈>은 무역업을 주로 하는 작은 도시국가였습니다.
헤롯은 웬일인지 이들에게 좋은 감정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으로 곡물을 수출하는 것을 막아버렸습니다.
마치 북한이 남쪽을 대포동 미사일로 위협하듯이 곡물로 <두로>와 <시돈>을 압박하려고 했습니다.
식량난에 봉착한 <두로> 와 <시돈>사람들은 헤롯의 신하인 왕궁내실 담당자인 <블라스도>를 매수하여 헤롯 왕과 관계를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다 썼습니다.
이 헤롯에 대하여 요세푸스(Josephus)라는 유대인 역사가는 이렇게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성서시대의 역사를 많이 기록해 놓았는데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대략 이러합니다.
“헤롯이 가이사라에서 큰 행사를 하게 되었는데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를 위한 행사였다. 헤롯은 평소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 사이가 나빴다. <두로>와 <시돈>은 항구 도시로 무역 중심지였다. 이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헤롯은 유대지방에서 나는 양식을 먹기 때문에 양식을 가지고 저들을 길들이려 했다. 그런데 한동안 저들에게 양식 수출을 봉쇄해 버렸다. 이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왕의 침소를 담당한 <블라스도>에게 로비를 하여 풀어 달라고 하면서 친선을 도모하려고 했다.”
헤롯이 가이사라 에서 축제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얻고 <시돈>에서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참석시켰습니다.
헤롯이 연설할 때 박수 부대가 되어 열렬하게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그 모습이 잘 들어나 있습니다.
<시돈> 사람들이 얼마나 아부적인 칭찬을 했는지,‘이는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만 헤롯이 이렇게 자기를 열렬하게 칭찬하는 소리에 우쭐하여 자신이 신(神)처럼 붕 뜨는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3절에‘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함으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교회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날 은실로 짜여진 화려한 왕복을 입고 왕좌에 앉아 있는 헤롯의 모습은 태양 아래 빛나고 있었다. 그가 일어나 백성들 앞에 연설할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그 연설을 듣고 칭찬했다. 그때 올빼미 한 마리가 무대 기둥 위에 앉았는데 헤롯이 그 올빼미를 보는 순간 복통을 일으켜 쓰려졌고, 그의 신하들이 예루살렘 왕궁으로 옮겼는데 닷새 만에 숨을 거두었고, 죽기 전에 그의 몸은 이미 썩어서 벌레가 일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끔 연말에 연예인들의 시상식에서 보는 일입니다.
주연 배우상, 신인 텔런트상, 작품상, 감독상 등을 발표할 때 보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또 축구 선수들 중에 골을 넣고 기도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함이 너무나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3.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헤롯은 사람의 칭찬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그 교만이 그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헤롯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인물이었습니다.
헤롯은 교만으로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자초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하늘에 천사장 <루시퍼>가 교만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14:13절에“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라고 하는 말을 가증스럽게 여깁니다.
잠언 16:18절에“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조심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칭찬에 눈이 멀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내 몸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헤롯처럼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을 때, 더욱 더 겸손해지지 못하고 교만해졌으니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그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행여나 나에게 그런 유혹이 올 때는 단호하게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오늘도 무릎 꿇고 기도하는 생활을 이어져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장로교 소요리문답 제1조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라는 물음에 답이‘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 성경을 기록하던 사람들은, 성경을 필사하다가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붓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면서 썼다고 합니다.
우리가 셋째 계명을 범하는 죄를 지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맹세하는 자들처럼 거짓된 자들이 없습니다.
얼마 전 모피 사건 때 청문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Oh My God’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용하는 용어들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이란 말을 부담 없이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 준대로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좀 더 진지해진 기도라면 그저 <아버지!> 그렇게 호칭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꼬박꼬박 붙이는 분들이 없듯이 하나님 아버지께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이렇게 기도하는 것보다,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봅니다.
이렇게 하나님, 하나님, 하는 것 보다는 <아버지>라고 호칭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돈을 벌어서도 하나님께 영광이요,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었어도 하나님께 영광이요,
좋은 직장과 자리에 승진했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헤롯을 심판하신 하나님
행 12장 18~24절 / 김영규목사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그립바를 준엄하게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심판자이십니다. 종말적으로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종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끊임없이 진행됩니다. 누구든지 명백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도전하거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까지 다 심판을 받습니다. 아그립바의 심판을 보세요. 그는 세상에서 최고 권력자지만 하나님 앞에 초개같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권력자를 두려워 마세요. 오늘 헤롯의 심판을 보면서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참 신앙을 갖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게 죽은 파수군들
오늘 먼저 말씀드릴 것은 파수꾼들이 당한 억울한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기적으로 구출한 후에 감옥에서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18) 베드로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16명이나 되는 군인을 동원해서 지켰는데 죄수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소란이 일어났겠습니까? 감방장 이하 모든 옥졸들이 우왕좌왕 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롯은 너무나 사무적입니다.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19) 대수롭지 않다는 듯 파수꾼을 심문하고 죽이라는 간단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당시 로마법에 죄수가 탈출하면 간수가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으니 법대로 처리한 겁니다.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요 억울한 죽음입니다.
그러나 요즘도 억울한 죽음은 마찬 가집니다. 매년 약 25만 명의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은 각종 질병과 관련된 죽음입니다. 육체 질병, 정신 질환 등등. 그러나 매년 약 3만 명 이상이 질병 이외의 원인으로 사망합니다. 요즘도 하루 평균 20여명의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죽고, 매일 32명이 스스로 삶을 포기합니다.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라고 다 늙어서 죽는 것도 아닙니다. 매년 8200 명 정도가 30세가 되기 전에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철거를 반대하다가 죽고, 산불이 나서 죽고, 강도에게 죽고, 연쇄 살인범에게 죽고, 억울한 죽음이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죽음은 다 억울합니다. 요즘 우리는 매일성경을 통해서 전도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죽음은 모든 삶을 원점으로 돌려 놓습니다. 지혜자나 미련한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자나 비천한 사람이나, 유명 인사나 무명 인사나 죽음 앞에 동일합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 됩니다. 그러면 이 죽음의 문제를 누가 풀어줄까요?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합니까? 대통령에게 해야 합니까? 아니면 사회 운동가들이나, 자선 사업가들에게 호소해야 합니까? 도대체 이 억울한 죽음이 왜 일어나며,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헤롯에게 아첨하는 두로 시돈 사람들
본문에서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헤롯에게 아첨하는 두로와 시돈 사람들입니다. 두로 시돈이란 도시는 페니키아에 속한 해안의 도시들입니다. 이 도시들은 일찍부터 무역으로 돈을 벌어 웰빙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상업도시는 신앙이 약합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약합니다. 자유를 추구합니다. 그러니 아그립바 왕을 불쾌하게 만든 것은 당연합니다. 더구나 이 도시들은 헤롯의 영지에 포함된 지 불과 3년 이내입니다. 그래서 헤롯에게 세금을 제대로 바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20) 어찌 된 연고든지 헤롯은 이 지역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 식량을 무기로 위협했습니다. 상업도시는 농산물을 수입해야 합니다. 두로와 시돈 지역에 식량을 공급하는 곳은 유대 지역이었기 때문에 아그립바는 식량 공급을 하지 않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 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20)
이런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아그립바의 가장 가까운 신하에게 로비를 했습니다.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20) 지극히 인간적인 해결법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정치적 해결법을 찾습니다. 권력자에게 아첨하고, 돈 있는 사람에게 아첨합니다. 두로 시돈 사람들을 보세요. 식량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아첨을 합니다.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22) 속으로는 욕하면서 겉으로는 신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런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 했습니다. 왕이 있는 곳마다 백성들이 왕을 신으로 떠받드는 일이 일종의 관습이었습니다.
오늘 먹고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도 없는 아첨들을 하고 있습니까? 요즘 “꽃보다 남자”란 드라마가 인기입니다. 저는 드라마를 안 봐서 내용을 하나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느냐고요? 뉴스에 보면 다 나옵니다. 요즘 어떤 드라마가 뜨고 있는지, 내용이 뭔지? 요즘 꽃미남들이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얼굴이 반반하고, 돈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성질은 개 같든지 소 같든지 상관없습니다. 가치관이 고상하든지, 짐승 같든지 상관없습니다. 잘 생기고 돈 많으면 OK입니다. 완전 애니멀 수준의 인생들입니다. 나는 이런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불쾌합니다. 이런 드라마를 좋아라고 보는 사람들도 불쾌합니다. 그러나 내가 불쾌해하든지 말든지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니까 계속 만들겠지요?
문제는 이런 꽃남에게 정신 파는 여자들입니다. 한심합니다. 이런 한심한 부류에 예수쟁이들도 끼어 있습니다. 겉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속으로는 “돈이여, 돈이여!” 합니다. 오늘 신앙 좋기 때문에 신랑감으로 택하는 예수쟁이들이 몇 명이나 됩니까? 아무리 신앙 좋고 인격이 훌륭해도 돈이 안 보이면 결혼 안 해요. 솔직하게 말해 보세요. 처녀들이여, 엄마들이여, 도대체 누구에게 시집보내려 하십니까? 남자들은 돈 버는 여자 좋아하고, 여자들은 돈 많은 남자 좋아합니다. 기왕이면 돈 많은 것이 나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돈만 보는 것입니다.
돈은 필요하지만 만능은 아닙니다. 돈은 힘이 있지만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돈은 중요하지만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돈 때문에 권력자에게 아첨하고, 돈 때문에 불의와 타협하고, 돈 때문에 인간을 신으로 떠받들지 마세요.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신이라고 아첨하지는 마세요. 하나님께서 너무나 불쾌해 하십니다. 진노하십니다. “꼴값, 육갑 떨고 있구나!”
헤롯을 심판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아그립바를 심판하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준엄하게! 아그립바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내용이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고대사” 제19권 8장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아그립바가 전 유대를 통치한지 3년째 되던 해에 가이사랴로 내려왔다. 로마 황제 가이사의 안녕을 비는 축제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귀족들과 유력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축제 2일째 되는 날 아그립바는 은으로 만든 화려한 옷을 입고 이른 아침 극장으로 갔다. 아침 햇살이 그의 옷에 비치자 어찌나 휘황찬란하던지 보는 자들이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현란했다. 여기저기서 아그립바가 신이라는 아첨의 소리가 들려왔다. ‘신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가 지금까지는 왕을 인간으로서 존경해 왔으나 이제부터는 왕을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 인정하겠나이다!’ 그는 이 소리를 듣고 말리거나 야단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 그 순간 머리 위에 올빼미 한 마리가 줄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전에 그가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에 올빼미가 보였었다. 그 때에 예언자가 말하기를 이 새가 다시 나타난다면 당신은 5일 이내에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었다. 그래서 헤롯은 올빼미를 보자마자 깊은 슬픔에 빠지고 말았다. 그 때에 갑자기 그의 배에 무서운 통증이 일어났다. 그는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신이라고 부른 내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이 세상을 하직하라는 명령을 받았네. 하나님께서 그대들이 방금 내게 한 거짓말을 꾸짖고 계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대들에 의해 불멸의 존재로 환호를 받던 내가 죽음에 의해 급히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네. 하나님께서 내게 정하신 섭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악하게 살아서는 안 되며 선하게 살아야 할 것이네!’ 이 말을 하고 왕은 5일간 복통으로 고통하며 기진하여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때 그의 나이 54세였으며 왕에 오른 지 7년 째 되는 날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준엄합니다. 아그립바의 가장 큰 죄는 피조물 인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인간이 되어 하나님을 빙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 것이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고 모독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어떤 선한 일을 한다 해도 무의미하게 됩니다.
