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이순분(가명) 할머니가 살해된 채로 발견 된 후, 5년간 화 성지역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은 10여 차례에 이른다. 이 중에 서도 특히 분노를 자아냈던 것은 9차사건. 사건의 피해자가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한 어린 나이의 중학생인데다 참혹하게 범행을 당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도 2달 후인 11월 15일이 되면 공소 시효가 만료돼 범인을 처벌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진다. 1991년 대구시 달서구 와룡산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나갔다 가 주검으로 발견된 이른바 ‘대구 개구리 소년 사건’도 2006년 3월 이면 공소시효가 끝난다. 이는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15년으로 국 한돼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반면 일본은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지난해 공소시효를 15년에서 25년으로 10년 늘렸 다. 지난해 공소시효가 만료된 살인범들이 잇따라 자수하자 사회 정의의 문제가 대두되었고 공소시효 연장 논의가 일어난 것이다. 미국은 살인죄에 대해서는 연방법에서 공소시효를 두지 않는다. 이 때문에 74년부터 91년 까지 10명을 잔인하게 살해하며 미국판 ‘화성연쇄살인’으로 표현됐던 ‘BTK 살인범’을 30년 만에 붙잡을 수 있었다. 또한 독일과 미국은 성폭행 피해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 공소시효 기간을 정지시키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성범죄에 해당하는 공소시 효 제도는 어떤가. 13년 전 친구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해 끊임없 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A씨는 13년 후, 그 보복으 로 친구의 아이들을 유괴했다. 왜 A씨는 법에 호소하지 못했을까, 강간 및 강제 추행 죄에 해당하는 공소시효는 각 7년, 하지만 이 기 간은 너무 짧다. 어린 아이에게 행해지는 강간의 경우, 어른이 되어서야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면 공소 시효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A씨의 사건은 법이 정의를 보장해주지 못하면 개인적 보복으로 흐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다. 「PD수첩」은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있는 살 인사건의 전모를 다시금 되짚어보고 공소시효의 한계를 취재했 다. 그리고 공소시효 제도, 이대로 괜찮은지에 대해서도 진단해 본 다. ■ 국가기관에 의한 고문, 공소시효라는 면죄부가 있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 함주명 조작간첩사건’-
함주명(69)씨는 1983년 4월 구속돼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간첩’ 임을 자백하라며 45일간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당했다. 그리고 국 가보안법위반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98년 8.15특사로 석방된 함씨는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간첩’누명을 썼다며 법 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검찰은 1990년에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가해자 이근안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 렸고, 함씨의 무죄를 입증 할 수 있는 길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 다. 그런데, 1999년 이근안이 자수하여 검찰수사를 받으면서 함씨에 대한 고문사실이 밝혀졌다. 2003년 재심이 이뤄졌고, 2005년 7월 서울고둥법원은 함씨에게 덧씌워졌던 ‘간첩’누명을 22년 만에 벗겨 주었다. 취재진이 만난 당시 대공수사관은 (간첩으로) ‘만들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으면 어떻게든 만들어 냈다고 증언 했다. 이러한 고백은 80년대 조작간첩이 함씨 혼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간첩조 작 사건 중 재심이 받아들여진 경우는 함씨가 유일하다. 운 좋게 도 고문 수사관 이근안이 검찰수사를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가족이 60일간 고문 받으며 간첩으로 조작된 이른바 ‘진 도간첩단사건’은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고문 수사관들을 찾아 진상을 밝히지 못하고 있고, 결국 재심도 이뤄지지 않고 있 다. 민가협에 의하면 고문 끝에 간첩으로 조작된 경우가 무려 100 여건이나 되는데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누명을 벋기가 매우 어렵다 는 것이다. ■ 국가에 의한 은폐조작사건 진실, 공소시효의 뒤에 숨어버렸다!
국가기관의 은폐조작사건은 어디까지인가? 한 가족을 파멸로 이끌 었던 ‘수지김 사건’. 남편 윤태식이 홍콩에서 아내 김옥분씨를 살해 한 단순 살인사건이었지만, 안기부는 김옥분씨를 간첩으로, 윤태 식을 반공투사로 조작했다. 15년 후 진실이 밝혀졌지만, 당시 사건 은폐를 주도했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은 처벌하지 못했다. 장세동이 저지른 직권남용죄 (공소시효 3년)와 직무유기죄(공소시효 1년)의 공소시효가 만료되 었기 때문이다. 간첩 가족으로 모함을 받아 정신병과 화병 등으로 일가족 중 3명을 더 죽게 만들고 가정을 파탄시킨 죄 값을 아무에 게도 물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반인권적 범죄와 국가범죄의 시효 문제
2003년 8월 서울지방법원은 수지김 유족들이 제기한 배상청구사건 의 시효가 지났음에도, 국가 책임을 인정 해 유족들에게 42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비슷한 내용인 故 최종길 교수의 사 망사건에 대해서는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국가의 배상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법원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느냐?’‘시효 를 중시하느냐?’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