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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 플 렉 스
C o m p l e x
18 . 기우
어느새 어둠이 가라앉고 파리 시내는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빛났다. 번화가를 살짝 벗어나 골목의 귀퉁이에 자리 잡은 바를 진부했다. 영화 속에서 봐왔던 빨간 칵테일 잔 모양 간판에 ‘ha bar’라고 적인 곳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의 내부는 고급스러웠다. 비슷한 듯 하지만 ‘진부’라는 단어보다는 ‘엔틱’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오랜만이다.”
“형. 잘 지냈어?”
상혁이 칵테일 잔을 닦던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눴다. ‘애인’이라는 부끄러운 단어로 지연을 소개하곤 자리에 앉았다. 다섯 가지 종류의 치즈가 꽃 모양으로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나오고, 그와 어울리는 빨간 와인이 준비되었다.
“오늘 어땠어?”
“상혁여행사 괜찮네요.”
“당연하지. 너만을 위한 건데.”
“꽤나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네요.”
“이제 서울 가면 엄청 바빠질 거야.”
“그렇겠죠. 영화 개봉은 왜 이렇게 빠른 거예요? 그게 가능해요?”
“사정이 좀 있어서.”
왠지 껄끄러워진 상혁의 얼굴에 지연은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여자의 직감은 실로 무섭다. 곧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전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운 것을 알았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사정’ 가끔은 한 사람의 사정이 가슴을 꿰뚫기도 한다. 과연 이 남자의 사정은 나와 관련이 있을까? 아니면 이건 아무것도 아닌 기우일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으음. 아니야.”
“그런 의미로 오늘 내 방으로 와.”
“네?”
“오늘이 마지막 밤이야.”
“내일이죠.”
“내일은 쫑파티라 같이 있기 힘들잖아. 우리의 마지막 밤이라고.”
우리의 마지막 밤.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파리의 마지막 밤. 마지막.
“안 들어가면 하나가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오빠가 다 알아서 할게. 오빠만 믿어.”
상혁의 의미심장한 말에 지연이 웃어보였다. 낯선 향기지만 그 속에 상혁과 함께하니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와인은 떫었고, 분위기는 야릇했으며, 상혁은 멋있었다.
* * *
“하나야-”
“어? 작가님?”
“오늘 구경 잘 했어?”
“네. 사진도 많이 찍었어요. 보실래요?”
“와. 정말 예쁘네. 하나야 나랑 얘기 좀 할래?”
“네. 들어오세요.”
“여기서 말고 내 방으로 가자. 룸서비스 해 놨어.”
하나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채은이 이상했지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옷을 갈아입고 채은의 방으로 향했다. 채은의 방에는 화이트와인과 샐러드가 차려져 있었다. 하나는 채은을 따라 간이 테이블에 앉았다.
“첫 영환데 힘들진 않았어?”
“네. 도와주신 덕분에 재밌게 촬영 했어요.”
“작가로서 하나에게 거는 기대가 커. 나중에 잘 돼서 나 모른 척 하기 없기야.”
“당연하죠!”
“어...음...일단 한 잔 마실래?”
“네. 감사합니다.”
채은은 하나와 잔을 가볍게 맞대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평소에 즐겨 마시던 와인이 왜 이리도 쓴지.
김상혁. 내가 제대로 벗겨 먹는다. 어색한 거 못 참는데.
.
.
.
“전혀 아니야. 그건 그렇고 나 좀 도와줘라.”
“뭘?”
“쫑파티 전 날 하나 좀 데리고 자.”
“뭐?”
“갑자기 지연이가 안 들어가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야. 남들 눈 피해서 부탁한다. 내 방에도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주고.”
“너 정말 가관이다.”
“부탁할게.”
.
.
.
“작가님?”
“...어? 어! 작가님은 무슨- 이제 편하게 채은언니라고 해. 언니.”
“네? 그래도...”
“어허. 언니라고 해봐.”
입술을 오물거리며 주춤하는 하나의 모습이 예뻐 채은도 마음을 풀었다. 원체 어색한 것을 싫어하는 채은이었지만 하나라면 밤 새 떠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봐 줬다. 김상혁.
* * *
“음.”
“이건 반칙이지.”
“아침이에요?”
“아니.”
“왜 깨웠어요?”
“씻고 나왔는데 예쁘게 자고 있어서 구경하다가, 갑자기 얄미워서 깨웠어.”
“응?”
“내가 손만 잡고 자자고 방으로 불렀는지 알아?”
지연은 상혁의 말에 피가 얼굴로 쏠렸다. 저렇게 남사스러운 말을 태연스럽게 하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점점 침대 위로 올라오는 상혁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개구진 얼굴을 하면서도 음탕한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호텔 밖으로 보이는 에펠탑은 새벽1시라는 것을 알리듯 반짝였다.
.
.
.