아그립바는 인간적으로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수성가형의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가 조부에게 살해당하자 로마로 피신했습니다. 로마에서 식객 생활을 하면서 모친 베르니케의 친구 안토니아의 호의를 입었습니다. 황제의 손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친분을 쌓고, 가이우스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는 남에게 선물 주기를 좋아했고, 이런 씀씀이 때문에 돈이 거덜 나고 빚더미에 않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추방되어 유대 땅 여기저기를 전전하기도 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다시 로마로 가서 카이우스가 황제가 되자 그의 호의로 유대 분봉왕이 되어 귀환합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그의 숙부 아켈라오, 빌립, 안티파스의 영지를 다 차지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 때, 로마의 가이우스 황제가 수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에 황제상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목숨을 걸고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치적 수완도 꽤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우스 황제가 암살당하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오를 때에 아그립바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에 가서 원로원을 설득하여 황제를 세우도록 작업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원로원은 공화정으로 돌이킬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클라우디우스 역시 황제에 오를 의사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런 양자 사이에서 작용한 것이 아그립바였습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오르자, 헤롯 대왕의 모든 영지를 아그립바에게 주도록 명령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아그립바의 통치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는 왕위에 있는 동안 전반 4년은 가이우스 황제에게 아첨하였다. 첫 3년간은 헤롯 빌립의 영토를 물려받아 다스리다가 4년째 되던 해에 부친 헤롯 대왕이 다스리던 영토를 다 얻게 되었다. 그의 통치 후반 3년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아첨하여 왕권을 누렸다. 이 기간에 유대, 사마리아, 가이사랴를 얻어 넓은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이 넓은 영지에서 무려 12백만 드라크마(425,000파운드)의 세금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워낙 씀씀이가 헤퍼서 항상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자수성가 하고, 정치적으로 성공하고, 성공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영광을 가로챌 때에는 엄중한 심판을 면치 못합니다. 아그립바는 벌레가 먹어 죽었습니다. 그 화려하던 인간이 겨우 벌레에게 먹히다니! 놀라운 결과 아닙니까? 인간은 영혼이 없다면 벌레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알지 못할 때 인간은 벌레와 같은 존재로 살다가, 벌레에게 먹혀 죽게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인생은 벌레 먹어 죽습니다. 이것은 인생이 지옥에 떨어지는 전주곡입니다. 우리는 세상 떠나기 전에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누가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을 가로막겠습니까?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방해하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하나님처럼 의지하지 마세요. 양식 떨어졌다고 사람에게 아첨하고, 이권 때문에 사람을 신처럼 떠받들지 마세요. 이 세상 어떤 왕보다도 하나님은 위해하십니다. 오늘 내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왕이십니다. 모든 피조물, 모든 육체, 모든 영혼, 모든 천사, 천국과 지옥, 현세와 내세를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오늘 누구에게 복종할는지, 누구에게 순종할는지 결단하세요.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사람을 믿고 의지하지는 마세요. 오직 하나님만이 위대하십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시146:1-10)
흥왕하는 하나님 말씀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행24)
하나님의 목표는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모든 것은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 본문 시작하면서 말씀드렸지요? 누가 인간의 모든 억울한 죽음을 풀어줍니까? 누가 이런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아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피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나를 죽음에서 건져내실 줄 믿습니다. 오늘 주님이 내 모든 병을 치료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주님이 내 마음의 고민을 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주님이 인간관계를 풀어주시고, 영혼과 육신과 물질의 모든 고통을 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오직 주님입니다.
주님 외에 세상 의지하는 것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두로 시돈 사람들이 양식 때문에 아그립바에게 아첨하면서 신이라고 했지만 다 부질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신이라고 했던 아그립바는 벌레를 이기지 못하고 벌레에게 먹혀죽는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자수성가하고, 권력을 얻고, 많은 땅을 차지했다고 거들먹거리던 아그립바는 단번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모든 것을 반납했습니다. 권력도 부귀도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누리고, 하나님이 거두어가시면 내놔야 합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자기 권력인 줄 알고 사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그립바를 단번에 제거해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오히려 복음이 힘을 얻었습니다. 만방에 전파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 권력이 아무리 교회를 탄압하려고 해도 하나님을 대항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 여론이, 혹은 악의적인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한다 해도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부흥케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세요.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세요. 오늘 우리의 사명은 복음 전파입니다. 우리 직업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우리의 직분은 복음 전파에 있습니다. 담대하게 가족 구원에 나서세요. 담대하게 친구를 구원하고, 직장 동료들을 구원하고, 이웃을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내 평생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악한 자의 결말
정 우목사 / 행 12:20-25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는 것처럼, 선한 자도 있고, 악한 자도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20세기, 100년 동안 누가 제일 악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마 독인의 히틀러일 것입니다. 그는 유태인 600만 명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것도 가스실에 넣어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는 길이길이 가장 악명 높은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캄보디아의 독재자 폴 포트가 있습니다.
그는 170만 명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 당시 캄보디아 인구가 750만 명입니다. 170만 명을 죽였으니 인구의 30%를 죽인 셈입니다. 지식인은 다 죽였습니다. 안경 낀 사람들도 다 죽였습니다. 손이 보드라운 사람들도 죽였습니다. 노동자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또한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있습니다. 그는 대숙청으로 100만 명 이상을 죽였습니다. 한 달에 평균 4만 명씩 죽였다고 합니다.
한 사람만 더 말씀드립니다. 아프리카의 대학살자 이디 아민이 있습니다. 우간다의 전 대통령입니다. 그는 고문으로 50만 명 이상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독재자들이 많습니다. 중국의 모택동, 북한의 김일성 등등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권세가 천년만년 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독인의 히틀러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불리해지자 더 이상 길이 없다고 생각해서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는 가택 연금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소련의 스탈린은 식사 중 쓰러졌는데, 독살설이 제기됩니다. 우간다의 이디 아민은 망명지에서 병사했습니다. 악한 자의 결말입니다. 잘 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악한 자의 결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을 듣고자 합니다.
<승승장구하는 헤롯>
이 사람은 여러 면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첫째,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신양 성경에는‘헤롯’이라는 이름이 네 사람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 왕의 손자입니다. 정식 이름은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만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은 ‘헤롯’하면 ‘헤롯 아그립바 1세’라고 알아 들으시길 바랍니다.
주후 37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로마 황제는 칼리굴라(주후 37-41, 재위)였습니다. 그런데 이 헤롯은 칼리굴라와 어릴 때 로마에서 같이 공부를 했습니다. 친구 사이입니다.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자 칼리굴라는 자기 어릴 때 친구였던 헤롯에게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헤롯의 이름을‘헤롯 아그립바 1세’라고 붙여주었습니다. 칼리굴라 황제는 그 후에 이 헤롯에게 자꾸 영토를 넓혀 주었습니다. 칼리굴라 황제는 주후 41년에 죽었습니다.
그 뒤에 황제가 된 사람은 클라우디우스(주후 41-54년, 재위)였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이 황제와도 연줄이 잘 닿는 사람이었습니다. 황제는 주후 41년 헤롯에게 이스라엘 땅 전체를 맡겼습니다. 이제는 분봉 왕이 아닙니다. 정식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헤롯의 위세는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둘째, 종교적으로도 승승장구했습니다.
헤롯은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출신 문제였습니다. 그는 정통 유대인 출신이 아니라 비정통 유대인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야곱 출신이 아니라 에서(에돔)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이것이 늘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죽으라고 싫어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교회를 없애려고 합니다. 교회를 없애면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헤롯 만세’합니다. 헤롯은 이제 교회의 일인자인 베드로도 죽이려고 합니다.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베드로만 죽이면 교회는 없어질 것이요, 그러면 자기는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때가 명절 기간입니다. 명절 기간에는 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명절이 끝나면 죽이려고 합니다. 철통같이 지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베드로를 감옥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어쨌든 그는 종교적으로도 승승장구한 사람이었습니다.
<심판받는 헤롯>
오늘 본문 20-23절은 이런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구출된지 약 1년 후 쯤 지난 때입니다. 헤롯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에게 찾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헤롯의 마음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헤롯이 두로와 시돈에 대해서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두로와 시돈에 대해서 식량 공급 중단 조치를 취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에 있으면서 부족함이 도시들이었습니다. 많은 물건들이 생산되었고, 또 수출도 잘 해서 매우 부유한 도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생산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식량입니다. 그래서 식량은 헤롯으로부터 공급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식량 공급 중단 조치를 취하니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헤롯에게 사절단을 보낸 것입니다. 사절단은 헤롯의 최측근인 블라스도라는 사람을 앞세워 화목하기를 청했습니다. 일이 잘 해결되었습니다.
사절단이 아직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을 때입니다. 주후 44년 8월 1일 날입니다. 헤롯은 로마 황제를 위해 축하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날은 자기를 후원해 주고 있는 클라우디우스 로마 황제가 영국 원정에서 승리했기에 축하하는 날이었고, 또한 그날이 로마 황제의 생일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왕복을 입고 백성들 앞에서 축하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소리칩니다. 아마 두로와 시돈의 사절단이 제일 크게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22절에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성경에는 이 부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만 유대 출신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은 이른 아침에 은으로 짠 왕복을 입고 야외극장에 들어섰다. 마침 그의 은으로 짠 왕복이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그러자 아첨꾼들이 헤롯을 향하여 신이라 말하며 이렇게 외쳤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지금까지는 우리가 왕을 인간으로만 공경했으나 이제부터는 불멸의 신으로 섬기겠나이다.’그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때 올빼미 한 마리가 무대 기둥 위에 앉았는데, 헤롯이 그 올빼미를 보는 순간 그는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 그 자리에 쓰러졌다. 놀란 측근들이 황급히 헤롯를 왕궁으로 옮겼지만 그는 닷새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이미 그의 몸은 벌레가 있었다.”
어떠십니까? 헤롯의 최후에 대해 성경의 기록과 요세푸스의 기록이 거의 비슷합니다.
우리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이 말씀을 보면,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헤롯의 죽음 원인입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닌 신의 소리이다’라고 말할 때에 헤롯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나는 신이 아니다. 사람이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는 고넬료가 있는 가이사랴에 갔을 때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종이요, 대사도인 베드로를 보고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엎드려 절했다’라는 뜻은 하나님에게 경배하듯 베드로에게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뭐라고 말한 줄 아십니까?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다”베드로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아시지요? 교향곡의 아버지는 하이든(1732-1809년)입니다. 그가 세상 떠나기 1년 전입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그의 걸작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관중들이 몰려왔습니다. 하이든은 나이도 많고 힘도 없었기에 휠체어를 타고 있었습니다. 공연이 끝나자 관중석에서는 하이든을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칩니다. 그러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아닙니다. 이 음악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기 저분,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다.”
