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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ngest Day (4): 드디어 이동
평소보다 일찍, 아마도 새벽 4시쯤 기상하였던 것 같다. 이미 완벽하게 준비되어있었겠지만, 병사들은 어스름 속에서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새삼스럽게 출발 준비를 서두르고, 연병장에 모여 군장 검사를 받고, 그러는 중에도 아침밥은 잊지 않고 챙겨 먹고, 그렇게 하다가 환해진 이후에, 텅 비어 초라하고 낯선 곳이 되어버린 내무반은, 제대로 한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출발을 하였을 것이다. 나는 동료 무전병들과 더불어, 새로 설치한 무전기가 탑재된 쓰리 고다(3 Quarters) 박스카에 배정되었다. 무전 대기 중인 V-46에서는 간헐적으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다가, 나로서는 알 필요가 없는 토막말들이 뜬금없이 흘러나왔다. 한참을 그렇게 달린 후 차가 멈추기에, 일어서서 손바닥만한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더니, 대대장이 지휘봉을 휘두르면서 민간인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 민간인 아저씨는, 우리 대대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시 주둔하고자 하였던 곳의 땅 주인인 것 같았다.
기나긴 행렬이 제법 장관이었을 것이다. 행렬의 주축이 되는 것은 역시 18문의 105미리 대포다. 대포는 포차라고 불리는 큰 트럭에 끌려다니는데, 이 날 포차에는 갑빠로 된 호로가 씌워져 있었을테고, 그 안에는 포다리라고 불리는 포반의 병사들이 앉아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 사단의 보병들을 만났을 것이고, 양쪽으로 갈라져서 길 가장자리를 일렬로 행군하는 그들의 사이를 뚫고 달렸을 것이다. 남하하는 20사단의 병사들과 마주쳤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서로 방을 비워줘야 하니까 동시에 이사를 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최단 거리는 하나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무관심한 채 가랑이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잠을 청했다. 자다가 깨어나면 목적지에 도착해있기를 희망하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아무리 자도 목적지에 도착하지를 않았다. 군대 차량은 원래 엄청나게 천천히 달리지 않는가? 지금 네이버에 들어가서 검색해보니, 양평읍에서 연천군 대광리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 반이 걸리는 것으로 되어있다. 우리는 오후 늦게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런 날은 저녁 점호도 간단하게 끝내주고 병사들을 일찍 재운다. 아예 취침 점호를 취하기도 한다. 긴 하루였으니까.
그러나 그 날 나의 하루는 그런 식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대광리의 새 보금자리는 구경도 하지 못한 채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 전 재산이 든 더블백(duffel bag)을 메고 말이다. 나는 민통선을 통과하여 GOP(General Outpost)라는 데에 들어간 것이다. 일행이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중위인 관측장교이고 또 한 명은 관측병 주특기를 가진 박상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근무처는 GOP 지역에 지어진 방카 안에 있는, 포병관측소라고도 불리는 OP(Observation Post)였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관측소에는, 우리 같이 105미리 포대에서 파견나온 병사들과 더불어, 155미리에서 파견나온 병사들도 있었고, 군단직할포대 몇 군데에서 파견나온 병사들, 그리고 4.2인치 박격포에서 파견나온 보병 병사들도 있었다. 여러 부대가 그 관측소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양평에서는 교신으로만 접촉하였던 인근 부대의 병사들을 눈으로 본 것이며 같이 생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같이 생활하였다’고 말하는 데에는 어폐가 있다. 관측소 안의 병사들은 서로 다른 부대에서 온 사람들로, 같은 공간을 사용하였을 뿐 서로 타치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심지어 같은 205에서 온 박상병과 나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둘이서 맞교대로 근무를 하였으니 두 사람은 그야말로 구조적으로 피해다녔다. 그 누구의 타치도 받지 않고, 누구하고도 접촉하지 않고, 누구하고도 같이 생활하지 않는 것 — 이런 꿈같은 일이 군대에서 가능하다니...... 양평 시절 내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한 일은 저녁 식사를 끝내고 발을 씻은 후 맨발로 침상에 올라가 앉아있을 때에 일어났다. 고참의 심부름이건, 5분 대기조 발령이건, 누군가가 나를 건드리곤 하였으며 나는 다시 양말과 통일화를 신어야 하였다. 이게 나는 그렇게 싫었다. 그러니 GOP 포병관측소는 그야말로 천국이 아닌가?
