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雜詩 잡시
陶淵明(당나라의 시인)
人生無根蔕 인생이란 뿌리나 꼭지도 없는지라
飄如陌上塵 길거리의 티끌이 나부낌과 같도다
分散逐風轉 흩어져 바람을 따라서 굴러다니나
此已非常身 지금 벌써 늘 있는 몸이 아니로다
落地爲兄弟 땅에 태어나면 모두 형제가 되니
何必骨肉親 하필이면 골육하고만 친하겠는가
得歡當作樂 기쁨을 얻으면 마땅히 즐거워하고
斗酒聚比隣 한 말 술에 가까운 이웃을 모은다
盛年不重來 청춘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一日難再晨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오지 않는다
及時當勉勵 때에 맞춰 애써 노력해야 할지니
歲月不待人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세상을 많이도 건너온 도잠의 술회가 담담하구나
결이 닮은 서구시 원문 몇편을 발췌해 번역해주고
그대 청연도 영시 한 수 지어 인생론을 펼쳐보게나
바람의 말이 참으로 도잠(陶潛)의 이 시를 정확히 짚었네.
이 작품은 인생의 허무를 말하면서도 허무에 주저앉지 않네. “뿌리 없는 티끌”이라는 자각 → 타인과의 만남 → 지금의 기쁨 → 청춘의 유한함 → 때를 놓치지 않는 삶으로 흘러가니, 담담하지만 안에는 제법 뜨거운 생의 의지가 있네.
특히 마지막의
及時當勉勵 / 歲月不待人
때를 만나 마땅히 힘써야 하리니,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는 단순한 근면의 격언이라기보다 “유한한 존재이기에 지금을 살아야 한다”는 도잠의 인생론이라 할 만하네.
그리고 이 시와 결이 닿는 서구의 시인들을 몇 사람 골라보겠네. 서로 베낀 듯 닮은 것이 아니라, 유한한 생·흐르는 시간·덧없는 인간·오늘의 삶이라는 같은 강물을 건너는 시들이네.
1. 오마르 하이얌 ― 《Rubáiyát》
도잠의 **「得歡當作樂」**과 가장 가까운 서구의 목소리 가운데 하나일 것이네.
The Moving Finger writes; and, having writ,
Moves on: nor all thy Piety nor Wit
Shall lure it back to cancel half a Line,
Nor all thy Tears wash out a Word of it.
번역
움직이는 손가락은 쓰고,
한번 쓰고 나면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그대의 경건함도, 지혜도
그 한 줄의 반을 지워 되돌릴 수 없으며,
그대의 눈물 또한
그 한 글자를 씻어 없앨 수 없다.
청연의 감상
도잠의
歲月不待人
과 거의 맞닿아 있지 않은가.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다시 불러올 수 없다.
그러므로 도잠은 “오늘 즐거워하라”고 하고, 하이얌은 “이미 쓰인 것은 지울 수 없다”고 하네.
둘 다 시간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지를 말하고 있네.
다만 도잠은 그 깨달음을 이웃과 술을 나누는 온기로 풀고, 하이얌은 운명과 시간에 대한 냉정한 명상으로 풀었다는 차이가 있네.
2. 월트 휘트먼 ― 「O Me! O Life!」
Walt Whitman의 이 시는 도잠의 시와 묘하게 다른 방향에서 만난다네.
O Me! O Life! of the questions of these recurring;
Of the endless trains of the faithless, of cities fill’d with the foolish;
Of myself forever reproaching myself,
For who more foolish than I, and who more faithless?
그리고 시의 마지막에서 그는 묻네.
What good amid these, O me, O life?
무엇이 이 모든 것 가운데 좋은가?
그리고 대답하네.
That you are here—that life exists and identity,
That the powerful play goes on, and you may contribute a verse.
번역
오 나여, 오 삶이여!
끝없이 되풀이되는 이 질문들이여.
어리석은 이들로 가득 찬 도시와
믿음을 잃은 사람들의 끝없는 행렬이여.