그래서 훌륭한 신앙인은 잘되면 하나님 때문이라고 하고, 잘못되면 내가 부족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둘째, 주의 사자가 쳤습니다.
여기 주의 사자는 누구일까요?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전에 베드로가 갇혔을 때 베드로를 구출해준 천사라고 말합니다. 주의 사자가 베드로는 구해 주고, 헤롯은 쳤습니다. 헤롯은 벌레에게 먹혀 죽었습니다.
헤롯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황제와도 잘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불가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년만년 통치할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그가 몇 년간 왕으로 있었는지 아십니까? 700년이 아닙니다. 70년도 아닙니다. 단 7년입니다. 그것도 보잘 것 없는 벌레에게 먹혀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습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어느 경건한 시인의 탄식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당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죽을 때 고통도 없고, 힘도 강건하고, 재앙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탄식했습니다. 의인이 잘 되어야 하는데 의인은 고난당하고, 악인은 심판받아야 하는데 왜 형통합니까? 시인의 결론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73:17)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그들에게는‘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흥왕하는 교회>
교회는 유대인들의 박해와 헤롯의 핍박으로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24-2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사라졌습니까? 없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흥왕해졌습니다. 교회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지난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해 볼 때 어려운 때 교회는 더 흥왕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코로나 시대를 지내면서 안타까운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신앙이 위축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고, 함께 신앙생활 하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모이지 못하면 약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코로나가 속히 퇴치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다시 회복시켜 주셔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아름답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부의 태도입니다.
작금의 정부의 태도를 보면, 교회를 전염병의 온상처럼 보고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큰 일 날 것처럼 호도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교회발 감염비중이 이 7.7%입니다. 그런데 국민 인식은 44%입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왜곡된 보도로 교회발 감염비중이 6배나 더 부풀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텔레비전에 나와 교회의 입장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도 있었습니다. 서울 지하철 하루 이용객이 약 7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출퇴근 시간에는 소위 다닥다닥입니다. 그런데 단 한 명의 감염자도 안 나왔습니다. 백화점이나 대형 슈퍼마켓을 가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합니까? 또 식당은 어떻습니까? 거기는 마스크를 벗는 곳입니다. 식사하면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곳과 비교해서 교회는 어떻습니까? 딱 1시간 예배드립니다. 방역 수칙 지킵니다. 식당 운영도 하지 않습니다. 카페 운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몰매를 맞고 있습니다. 부당한 처사입니다. 물론 몇 몇 교회에서 감염자가 많이 나와 우리 사회에 걱정을 끼친 것은 유감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 전체 10만 교회 중 극히 일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오늘 말씀은 바나바와 사울과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새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점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인 헤롯은 마침내 심판하시고, 고난당하고, 핍박받는 교회는 다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성공이 진정한 성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실패가 진짜 실패가 아닐 수 있습니다. 부귀영화와 절대 권력을 누렸던 헤롯은 어느 한 순간 벌레에 먹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교회는 죽지 않고 오히려 흥왕했습니다.
오늘도 말씀 따라 살아가도 고난도 있고, 아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 주실 것입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악한 자가 잘 되기도 합니다. 성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제 이 사실 기억하시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셔서, 꼭 좋은 날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헤롯의 죽음과 말씀의 승리
이상호목사(세광교회) / 행 12:20-25
오늘은 야외예배인데 역사기행이기 때문에 진도나갑니다. 본문 전반부에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사도행전적인 시각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또한 선교적인 차원에서도 이 헤롯의 죽음은 큰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대헤롯 왕의 손자입니다. 대헤롯 다음으로 가장 큰 세력을 확보한 분봉왕입니다. 대헤롯 다음에는 헤롯 아켈라오, 안디바, 헤롯 빌립으로서 그 영역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서 세 분봉왕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형제들 간에는 권력다툼이 아주 심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그립바 1세에 이르러서는 다시 통일이 되어 형제들을 다 치워버리고 대헤롯 때보다도 영토가 더 확장되었습니다. 아그립바 1세는 이제 유다와 사마리아 전체까지 다스리는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그립바 1세는 대헤롯의 손자로서 이렇듯 큰 세력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애매한 의미를 가진 왕이었는데, 그 위에 왕이 또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로마 황제입니다. 그렇게 보면 왕 노릇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백성들의 환심도 사야하고, 로마 황제에게도 잘 보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 황제의 속셈은 첫째,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말아라, 로마 황제인 나를 잘 섬겨라'였습니다. 둘째는 유대와 사마리아 땅이 좀 시끄러운 곳인데 제발 조용해줬으면 좋겠다, 로마에 항거하는 소동이 없고, 혁명도 없어야겠다는 '팍스 로마나'를 원했던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그 엄청난 권력 앞에 온 세계가 조용하기를 바랍니다. 공동묘지의 고요함 같은 평화를 원했던 것입니다. 아무런 일도 없는 것 같으나 그 속에는 엄청난 죽음과 엄청난 억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을 내세웠는데, 이 헤롯이 유대 나라 왕이라고 앉아 있으니까 그동안은 유대인들이 조용합니다. 그리고 이 헤롯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는 재주도 있고, 비교적 나라를 잘 다스리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그립바 1세가 오늘 본문에서 죽습니다. 그것도 비참하게 죽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이 헤롯왕은 죽고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합니다. 말씀의 승리, 교회의 승리, 복음의 승리를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야고보 사도를 죽였습니다.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 특히 제사장과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야고보를 목베어 죽인 것입니다. 죽였더니 정말 그 무리들이 헤롯왕 만세를 부릅니다. 한사람을 죽여 좋아하니 이제 두 사람을 죽이면 더 좋아하겠구나, 그래서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인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에 잡아넣었는데 베드로는 뜻밖에도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헤롯 아그립바는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놓쳤구만... 이렇게 심상할 뿐 그 이상의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그립바는 자기가 왕된 데 대한 신앙적 이해가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그가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께서 왕되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헤롯은 왕이 된 이유야 어쨌든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권력 아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알 바도 아닙니다. 자기 영달, 자기 출세, 자기 향락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헤롯의 모습입니다. 결국은 야고보를 죽였지만 조금도 가책이 없습니다. 특별히 베드로를 죽이려고 했다가 그의 탈옥 사실을 알고는 파수꾼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처형해버립니다. 이것저것 알아볼 것도 없이 무조건 잡아다가 다짜고짜 죽여버립니다. 잔인무도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데 헤롯은 전혀 이 사실을 모릅니다. 관심이 없고 보니 알 길도 없습니다. 이것이 헤롯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정말 어리석고도 무지합니다. 그러니 깊은 고민도 없습니다. 사실은 두려워해야 할 시간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이렇게 했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전혀 신령한 고민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헤롯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헤롯에게 결정적인 시간이 왔습니다. 결정적인 시간, 심판의 시간입니다. 그것은 가난과 질병과 고통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영광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불의한 사람의 형통, 불의한 사람이 잘될 때에 그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축하할 일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그것으로 인하여 크게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불의하고 죄의 길을 가고 있다면 오히려 실패하게 되고, 병들게 되고, 일이 잘못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세상에서 세상 방법대로, 자기 뜻대로 살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예수를 믿자마자 사업이 잘돼야 하는데 반대로 점점 안됩니다. 그러니 예수 믿어서 손해 많이 보았다고 사람들이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영혼을 깨끗케 하시기 위하여 잘못된 그 동안의 생활을 청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지난날에 믿지 않던 사람으로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신앙적인 방법으로 다시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가치관도 바뀝니다. 그러면 장사하는 법도 바뀌어야 합니다. 생활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련을 겪는 것입니다. 시련을 다 겪게 하시면서 목적도, 세계관도, 방법도 바꾸어 놓고서야 그 다음에 복을 주십니다. 이 과정이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가졌던 생활 태도를 그대로 가지고 살면서 예수 믿자마자 축복만 듬뿍 받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헤롯을 심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가난과 역경과 실패가 아니라 영광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헤롯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거든 때가 온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한 곳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 거룩한 곳에 있습니다. 성공해서는 안될 사람이 성공합니다. 천하에 고약한 사람에게 돈이 주어집니다. 그건 망조입니다. 절대로 성공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의 노여움을 샀다고 했습니다. 헤롯과의 관계가 불편했던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헤롯의 마음에 거슬렸을까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두로와 시돈은 항구도시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식량 등을 무역하려고 하면 두로와 시돈의 항구를 통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륙에 살고 있으므로 바다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의 항구를 이용해야 하는데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던가 봅니다. 그래서 헤롯이 지금 그들을 혼내 주려고 벼르고 있던 참입니다. 이 사실을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헤롯과의 불편한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헤롯으로부터, 유대인으로부터 식량을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불 헤롯과 화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통하여 헤롯과 화목하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원치 않으면서도 헤롯에게 잘 보이려는 속셈이지요. 여기에도 때가 왔습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라고 했는데, 이 날이 과연 언제였을까요? 이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생일 축제가 있었습니다. 축제는 여러 날 계속되는데 그 둘째 날입니다. 헤롯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글라우디오를 즐겁게 하겠다고 가이사랴에서 축제를 준비했습니다. 거기 주둔하고 있던 많은 로마군인들을 초청하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 큰 잔치를 벌였는데, 로마 황제가 그 자리에 없으니까 결국은 자기가 황제처럼 나타나게 됩니다. 로마 황제를 위한 잔치라지만 결국은 자기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은으로 만든 찬란한 옷을 입고 상석에 앉아서 뭇시선으로부터 영광을 누렸던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이 이 때를 타서 왕의 환심을 사고,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헤롯이 일장 연설하고 난 후에 아첨하기를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이 소리가 아니라"(22)
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저들이 아그립바를 향하여 "당신을 이제부터 신으로 섬기겠나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사람이 아닙니다. 신입니다. 신으로 섬기겠습니다.' 헤롯왕은 너무 기분이 좋았겠지요. 아첨하는 사람이 대개 이런 식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그런 아첨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마땅히 백성들을 꾸짖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헤롯은 자기를 신이라고 추켜세우는 사람들 앞에서 오히려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칭찬과 아첨을 그대로 수용한 것입니다. 일은 그때에 일어났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때에 아그립바는 극장의 천막 기둥에 앉아있던 불길한 징조의 올빼미 새를 보았고, 그 순간에 복통이 일어나서 궁전으로 옮겨졌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닷새 후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으면서 아그립바는 이렇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너희가 나를 신이라고 부른 것으로 인해 나는 죽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불의한 중에 형통하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이 일이 잘되고, 장사가 잘되고, 잘살게 되거든 망조가 가까운 징조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거든 오히려 심판의 때가 가까웠음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하여 항상 민감해야 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경륜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장하십니다. 잘되든 못되든 그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훈련시키십니다. 때로는 내가 끊지 못한 것을 끊게도 하시고,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도 하시고, 내가 교만할 수밖에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겸손하게 만들기도 하시며, 허영의 사람을 진실의 사람이 되게 인도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신비로움 가운데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외면하면 안됩니다. 여기에 무감각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가 탈옥했는데도 이 사람 헤롯은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가책도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나아가 "신"이라고 하는 황홀한 호칭을 들으면서 이것을 침묵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누가 칭찬할 때 가만히 있으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예, 아니오"에서 지나치면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 '갸륵하다, 진실하다'고 할 때에 "아닙니다, 잘못 봤습니다. 나 그런 사람 아닙니다."하고 분명히 말하십시오.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침묵의 수용 : "당신은 신이요"하고 소리지를 때에 헤롯은 기분이 좋아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 그는 마침내 죽습니다. 죽을 때에 가서야 "너희가 나를 신이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죽는다"고 술회합니다. 신이라고 했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신이 아니오 라는 말을 못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헤롯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이런 죄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혹이라도 내게 영광이 돌아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시편 가운데서, 하나님이여 영광을 내게 돌리지 말아주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을 다시 읽어가다 보면 교회를 극단적으로 핍박하던 사람이 죽어버리고 나니까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졌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높아지더라, 바울이 높아지더라, 스데반이 높아지더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야고보는 죽었고, 베드로는 지금 쫓겨 다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 하더라고 합니다. 어느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말씀만이 흥왕해졌다는 것입니다. 곧 말씀의 승리입니다.
