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하루 숙박비가 41만원에 식사도 비싸기만 하고 형편없었다는 동해안 여행 후기를 보고 36년 전이 생각난다.
83년 6월 장마철에 토요일 잠시 해가 나서 초등학교 1, 2학년 다니는 아들과 딸, 그리고 처와 함께 드라이브를 금강유원지에 갔다. 남이 쓰던 중고차 대우의 까만색 Gemini를 타고, 지금은 없어진 고속도로 초입의 달래내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한산한 고속도로를 달려 금강 휴게소까지 순식간에 왔다. 바람 쏘이러 온 김에 하루 밤 쉬었다 가자며 금강 모텔, 아직도 있나요? 에 자면서 저녁에 강가로 나왔더니 식당에서 잡은 천연기념물인 황 쏘가리 매운탕을 먹었고, 낚시로 잡는 쏘가리 미끼는 거머리입니다. 지금 말해도 시효가 끝난 일이니 괜찮겠지요. 시원한 강바람 맞으며 산책을 하였다. 일찍 눈뜬 새벽에 모텔 앞으로 보이는 강물 위 피어오르는 것은 물안개이었던가?
한 달 뒤 83년 7월, 동해안에 가족들과 다녀 온 여름휴가를 생각해본다. 먼저 백담사 계곡에서 찬물에 발 담그고 준비해간 늦은 점심을 먹고 놀다가 청학동 소금강에서 하룻밤 자기로 예정을 하였다. 도착하여 숙소라 해봐야 민박이지만. 길쭉한 뒤의 골방을 2만 3천원을 달라 하였다. 애들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보고 좋아하였으나 이런 숙소에서 자기가 싫다고 하여 기동성 있는 차도 있겠다. 흥정할 필요도 없이 차를 돌려 그대로 초입의 연곡 해수욕장을 찾았다. 해수욕장 뒤편 마을의 새로 지은 2층 깨끗한 방을 일박 오천 원으로 구하였다. 물론 푸세식 화장실에 엉성한 샤워장이었지만 소금강의 숙소보다는 몇 배나 나았다. 더 좋았던 건 손님은 우리 가족뿐이었으니 조용해서 얼마나 좋았던가. 준비해간 주, 부식과 간단한 취사도구로 푸짐한 밥을 지어 먹고 해수욕객이 별로 많지 않은 해변 모래사장을 걸으면서 바다는 오늘 구경만 하고 해수욕은 내일 하기로 애들에게 약속을 하였다. 민박집을 떠날 때 주위 분들에게 이 집을 좀 알려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
다음 일정은 누가 미리 일러준 속초 백도 해수욕장에 왔다. 동해안답지 않게 수심이 완만하여 물을 무서워하는 나도 들어갈 수가 있어 애들과 물장구치며 놀았고, 그때 처의 수영복차림의 날씬한 모습 사진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네. 문제는 또 숙소이었다. 날림으로 지은 가건물이 이건 자물쇠도 아예 없고, 흙방바닥에는 비닐 장판에 깔려있으며, 봉창 하나 뚫린 방 하나에 1만원,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어 하루만 잤다.
다음날 군대에 근무할 때 출장도 가보았던 속초의 내가 있었던 예하부대에 들렀다. 초소에서 "부대장이 누구냐.?" 하였더니 서 모대령이란다. 나와 그러니까 4년 전 본부에서 중령으로 인사과장을 하셨던 분. 이 분은 예편하고 난 뒤 본인은 나에게 와서 조기 위암으로 수술을 받고 아직도 건강하며, 부인은 뇌출혈로 우리병원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고, 사위는 맹장염으로 우리 병원 외과에서 수술을 받았으니 한번 맺어진 인연은 길기도 하다. 우리 부대는 국방부 직할 정보부대라 아무나 출입을 할 수는 없지만. 나야 군사 일급비취인가까지 있었던 본부 의무실장이니 들어갈 수 있지요. 만나서 반갑게 차 한 잔을 하며 설악산 호텔하나 잡아 달려고 하였더니 마침 하나 확보한 게 있다며 외설악의 설악파크 호텔에 연락을 해준다. 부대에 차를 갖고 가면 군대 식 차 예절이 있다. 깨끗하게 세차를 해주고 좋은 군대휘발유를 가득 채워주는 것이다. 호텔은 지금 퇴락하였겠지만 그때는 새로 지어 모든 것이 좋았었고, 애들은 제대로 된 곳에서 잠을 잘 수 있다고 좋아한다. 특히 화장실과 아침 조식 뷔페도 즐겼고. 요즈음처럼 차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3박 4일의 휴가를 가뿐히 즐기고 돌아왔다. 흠이었다면 영동 고속도로가 왕복 합쳐 2차선이라 운전할 때 신경이 쓰였고, 힘이 부치는 차로 대관령 고개를 넘으려니 엔진이 낄낄대어 에어컨은 꺼야 겨우 오를 수 있었다.
자. 금강유원지까지 4일의 여행에서 숙박비는?
시설 좋았던 금강모텔이 1만 5천원, 연곡의 민박이 5천원, 백도의 겨우 비가림막이 1만원, 설악파크호텔이 4만 5천 원. 요금이 들쭉 날쭉이 아닌가? 이러니 한번 와서 바가지요금을 써본 관광객들은 동해안에 다시 휴가를 오지 않을 것이다.
첫댓글 난 1980년 5월에 개원한 이래 6년 동안은 휴가라는 것을 가 본적이 없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이니까
현재와는 많이 달랐었겠지요...
조금 전에도 내 사무실에 들른 우리 회사 여직원한테 우리나라 걱정을 하며 난 앞으로 10년 고생을 하라고 해도 감수한다. 그런데 젊은 세대들은? 우리는 인턴때 몇푼 못받은 월급으로, 제대로 먹지도, 잠도 못자고 일했는데 그때는 다들 그렇게 하니까 고생인 줄 몰랐다. 하고 말해주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