그리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책망하는 나여—
무엇이 이 모든 것 가운데 좋은가?
네가 여기 있다는 것,
삶이 존재하고 네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
이 강렬한 연극이 계속되고 있으며
너도 그 무대에 한 구절을 보탤 수 있다는 것.
청연의 감상
이것은 도잠의 마지막 두 구절과 아주 깊은 곳에서 만난다네.
及時當勉勵
때를 만나 힘써라.
휘트먼은 그것을 더욱 현대적으로 바꾸었네.
“삶이라는 연극은 계속된다.
그러니 그대의 한 구절을 보태라.”
도잠에게 인생은 바람 따라 굴러가는 티끌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네.
오히려 반대라네.
티끌처럼 사라질 존재이기에 지금 한 편의 시를 써야 한다.
휘트먼 역시 같은 곳에 도달했네.
3. 앤드루 마블 ― 「To His Coy Mistress」
Andrew Marvell의 유명한 시 가운데 일부를 보세.
But at my back I always hear
Time's wingèd chariot hurrying near;
And yonder all before us lie
Deserts of vast eternity.
번역
그러나 내 등 뒤에서는 언제나 들려오네.
시간의 날개 달린 전차가
급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리를.
그리고 저 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영원의 사막이 놓여 있네.
청연의 감상
이것이야말로
歲月不待人
의 서양적 변주라 할 만하네.
도잠은 한마디로 말했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마블은 그 세월을 아예 날개 달린 전차로 형상화했네.
시간은 걷지 않는다.
달려온다.
인간이 젊음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에도
시간은 이미 다음 언덕을 넘어가고 있네.
그래서 마블은 현재를 붙잡으라고 말하고, 도잠은 현재의 기쁨과 사람 사이의 정을 붙잡으라고 말하네.
4.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 「A Psalm of Life」
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도잠보다 훨씬 낙관적인 목소리를 내네.
Life is real! Life is earnest!
And the grave is not its goal;
Dust thou art, to dust returnest,
Was not spoken of the soul.
번역
삶은 진실하다!
삶은 진지하다!
무덤이 삶의 목적지는 아니다.
그대는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그 말이 영혼까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네.
Lives of great men all remind us
We can make our lives sublime,
And, departing, leave behind us
Footprints on the sands of time.
번역
위대한 이들의 삶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우리 또한 삶을 숭고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이 세상을 떠날 때
시간이라는 모래 위에
우리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음을.
청연의 감상
도잠의 인생론과 가장 큰 차이가 여기 있네.
도잠:
“우리는 티끌처럼 흩어진다.”
롱펠로:
“그래도 발자국은 남는다.”
그러나 둘은 완전히 대립하지 않네.
왜냐하면 발자국 역시 언젠가는 지워지기 때문이네.
결국 두 시인이 묻는 것은 같다네.
“사라질 것이 분명한 인간에게,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5. 그리고 청연이 한 수 보태겠네
도잠은 티끌이라 했고,
마블은 날개 달린 전차라 했고,
휘트먼은 한 구절이라 했고,
롱펠로는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 했네.
청연이라면 인생을 저녁 강물에 비유하고 싶네.
강물은 붙잡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강을 바라보는 일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The River Does Not Wait
The river does not wait
for the hand that bends to hold it.
It carries the fallen leaf,
the broken moon,
and all our forgotten names.
We came here without roots,
like dust upon the evening road;
a breath of wind was enough
to scatter what we called ourselves.
Yet look—
there is a lamp beside the river,
and someone pours the last cup of wine.
A friend sits near,
and for one brief hour
the world is not empty.
Youth does not return.
Morning comes but once each day.
The years pass quietly,
not cruelly,
but without turning back.
So do not ask the river
where it is going.
Sit beside it.
Drink while the cup is warm.
Speak while the friend is near.
Love what is passing
because it is passing.
And when the evening wind
takes even your footprints away,
let it.
For life was never asking us
to remain.
Only this:
while the river carried you,
did you know you were alive?