* 이제 우리가 가 볼 아펜젤러 순직기념관에서는 우리나라 초대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님의 삶과 순직에 대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국만리 조선땅에 와서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다가 성경번역사역을 위해 목포에 가다가 바로 이 앞바다에서 순직하셨습니다. 현장 설교는 계속될 것입니다.
가로챈 하나님의 영광
행 12장 20~25절 / 서금석목사
미국에 빈 브라이언트(Bean Brayant) 라는 유명한 대학축구코치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팀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몇가지 방법을 공개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모든 것이 잘 안되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고,
둘째, 모든 것이 그저 그러면 그것은 우리가 한 것이고,
셋째 모든 것이 매우 잘되면 그것은 당신이 한 것이다" 라는 세가지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그의 팀을 하나라 뭉치게 했습니다. 잘못된 것은 나에게, 그저 그런 것은 우리에게, 잘한 것은 남에게 돌릴 때 참 우정과 사랑도 싹트고 어떠한 인생의 찬바람도 능히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가정의 달에, 가정에서, 교회에서 곰곰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유익한 말입니다.
삶의 문제가 대부분 어디에서 발생합니까? 잘한 것은 내가 한 것이고 잘못된 것은 네가 한 것이라는 볼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올 때 - 우리의 관계는 삭막한 겨울처럼 얼어붙고 마는 것입니다.
이야기 하나 더 예를 들면,
어느 학생이 선생님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나에게 힘이 되는 좋은 말씀을 해 주세요" 선생님은 말합니다. "아무 무덤에든지 가서 실컷 죽은 사람을 욕하렴" 학생은 실컷 욕하고 왔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묻습니다. "그 죽은 사람이 뭐라고 말하던가?" "아무 말도 안하던 데요"
"그럼 내일은 가서 실컷 칭찬해 주렴" 학생은 이번에도 가서 마음껏 칭찬했습니다.
"당신은 성자요, 의인이요" 그리고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은 또다시 묻습니다.
"죽은 사람이 뭐라고 말하던가?" "아무 말도 안하던데요"
선생님은 결론을 내립니다. "네가 정말 멋지게 세상을 살려거든 세상사람들의 욕설과 비난과 멸시, 아니 그들의 칭찬에 대해서도 전혀 흔들려서는 안된다"
지난 주간 어떤 책을 읽다가 위의 두 이야기가 유난히 크게 보였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일심(一心)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하였습니다.
여기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1세로 조상 때부터 음탕하고 거만하며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롯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두를 통치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본래 헤롯의 통치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지리상으로 농산물도 생산하지 못하는 지역이었기에 하는수 없이 헤룻의 통치권 아래서 나는 물건을 가져다 먹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헤롯의 비위를 맞추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헤롯왕의 실세 중 블라스도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블라스도를 통하여 헤롯왕과 친하게 지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21)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位)에 앉아 백성을 효유(曉喩)한대
22)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 헤롯왕이 화친을 맺기 위해 날을 정하여 특별한 행사를 하던 날, 헤롯은 아주 화려한 왕복을 입고 높은 자리에 앉아서 백성들에게 효유했다고 했습니다. 헤롯의 옷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비치는 태양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습니다. '효유하다'는 본래 '알아듣게 일러주다'는 뜻이지만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한자어로 지금의 의미는 모인 사람들 앞에서 연설했다는 뜻입니다. 22절의 백성들은 유대인으로 보지 않고 두로와 시돈 사람들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헤롯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신의 소리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위대한 사람을 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의 연설 내용이 훌륭했던지 아니면 목소리가 매혹적이었던지 그도 아니면 높은 자리에 빛나는 옷이 멋있어 보였던지 알 수는 없지만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헤롯이 신적인 인물로 추앙 받게 되었습니다.
"23)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蟲)이 먹어 죽으니라"
헤롯은 신적인 인물로 추앙받으면서도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저자는 하나님의 천사가 헤롯을 내리쳤고 헤롯은 벌레에게 먹혀 죽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부분에 대하여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헤롯이 갑자기 엄청난 통증으로 궁전으로 옮겨졌고 닷새 후에 그 병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헤롯이 갑자기 병이 난 이유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중간에서 가로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다' 는 부분을 '이제부터 당신을 신으로 섬기겠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아랫사람이 아첨하면 대개 기분 좋아합니다. 하나님처럼 섬기겠다는 말에 침묵으로 인정한 헤롯은 마침내 비참하게 죽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몇가지 신앙의 교훈을 찾아봅니다.
1.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영적으로 항상 민감해야 합니다.
(1) 불의한 자의 형통은 결코 축하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을 보면 분명 잘못과 죄 속에서 사는데도 형통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건강해요. 직장에서 승진도 잘 돼요. 돈도 잘 벌어요. 자녀도 잘 돼요. -그런 가정 그런 사람들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저들을 저렇게 축복하시는데 나는 이 모양, 이 꼴인가? 하며 그들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내가 죄의 길을 간다고 하면 실패하고, 병들고, 일이 잘못되는 것이 정상입니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되는 것이 정상입니까? 안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세상에서 세상사는 방법으로 마음대로 살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자마자 사업도 잘 되고 가정도 형통하겠습니까? 아니면 잘 안되겠습니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만 예수 믿고 손해 보았다는 얘기 많이 들어요. 왜 하나님께서 예수 믿자 마자 바로 축복을 주시지 않고 시련을 주십니까?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고 나서 세상의 불의한 방법 그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하나님 방법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변화되지 않으니까 시련을 통해서 변하게 하십니다. 변화된 다음에 복을 주십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삶의 정당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과감한 청산을 의미합니다! 멋대로 사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결코 아닙니다. 잘못 사는데도 형통하다 -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증거입니다.
헤롯을 보실까요? 헤롯은 엉망으로 살았어요. 성적으로도 문란하고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엉망으로 살았다면 가난과 질병과 고통이 주어져야 하는데 왕의 권한이 점점 강해지는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통해 헤롯을 심판하셨습니다. 가난과 역경과 실패를 통해서가 아니라 영광과 형통이 심판으로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장 세대 종말의 표징들에 대한 말씀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15절) 때가 온 줄 알라 하셨습니다. 성공해서는 안될 사람이 성공하고, 그 자리에 있어서 안될 사람이 승진합니다.
- 심판이 닥쳐왔다는 사실로 깨달아야 합니다.
(2) 상황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매사에, 매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이 잘 될 때에는 잘 되는대로 그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일이 잘 안되면 안 되는대로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 만사를 무심하게, 무감각하게 보아 넘기는 것은 신실한 신앙인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 저 일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시는데 성도가 외면하거나 무심하게 지나쳐 버린대서야 되겠습니까?
헤롯은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가 감쪽같이 감옥에서 나갔는데도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양심의 가책이 없었어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사가, 사업상의 일이 자녀의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습니까? 그 속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신앙의 문제, 교회의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습니까? 그 속에도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매 순간, 매사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3)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항상 넘나드는 두 문이 있으니 바로 교만과 겸손입니다. 겸손하구나 하다 보면 언제인가 교만의 자리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헤롯에게 뭐라 했습니까?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다시 말씀드리면 "당신은 바로 신이오"라고 아첨했다는 말입니다. 헤롯이 부정하지 않았어요. '나는 신이 아니다'하지 않고 침묵했습니다. 침묵은 무언(無言)의 인정입니다. '당신은 신이오'라고 했을 때 헤롯은 기분이 좋아서 가만 있었어요. 가만히 있었기에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헤롯에게 신이라고 했기 때문에 헤롯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헤롯이 '나는 신이 아니오'라는 소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많은 상처와 갈등은 바로 우리 자신이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임을 아셔야 합니다.
칭찬들을 때 기분 좋지요? 책망을 들을 때는 어떻습니까? 기분이 나쁘지요. 그러나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일로 인해 칭찬 받을 때 내가 잘나서 칭찬 받는 줄 알면 언젠가는 반드시 시험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재능있습니다. 사회에서도 유능합니다. 많은 사람이 칭찬과 기대를 합니다. 그렇다가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난받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럴 수도 있지'하면서 비난하는 / 책망하는 사람에게 화도 내고 서운해 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문제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받습니다.
벧전4:10-11 "10 각각 은사(恩賜)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목사도 목회하면서 시험 받을 때 있어요. 내가 목회 잘해서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으로 착각할 때입니다. 아닙니다.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주시니까 힘 주시니까 하는 것입니다. 영광은 누구에게?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도, 성가대도, 선교회 봉사도, 내가 영광받으려 하면 시험들어요. 일종의 교만입니다.
누구에게 영광 돌려야 합니까? 하나님께.
