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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한 하늘아래 서로 다른 무대에서 펼쳐지는 서로 제목이 다른 연극무대 그것이었다.
이쪽에서는 관객들과 함께 희극을 보며 웃고있고 저쪽에서는 헤어짐의 이별극을 보면서 모두가 슬퍼하며 또 다른곳에서는 초상집에서 보듯 곡과 화투놀이가 함께 이루어지는 연극이었다.
한세상을 함께 살아가면서도 세상사람들은 서로가 무정하게 내가 꾸며논 무대에서 연극을 해나가고있을뿐이었다.
그 무대위에 지금 나는 서있는것이었다.
무대 1
옆에 침대에서는 산소마스크를 쓴 의식잃은 중년의 남자가 누워 저승길을 재촉하고
저건너 침대에서는 고통을 견디지못하는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며 부르지못해 건너지못하고있는 저승길의 강가를 헤메고있었다.
저 건너 침상의 고희를 넘긴 송장닮은 할머니는 밤새 귀신들린 소리로 길을 잃고있는 나를 유혹하고
바로 내옆에 누워 이제 병원신입생인 40 대의 가장은 아내의 옆에서 앞으로 가야할 긴 여로를 알지못해 근심에 빠져있었다.
야전병원같은 응급실에서 수백여침상위에서 저렇듯 사연이 다른 연극을 하고있었다.
음 ~ 사람들.......
무대 2
누웠다.
아니 나는 환자이기에 뉘어져있었다.
한차례 종합적인 검사가 이루어졌고 다시또 간헐적으로 추가 진료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기다림, 음....... 기다림이 이어졌다.
조여오는 호흡,
검사결과가 어떻게 나올것인지
더 살수있을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호흡을 결국 멈추고 저승으로 가게될것인지 ........
내 집도 떠나오면서 버렸고
그 많은 내 희망도 인생도 버렸고
이제 오늘은 이렇게 마지막 남은 내 목숨마저도 버리고말것인가 ? .......
내가 떠난 흙바람속의 이승 세상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딸 혜정이와 아들 대건이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또 .........
무대 3
간간히 비몽사몽인가를 맛보고있을뿐 잠을 이룰수가 없다.
하루종일 아수라장터는 영업이 잘되고있었기 때문이었다.
환자들은 이곳을 들러 다시 입원실로,
치료를 포기하고 죽음을 준비하기위해 집으로,
바로 저승길로,
또 다행히 치료를 끝내고 퇴원의 길로 가곤 하였다.
잠을 이룰만하면 의료진들은 나를 내버려두지않았다.
열 체크, 혈압체크, 산소량체크, 주사약 교체 등등 그때마다 나를 깨워 물었다.
" 환자분 이름은 무엇이지요 ?......"
귀찮은 소리로 " 정진백"
그래도 여전히 얼마후 다시 와서 이런 질문과 처치는 계속되었다.
저승으로 서둘러 떠났는지를 알아보려는것같기만 하였다.
어쩌다 꽃이 활짝 피어있을 이 나이에 내 처지가 이렇게 .................
무대 4
조금전까지 눈을 뜨고 깨어있었던 환자가 조금전 저승길을 떠났다.
옆에 보호자로 따라온 가족들의 흐느낌이 이어졌다.
이별은 그런것이었다.
떠난이는 무정하게 말이없고
남아있는 사람만이 슬프게 산 사람들만이 할수있는 이별잔치를 벌이고있는것이다.
떠나간이의 잔치는
저승에서의 그 잔치는 어떤 것일까 ? .......
힌 천으로 얼굴을 가린 망인의 떠나가는 모습을 장터사람들과 함께 바라보기만할뿐이었다.
아무도,
아무말도......
그 노래에서 처럼 -
무대 5
둘째누님이 응급실을 서둘러 찾아오셨다.
죽을 끓이고 몇가지 반찬을 만들어 들고 -
돌아가는 누님을 보면서 결국 보이지않으려했던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나는 눈물이 참 많은 화상이었다.
바보같이 -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방문을 꺼려하곤한다.)
새벽에는 매제가 찾아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
생각해보니 오늘점심때는 둘째 처남내외분들이 오셔서 함께 점심을 할수있었다.