청연의 번역
「강물은 기다리지 않는다」
강물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강물을 두 손으로 붙잡으려는 이를.
강물은 떨어진 잎을 싣고,
부서진 달을 싣고,
우리가 잊어버린 모든 이름을 싣고 간다.
우리는 뿌리 없이 이곳에 왔다.
저녁 길 위의 티끌처럼.
한 줄기 바람이면 충분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던 것이
흩어지기에는.
그러나 보라—
강가에는 등불 하나 켜져 있고,
누군가는 마지막 술잔을 따르고 있다.
친구가 곁에 앉아 있고,
잠시 한 시간 동안은
세상이 비어 있지 않다.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침도 하루에 한 번뿐이다.
세월은 조용히 지나간다.
잔인해서가 아니라,
뒤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그러니 강물에게 묻지 마라.
어디로 가느냐고.
그저 곁에 앉아 있으라.
잔이 따뜻할 때 마시고,
벗이 곁에 있을 때 이야기하라.
지나가는 것을 사랑하라.
그것이 지나가기 때문에.
그리고 저녁바람이
마침내 그대의 발자국마저 지워버린다면,
그대로 두어라.
삶은 우리에게
영원히 남으라고 요구한 적이 없으니.
다만 이것 하나를 물을 뿐이다.
“강물이 그대를 데리고 흐르는 동안,
그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고 있었는가?”
바람, 나는 이 마지막 물음이 도잠의 「雜詩」에 대한 청연 나름의 화답이라 생각하네.
도잠은 말했지.
人生無根蔕
飄如陌上塵
인생은 뿌리 없는 티끌이라고.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티끌이니 허무하다”가 아니라
“티끌이기에 서로 곁에 머물 수 있는 순간이 귀하다”는 결론에 닿는다네.
그래서 도잠은 결국 혼자 술을 마시지 않았네.
斗酒聚比隣
한 말 술을 마련하여 이웃을 불러 모았지.
이것이 도잠의 위대한 점일세.
세월이 무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로 삼지 않았네.
오히려 반대였네.
언젠가 모두 흩어질 것이므로
오늘 한 잔의 술을 함께 마신다.
청연은 그래서 도잠의 인생론을 이렇게 한 줄로 줄이고 싶네.
“인생은 붙잡을 수 없으니, 붙잡으려 하지 말고 함께 흘러가라.”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많이 건너온 사람이 끝내 얻게 되는
가장 담담한 지혜인지도 모르겠네.
청연의 강물은 세월이고 인생이로다 그렇게 흘러가지만 그 또한 행운이리라
그러하네, 바람.
흘러간다는 것은 잃는다는 뜻만은 아니지.
멈추지 않고 흘렀기에 만나기도 했고,
흘렀기에 헤어짐도 있었으며,
그 모든 만남과 이별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으니 말일세.
강물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네.
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바위를 만나면 부딪혀 노래하고,
낮은 곳을 만나면 몸을 낮추어 흐르지.
그러다 마침내 바다에 이르러
자신이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지도 않네.
어쩌면 행운이란 강물이 순탄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흐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사람을 만나고
한 잔의 술과 한 편의 시를 남길 수 있다는 것
인지도 모르겠네.
도잠이 말한 **「人生無根蔕」**도 이제 조금 다르게 들리는구나.
뿌리가 없다는 것은
반드시 불행이 아니라네.
뿌리가 없기에 떠날 수 있고,
떠날 수 있기에 새로운 풍경을 만나며,
새로운 풍경을 만났기에 한 번뿐인 인생이 되는 것.
그러니 바람의 말처럼,
흘러가는 것 자체가 또한 행운일세.
청연은 오늘 이 한 구절을 마음에 새겨두겠네.
흐르는 강을 슬퍼하지 말자.
멈추지 않고 흐를 수 있었음이
이미 하나의 행운이었으니.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강의 끝에 닿겠지.
그때는 아마 알게 될 것이네.
강은 어디로 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흐르는 동안 무엇을 품고 흘렀느냐가 중요했다는 것을.