헤롯이 벌레먹혀 죽은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너는 신이라'했을 때 베드로 처럼 '나도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했어요. 침묵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가로챘어요. 교만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왜 교만해 집니까? 한마디로 착각해서입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외면하시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어요. 큰소리치지 말아요.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겸손해야 해요. 감사해야 해요. 후배 목사가 쓴 글을 겸손하게 다 읽었어요. 그 목사는 해마다 임원훈련이 끝나면 시험 보는데 시험문제 '우리교회가 좋은 점 100가지 쓰기' 잠깐동안 쓰는 사람도 있고 영영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매 순간 겸손하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상처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2.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은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예수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와 불이익을 당한 경우가 있지요? 때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 잘 믿으면 복만 주셔야지 박해는 무엇이냐? 물론 예수 잘 믿으면 틀림없이 복 받습니다. 그러나 박해도 있어요. 기독교역사에서도,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교회와 성도가 많이 핍박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을 심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輕蔑)히 여기리라"(삼상2:30)
교회가 핍박받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를 반드시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교회를 핍박하면 하나님께서 당장 심판하셨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리 하시지 않습니다. 당장 얻어터지고 벼락이라도 한번 꽝치면 '이크'하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구나 깨달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불의한 방법으로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이 있습니까? 내버려 두세요. 조용히 지켜만 보세요.반드시 자신들의 함정에 빠져 망할 때가 옵니다. 당장은 승리한 것 같지만 두고 보세요. 반드시 심판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핍박하는 자를 심판하사는 방법입니다. 헤롯을 보세요.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를 목베어 죽였어요. 단순히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의 환상을 사기 위해서 였습니다. 자기 왕위를 유리하게 보존하기 위한 욕심 때문에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그래도 헤롯은 무사했어요. 기고 만장하여 베드로까지 잡아 가두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왕은 가이사랴에 가서 '당신은 신이다'소리를 들으며 화려한 옷에 높은 자리에 앉아 멋진 연설을 하는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중에 벌레에 먹혀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자기가 지은 죄와 파논 함정에 빠져 심판받게 하십니다.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핍박하는 자를 심판하실 때 핍박하는 바로 그 순간에 벼락이라도 내리치시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 떨며 하나님께 머리를 숙일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핍박받는 입장에서는 자기가 의로워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켜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구나. 자기의 의로움, 자기 능력이라 착각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핍박하는 자를 반드시 심판하시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핍박을 통해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은 더 순수해 지고 강해지지 않습니까? 헤롯이 하나님께 심판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헤롯의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박해 때문에 온 교회와 성도들은 모두 모여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와 교회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박해가 온다' '뭔가 잘 안풀린다'하면 모두가 모여서 합심하여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뭔가 잘 안풀리십니까?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일도 뭔가 잘 안 풀리는 것 같습니까? 온 성도가 합심하여 간절하게 하나님께 빌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도 예루살렘 교회는 그를 위해 간절히 빌었습니다.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핍박하는 자가 심판 받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 하나님께서 내 신앙이 더 순수해 지고 더 강건해 지기를 원하시는구나' 깨닫고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면서 믿음의 자세와 생활을 가다듬고 바로 해야 합니다.
3. 교회는 박해를 받기는 해도 반드시 성장합니다.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 하더라"(표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믿는 사람이 많어졌다)
기독교 역사상 교회나 성도 개인이나 수많은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긴 햇지만 교회는 더욱더 성장해왔습니다. 박해가 교회를 문닫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려움은 있었지만 반드시 극복되었습니다. 야고보가 순교당했습니다. 베드로도 쫓겨 다니고 잇습니다. 그래도 믿는 사람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보시면 박해 뒤에 반드시 교회부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시련 뒤에 반드시 사람이 모여드는 성장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헤롯이 죽고 나서 하나님 말씀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헤롯은 어떤 자였습니까? 한마디로 교만한 자였습니다. 육신적 생각, 육신적 생활로 가득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죽고나자 말씀이 충만해 지고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때 내 마음 속에 하나님 말씀이 흥왕하여 집니까? 말씀의 감격이 넘칩니까? 말씀의 뿌리가 내리겠습니까? 내 마음에서 헤롯과 같은 육신적 생각과 교만이 없어질 때. 그럴 때 영적인 것들이 일어나고 거룩한 것들이 넘쳐나게 됩니다. 내 속에도, 우리 속에도 헤롯과 같은 것들이 버티고 있으면 말씀이 뿌리 내리기도 힘들고 뿌리 내리지 못하는 말씀이 무슨 결실을 맺겠습니까? 겸손하게, 신령하게 생각하며 살아야지요.
또 하나 박해는 이기기만 하면 수지 맞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통해 시련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요셉이 그랬어요. 박해와 시련을 통해 순수하지 못했던 것들이 다 닦여집니다. 녹들이 제하여 집니다. 어린애들은 병을 앓고 나면 단단해지고 약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요즈음 교회 건축이 마지막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10월이나 11월중에 새 교회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힘들다고 느껴집니다' 가장 힘든 때가 눈앞에 있습니다. 저 강만 건너면 푸른 초원이 보이는데, 저 강을 건너야 할텐데 하는 생각입니다.
힘은 들겠지만 강만 건너면 됩니다. 제가 건축하면서 건축헌금 얘기 잘 안해도 성도들은 건축헌금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 많습니다. 입당할 때 헌금 얘기 다시 한번할 때가 올 겁니다. 고비입니다. 이겨야지요. 온 성도가 마음을 모으고 믿음으로 정성을 하나님께 모으면 문제 없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건축하다가 보면 반드시 고비가 옵니다. 처음 헌금할 때는 그래도 쉬워요. 그런데 두 세 번 하게 되면 힘도 들고 헌금은 잘 안나오고 그래서 성도도 목사도 힘이 들지요.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이 고비만 지나면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습니다. 환희의 기쁨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박해는 있었지만 교회는 성장했듯 어려움은 있겠지만 교회는 지어집니다. 왜? 하나님의 교회니까. 이 어려움은 저와 여러분이 서로서로 나눠집시다. 여러분에게만 어려운 짐 지라 하지 않겠습니다.
잘못된 것은 내 탓, 그저 그런 것은 우리 탓, 잘된 것은 네 탓으로 여기며 삽시다. 비난과 칭찬에도 초연하게 대처합시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항상 민감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음성을 들으면서 또 교회와 성도들 핍박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돌아보며 핍박을 이기노라면 교회는 부흥하고 성도는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전건축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기도와 마음을 합쳐 고비를 잘 넘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심는대로 갚아주실 줄 믿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두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흥왕하는 새해. 신년
행 12장 24절 / 주바나바목사
부산 송월타월을 이룬 “박찬수”회장은 경북 청송군 깊은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산골마을에는 몇 가정 되지 않지만 모두 조상귀신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의 모친도 조상귀신을 섬겼는데 그 조상을 섬기므로 잘되기는커녕 어려움만 계속되었고 찌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범하고 적극적이었던 그의 모친은 조상의 귀신단지를 방망이로 다 깨어 부수고 하는 말이 “귀신이 있다면 효험이 있어야지. 이게 뭐야” 하면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주일이 되어 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주일날 예배당에서 안내하고 있던 집사님은 박찬수의 모친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이곳엔 무엇 하러 왔소!”라고 물으면서 문전박대했습니다. 박찬수씨 어머니는 안내 집사님께 예수 믿으러 왔다고 대답하니 안내 집사님은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교회 문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박찬수씨 어머니는 “뭐라고! 나같이 복 없는 년도 예수 믿고 복 받으려고 왔다”고 말하면서 집사님을 제치고 그날 이후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 후 아들인 박찬수는 장로가 되고, 그의 사업이 날로 번창 되었습니다.
지금도 송월타월 회사의 중역가운데 청송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그 한 가정이 예수 믿고 복을 받게 되니 그 마을이 모두 예수를 믿고 영육 간에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박찬수 회장은 오래 전 고인이 되었지만 후손들이 회사의 대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고 박찬수 회장의 막내아들인 박병대 송월타올 회장은 송월타월을 발전시켜 우리나라 타월 제조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이 되게 했습니다. 현재 브랜드 인지도가 70%를 차지하고, 국내 시장 점유율은 35%로 국내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요 브랜드인 松月(송월) 뿐 아니라 로베르타, 란체티, 샤보렌, Sweet Heart(스위트 하트), 카운테스마라, 아날도바시니 등 다양한 브랜드를 선보이며 타월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베트남 호치민에 송월비나 법인을 설립하여 날로 흥왕하는 기업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월리엄 제임스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업을 하는 사람은 흥왕하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사업이 성공하게 됨을 말합니다. ‘흥왕’이란 용어가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번창하고 세력이 매우 왕성하게 퍼져나가는 것을 의미하기에 영어로는 프러리쉬(flourish)라고 말합니다.
1913년에 저술된 이승만 대통령의 『한국 교회의 핍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기독교 항일민족운동의 한 획을 그은 [105인 사건]의 전말을 생생하게 기록한 것으로, 일본의 탄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민족과 독립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는 모습을 기록한 책입니다.
일부 내용 가운데 일본 사람이 합방을 전후하여 조선인을 4부류로 분류한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수의 백성으로서 무식하고 양순하여 관인을 범같이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둘째는 이완용과 송병준같이 일본에 충성하는 자를 말합니다.
셋째는 주색잡기에 빠져 세상일을 잊고 사는 자들인데 이런 이들은 일본 사람들이 염려하지 않았고, 더러 항일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어 백성의 존경을 받았으나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고, 유배당하고, 옥에 갇혀 두려울 것이 못 되었습니다.
넷째는 수훈도 많고 자기 지방에서 다소간의 명망이 있는 자들인데 어찌 보면 일본에 복종하는 듯도 하고, 어찌 보면 ‘너는 너, 나는 나’로 여기는 듯도 하여 남과 잘 섞이지 않고, 일본의 주권자가 벼슬하라 하면 공손히 거절하고, 교회 속에 묻혀 교육이나 전도에 종사를 합니다.
혹 이들에게 일본인들이 돈을 주며 비밀 청탁하여도 듣지 않고 혹 주색잡기로 유혹하여도 이에 빠져들지 않으니 예수교인들은 이와 같이 일본 관리들과 반대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 교회는 일본 관리들에게 두려움이 되고 백성들에게는 조국의 어두운 시기에 빛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핍박에도 불구하고 더욱 흥왕하고 힘을 얻었습니다. 교회의 흥왕은 이와 같은 말씀의 원리에 교회가 굳게 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가 살면 민족이 삽니다. 흥왕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통한 하나님 말씀의 역사입니다.
초대교회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흥왕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이 복음의 말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나니 흥분되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서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새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이 흥왕하면 언제나 혈기왕성해서 산소망이 넘치며, 전도도 하게 되고, 선한 사업도 하게 되고, 교회도 세우게 됩니다.
죽은 송장에는 활동이 없지만, 살아있고 말씀이 흥왕하는 교회는 쉬지 않고 바쁘게 일하게 됩니다. 성도들에게도 말씀이 흥왕하면 생명이 약동합니다. 삶이 적극적입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확실합니다. 삶의 원동력과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말씀의 부흥역사입니다. 이 세상에 교회가 탄생되고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가능해졌습니다. 주의 말씀이 임하는 곳마다 믿는 성도들의 수를 점점 더해서 흥왕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사도행전에 흥왕에 대한 기사를 3곳에서 반복하며 전합니다.
첫 번째는 6장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두 번째는 오늘 본문 12장24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그리고 세 번째 기록입니다. 19장20절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이렇게 한 성경책에 거의 동일한 내용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강조하여 깨우치는 메시지가 있음을 알게 합니다. 우리말에 ‘왕성하여’ 혹은 ‘흥왕하여’라고 번역된 원어의 뜻은 ‘자라가다, 성장하다, 퍼져나가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할 때, 자라가고 퍼져갈 때, 많이 번져갈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렇게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세 번에 걸쳐서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할 때 나타난 일들을 기사를 중심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첫째로는, 사도행전 6장7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졌습니다. 말씀이 흥왕하면 교회의 성도의 수가 증가합니다. 전도와 선교의 열매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할 때 삼천 명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점점 늘어나서 남자의 숫자만 해도 약 오천 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인의 숫자가 늘어가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도들이 감당해야 할 일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을 구제하는 일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히브리파 교인들은 구제가 잘 되는데, 헬라파 교인들에게 구제가 잘 안 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자연적으로 원망과 불평이 헬라파 사람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이때 사도들이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교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교회의 구제하는 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력해야 하겠다고 결정하여 7집사들을 세웁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하여져서 제자의 수가 더욱 많아지고, 심지어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십자가의 도에 복종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습니다만 당시 제사장의 무리는 약 2천명에서 8천명의 제사장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유대종교지도자요 율법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지면 복음을 믿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교회가 부흥을 체험하게 됩니다. 교회는 말씀이 흥왕해야 합니다.