“언니! 잘 잤어요?”
“...어?”
지연은 가볍게 산책을 하고 방으로 들어오니 하나가 없어서 한숨을 돌리곤 가방정리를 했다. 그런데 운동을 했는지 갑자기 들어온 하나의 물음에 당황했다. 다행히 하나는 지연이 당황한 것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말을 이어갔다.
“어우. 저는 죽는 줄 알았어요. 어제 채은언니랑 와인 마시는데 못 따라가겠더라고요.”
“언니?”
“응! 언니동생 하기로 했지요-”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흔들어 대는 하나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상혁이 알아서 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하나는 어젯밤 지연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오늘 파티 후 내일 오전 비행기로 입국을 하기 때문에 지연과 하나는 짐정리를 했다. 룸서비스로 가볍게 브런치를 먹은 후 베란다에 있는 간이 테이블에 앉았다. 향긋한 커피향과 홍차향이 내심 어우러졌다. 각설탕 하나를 홍차에 넣은 하나가 신기한 듯 설탕이 녹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여기 호텔 연회장이죠? 오늘 파티.”
“응. 하나 너 옷 챙겨왔어.”
“와- 파티복 처음이에요. 언니 덕에 처음 해 보는 거 참 많네요.”
“오늘 최고로 예쁜 날로 만들어 줄게.”
“신난다.”
아이처럼 웃어 보이는 하나 덕에 지연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한편으로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해졌다. 하지만 지연은 억지로 그런 기분을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괜한 걱정일거야. 한국가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이거 진짜 나에요?”
“그건 신부가 하는 말이고.”
“예쁘다.”
청록색 드레스를 입은 하나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전신거울 앞에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하나에게 지연이 다가가 작은 티아라를 머리에 고정시켜주었다. 하나는 마치 미스코리아 왕관이라도 받은 듯 행복 해 보였다.
“언니.”
“응?”
“사실은 나 도망쳤던 거예요.”
“어?”
“허구언날 술 마시고 때리는 아빠에게서 도망친 거였어요. 언니 만난 날.”
“......”
“마치 10년 전 우리 엄마처럼.”
“...하나야.”
“배우가 꿈이었는데, 생계유지 때문에 도저히 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그동안 조금씩 아르바이트하면서 모았던 돈 아빠 머리맡에 두고 그대로 집 나왔어요. 운 좋게 첫 날 언니 만나서 돈 하나 없이도 이제는 이렇게 파리에 와있네요. 고마워요. 언니.”
어렵게 말을 꺼내는 하나를 지연이 가만히 안아주었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는 하나가 안타까웠다. 지연은 그저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울지 마. 화장 번진다.”
“나 여기까지 온 거 다 언니 덕이야.”
“앞으로도 내 덕 많이 봐야 하니까 인사는 그 때 해.”
“역시 언니는 최고예요. 나 못됐죠. 아빠도 버리고.”
“응. 그러니까 한국 가서 나랑 같이 찾아뵙자.”
“네?”
“한 동안은 좀 한가하니까 찾아봬서 치료 받으시도록 하자. 너 성장한 모습도 보여드리고. 그게 도리야. 나도 네 보호자로서 그게 맞는 거야.”
“언니...고마워요. 진짜 저 매일 밤 죄책감에 못 잤어요. 진짜.”
“그래, 그래. 언니랑 같이 가자. 울지 말고.”
결국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하나 때문에 지연도 함께 울컥했다. 가까스로 눈물을 참아내는 하나가 대견했다. 지연이 하나의 어깨를 잡고 거울을 마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자. 지금 거울에 비친 모습이 지금의 너야. 잘 기억해둬.”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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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잔을 높이 올려주세요.”
상혁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들 앞에 있는 잔을 높이 올렸다. 형형색색의 액체가 각자의 손에서 찰랑였다.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개봉을 향해 달려갑시다. 영화의 대박을 위하여-”
“위하여-”
상혁의 건배 제의에 맞춰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원샷을 했다. 자리를 옮겨가며 서로를 독려하며 자축의 시간을 가졌다. 지연도 인사를 나누다 칵테일 한 잔을 받아들곤 테라스로 나갔다. 갑자기 피부에 닿는 시원한 기운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갑자기 따뜻함이 감싸져왔다.
“왜 나왔어?”
낮고 간지러운 목소리가 귓속을 간지럽혔다. 상혁의 숨결이 귓가에 닿자마다 등골이 아렸다. 지연이 움찔하는 것을 느낀 상혁은 낮게 웃더니 귓가를 축축하게 적셨다. 결국 지연이 참지 못하고 상혁을 밀쳐냈다.
“뭐 하는 거예요!”
“뭐가?”
“정말!”
“쉿. 누구 온다.”