퇴원의 승락을 받은 얼마후였기에 짐을 싸들고 함께 집을 향할수 있었다.
마지막
내게, 내 남은 가족들에게 남아있게될 집안 사람들......
나는 그 분들에게 과연 지금까지 무엇이었었는가 ?
드린것은 없고
받은것만 생각나는 나의 지난날 모습이 한없이 후회스럽고 부끄럽기만 하다.
내입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던 지난세월을 보면서 정말 잘 살아오지 못했었음을 반성하는것이다.
가족은 물론이고
피가 섞인 집안들에게 우선 잘해야함은 천륜과 같은 것이었다.
감사함을 잊을수 없는것이다.
무대 6
딸 혜정이는 대학졸업후 집과 도서관을 오가며 9 급 공무원 시험을 일관되게 준비했었다.
생각해보면 딸과 아들 대건이가 함께 대학을 다닐때가 내게는 가장 힘들었던 때였던 같다.
항상 나의 봉급통장은 마이너스 상태였으니까 -
딸에게 학원의 도움도 받을것을 나는 경험을 토대로 권했으나 듣지않았다.
아마도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었을것이며 병들어 힘들어하는 아빠에게 더이상 짐을 지우지않으려는 뜻에서였을것이다.
그러던 1 년후 딸은 시험에 함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봐야 이제 1 년 3 개월 정도가 지났으며 몇달전 확인해본 딸의 봉급통장에는 그달 봉급이 75 만원 입금되어있을뿐이었다.
그래봐야 매월초의 수당이 조금 더 있다해도 지난 1 년 1 천여만원전후의 간조를 받을수있었을것이며 기초생활비를 제하면 기껏 저축은 500 만원을 조금 넘길수준이었을것이다.
아내는 가끔 다녀간 딸을 두고 말했다.
지독한 년이라고 -
함께 백화점을 가도 식당을 가도
몇천원밖에 안들어갈돈인데도 먼저 돈을 꺼내려하지않는다는것이었다.
꼭 지 애비라고 -
그러던 딸이 지난달에는 시집을 갔다.
나는 겨우 600 여만원을 들여 시집을 보냈고 그동안 둘이서 모았던 저축통장을 털어 결혼식을 치뤘다.
물론 저축통장을 모두다 해약했을것이다.
이제 딸은 남편과 함께 상의하며 써야하는 돈만이 남아있을뿐일것이다.
사위녀석과 딸이 저녁시간을 택해 응급실을 찾아와 하루밤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돌아갔다.
사위녀석과 함께 돌아가면서 딸은 엄마의 주머니에 말없이 봉투를 하나 남기고갔다.
50 만원이 든 봉투를 -
그들을 보내고 난후에야 이를 확인한 아내가 물었을때 딸은 말했다.
이 돈은 결혼전부터 아빠의 어려운 병원비 지출을 지켜보며 첫봉급을 타면서부터 따로 매달 몇만원씩을 모았던돈이라고-
결혼때에도 이돈만큼은 언제인가 아빠의 병원비에 도움을 드릴까해서 함께 해약할수가 없었노라고 -
유서방에게는 말하지않아 미안하지만 그랬었노라고 ........
나는,
나는,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루가 가는 그날 밤에 딸에게 나는 전화를 했다.
아빠는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살림에 씀씀이가 점점더 커질텐데 이제부터는 아빠걱정일랑 하지말라고 -
그 자리에 시부모님과 유서방을 채워넣으라고 딸에게 나는 눈물을 참으며 말해주었다.
전화는 참 유익한 기기였다.
내가 우는지 울지않는지를 보이지 않을수 있으니 말이다.
무대 7
다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것같았던
숨이 턱턱 막혀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것같았던 내 집에 다시 돌아왔다.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눈물을 참았다.
나는 지금 살아있었다.
이제는 호흡도 고비를 넘겨 견딜만하고 열도 정상을 찾았다.
폐렴을 치료받기위한 항생제주사 덕분이었다.