둘째로, 핍박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흥왕하여 넉넉히 승리토록 인도 하셨습니다. 바로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에 더욱 흥왕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박해를 통하여 부흥한 교회임을 보여줍니다.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통해 부흥한 교회임을 사가들은 말합니다. 1866년 개신교 최초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 강변에서 순교한 이후 한국교회는 엄청난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일제 36년 동안,그리고 해방과 남북분단,6ㆍ25한국전쟁을 통해 한반도는 순교의 피로 흥건히 적셨습니다.
마침내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은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의 피를 흘린 평양에서 발원하여 온 나라에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복음이 번져 나갔습니다. 순교의 피가 말씀의 부흥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일찍이 초대교회 시대의 초대교회 교부 가운데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AD)은 이렇게 설파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 전파가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이르는 장면입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사탄도 가만히 있지 않고 같이 활동하기에 복음이 전파를 방해하는 핍박이 항상 뒤따랐는데, 그 핍박이 극에 달한 때였습니다. 헤롯이 세베대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를 죽임으로 사도로서 첫 번째 순교자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수제자 베드로를 잡어 옥에 가두었습니다. 전점 더 가중되는 핍박입니다. 이 때 교회는 핍박을 이기기 위해 성도들이 모여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어려움을 만난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의 천사가 옥에 갇혀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옥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모르게 옥문을 열어주며 베드로를 풀어줍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 나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헤롯은 진노하여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베드로를 잡아 죽이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베드로가 다시 잡혀서 죽는 것이 아니라, 헤롯에게 재앙이 내립니다.
23절입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어 죽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백성들이 그의 말을 “신의 소리”라고 숭배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의 베드로와 헤롯의 대결은 베드로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를 일컬어 성경은 ‘베드로가 점점 흥왕했다’고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흥왕했다”고 말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베드로와 헤롯의 싸움이었지만, 이면적으로는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었습니다. 말씀의 승리입니다. 핍박이 이기지 못하는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는 곳마다 신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고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이 불붙는 곳마다 말씀이 죄를 내어 쫓고 회개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러니 말씀은 교회에 부흥을 가지고 옵니다. 흥왕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직 성경, 오직 말씀이 힘이 있고 세력을 얻어 교회를 흥왕케 합니다.
셋째로, 악한 영들조차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십니다. 영적전쟁에서의 흥왕입니다. 다른 문화권 즉 선교지에서의 흥왕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어떤 사람들이 강퍅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도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십자가의 도를 비방하자, 거기를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약 2년 3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 19장입니다. 그곳에서 헬라인들도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병든 자에게 얹으니까 악한 영이 떠나 병고침이 나타납니다. 그 결과 수다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두려워 떨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자복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심지어 마술을 믿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점치는 책들을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이유는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나타나 악한 영들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선교의 땅, 이교도의 땅에서의 말씀의 흥왕입니다.
Calvin 은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혜를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을 제쳐 놓고 다른 길로 가면 아무리 진리를 알려고 해도 이미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생각할 때 그의 말씀이 우리를 조명하는 방법 이 외의 다른 방법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언제나 성경 말씀에 붙잡혀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심령이 부흥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부흥을 체험합니다. 회심과 회개가 일어납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흥왕의 은혜가 입합니다. 흥왕의 축복을 체험합니다.
인생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보다 흥왕한 삶을 원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흥왕하는 삶이 어떤 삶인가를 바른 판단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더라도 흥왕하는 삶을 위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잘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말씀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성경을 첫째로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의 부흥입니다.
흥왕하는 말씀의 역사란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전파되고, 여러 사람들에게 가르쳐지고, 말씀을 배운 사람들이 말씀을 좇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의 사람은 말씀 안에서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새롭게하고 승리합니다. 새해에 우리교회와 우리들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에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이런 축복이 가득하기를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김영규목사 / 행 12:25-13:3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바나바와 사울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1장에서 12장까지이고, 후반부는 13장에서 28장까지입니다. 전반부의 중심인물은 베드로 사도이고, 후반부의 중심인물은 바울 사도입니다. 전반부의 중심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이고, 후반부의 중심 교회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전환이 나타납니다. 첫째로, 베드로 사도에서 바울 사도로 역할이 넘어가는 전환입니다. 둘째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역할이 넘어가는 전환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교회의 설립과 복음 전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 건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표는 하나님 나라 건설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8-19) 주님이 목표하신 하나님 나라는 오순절 성령 강림과 예루살렘 교회 창설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 사도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가이사랴, 샤론 지역 두로와 시돈으로, 이방인 고넬료에게로 퍼져나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베드로 사도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의 역할은 안디옥 교회의 몫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예루살렘 교회의 한계는 유대인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정통파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사마리아도, 샤론 지역 사람들도, 가이사랴 사람들도 이방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유대인의 범주에 속합니다. 혈통적으로 그렇고, 지역적으로 그렇고, 종교 문화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2:11-14)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제자요, 오순절 성령을 처음 받은 자요, 최초 교회의 설립자요, 최초 이방인 전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동 영역은 유대 사회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의 의식구조 속에는 유대인의 문화와, 유대인의 전통, 유대인의 의식이 깔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설립자로, 최초 복음의 전파자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역할은 안디옥 교회로 넘기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베드로 사도에서 바울 사도로 역할을 넘기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이것은 상징성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복음의 선물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주었습니다. 큰 선물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전해준 복음으로 예루살렘 교회보다 더욱 부흥했습니다.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보다 더 커졌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 고마움을 물질적인 것으로 일부나마 갚았습니다. 흉년 든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구제금을 전달해 준 것입니다. 그 구제금을 전달했던 사람은 바나바와 사울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전달한 후에 얼마간 있다가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머물지 않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 시대가 아니라 안디옥 교회 시대를 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듯이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지역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각 교회마다 일정한 역할을 맡기십니다. 모든 교회가 똑 같은 분량, 똑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마다 맡겨주신 일이 다르고, 대상이 다르고, 목회 방법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위적으로 어떤 교회를 만들기 위해 수단을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서로 닮으려고 억지를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구성원이 다릅니다. 지역이 다릅니다. 문화가 다르고 정서가 다릅니다. 안디옥 교회가 새로 세워졌다고 해서 안디옥 교회는 좋고 예루살렘 교회는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마다 자기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합니다.(고전7:7) 우리 정윤교회는 학교 안에 세워졌습니다. 지역적으로 상일동과 강일동 망월동, 하남 지역을 담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지역에, 우리 교회를 세우셨을까요? 우리 교회만의 사명을 찾아서 열심히 섬기는 정윤교회가 됩시다. 다만 주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됩시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본문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1) 여기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언급됩니다.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 여기 기록된 순서는 어떤 서열일까요? 대략 연령순으로 추측됩니다. 바나바는 가장 연장자였고, 사울은 가장 나이가 적었습니다.
첫째는 바나바입니다. 바나바에 대해서는 앞서 상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둘째는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은 히브리식 이름인데, “니게르”는 그의 별명입니다. “니게르”란 말은 “Nivger”인데 라틴어로 검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nigro, 즉 흑인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피부가 검다는 뜻인지, 아니면 오늘날 통상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하듯이 지역적인 의미의 이름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피부색과 상관없이 아프리카 대륙에 살면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시므온은 유대계 사람인데 아프리카에 이주해 살았기 때문에 “니게르”란 별명이 붙은 것 같습니다.
셋째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입니다. 라틴어로 빛이란 의미의 “LUX”에서 온 말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루기오”(Louvkio")가 누가 복음을 기록한 누가와 동일 인물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루기오가 로마서 16장 1절에 언급된 바울의 친척과 동일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구레네 출신이란 점뿐입니다. 구레네(Kurhnai'o")는 아프리카 북부 해안, 지금의 리비아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역사적으로 구레네란 도시는 크레타 섬 출신의 그리스인들이 건설했습니다. 그 후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되고, 프톨레마이오스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가, BC96년 경 로마에 양도되었습니다. 헬라 문화권이기 때문에 헬라어를 사용했으며, 피부색이 검은 흑인들보다는 오히려 셈계나 유럽계 사람들이 많이 건너가 살았습니다.
넷째는 마나엔(Manahvn)입니다. 이름의 뜻은 “위로자”입니다. 마나엔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입니다. “젖동생”이란 말은 “suvntrofo"”인데, “suvn”(함께)과 “trevfw”(양육하다)의 뜻입니다. 분봉왕 헤롯이란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안티파스는 헤롯 대왕의 아들로, 부친 사후에 로마에 의해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는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아주 고약한 왕으로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가로챘고, 이를 책망하는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였습니다. 그는 조카인 아그립바 1세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고올(GAUL) 지역으로 유배되어 거기서 사망했습니다. 이런 고약한 왕과 함께 자란 사람이 마나엔인데, 안티파스와는 전혀 반대의 인생길을 걸었습니다. 안티파스가 세상 왕권에 매달렸다면, 마나엔은 전능하신 왕이신 주님께 충성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안티파스가 사람을 죽이고 사악한 삶을 살 때에, 마나엔은 사람들을 살리는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양육 조건이 같다고 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같은 젖을 먹고 자랐는데 하나는 위로자 구원자가 되고 하나는 파괴자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인물은 사울입니다. 사울에 대해서는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본문이 안디옥 교회의 다섯 명의 지도자를 언급한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바로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를 바꾼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라면, 그 교회를 우뚝 세운 사람이 바로 이 다섯 명의 지도자들입니다. 지도자는 배의 선장과 같고, 비행기의 기장과 같습니다. 거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지도자에 의해 좌우됩니다. 얼마 전 US AIR WAYS 의 A320 여객기가 허드슨 강에 불시착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뉴욕의 라과디아(LaGuardia)공항을 이륙한지 4분 후에 고도 3200피트(약1000m) 지점에서 엔진 두 개가 동시에 정지해버렸습니다. 이륙할 때에 새가 엔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이면 손 쓸 사이 없이 그냥 추락합니다. 그러나 이 비행기의 기장 “C. B. Sullenberger”씨는 침착하게 비행기를 조종하여 빌딩 숲을 피해 허드슨 강에 안착시켜 승객 전원이 무사히 구조되었습니다. 이 기장은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F-4 전투기를 7년간 조종했고, 1980년 US AIRWAYS 에 입사하여 지금까지 근무했습니다. 이런 긴급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이런 가정을 해 봅시다. 이 여객기의 기장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확률적으로 살아날 가망성이 거의 없었을 겁니다. 지도자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지도자의 결정 하나로 나라가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합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잘 살던 필리핀이 왜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까? 지도자를 잘 못 만나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왜 킬링필드가 생겨났습니까? 오늘날 북한 사람들이 왜 굶주립니까?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그렇습니다.