그러나 천국은 내일부터 시작되었다. 오늘, 즉 더블백을 메고 민통선을 지나 GOP에 들어간 당일은 한 마디로 지옥이었다. 당장 누군가가 관측소에서의 근무를 시작하였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당연히 일병인 내가 그 근무자가 되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내 고참들은, 거기 가서 기죽지 말라고, 나에게 상병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그러나 박상병은 떡하니 병장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나는 그 밤을 꼬박 새워야 하였다. 재우지 않는 것이 고문 종목에 들어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날 나는 그 말을 실감하였다. 전날 (양평에서) 새벽 4시에 기상을 하였으니 만 24시간을 훨씬 넘게 깨어있어야 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관측소에서의 근무라는 것은 따뜻한 실내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은 채 포대경 — 잠망경처럼 방카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쌍안경 —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일어서서 서성거려 보기도 하였고 건빵을 먹어보기도 하였지만 눈꺼풀의 무게를 이겨낼 수 없었다.
어김없이 내일은 왔다. 주요 관측 대상 중에서 지금 기억나는 것은 8동굴이라는 것밖에 없다. 그 동굴 안에는 대포가 들어있는데, 가끔씩 동굴 바깥으로 나왔다. 그럴 때면 그 주변에 북한군 병사들도 보였다. 내가 그곳에서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 4월 경 — 불구경을 한 적도 있다. 비무장 지대의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불이 번지고 있었고, 포대경을 들여다보면, 불을 피해 고라니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북한군이 불을 지른 것이라고 한다. 나는 겁을 먹고 있었는데, 방카안의 병사들은 빨래터의 아낙네들처럼 수다를 떨었다. 누구는 김일성 생일을 축하하느라고 저러는 거라고 말했고, 누구는 시계를 확보하느라고 풀과 나무를 태우는 거라고 말했다. 누구는 이맘때가 되면 저들이 화공을 해오곤 한다고 말했고, 또 누구는 우리도 맞불을 질러 대응을 한다고 말했다.
10년 전만 해도 놈들이 넘어와서 우리 병사들의 목을 따갔다고 한다. 새로 지은 보병 막사 근처에 예전의 막사가 폐허가 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그 막사에서 가끔씩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병 막사의 한 구석을 빌려 썼는데, 잠을 잘 때면 통로쪽이 아니라 관물대쪽에 머리를 두었다. 식기를 닦으려면 외진 곳에 있는 샘물을 이용하였어야 했는데,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식사 이후에는 식기를 닦으러 가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딱 한 명이, 그것도 딱 한 번 나를 건드렸다. 평생 잊히지 않을 만한 강렬한 기억이다. 관측 장교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박중위. 내가 이 사람의 군화를 닦아주다가 일이 터졌다. 어디에서 뭘 하는지 박중위는 관측소 방카에는 가끔씩만 나타났다. 다른 부대에서 온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문득 알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사병들이 장교들의 따까리 노릇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자기 부대 장교의 군화를 닦아주는 것은 자주 눈에 띄었다. 그렇다면, 그 동안 박중위의 군화는 박상병이 닦아주지 않았겠는가? 아차 싶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나도 그 일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박중위에게 구두를 닦아드리겠다고 말했다. 박중위는 의자에 앉은 채 구두통에 발을 올려놓았다. 이 방카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구두통인데, 구두닦이 소년들이 쓰는 것과 똑같이 생겼다. 물론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구두닦이 소년들이 취하는 자세와 똑같은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런 자세로 먼지도 털고 약도 바르고 한참을 닦았다. 불편하였다. 보통은 장교들이 군화끈을 끌러 군화를 벗어서 준다. 박중위측에서도 불편하였던 것일까?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발작하듯 구두통을 걷어차면서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새끼, 신발 닦기 싫으면 닦지마.” 그러면서 감정을 많이 실은 말들을 쏟아냈다. “대학 다니다 온 새끼들은 다 너같이 건방지냐” 이렇게도 말했다.