“헉”
누군가 온다는 상혁의 말에 지연이 그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작게 오그라진 지연의 어깨가, 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빼는 행동이 귀여워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상혁의 입술이 은밀하게 지연의 입술을 찾아갔다.
그래. 이건 네 탓이야. 아니다. 내 탓이다. 너를 너무 사랑한 탓.
* * *
“민성이 짐 체크하고 체크인 해.”
“네.”
“좌석 체크하고.”
파리의 샤롤드골 공항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면세점이 열악해서 인지 이미 지쳐서인지 사람들은 체크인을 하고는 다들 자리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렸다. 비행기 안은 고요했다. 어째서인지 조금의 분주함도 없었다. 그래서 금방 잠들 수 있겠단 생각을 했던 지연은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 가슴 한 켠의 불안한 마음이 떨쳐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 숨도 자지 못 한 채로 한국에 도착했다.
“민수 너는 장비 확인 해 보고 퇴근해.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탭 모두 피곤한 얼굴색을 하곤 삼삼오오 흩어졌다. 파리에서 촬영한 테이프를 편집부에 넘긴 상혁은 지연에게로 왔다.
“피곤해? 아까 안자는 거 같더라.”
“나 안자는 거 봤음 상혁씨도 마찬가지겠네요.”
“내일 데이트하자.”
“바쁘지 않아요?”
“바쁜데 욕심 부릴래. 하루만.”
“괜찮아요?”
“이제 계속 바쁠 거니까.”
“좋아요. 땡땡이 쳐요.”
상혁은 지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뒤돌아 서 걸어갔다. 그녀는 그의 등을 바라보는 것이 숨이 막혔다. 넓게 딱 벌어진 어깨도, 거침없는 발걸음도 왠지 무서웠다. 그의 등을 한 동안 보던 그녀도 짧게 한숨을 내쉬곤 뒤 돌아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 끝에는 그녀의 친구들이 있었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왜 왔어?”
“피곤 할 거 같아서 일일 기사 해 주려고 왔지-”
사랑과 하은의 모습에 지연은 기분이 퍽 좋았다. 안 그래도 비행 내내 한 숨도 못 자서 이미 지연은 피곤이 극에 달했다. 거기다 유럽 시차에는 워낙 약한 그녀였기에 더욱 심했다.
“하나라는 애는 수연언니가 데리고 갔어.”
“아”
“즉 너만 가면 된다는 말이지. 가자. 가다 뭐 좀 먹어야겠다, 너.”
“잠 먼저.”
지연은 사랑의 말에 고개를 내 젓고는 차에 올랐다. 곧이어 차에 사랑과 하은까지 타자 차는 출발했다. 창문 밖의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내가 아무리 손을 뻗는다 해도 잡을 수 있는 건 없을 거야. 그러니까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편이 나아. 창문 밖으로 손을 뻗는 짓은 일곱 살 어린애도 하지 않을 테니까.
*
안녕하세요 레스피토입니다 :)
아직 춥긴 하지만 그래도 한 풀 꺾였죠?
저는 요즘 취업을 위해 교육중입니다.
지금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데
중간에 숫자 하나를 놓쳐서 마지막에 모든 것이 엉켜버린 스도쿠 게임을 하는 것 같아요....
화이팅!
화이팅!
첫댓글 작가님 화이팅!ㅎㅎ 바쁘신 와중에도 연재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봄블리님 :)
바쁜 와중에도 찾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원 감사드려요!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르겠어요 ㅠㅠ 애정합니다 😇
취업교육잘받으세요^^ 거울에비친게 지금의 너야ㅋㅋ이거 멘트좋네요!
안녕하세요 따농남님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육이제 끝나가네요 ㅠㅠ
저는 언제쯤 이런작가가 될수있나요
안녕하세요 오띠또띠님 :)
너무 비행기 태워주지 머셔요 ㅎㅎ 부끄럽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오띠또띠님도 단편 소설 종종 쓰시죠? 진짜 완결 나면 꼭 볼게요!
좋은 친구들이닷 ㅠㅠㅠ 스도쿠게임 아무리 꼬여도 정신없어도 답은 잇어요! 이 게임 마무리 잘 지었음 좋겟어영♡
안녕하세요 꿀호떠억님 :)
스도쿠.....멋진 말이네요!!! 힘이났어요 ㅠㅠ 감사합니다! 저런 친구들 있다면 참 좋겠죠? ㅎㅎ
재밌게보고 가용~~^^
안녕하세요 킬힐님 :)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육끝나면 폭풍업뎃 할게요!!!!
넵 다음편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재미있어요~~우왕~~ㅋ
안녕하세요 o여우o님 :)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바빠서 찾아뵙지 못 했는데 금방 컴백할게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안녕하세요 werrty43님 :)
정주행 해 주셨다니 감사드려요~ 금방 찾아뵙겠습니다! 더 알찬 구성으로 돌아올게요~
잘봤어요~
작가님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