요즘은 지도자가 경시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경영자가 될 수 있고, 누구든지 국가원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맘에 안 들면 맘대로 욕하고 비난합니다. 어떤 권위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그 지도자가 잘 되었든지, 잘못 되었든지! 지도자를 잘못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모세 시대 애굽의 파라오나, 현재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체제가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지도자에 따라 구성원 전체의 운명이 좌우됩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가벼운 자리가 결코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교회는 더욱 더 지도자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만일 모세가 아니었다면, 만일 베드로가 아니었다면, 만일 바울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로 가고 하나님의 교회는 어디로 갔을까요?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습니다. 40만 명이 추위를 무릅쓰고 줄을 서서 조문을 했습니다. 그 분의 훌륭한 점이 뭡니까? 교회만 살피지 않고 나라도 살피고 민족도 살피는 안목입니다. 필요할 때는 불의에 항거하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권력자보다는 약자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좁은 공동체보다는 전체를 아우르는 노력입니다. 아마 김수환 추기경 때문에 가톨릭 교회는 엄청나게 부흥할 겁니다. 오늘 우리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거꾸로 가지는 않습니까? 교회 크기를 자랑하고, 숫자를 자랑하고, 재산을 자랑하고, 건물을 자랑하고, 새로운 프로그램 도입에 정신없고, 불의에는 눈 감고, 물질 축복에 매달리고, 세상을 변화시킬 생각은 않고 교권 쟁탈에 여념이 없습니다. 나는 가톨릭 교인들이 열린 예배나 프로그램을 따라서 교회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릅니다. 오늘의 개신교인들은 왜 그렇게 교회를 옮겨 다니는지 몰라요. 섬기는 일에는 관심 없고 섬김 받는 일에만 관심이 많아요. 밤낮 무슨 공부만 해서 그런지 머리만 커져서 아는 것이 너무 많아요. 식자우환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있고 많은 지도자가 있지만 존경받지 못합니다. 그 역시 모든 책임은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소명의식 없는 삯군들에 의해 참 지도자들이 설 자리를 잃어갑니다. 여기에 분별력 없이 스타를 따라 몰려다니는 무리들(o[clo" :crowds)이 문제입니다. 양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좋은 지도자를 분별하는 안목입니다. 참 지도자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삯군의 소리만 들려온다면 불행은 맡아 놓은 당상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다섯 명의 지도자에 의해 진로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연합했습니다. 같은 뜻을 품었습니다.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결의를 했습니다. 같이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최고의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을 알아보고 따라준 안디옥 교인들도 꽤 안목이 높고 복을 받을만한 교인들입니다. 평생 좋은 지도자를 분별할 줄 알고, 좋은 지도자 만나서 복 받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의 사역 원리입니다. 그들은 어떤 원리를 따라 교회를 세우고, 어떤 원리로써 복음을 전했을까요? 본문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역 원리가 나옵니다.
첫 번째 사역 원리는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일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2-3) 성령의 지시를 따르라! 그것이 성직 수행의 제일 원리입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성령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성령의 지시를 따르라는 것은 인간의 생각을 배제하라는 말입니다. 요즘 자기 기분을 성령의 감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의 지시는 내 감정이 아닙니다. 내 기분이 아닙니다. 내 자존심이나 내 생각이 아닙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 바울이 로마에 가는 것은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붙잡혀 감옥에 갇힌다고 예언했습니다. 같은 성령이 바울에게는 가라고 하시고, 아가보에게는 가면 고난 받는다고 하십니다. 서로 상충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두 내용은 결코 상충되지 않습니다. 바울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상충되는 것이지, 주님 중심으로 생각하면 상충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로마로 가라! 붙잡혀 고난 받는 일이 있을 것이지만 담대하게 나아가라! 그것이 바로 성령의 뜻입니다. 선택은 바울의 몫입니다. 일신상의 안녕을 생각한다면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른다면 고난 받을지라도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뜻을 함부로 해석하지 마세요. 내게 유리하면 주님의 뜻이고, 내게 불리하면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감정이나 기분, 내 판단에 좌우되지 마세요. 오직 성령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안디옥 교회에 내려진 구체적인 성령의 지시가 뭡니까?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2) 성령이 시키실 일을 위해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안디옥 교회에 다섯 명의 지도자가 단합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너무나 중요한 일꾼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중에 둘을 떼어 내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가장 유능한 두 사람을! 바나바와 사울은 멋진 콤비입니다. 바나바는 부드럽고 강력한 통합의 지도자입니다. 바울은 영적 능력이 탁월한 복음 전파자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둘을 한꺼번에 잃는 것은 너무나 큰 손해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차출 당하는 것이 성령의 뜻입니다. 성령의 지시를 따를 때, 주님이 그 교회를 축복하십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내어줌으로써 오히려 더 부흥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 마가의 거취문제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돌아올 때 요한 마가를 데리고 왔습니다.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마가를 첫 번째 선교 여행에 동행시켰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구브로 선교가 끝나고 소아시아 버가에 상륙하자마자 선교를 포기하고 되돌갔습니다.(행13:13) 어떤 사유로 중도 포기했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로 본다면 성령의 부름을 받았던 바나바와 사울은 끝까지 갔고, 성령의 지시가 없이 출발했던 마가는 중도 하차했습니다. 성령의 소리를 듣지 않고 주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반드시 주님의 부르심, 성령의 소리를 확실히 듣고 주의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오늘 오후 예배 때에 선거를 위한 공동의회가 있습니다. 네 분의 장로님과, 다섯 분의 안수집사님, 열다섯 분의 권사님을 뽑는 선거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누가 뽑힐까 궁금해 합니다. 어떤 분들은 경력과 이력을 꼼꼼히 따져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입니다.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하세요. 과연 장로로 합당한지, 집사나 권사로 섬길 능력이 있는지?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성령님의 판단으로 투표하세요. 선거 결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성령의 뜻으로 알고 순복해야 합니다. 뽑힌 사람이나 뽑히지 못한 사람이나 자신을 돌아보며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의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때에 성령의 지시가 들려옵니까? 첫째로, 주를 섬길 때에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섬기다”(leitourgevw)란 말은 봉사의 뜻도 있지만 70인경에 보면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지칭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배입니다. 성령의 지시가 누구에게 옵니까? 예배자에게 옵니다. 여러분 항상 예배를 통해서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특히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지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금식할 때에 성령의 지시가 들려왔습니다. 금식은 구약 시대의 명령입니다.(슥7:5,8:19) 금식은 회개의 표시입니다. 자기 죄를 슬퍼하고 고치는 표식입니다. 신약 교회도 금식의 전통이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아도, 주님이 떠나가시면 금식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9:15) 바른 금식은 항상 그릇된 삶을 고치고 바른 삶을 실천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기도하고 안수했습니다
두 번째 사역 원리는 기도입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3) 안수는 임직의 의미입니다. 성경에 보면 왕이든지 제사장이든지 선지자든지 안수로 임직했습니다. 안수는 구약적으로 보면 성령의 임재와 위임을 상징합니다. 임직은 성령님의 은사입니다. 성령님은 각 사람의 분량대로 적절한 직분을 주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7-11)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지시임에도 불구하고 금식하고 기도한 일입니다. 명령대로 하는데 왜 기도가 필요할까요? 명령대로 하는데 무슨 금식까지 필요할까요? 우리는 항상 이점에 대해서 소홀합니다. 교회가 명령하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하기 쉽습니다. 목사가 주일 설교를 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합니까? 우리 성도들은 어떤 당연한 일이라도 그냥 해서는 안 됩니다. 사업가가 사업하는 일은 자기 업무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합니까? 부모가 자식 기르는 일은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합니까? 모든 일, 모든 순간에 우리는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서 기도한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인지, 혹은 일반 신자들까지 다 기도하고 금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주님의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기도하고 금식하시기 바랍니다. 설교하기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기 위해 기도하고, 식당 봉사하기 위해 기도하고, 안내 하기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기 위해 기도하고, 찬송하기 위해 기도하고, 회계 재정 계수하기 위해 기도하고, 재정 집행하면서 기도하고,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기도하고, 심방하면서 기도하고, 약한 사람을 돌아보기 위해 기도하세요. 교회에서 당연한 일이 아닌 일이 없습니다. 다 당연하지요. 그러나 그 당연한 일을 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령의 지속적인 도우심을 받는 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준 사역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문제 속에 있는 사람들
행 12장 25~45절 / 박지온목사
[1]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원칙
문제 속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문제가 나오면 "당연하다"라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문제들에 눌려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원칙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인간에게 문제가 나오자마자 하나님은 영원한 해답을 주었습니다. 그 영원한 해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되심으로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 함께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는 실제적인 능력이 나와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시는 천군천사들이 우리의 현장을 따라다닙니다. 즉, 우리가 가는 곳에 성령이 함께 하시고, 천군천사가 따라다니며 지키고 있습니다. 아람 군대가 쳐들어오자 엘리사의 사환은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열리사를 통해 영적 눈이 열리자 천군천사가 아람 군대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눈이 열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눈이 안 열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과 근심에 눌려 살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 말로는 되는데 사실로는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 응답의 구체적인 역사가 있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99년을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2] 문제의 배경
그렇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상 문제입니다. 즉, 영적 문제입니다. 이 땅의 문제는 우상의 문제요, 영적 문제입니다. 이 땅의 문화나 삶이 다 우상의 배경 위에 있습니다. 우리 사회와 국가가 안고 있는 문화는 귀신 문화입니다. 우리 나라의 전통 문화가 바로 귀신 문화입니다.
이러한 귀신 문화 속에서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앞에서 귀신은 물러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얼마 전에 30년 동안 작두를 탄 무당이 상처를 입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무당이 상처를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귀신이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행사장에 다락방 요원들이 많이 참석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무당은 그 자리에 정신병자들이 와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무당이 예수를 믿는 자들이 온 것임을 알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귀신 문화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 속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들을 이상하게 봅니다. 눈 하나만 가진 원숭이 사회에 눈 둘을 가진 원숭이가 가면 눈 둘을 가진 원숭이가 비정상이 됩니다. 우리의 사회가 이러한 정도로 귀신 문화에 빠져있습니다.
이런 것이 보이지 않으면 영적 싸움이 안 됩니다. 국가적으로 내려오는 배경이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영적 싸움에 눈이 안 열리고, 현장에서 기도의 문이 안 열리면,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내력에 잡혀서 당하게 됩니다. 교회와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왜 생기는지 원인이 보여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한 주간 이것을 계속 붙잡아야 합니다. 연말 연시를 맞이하여 나타나는 문제도 뒷 배경 때문입니다. 즉, 그 개인보다는 배경이 문제입니다. 여기에 매이면 자신이 힘들어집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이를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경을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해결을 받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해결입니다. 일단은 구원 문제 즉, 근본 문제가 해결됩니다.