나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격이지만, 박중위로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 때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날 그 때의 표정이나 행동에 국한되지 않는, 훨씬 넓은 범위의 이런저런 나의 행동이나 처신들이 사달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박중위에게 GOP와 OP, GP(Guard Post) 등등이 무엇의 약자인지를 물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물었을 것이다. 몹시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GOP에 근무하면서 그것이 어디에서 온 말인지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GOP는, 그것이 무엇의 약자인지를 안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GOP(전초기지)의 P와 OP(관측소)의 P는 서로 다른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페바(FEBA)도 궁금하였다. (205는 1년 뒤 내산리의 페바로 내려가게 된다.) 그 방카를 드나들던 어떤 장교에 의하면, 그것은 Forward Edge of Battle Area다. 최전방이라는 말 아닌가? 그러나 진짜 최전방은 GOP 아닌가? 나는 이런 식으로 따졌던 것 같다. (GOP는 Outpost로, 아예 최전방의 바깥이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천국의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관례대로 3개월만에 교체되었다. 그러나 천국은 그보다도 일찍 끝났다. 내 근무시간만 끝내고 내무반으로 내려오면 그야말로 자유시간이다. 밥 먹으러 가기 싫으면 (생명수당 대신에 지급된) 라면을 끓여먹었다. 그리고는 책을 읽었다. 자유롭게 읽었다. 양평에서는 모포 속에 숨어서 읽지 않았던가? 지루해질 때면, 산밑으로 내려가 나만 알고 있는 조그만 웅덩이에서 목욕을 하고 올라왔다. 그리고는 개운해진 몸으로 다시 책을 꺼내들었다. 샘터도 읽었고 이런저런 경로로 손에 들어온 각종 문고판도 읽었다. 안전하게 읽었다. 양평에서는 나를 잠시도 그냥 놓아두지 않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렇게 생활하는 중에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어이없게도 책 읽는 것이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목욕하러 산 아래로 내려가는 횟수가 잦아졌고, 어디선가 나타난 기타를 집어드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더니, 포대경 들여다보는 일도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하였으며 방카 안이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곳이 말이다. 땀 한 방울 흘리게 하지 않는, 그 꿀 빠는 보직이 말이다. 그러더니, 어럽쇼, 대광리의 자대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궁금해지고, 자대의 통신과 고참들이 그리워지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어쨌건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고, 어쨌건 4, 5개월을 같이 생활했던 사람들이고, 기죽지 말라고 나한테 상병 계급장을 달아준 사람들이니까. 고참들은 새로 입주한 통신과 내무반에 내 관물대를 마련해 놓았을까? 내 관물대는 옷 한 벌 없이 텅빈 채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곳 GOP 보병 막사의 한 구석에는 짐을 풀지도 않은 채 내 더블백이 방치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면서 대광리 통신과 내무반의 내 관물대를 상상하였다. 집 생각을 하면서 습작을 하던 신병이 몇 달만에 일병 혹은 마이가리 상병이 되어 부대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습작도 시들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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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의 50년전 경험한 군 생활모습을 생생하게 그대로 그려내셨네,
새로운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조교수님의 모습
영어약자에 대한 궁금증은 누구나 가지게 되지만
영태처럼 누구에게 묻고 다니지는 않지
나는 그냥 따블빽 으로 알아 듣고 훈련소에서 한번 사용해보고 자대에서는 사용 안했어
영어는 그냥 모르면서 사용하다가 나중에 사전을 찾아 보던가 했지
요즘 처럼 인터넷이 있던 때도 아니니까
책 읽는 거를 즐기는 영태 모습하고
이처럼 글을 재미나고 빠져들게 쓰는 능력하고
항시 그곳에 가면 똑 같은 모습으로 살면서
반갑게 맞아줄 거 같은
멋지고 대단한 친구 되시겠다.
하여간 영태교수 기억력은 대단하다..
근데 대체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돈 빌린 건 잘 잊어 먹어요 ㅋㅋㅋ
물론 농담!!
두 사단이 동시 이동을 하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보병들의 경우, 한 동안은 두 사단이 합동으로 철책 근무를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역시 보병들의 경우지만, 양평에서 대광리로 갈 때 기차를 이용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기억력 별 거 없어. ㅎ 갑자기 돈빌린 게 생각나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