나에게 한동안 꿈을 심어주었던 표적치료제 넥사바의 치료는 이미 주치의 의 처방에따라 지난 2일부터 복용을 중단했고 내일부터 나는 또 방사선 치료를 시작해야한다.
이렇게 병이란 삶가운데에서 나와 함께 가야하는 긴 동행이었다.
이번엔 제발 꿈으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
밤인데도 아내는 하느님을 만나러 성당을 갔다.
오늘은 또 무슨 말씀을 받아 나에게 은총을 전해주려하고있는것일까?
무심하시고 냉정하시기만 하느님에게서 어떤 편안함을 아내는 얻어 올수가 있을것인지........
몇일간의 여독과 시름속에 방에 있던 아들 대건이를 불렀다.
나에게 배를 갈라 간을 떼어준,
내가 강을 건널때 징검다리였던 내 눈물의 원천 대건이 ......... 어느새 3 년 세월이 지났다.
그를 생각할때마다 아직도 나는 이유를 모를것같은 눈물을 흘린다.
사랑은 내리는것일진데 그 사랑을 올림받았으니 그도 그럴것이다.
나는 아들에게 나의 상황과 앞으로 대비 해야할 그의 역할을 말해주었다.
결국 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의사는 보조자일뿐 나의 구원자는 되지못하며 나 또한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은 그렇게 되겠지만
올해안 일지,
내년에 일지,
아니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10 년후일지 모를 아빠와의 이별을 준비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가장으로서 아빠의 위격을 준비된 모습으로 당당하게 너는 이어가야한다고 말해주었다.
혜정이 누나도 우리집을 떠나간 이제 오로지 그 제일선상에 니가 있기에
특별히 너의 봉양이 필요한 혼자 남게될 엄마를 극진히, 마음 편하게, 바라는 대로 모셔야한다고 말해주었으며 그렇지못할때 너는 불효자가 될것이며 너의 엄마는 불행하게 일생을 보낼것임을 명심하라고 말해주었다.
아빠는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있을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 노래에서 천상병의 " 귀천 "에서처럼 인생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여행이라고-
앞으로 자신에게 찾아올 어떤 시련과 절망도 그 행복을 반감시킬수는 없다는것을 지혜로 읽어가라고 말해주었다.
그 중심에 신앙이란 기본임을 잊지말고 현재 냉담중인 신앙의 문을 다시 열어가라고도 간곡히 말했다.
중간중간,
나의 당부를 끝낸후
방으로 돌려보낸후에도 나는 흐르는 눈물을 참지못했다.
아들앞에서 아마도 생전 처음으로 -
나의 이별무대에서의 연습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세상은 조용하기만 하다.
저 멀리 아득하게 그날의 장터소리만이 들리고있을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살아있음에 대한 감격의, 감사의 눈물이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있음 그보다도 더큰 행복함은 없는 거였다.
"그 사람들"의 모습처럼
서로 달랐던 이 세상무대위에서의 연극을 행복하게 바라볼수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을 다시 시간을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를 위해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나의 작은 사랑을 전한다.
" 음 ~ 사람들 ......."
첫댓글 퇴원하셨군요... 멀리서지만 기도합니다..모든걸 하느님께 맡깁니다...
이식인이 다시 아프면 모두가 느낄 수 있는 '동병 상린"의 글이네요!!!힘내세요!!모든 이식들이 지켜보고 있을테니까요!!!모든것은 "희망"을 갖고 살고 삶의 끈을 놓지 않는 "의지력"만 있으면 천수를 다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된답니다.
어떻게든 견뎌 내시고 이겨 내시기 바랍니다...
벌판님의 투병생활이 눈에선하게 보이는 듯하군요 힘내시고요. 끝까지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결과있기를 기원드립니다.
이긴다고 이길것인가? 견딘다고 이길것인가? 모질고도 모진 이승의 동아줄이 원망스럽게만 느껴지는 이 순간, 님의 무대에 잠깐 같이 서 봤읍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이 있으니 매달려서라도 가 봐야지요. 부디 힘 내세요.
퇴원하셨다니 ...다행 또 다행입니다
방사선치료계획 처방을 받고 퇴원했습니다. 하늘에 맡겨야지요. 모든분들의 건승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