[3] 근본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었는데도 자꾸 어려움이 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 싸움을 하는 눈이 열리지 않아서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강한 세력들에게 당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여성도가 아이를 가지려고 무척 애쓰다가 10년만에 우리 교회에 와서 아이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 바로 전에 아직 젊은 남편을 잃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건강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었습니다. 그 가문을 살펴보니 모두 일찍 요절했습니다. 그 남편은 쓰러져 병원에 있으면서 의식은 잃고도 몸은 마구 움직였습니다. 몇 번을 찾아가도 의식이 없어서 메시지를 전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전문 교회를 하는 한 직원이 상황을 알고 그 남편이 있는 중환자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때까지 전혀 의식이 없던 사람이 그 순간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 직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영접을 시켰습니다. 그 때에 그 남편은 확실하게 영접하고 스스로 "이제는 예수가 내 안에 계신다"라고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 직원이 나가자 그 남편은 다시 의식을 잃었습니다. 결국 남편은 죽었지만, 남편이 예수 믿기를 바라던 여성도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속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이 있습니다.
루디아는 자주 장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만나자 '당신이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와서 유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즉, 미션 홈, 전문 교회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때에 복음의 역사가 그 지역에 이루어지면서 귀신들린 자가 해방받고 복음 사역에 붙여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그 지역을 완전히 복음화 시키는 문이 되었습니다. 그 병원에서도 그 직원이 문이 열리는 통로인 것 같습니다.
원래 그 여성도는 생글생글 웃는 표정입니다. 그러나, 남편을 그렇게 일찍 갑작스럽게 잃었다면 얼굴이 찡그러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영광을 바라보고 평안이 오니까 원래의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장례식 설교가 어렵습니다. 특히 내세의 소망이 없는 사람 앞에 설 때는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너무 편하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만약, 지옥에 갔다면, 땅을 치고 데굴데굴 굴러야 합니다. 그러나, 진짜 천국에 갔다면, 계속 울 필요가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처럼 울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참 감사한 일입니다. 복을 받고 내 남편이 천국에 갔습니다. 잠시 잠깐 후이면 나도 갈 곳입니다. 거룩한 곳에서 너무나 기쁘게 있을 것인데 데굴데굴 구르며 운다면 천국에 있는 남편은 기분 나쁠 것입니다.
성경에 부자가 죽어서 음부에 갔을 때, 아브라함에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형제들이 있는데, 자신이 있는 지옥에는 오지 않도록 거지 나사로를 보내서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먼저 가신 조상이 이 땅에 와서 소원을 한 가지 빈다면 무엇을 빌겠습니까? "지옥이 있다. 얘들아, 예수 믿고 꼭 천국 가거라." 천국에 가신 조상이 와서 비실거리는 후손들을 향해 소원을 한 가지 빈다면 무엇을 빌겠습니까? "내가 있는 천국에 오거라." 즉, 오직 한 가지, "천국 가라"는 것이 간절한 소원일 것입니다. 이 눈이 열려야 현실에서 능력이 나올 수 있습니다. 현실의 부가 바로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되면 기복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5가지 언약을 주셨습니다. 첫번째,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언약입니다. 두번째, 그 분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언약입니다. 세번째, 지금 살아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입니다. 네번째, 지옥에 가서 멸망받을 사람들에게 구원받을 축복의 복음을 전해서 세계를 복음화 하라고 함께하시겠다는 언약입니다. 다섯번째, 지금 어려울지라도 때가 되면 천군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무엇보다도 실제적인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나라인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이 없다면, 이 땅에서의 삶은 정말 고통 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즉, 내세가 없으면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은 너무나도 괴롭고 힘든 것입니다. 내세가 없다면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대로 편안하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살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내세가 있고, 하늘 나라의 기업이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현실 속에서의 누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늘 영광의 기업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모든 것을 다 드리고도 아깝지 않고 기쁠 것입니다. 온갖 보석으로 만들어진 집이 준비되어 있고, 황금 길과 수정같은 바다와 계절을 따라 아름다운 과실이 있는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이것이 확신되어야 기복 신앙이 사라집니다. '이 영광을 위하여 오늘 내게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참된 고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돈을 지닐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일이 됩니다. 가지고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걱정 때문에 정신 문제가 옵니다. 부자의 고난을 가난한 사람은 잘 모를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부자에게 안 주신 축복을 가난한 자에게 주신 것 같습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도적에 대한 근심이 없습니다. 가져갈 것이 없으면 편안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은혜를 주셨습니다.
사단의 문화 속에 있는 우리 나라 속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왜 가정에 문제가 생깁니까? 사단의 눌림에서 해방받기 위해서는 영적 눈이 열려야 됩니다. 이 땅에 사단의 세력이 강하게 눌리고 있음을 보고 기도가 나와야 됩니다. 그 때에 문제 해결의 실제적인 증거들이 기도응답으로 나오게 되고, 눌림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잡다하기 보다는 오히려 '성령 충만'으로 모아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받을 수 있도록 성령 충만을 주십시오. 사단이 완전히 결박되게 하옵소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사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다른 교회를 다니던 사람이 왔을 때 메시지를 주는데, 이미 기존 신자이고 하니까 그리스도에 대해서 응당히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모르고 있으며 기도가 안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직자들도 초신자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친절하고 겸손하며 세밀하고 알뜰하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영적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예수를 믿은지 2년쯤 된 부부가 있는데 성탄절에 남편이 죽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의 아이가 밤잠을 자지 않고 12시부터 5시까지 계속 우는 가운데 어느 여전도사님을 통해서 어머니가 먼저 영접하면서 그 날 밤부터 아이가 울음을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시어머니가 무속인이라는 가정의 내력이 있습니다. 남편도 뒤이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영적 문제가 잘 안보였던 것 같습니다. 성탄절날 정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직장에 갔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직장에 갔었다는 것은 영적인 눈이 안 열린 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영적 눈이 안 열리면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에 눌리게 됩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도중에 기계에 가슴이 눌려 즉사했습니다. 물론, 저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또 방황하게 됩니다. 너무 강한 가정의 흐름이 있다면, 영적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때에 눌리게 되고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무속인 조상이 있다면, 그 가정의 흐름은 너무나도 강합니다.
[4] 기도가 터져나와야 한다.
기도가 터져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문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터져나오게 됩니다. 내게 응답되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왜 똑같이 일하는데 이유없이 실패합니까? 그리스도의 역사를 붙잡고 확인하는만큼 해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대에서 조상적부터 흐르는 영적 흐름을 끝내야 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영적 문제가 있음을 확인하며 기도할 때에 확인되는 만큼 영적 흐름은 우리 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감나지 않으니까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해결은 그리스도로 되었으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실제적인 기도를 통해서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기존 신자들이 그리스도가 확인되면, 그리스도 뿐이라는 확신 속에서 그리스도를 붙잡게 됩니다. 그 때부터 기도가 나오면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마28:19-)'는 현실적인 기도 응답이 나오게 됩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실제가 아니면 절대로 안됩니다.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사단은 물러가지 않습니다. 싱글싱글 웃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에 사단은 물러갑니다. 이 때부터 기도하게 될 때에 흑암 권세들이 꺾이게 됩니다.
왜 저주 속에, 문제 속에 살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배경 때문입니다. 사단의 역사 때문입니다. 사단은 구원받지 못하도록 발악을 합니다. 메시지를 받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리스도가 확인되지 않으면 불쌍합니다. 100년을 잘 산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확인되지 않으면 죽는 즉시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복음 없이 지옥에 간다면 이 땅에서 아무리 돈방석 위에 있다고 해도 헛일입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고 이 땅에서 잘 살지 못하더라도 영원한 천국을 바라본다면 축복입니다.
무엇이 고생입니까? 현재 받는 고생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가 안됩니다. 이 땅에서의 고생은 아무리 가도 100년 정도 뿐입니다. 그에 반해, 하늘 나라의 영광은 영원합니다.이것이 확인되어야 이 땅에서 전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도를 위해서 필요하니까 재정을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장래의 축복이 현실에서 응답되어지는 것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늘 나라의 영광이 있기에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5] 후손을 위한 기도
사도행전 1장의 언약을 잡고, 2장의 성령을 받으면, 3장의 전도의 문이 열리고, 그 때부터 4장 이후의 일꾼이 붙고 지속적인 역사가 나오게 됩니다. 내 힘으로 할려고 하지 말고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리면 됩니다. 이렇게 세계 복음화의 언약을 붙잡게 될 때에 영권이 회복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자녀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세계를 복음화할 사람들입니다. 자녀를 향한 세계 복음화의 눈이 안 열리면 진짜 피맺힌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TV에서 구성애씨가 나오길래 보았습니다. 구성애씨가 가장 절망했던 시절은 결혼 후 1년간 가출을 했을 때라고 합니다. 결혼 후에도 남편과 함께 노동 운동을 하고자 했으나, 남편이 가정과 일 중에서 택하라고 하자 일을 택해서 가정을 나왔다고 합니다. 가정을 나와 공장에서 일을 하며 노동 운동을 하던 때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여자로서 본능적으로 온 몸으로 그리운 것이 아이였다고 합니다. 너무나 아이가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게 되자 완전히 남편에게 굴복하고 가정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후손에게 눈이 열리면 눈물을 흘리며 자식을 항해서 기도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능력과 영권이 나갈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세계 살릴 자녀들로 볼 때에 영권이 나가게 됩니다. 정말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의 후손을 통해서 주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기도가 나가게 됩니다.
구성애씨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 세 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첫번째가 아버지이고, 두번째가 남편이며, 세번째가 스승 중의 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해서 한 마디 더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도저히 평범한 사람으로 살도록 버려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그 믿음이 자기에게 와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평범하게 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가 해답을 주고 상담을 해 주셨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나서 아버지 산소를 찾아간다고 합니다. 그 앞에서 묵상을 하면서 일들을 정리하곤 한다고 합니다.
만약, 구성애씨가 복음으로 눈이 열린다면 얼마나 영향을 주겠습니까? 아직까지는 그런 메시지가 그녀에게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아버지 자신에게서 그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구성애씨를 연결시켜 주었더라면 얼마나 큰 축복이 되었겠습니까? 문제가 생길 때에 굳이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아버지를 통해 깨닫게 된 하나님께 기도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정말로 엄청납니다. 저의 큰 어머니께서는 어머니를 통해서 예수를 영접하셨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가 찾아뵐 때도 말을 낮추지 않으시고 꼭 목사님과 사모님으로 맞아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기도를 하실 때도 자기 아들들 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저와 목사인 제 동생 기도를 먼저하시고 자녀들 기도를 하셨습니다. 돌아가실 때에도 큰 아버님 묘 옆이 아니라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준 어머니 묘 옆에 묻어달라고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마침 저희 어머니도 아버님 묘과 떨어져서 교회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나무를 베어내고 해서 큰 어머니 묘를 어머니 묘와 나란히 썼습니다. 복음을 받고 나니, 그 축복을 알려준 어머니가 너무 좋아서 묘를 써도 어머니 옆에 쓰려 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복음을 확실하게 줄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다 들으시는 그 분을 자녀들에게 확신시켜 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우리의 후손들이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 가슴 속 깊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심어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통해 귀중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체적으로 살리실 것입니다.
문화와 환경이 어떻든지간에 지금 이 언약을 붙잡고 나아갈 때에 99년도에 승리하며 감격할 수 있기를 축복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